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 8기-2학기 16차시 자료 (12월 2일 용)
수필창작의 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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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품 첨삭
《참고 작품》
▪ 백 세 인생을 산다는 것은/ 옥경자
최근 TV에서 100세가 넘으신 노인의 일상이 공개되었다. 휴대폰이나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을 보면 젊은 사람 못지 않았다. 백 세 인생 파이팅을 외치고 싶을 만큼 활동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렇지만 백세시대를 살고 있는 노인들이 너무 건강해도 걱정이다.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팔순 딸의 말이 내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식들의 건강이 부모보다 우선순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팔순의 자식도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인 것이다.
인근 공원에서 지팡이 두 개에 의지해 힘들게 운동하는 노인 한 분을 보았다. 허리는 기역자로 굽었고 나이가 많아 보였다. 숨이 차는지 몇 발짝 만에 쉬고 숨을 고르고 또 발걸음을 옮겼다.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저렇게까지 하면서 오래 살고 싶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지인의 시어머니는 올해 96세로 요양원에 가셨다. 치매가 중증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 육식하지 않던 분이었는데 정신이 없으니, 요양원에서 주는 음식을 육식, 채식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고관절을 다쳐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잊어먹고 자꾸 침대에서 내려와 걷기를 시도하다 다친 데를 또 다치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서 침대에 묶어 놓고 지낸다고 한다. 지인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버지는 올해 93세이다. 인지력이 떨어진 건지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이 늘었다. 툭하면 아파서 밥을 먹지 않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버린다. 요양사의 말에 의하면 뭔가 마뜩잖은 일이 있으면 그런다고 한다.
“빨리 죽어야 하는 데 죽지도 않고 내가 나라에 좀 같은 인간이다.”
하면서 바른 소리를 할 때도 있고 내가 좀 더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몸에 좋은 식자재를 탐할 때도 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변한 것 같다.
몇 달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으신 아버지는 한동안 편해하셨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의 유품을 버리면서 밥도 잘 드시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아직은 건강하니 백 세까지는 끄떡없겠다고 스스로 농도 했다. 경로당에도 나가고 소통하면 좋으련만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보는 나도 안타깝지만 어떻게 해 줄 방도가 없다. 사람이 밥만 잘 먹는다고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매일 TV 리모컨만 친구 삼고 있으니, 무력감도 생기리라. 어머니가 있을 때는 맨날 병치레만 하는 너희 엄마 때문에 내 명대로 못 살겠다. 하더니 이제는 그때가 그립다고 털어놓는다.
물기가 없는 마른 풀잎처럼 매사에 건조하고 힘이 없다. 쪼그리고 누워 있는 작고 초라해진 아버지의 어깨에서 절실한 외로움을 본다.
나도 나이가 들면 아버지와 똑같은 절차를 밟고 살지 모른다. 지금도 생각의 폭이 자꾸 좁아지고 있는 나를 보면서 사람이 재수 없으면 백 살을 산다는 어떤 강사님의 말을 떠올려 본다. 이렇게 백 세를 산다고 한들 행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건강해도, 밥 잘 먹어도, 요양원에 있어도, 공감할 친구가 없고 동반자가 없는 백 세 인생은 외로운 길인 것 같다. 어떤 인생이든 정답은 없는 것 같다.
▪ 양보 그후 /박신자
1. 일 년 전 예약해 둔 진료가 한 시간이나 밀리고 있다. 긴장을 한 탓인지 목이 마르다. 서둘러 물을 마시고 병실복도를 걷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작년보다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건지 지금껏 진료시간이 밀리기는 처음이다.
2. 십이 년 전 그날의 난 두렵고 불안했다. 수저로 음식을 넘기기는 했지만 위와 장에서 받아주지 않고 이내 쏟아냈다. 날마다 아침에 몸무게를 재면 전날보다 빠졌었다. CT 상 약 6센티 정도의 종양이 계란모양으로 경계가 뚜렷했다.
3. 그날 나의 이전 진찰 기록물을 찬찬히 보신 후 담당의사의 총평이었다.
"네 좋습니다. 부분절제 수술 가능합니다. 수술 날짜만 잡으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가장 빠른 달이 다음 달입니다. 지방에서 올라왔으니 같은 검사를 자주 하기보다 수술 전 그때 하면 되겠습니다."
4. 지역에서 몇 군데 병원을 알아본 뒤 최종적으로 올라온 서울에서조차 암이라는 확신이었다. 혹시나 하며 기대한 것이 실망으로 보탠 무게감에 가슴은 더 쿵 내려앉았다. 지역의사와 다른 점은 좀 더 친절한 말과 부분절제 가능이었다. 이미 각오한 일인데도 가슴은 연거푸 난도질당한 듯 쓰리고 아팠다.
5. 상담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니 간호사와 면담이 이어졌다. 한 달 여 뒤로 잡힌 수술준비물과 금기사항 등을 적은 안내문을 받은 뒤에 내용 설명을 듣고 터덜터덜 병원 문을 나섰다.
