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동학 농민혁명의 진원지였던 우리고장에는 모악산금산사와 원평장터가 있었다.
- 모악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최 순 식
가. 금구원평취회(金溝院坪聚會)
1893(癸巳) 3월 21일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잉교왈 호남중 금구최거다운 자완영상거기허 선파기소굴위초집지역의(仍敎曰 湖南中 金溝最居多云 自完營相距畿許 先破其巢窟爲剿집之赤矣), 문현왈 상거사위삼십리허이 금구원평과위취당운 근당의성교엄집의(文鉉曰 相距似爲三十里許而 金溝院坪果爲聚黨云 謹當依聖敎嚴집矣)"라 하였다.
내용인즉 당시(1893. 3. 21) 김문현(金文鉉)이 전라감사로 임명받기 위해 고종 임금을 알현(謁見)하는 자리에서 고종이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취당(聚黨-동학농민군)에 대하여 문답한 내용이다.
호남에서 금구에 동학농민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그곳이 완영(전주)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고 고종이 묻자 전라감사 김문현이 "그곳이 금구가 아니라 원평(院坪)이라는 곳이다"라고 답하고, 고종이 그곳 동학농민군을 완전 소멸해버리라고 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때 당시의 모임을 <금구원평취회>라고 한다. 1892년부터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공주와 삼례에서 계속하다가 동학교조(東學敎祖) 최수운(崔水雲)이 1864년 대구감영(大邱監營)에서 참수(斬首) 당한 날 3월 10일을 기해 전국에 있는 동학교도가 충청도 보은과 경상도 밀양, 전라도 금구원평에서 1893. 3. 10에 일제히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금구원평집회는 금구접주 김덕명과 새로운 지도자 전봉준이 주동이 되어 교조신원운동과 함께 반봉건(反封建) 반외세(反外勢)에 대한 개혁의지가 강열하게 부각되어 이 모임의 조직력과 개혁의 의지가 다음해 고부 봉기로 화살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 증거로 시천교사(侍天敎史) 계사(癸巳)(1893) 11월조를 보면, -교도지난동인 전봉준 사탈교도 주재 어전라도 금구원평지고야(敎徒之亂動因 全琫準 私奪敎徒 駐在 於全羅道 金溝院坪之故也)
"교도가 난동을 일으키는 원인은 전봉준이 교도를 자기 임의로 빼어다가 전라도 금구원평에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최초 고부민란(1894. 1. 10) 바로 1개월 전의 기록이다. 전봉준이 원평을 근거지로 해서 고부민란을 기도하였다는 생생한 기록이기도하다.
당시 원평장터는 전라도 동학의 중심지 역할을 다하였으니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서 외무대신(外務大臣)을 지낸 김윤식(金允植)의 면양일기(沔陽日記) 1893(癸巳)3월 28일자를 보면은 "우금구원평취당 수만 성언장직주 인천제물운(又金溝院坪聚黨 數萬 聲言將直走 仁川濟物云)" 금구원평에 동학 농민군 수만명이 모였는데 들리는 말로는 인천 제물포로 곧 달려간다는 내용이다.
인천(제물포)은 일본인의 주거지역이었다. -또한 같은 일기 4월 5일자에는 "전라도즉도회 금구원평(全羅道則都會 金溝院坪)" -금구원평취회가 1893. 3. 10부터 4. 3까지 계속 된 것으로 보이는데 김윤식의 일기로 보아서도 당시 전라도 동학의 중심지가 도회소가 있었던 원평장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 금구 대접주 김덕명과 전봉준 장군의 관계
김덕명(1845-1895) 금구대접주(金溝大接主)는 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235-2번지 용계(龍溪)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금구 토반인 언양김씨(彦陽金氏)로서 체구가 장대하고 총명하여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일찍이 형제가 경상도까지 최해월 교주를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서 전라도 포교에 전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금구 대접주로서 전라도에서 가장 큰 김덕명포를 관장하며 삼례집회와 백산 기포를 주도하였다.
전봉준(1855-1895)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을 따라 유년시절에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186번지 관봉 황새마을에서 17-18세까지 살면서 김제시 봉남면 종정마을 강당(講堂)에서 서당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전봉준이 어떻게 해서 원평장터가 생활권인 감곡면 황새마을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는가가 궁금하다.
원평장터에서 황새마을은 1km 남짓해서 전봉준은 원평 시장권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전봉준 부자(父子)가 언양 김씨의 집성촌인 거야(巨野)와 신암(新岩)을 배회하며 식객(食客)노릇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는데, 최근 고창 문화원에서 전봉준의 외가가 언양 김씨라는 것을 밝혀낸 것으로 보아 거야, 신암 언양 김씨를 자주 찾았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보아 금구대접주 김덕명과 전봉준의 끈끈한 인간관계를 외척(外戚)의 혈연으로 살필 수가 있고 어떻게 해서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원평에 가까운 황새마을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는가가 짐작이 간다.
이러한 인연으로 서로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김덕명과 전봉준의 공통점은 의협심이 강하고 지도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두 지도자는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893년 계사 금구원평취회를 주도하였던 세력이 바로 전봉준, 김덕명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금구대접주 김덕명포가 원평장터를 중심으로 전라도 동학을 이끌어 갔으며 그래서 전라도의 접주들이 모이는 도회소가 원평장터였고 현재 원평리 김영태씨가 거주하고 있는 집(원평리 184-3 : 최초 금산면 사무소)이 바로 전라도 동학 접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던 도회소였다고 전해온다.
그 도회소를 '동래개'라는 별명을 가진 '동록개(董錄介)'가 백정(白丁)출신으로서 동학의 개벽평등사상에 감복하여 자기 집을 당시 동학교주 최해월(崔海月)에게 바쳤다는 전설과 함께 그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