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 시인.
196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학생 잡지에서 공모하는 학생작품공모전에 소설과 시가 장원에 당선될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던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그 후 서울살이가 시작될 무렵 시인 박재삼을 우연히 만나면서 그의 관심이 소설에서 시로 바뀌었습니다. “니는 소설카마 시 쓰는 기 나을끼라.” 박재삼 시인의 이 말 한마디가 그로 하여금 시의 길에 접어들게 했다고 그는 어느 문학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박재삼 시인의 후배가 운영하던 <경인문예>에 1984년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하는가 싶었지만 그 문예지는 이내 폐간되었고, 배한봉 시인은 일간신문 신춘문예 관문 최종심에서 늘 탈락하는 고배를 마시며 처절한 좌절감을 맛봐야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간은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시에 재능이 없다는 자책과 절망 때문에, 또 열심히 돈이나 벌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 우여곡절 끝에 <현대시>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현대시>, <문학사상> 등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黑鳥>(한국문연, 1998 – 개정판 <천년의 시작, 2003>), <우포늪 왁새>(시와시학사, 2002), <악기점>(세계사, 2004),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문학의전당, 2006), <주남지의 새들>(천년의 시작, 2017)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우포늪, 생명과 희망과 미래>(문학의 전당, 2009), <당신과 나의 숨결>(문학사상, 2013) 등이 있습니다. 전업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경남 창녕군에 위치한 람사르 습지 우포늪에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우포늪 시 생명제’를 주재 · 개최하는 등 생태문학 발전과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김달진 창원문학상, 경남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에는 시 ‘복숭아를 솎으며’가 농림부 주최 <詩사랑 農사랑 - 아름다운 농촌 시>로 선정되어 농림부장관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 ‘우포늪 왁새’는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되어 수능 고사에 출제되기도 하여 고등학생들의 필독 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경희사이버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등에서 대학생들에게 문학과 글쓰기 등을 가르치면서 작가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대표 시
씨팔! /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물의 신전(神殿)/배한봉
아침은
지상의 거주자들을 위해 노래한다
산천 곳곳에다 공손히 햇살을 풀어 놓고
달디단 새들의 잠
속에서 끄집어낸 노래를 공중에 흩는다
어둠에 젖었던 대지의 입술에
자오록한 물안개에 싸인 늪의 가슴에
긴병꽃풀 같은 온기로
사랑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비로소 지느러미 흔들며 입을 뻐끔거리는 물고기와
부화된 유충들의 오랜 믿음이
한 뜸씩 유영의 무늬를 수놓는 물의 성소,
이제 막 새순 틔우기 시작한
물오리나무 그림자가 받쳐든 몇 겹 파문 속으로
바람이 연둣빛 고요한 시간의 잎과 줄기를 퉁기자
은구슬 소리가 난다
너무 투명해서 눈이 아픈 이 광휘의 풍경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거니, 1억4천만 년 전부터
물면은 햇빛 곧게 세워 이 신전을 만들었으리
이곳에서 평온의 샘은 솟고
휴식을 마친 철새들은 다시 여정에 오른다
우리는 모두 빛의 축복을 받은 동행자
자유와 방종의 긴 여정 뒤에 물이 얻은
안온 속에서 푸석푸석한 어둠조차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한 은비늘로 파닥거리더니
꽃은 피고 나비는 환하게 나는 것이다
기슭에서 화석의 잠을 굴리는 고둥껍질
원시 적 빗방울을 머금은 저층늪의 뿌리들
무수한 생과 멸을 끌고 온 세월이
사리알처럼 영롱해서 새삼 나는
짧은 일생을 활짝 펴 햇살에 비춰보는 것이다
가자, 희망의 층계를 올라
아침을 타종할 때
우리는 황금의 시간을 얻으리라
그대와 내가 열어가야만 할 세계를 위해
만다라를 공양하는 물의 신전 우포늪
나무에게 절한다/배한봉
복숭아를 따본 사람은 알지요. 복숭아를 따려면 열매의 무게로 늘어진 가지 아래로 절하며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허리와 무
릎 낮추고 나무를 우러러보며 따야 한다는 것을.
