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동안 쌓인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조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들이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부 내에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도 강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민씨 세력을 몰아 낸 후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개혁에 앞장서도록 하였다(1894.7.23). 이에 김홍집을 총리로하는 새 내각이 구성되고, 개혁의 추진을 위해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임시 기관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안을 심의하였다.
이 때 실시된 개혁을 1차 갑오개혁(1894.7~12)이라고 부른다. 갑오개혁은 조선 후기 이후 새로운 사회를 기대하는 농민들의 움직임에서 시작하여 개화 운동으로 이어진, 전통 사회를 개혁하려는 민족의 욕구가 담긴 개혁이었다. 개혁의 내용에는 이미 갑신정변에서 개화파가 제시하였거나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들이 주장하였던 신분제 폐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정치, 경제, 사회의 각종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는 중요한 내용이 많았다.
당시 일본은 청과의 전쟁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은 비교적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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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
정치면에서는 국정과 왕실 사무를 분리하여 국정은 의정부, 왕실 사무는 궁내부가 담당하게 하였고, 의정부 산하의 6조는 8아문으로 개편되었다. 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적 관리 임명 제도를 마련하였다.
경제면에서는 탁지아문이 재정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상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제를 시행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신분 제도를 폐지하고 조혼을 금지하였으며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고 고문과 연좌제 등 봉건적인 악습을 혁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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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면서 그동안 개혁에 소극적이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각각 일본과 미국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2차 갑오개혁). 정부는 국왕의 이름으로 우리 나라가 독립국임을 내세우고,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개혁의 내용과 정신을 밝혔다. 그리고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근대적 교육을 실시할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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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 14조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과 외척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대군주는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외척의 내정 간섭을 금지한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나누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한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해 함부로 거두지 않는다.
7. 조세의 부과와 징수,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한 젊은이를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보고 익히게 한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립한다.
13.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과 지연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 관보(1894. 12. 12.)
2차 갑오개혁(1894.12~1895.6)의 주요 내용
홍범 14조 반포(1895.2)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8아문->7부)
지방 제도 개편(8도 -> 23부, 337군), 지방관의 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 재판소 설치,
교육입국조서 반포(한성 사범 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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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8).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단발령 등을 실시하였다(을미개혁: 1895.8~18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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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개혁의 주요 내용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사용, 소학교 설치와 우편 사무 시작, 종두법과 단발령 실시.
군제 개편: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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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전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농민층의 개혁 요구도 일부 반영한 개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적 개혁이나 농민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다.한편,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정리에요! 감사합니다!
1,2차 구분해서 알아야하죠 갑오개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자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와... 방대한내용정리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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