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근대적 개혁의 추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조선은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근대적인 개혁을 주체적으로 실시할 기회를 잃었으나, 개항 이래로 누적된 여러 가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국왕은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던 온건 개화파들도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으므로, 국왕의 명을 받아 교정청(敎正廳)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1)
한편,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들어왔으나, 이미 정부와 동학 농민군 사이에는 전주 화약이 성립되어 외국 군대의 조선 주둔에 대한 명분은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내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내정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내면적인 의도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의 명분을 찾고, 나아가서 청과의 전쟁 구실을 만들어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물리친 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권 탈취와 함께 침략의 기반을 닦으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내정 개혁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일본군이 먼저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측의 내정 개혁 강요와 조선측의 자주적 개혁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위협 속에 민씨 정권이 붕괴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 1 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초정부적인 회의 기관으로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것이 제 1차 개혁으로서, 이른바 갑오개혁이다(1894). 당시, 일본은 이권 침탈에 힘쓰고, 개혁 내용에 대해서는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므로 개혁은 사실상 군국기무처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게 되자, 조선에 대하여 적극적인 간섭 정책을 취하였다. 이 때, 갑신정변의 주동자로서 망명해 있던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하여 개혁에 참여하였다.
제 2 차 개혁은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면서 추진되었다. 고종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가 독립 서고문(獨立誓告文)을 바치고,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독립 서고문은 국왕이 나라의 자주 독립을 선포한 일종의 독립 선언문이었으며, 홍범 14조는 자주권, 행정, 재정, 교육, 관리 임용, 민권 보장의 내용을 규정한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었다. 제 2 차 개혁은, 당시 일본이 삼국 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내각 대신들, 특히 내무 대신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되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민씨 일파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되었다.
박영효가 실각한 뒤, 온건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 내각인 제 3 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 침략자들은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1895). 이러한 가운데, 제 3 차 개혁이 추진되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로 반발하였다. 마침내, 명성 황후의 시해로 울분에 싸여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이 단발령을 계기로 하여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친러파는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켰다. 이 아관 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하여 개혁 운동은 중단되었다.
개혁의 내용과 의미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통하여 정치․경제․사회의 각 분야에 걸친 근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정치면에서는, 개국 연호를 사용하고,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하여 정치의 실권을 상당 부분 내각이 가지도록 함으로써 국왕의 전제권을 제한하였다. 또,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시켜 체포와 구금, 재판의 업무는 경찰관과 사법관만이 맡도록 하였다. 한편, 지방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하고 행정권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재정에 관한 모든 사무를 탁지부가 관장하도록 하여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왕실과 정부의 재정을 분리하여 국가 재정을 정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 은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제를 시행하였으며, 도량형을 개정, 통일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신분제를 철폐하여 양반과 평민의 계급을 타파하였고, 공사 노비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인신 매매 행위를 금지하였다. 또, 조혼 금지, 과부 개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의 폐지 등을 실시하여 봉건적인 폐습을 타파하였다.
군사면에서의 개혁은 소홀하였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의 군사력 강화나 군제 개혁을 꺼린 때문이었다. 개혁 과정에서 훈련대의 창설, 확충과 사관 양성소 설치 등이 한때 시도되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갑오․을미개혁은 전통 질서를 타파하는 근대적 개혁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아가, 조선의 개화 인사들과 동학 농민층의 개혁 의지가 반영된, 민족의 내부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노력이기도 하였다.1)
(4) 독립 협회 활동과 대한 제국
독립 협회의 창립과 민중 계몽
아관 파천에 의하여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 정권이 성립되어, 일본의 침략 세력은 일단 견제되었다. 그러나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고,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시기에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여,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 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독립 협회는 서재필을 비롯하여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지닌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도부를 형성하였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보수적 지배층의 압제에 불만을 가진 도시 시민층의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학생, 노동자, 여성, 천민 등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독립 협회의 지도층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같은 개혁 운동이 민중의 지지 기반이 없어 실패로 끝난 사실을 거울삼아, 우선적으로 민중을 일깨우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 강연회와 토론회의 개최, 신문과 잡지의 발간 등을 통하여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민중을 계도하였다. 이러한 계몽 운동에 의하여 점차 국민의 근대적 정치 의식이 향상되고,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도가 높아져서 독립 협회는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독립신문과 서재필
그 후, 독립 협회와 독립 신문이 정부의 외세 의존적인 자세를 비판하자, 독립 협회에 참여하였던 관료들은 대부분 이탈하였지만, 독립 협회는 오히려 민중에 기반을 둔 사회 단체로 발전되어 갔다.
국권․민권 운동의 전개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고,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 만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독립 협회는 국민의 신체 자유, 재산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확보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고,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나아가,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에 서울 시민들은 만민 공동회를 열어 50여 일 간의 시위 농성을 통하여 독립 협회의 부활, 개혁파 내각의 수립, 의회식 중추원의 설치 등을 요구하면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만민 공동회(민족 기록화)
독립 협회 활동의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 과정에서 나타난 사상은 자주 국권 사상, 자유 민권 사상, 자강 개혁 사상으로 집약된다.
첫째, 자주 국권 사상은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자주 독립하는 길은,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국권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민중을 배경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열강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를 물리치는 등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자유 민권 사상은 국민의 자유와 평등 및 국민 주권의 확립을 통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민중에게 민권 의식을 고취시키고, 자유 민권의 민주주의 이념을 사회 일반에 전파하였다.
셋째, 자강 개혁 사상은 자주적인 근대 개혁을 통하여 국력을 배양하려는 근대화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과거의 개화 세력과는 달리,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
아관 파천 1년 만 인 1897년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황궁우(서울 중구)
대한 제국은, 안으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인 자각과, 밖으로는 조선에서 러시아의 독점 세력을 견제하려는 국제적인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 성립되었다.
대한 제국의 집권층은 갑오․을미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광무 정권의 시정 방향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 신참(舊本新參) 에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복고주의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광무 정권의 복고적 정책은 정치면에서 전제 왕권의 강화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광무 정권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독립 협회의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광무 정권이 1899년에 일종의 헌법으로 제정한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 제국이 전제 정치 국가이며, 황제권의 무한함을 강조하고,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등을 모두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여 전제군주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 광무 정권은 경제면에서 양전 사업과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양전 사업은 과거의 누적된 폐단의 하나인 전정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양전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地契)가 발급되었다.
정부의 상공업 진흥책이 실시되어,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실업 교육이 강조되었고,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이 파견되었으며, 각종의 실업 학교와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그리고 교통, 통신, 전기, 의료 등 각 분야에 걸친 근대적 시설이 확충되어 갔다.
이와 같이, 광무 정권은 경제, 교육, 시설면에서 국력 증강을 꾀하였으나,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