부처에게 절하듯 나무에게 감사의 절을 하고 공손히 손을 내밀면, 나무는 열심히 잘 익힌 열매로 그 뜻을 받아들이지요. 이
심전심, 그것이 고마워 나는 자연의 경전인 그 과일을 아름다운 이웃과 나눠 먹지요.
나무에게 절하지 않고 열매를 따지 마세요. 흙과 물과 햇볕과 바람의 기도로 꽃 피고 열매 맺어 익은 복숭아를 따본 사람은
알지요.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나라에 가 닿는 일인가를. 착한 손, 순한 마음으로만 가 닿을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그들이 황무지를 가진 것은/배한봉
먼지 일으키며 차를 타고 달려온 그들은
늪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소문을 좇아 온 것이다
차 안에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면서
아주 경제적으로 1억4천만 년을 읽는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어보지 않고 우포늪 다 보았다고
혓바닥이 70만 평쯤 커져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다
사막 같은 생각에도 돈만 투자하면
물웅덩이가 생기고 초원이 될 것이라는 말초신경을
가시덤불은 찌르고 싶었던 것일까, 이제는 길이 아니라고
사람이 만든 길을 산기슭 땡볕 속으로 끌고 가버린다
그들은 잠사잠깐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겠지만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원시는
원시 속에 숨어 풀잎 하나 흔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모래바람 부는 황무지를 가진 것은
폭염 탓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문명에 길들여졌기 때문
구경하기 좋은 곳 어디냐는 그들에게
걸으며 느끼지 않고서는 늪의 정신 만날 수 없다고
왜가리가 나 대신 목을 쭉 빼고 울어주었다
여름의 귀 / 배한봉
곰산 어디쯤서 샘물 하나가
실낱 물줄기 만들었을 것이다.
그 물줄기가 조그마한 돌들의 이마를 씻어주고
어린 풀의 입술 적셔주며 바다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똑같은 일을
신라시대보다 더 전부터 받아주고 있는
소사천의 이야기 알든 모르든
송사리 떼만 봐도 깔깔대는 아이들, 예쁘다.
개구리자리 노랑 꽃 이름 알든 모르든
쫑알쫑알 한참 들여다보는 아이들, 예쁘다.
우리나라 산이 되고 바다 될 아이들에게
예쁘다는 이 똑같은 말을
단군할아버지 시대보다도 더 전부터
처음 하는 인사마냥 하고 있는 소사천 물소리의
생기발랄 이야기 다 들어주는,
너무 시원해서 투명한 여름의 귀.
우포늪 왁새 / 배한봉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서리꾼이었다. 신명난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의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울음 되어 우황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메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 문명의 식욕
옷의 식욕은
왕성하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세다
나는 옷의 배를 불리는 양식이다
양말을 신자, 발이
사라진다, 양말이, 발을 먹었다
왼쪽 다리를 먹은 바지가
오른쪽 다리를 밀어 넣으니 오른쪽 다리마저
먹어버린다
왼팔을 넣으면 왼팔을, 오른팔을 넣으면
오른팔을 먹는 재킷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재킷
나는 이제 어깨도 가슴도 없다
나는 이제 한 벌의 옷이다!
