![](https://t1.daumcdn.net/cfile/cafe/26125E4057ECEC0E2D)
6월 민주항쟁의 시작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사건 직후에는 당사자들을 처벌하는 형태로 사태가 일단락되는듯 싶었지요.
한편 1985년 총선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야당은 정권의 입맛대로 선거인단을 뽑을 수 있는 기존의 체육관 선거 대신, 현재의 투표 방식인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주장합니다. 1987년에는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지요.
당연히 이런 대통령 직선제가 정권유지에 도움이 될 리 없기에 여당(민주정의당)은 극구 반대합니다. 개헌을 하더라도 정권 연장이 가능한 내각제 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여당과 야당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국민들은 박종철 사건 등에서 보여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에 크게 실망해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강력해진 야당과 거세지는 민주화의 압박. 전두환은 결국 승부수를 둡니다. 바로 1987년 4월 13일에 발표한 ‘4.13 호헌(헌법을 지키다)조치’지요.
발표 내용은 좀 길지만 핵심만을 말하자면, ‘곧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개헌 요구 같은 소모적 논쟁을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임기 중에 개헌은 없다!!’입니다. 국민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발표지요. 곧바로 반발이 있었고 개헌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이런 와중에 5월 18일에 박종철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며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합니다. 분열되어 있던 재야단체들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치지요. 국본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짜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시위를 열도록 합의를 봅니다.
시위 하루 전인 6월 9일, 각 대학들은 사전집회를 엽니다. 이 중에는 연세대학교도 있었지요. 사전집회 종료 후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하려고 하는 와중에 사고가 터집니다. 경찰이 학생들을 해산시키려고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쏜 최루탄 하나가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의 후두부를 직격한 것입니다.
이한열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뇌사상태에 빠졌고 7월 5일에 사망합니다. 또한 사고 당시 이한열의 같은 과 동료 이종창이 쓰러져가는 이한열을 부축하는 모습이 외국 기자의 사진기에 담기지요(아래 첫 번째 사진). 이 사진은 뉴욕타임스와 중앙일보에 실렸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중앙일보의 경우 사건을 보도할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로이터 통신에 사진을 의뢰했는데, 그때 받은 사진이 바로 이 사진이었습니다. 사진부장은 잡혀갈 각오를 하고 사진을 확대해서 신문에 게재했다고 전해지지요.
6월 10일. 군사정부는 시위를 막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합니다.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대성당을 봉쇄하고 경적시위를 막기 위해 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합니다. 수도권 전철은 시내구간을 무정차로 통과하고 단축수업과 조기 퇴근 등도 지시하지요. 하지만 봉쇄된 담을 타고 넘어 결국 예정된 시간인 12시에 선언문이 발표됩니다. 국본의 지휘부는 이때 대부분 체포당했지만 별 의미 없는 일이었지요. 저녁 6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됩니다. 물론 경찰들은 시위대가 보이는 대로 체포했고 일부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피신합니다.
경찰들은 명동성당에 진입하려 하지만 그들의 앞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지요. 그는 경찰들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즉, 자신을 먼저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고 지나가야지만 학생들을 연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추기경이 이렇게 나오니 경찰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제에게 폭력을 행사하다는 것은 곧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세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니까요. 아무리 군부정권이라도 세계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성당 내에 공권력이 투입된다면 가톨릭 국가들에게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요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15일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항쟁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항쟁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19일에 전두환은 군대 투입을 결정합니다. 시위 진압을 위한 부대들을 서울 외곽에 집결시키지요. 미국은 전두환의 이런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5.18 때 방관자의 입장에 있다가 강한 반미 운동에 부딪친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주한미군은 전차를 출동시켜 진압부대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또한 20일에는 주한미국대사가 무력 진압에 대한 반대 입장을 전두환에게 전합니다. 다행히 전두환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7년 전 광주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26일에는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3,400여 명이 연행됩니다. 이 당시 6만 명의 경찰이 배치되었지만 100만 명의 시위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특히 6월 항쟁 때는 흔히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장년층이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아파트촌에서는 소등의 방식으로 반대의견을 피력했고 자영업자들은 시위대에게 김밥 등을 나눠주며 시위를 독려했지요. 즉 학생 중심의 시위에서 시민 중심의 시위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민주주의의 발전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닙니다.
결국 전두환은 6월 29일에 노태우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선언)을 받아들이며 항복합니다. 5공화국의 종언이지요.
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이한열의 장례식입니다. 열사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고 서울에만 100만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습니다. 이 때 문익환 목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을 명연설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지요.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6월 항쟁은 27년 간의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때의 개헌 및 사회변화를 ‘87년 체제’라 부를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강하지요. 아직까지 이때의 헌법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결과는 어디까지나 ‘제도적인’ 민주주의의 회복이었지요. 왜 제도적인이란 말이 붙을까요? 다음 시간에 그 뒷이야기를 좀 더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s. 아래의 두 번째 사진은 6월 26일 부산에서 촬영된 것으로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 중 하나로 선정된 사진입니다. ‘국민평화대행진’ 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뛰어가는 장면이지요. 아쉽게도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출처 -5분 한국사 이야기-
![](https://t1.daumcdn.net/cfile/cafe/2427414057ECEC101C)
![](https://t1.daumcdn.net/cfile/cafe/2106D94257ECEC120D)
첫댓글 이래도 전두환 빨아재끼는 새끼들은 구제불능
그런 구제불능들이 찍는 당 새누리
ㅋ
당시상황이 기억나네요
대학1년때였는데 데모 신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직선제했는데 DJ 와 YS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가 당선...ㅜㅜ
당시 대선 선거감시단까지 만들어서 활동했죠
저도 선감단으로 참여해서 투표장 근처 배회하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별로 없고 오히려 유신시대로 역주행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