거리에 사람을 갖춰 입은
옷들이 둥둥 걸어 다닌다
숫제 개나 고양이를 갖춰 입은 옷도 있다
아침부터 왕성하게 나를 먹어치운 옷은
저녁이면
나를
생산한다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된다
(배한봉·시인, 1962-)
+ 지구의 눈물
둥근 것들은
눈물이 많다, 눈물왕국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칼로 수박을 쪼개다 수박의 눈물을 만난다
어제는 혀에 닿는 과육 맛에만 취해
수밀도를 먹으면서 몰랐지
사과 배 포도알까지 둥근 몸은 모두
달고 깊은 눈물왕국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눈물왕국을 사랑하는 사람
입맛 없을 때마다 그 왕국에 간다
사람 몸 저 깊은 곳
생명의 강이 되는 눈물,
그리하여 사람 몸도 눈물왕국 되게 하는 눈물,
그렇기 때문인가? 사람들은
둥근 것만 보면
깎거나 쪼개고 싶어한다
지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숲을 깎고 땅을 쪼개 날마다 눈물을 뽑아 먹는다
번성하는 문명의 단맛에 취해
드디어는
북극의 눈물까지 먹는다
(배한봉·시인, 1962-)
+ 과수원 시집
봄 과수원에
파릇파릇 돋는 저것은 풀이 아니다
노랗게 발갛게 피는 저것은 꽃이 아니다
바람에게 물어봐라
햇빛에게 물어봐라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산비둘기가 나뭇가지에 두고 간 울음
그 여운 끝자락을 붙잡고 화들짝 꽃봉오리 여는 홍매에 대해
지난겨울의 눈바람을 먹고
열병처럼 퍼지는 가뭄을 먹으며
온몸으로 대지가 쓰는 시, 나무가 쓰는 시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저 시 없다면 누가 봄이라 하겠나
저 시집 한 권 읽지 않고 어떻게 봄을 말할 수 있겠나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배한봉·시인, 1962-)
얼음바위
용추계곡 바위
얼음 덮여 있다
흐르는 물을 붙잡아 허옇게 얼린 것은
바위 스스로의 침묵일 것이다
깊어서 무거운 나락으로 빠진 침묵,
침묵의 서늘한 힘이
스스로 전신을 꽁꽁 묶은 얼음 되었을 것이다
가벼워서 아픈 인생들,
그 발목을
그 숨길을
그 심장의 박동을
더는 함부로 나다닐 수 없도록 허옇게 얼린 바위 스스로의 처절한 침묵,
그 끝에서 마삭줄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침묵이 냉기의 극한에서 내뿜는
단 한 줄의 시구詩句
그 허옇고 긴 두루마리 문장에서 새나오는
시의 길은 이렇게, 차고 맑다
스윽, 벼린 칼날같이 내 목덜미 지나간다
통영의 봄은 맛있다
참 달다 이 봄맛, 앓던 젖몸살 풀듯 곤곤한 냄새 배인, 통영여객선터미널 앞 서호시장 식당 골목,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 사이, 우리처럼 알음알음 찾아온 객이, 열 개 남짓한 식탁을 다 차지한, 자그마한 밥집 분소식당에서 뜨거운 김 솟는, 국물이 끝내준다는 도다리쑥국을 먹는다 나눌 분 자 웃음 소 자, 웃음 나눠준다는 이 집 옥호가 도다리쑥국 맛만큼이나 시원하다고 웃음 짓는 문재 형 앞 빈자리에 젊은 부부 한 쌍이 앉는다 자리 생길 때마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동석하는 분소식당 풍경이 쌀뜨물에 된장 풀어넣은 국물 맛 같다 탕탕 잘라넣은 도다리가, 살큼 익은 쑥의 향을 따라 혀끝에서 녹는
통영의 봄맛, 생기로 차오르는, 연꽃처럼 떠 있는 통영 앞바다 섬들이 신열에 달뜬 몸을 풀며 바다 틈새 어딘가 숨어 있던 봄빛을 무장무장 항구로 풀어내고 있다 어어, 이것 봐라 내 가슴에도 툭툭 산수유 꽃이 피는가 보다 따뜻해진 온몸 가득 파랑처럼 출렁이는, 참 맛있다 통영의 봄.
수련의 밤
푸른빛 물의 종이는 밤이 쓴 검은 문장에 덮여 있다.
새는 수련의 잎을 딛고 서 있다.
수련은, 가끔씩 흰 손길로 다가오는 달의 다정한 속삭임이 들릴 때만 둥근 육체의 윤곽을 가녀리게 보여줄 뿐이다.
물에 녹아 있는 언어가 뽀글뽀글 물방울로 솟아오를 때
새는, 수련의 뜨겁고도 아픈 사랑의 속말들로 노래를 만든다.
노래는 물의 종이에 쓰인 언어들을 공중으로 밀어올린다., 공중으로 솟구친 노래가 노란 입술로 천공天空 곳곳을 키스할 때
물의 종이는 수런거리는 눈부신 별들로 가득 차고
밤이 쓴 문장은 비로소 완성된다.
수련의 꿈은 이제 공기와 섞여 있다
숨 쉴 때마다 우리 폐 속으로 흡입되는 수련의 언어들, 그 꿈을 먹고 나도 수련 꽃봉오리처럼 배가 자꾸 불러지고 싶은, 푸르게 캄캄한 밤이다.
* 2011 제 26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