6. 혹시나 했던 기대도 무너지고 비쩍 마른 몸이 더 야위어 가는 중인데 정말 수술하면 살 수 있을까? 산다면 얼마나 살까? 남은 날들을 과연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오만가지 갈등으로 짓눌린 채 병원마당에 나와서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7. 그때였다. 앞자리가 서울인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저 여기 병원 진료 과인데요. 방금 저희 과 담당교수님과 상담하고 나가신 환자분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
8. 그 전화의 내용은 이랬다. 막 병실 문을 나선 그 뒤로 나보다 상태가 더 심각한 환자가 들어왔는데 수술을 당장이라도 해야 할만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예약해 놓은 그날 이전에는 조절이 어렵고 해서 그보다 덜 심각한 내게 수술 날짜를 양보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9. 몸 상태야 어떻든지 신장하나를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던 지역병원보다는 부분절제가능이란 진단을 받은 지 채 삼십 분도 안 된 때였다. 정밀검사조차 수술날 무렵 다시 올라왔을 때 하기로 했으니 금전적인 낭비는 없었지만 순간 잠깐이나마 생각을 해야 했다. 어쩌면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0. '서두르지 마라'는 성서말씀에 일말의 기대를 걸며 힘을 싣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
" 네 , 그렇게 하세요. 전 그럼 다음 달에 와서 다시 날 받겠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린 지 어느새 열두 해가 지났다. 난 지금 그때보다는 일반 컨디션이 좋아서 밥을 잘 먹고 잠도 잘 자며 쉬 피곤하지도 않은 데다 몸무게도 늘었다. 단지 수시로 재어보는 종양 사이즈가 처음 그때보다는 거의 배로 커져 있는 상태지만 말이다.
11. 그렇건만 여전히 대기시간은 긴장된다. 이전에는 혹 조금이라도 사이즈에 변화만 있어도 희비가 엇갈렸다. 번번 어떻게 관리하며 지냈는지에 따라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이번에야 말로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성공이지라는 각오로 왔다. 하지만 긴장되는 건 매 한가지다.
《습작품 첨삭》
1. 그리움/백복순1
1. 늦가을은 어릴 적 시골집 군불 때는 냄새와 따뜻한 아랫목 그리고, 무와 된장만 들어간 소박한 된장찌개를 생각나게 한다. 저녁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도 못한체 해가 지니 서글퍼지기도 하고 때로는 기분이 가라앉기도 한다. 그런 아련함은 나이가 들어가며 더 깊어졌고, 그쯤부터 김장을 담기 시작했다.
2. 일년에 한번 김장 외 김치를 하지 않아 내 김치방법에는 줏대가 없다. 어느 해는 설탕 대신 홍시를 넣고, 어느 해는 사과와 매실을 넣기도 하며 어느 해는 생새우를 갈아 넣는 등 그 해 검색된 조리법에 따라 변한다.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하는 김치지만 식구들에게 김치를 사 먹이지 않는다는 자존심 정도는 충분히 지켜주고 있다.
3. 올해는 남편의 잦은 출장과 큰아이의 기숙사 생활로 묵은김치가 많이 남아있다. 남편은 김치만은 국내산을 고집한다. 남아있는 김치가 많아 김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금요일 저녁, 퇴근을 하니 절임 배추 두 박스가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4. 김장은 늘 미리부터 걱정과 함께 준비가 필요하다. 올해의 김장 조리법을 일찌감치 찾아 정한다고 해도 김치냉장고를 정리하여 김치통을 씻어두고, 절임 배추가 도착하는 날에 맞춰 액젓과 새우젓, 마늘, 생강, 대파 등의 재료를 사서 손질해야 하는 이런저런 시간이 일주일 정도는 걸린다. 그런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았는데 배추가 도착해 있으니 당혹스러웠다. 역시 남편은 남의 편인가보다.
5. 절임 배추 상자에는 택배를 받는 날 김치를 담그는 경우와 하루 지났을 때 담그는 경우 두 가지의 설명이 붙어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할 틈이 없었다. 셋째 언니한테 전화를 걸어 가장 손쉽게 하는 양념법을 메모했다. 언니 넷은 친정엄마의 김장 양념에 각자의 손맛과 스타일을 가미하여 자기만의 김치를 해오고 있고 제법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이런 김치장인들을 두고도 매번 인터넷에 떠도는 조리법을 따라 해왔던 이유는 강원도가 고향인 남편이 맵고 짠 경상도의 음식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6. 외투를 다시 입고 새우젓과 마늘, 생강, 찹쌀가루를 사 왔다. 언니가 알려준 대로 양념을 만들고 김치통을 씻고 나니, 절임 배추의 물기를 빼어 버무리는 일만 남았다.
7.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서둘러 앞치마를 하고 어제 만들어 둔 양념장의 간을 다시 보았다. 김장 양념은 간을 봐도 가늠이 안된다. 매운 고춧가루에 마늘과 생강 맛이 더해졌을 뿐 싱겁다거나 짜다는 것이 쉽게 판단이 안 된다. 그런데 비슷했던 맛들이 김치냉장고 속에서 몇 개월 숙성과 발효를 거치면 집마다 모두 제각각 다른 김치의 맛으로 나타나니 신기할 따름이다. 신김치만 먹는 작은 아이도 코를 막고 주방을 두어 번 다녀가면서 이 양념 냄새가 너무 싫은데 익으면 맛있어지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8. 두 박스의 절임배추가 김치로 변해 있었고, 뒷정리마저 끝내니 오후 4시였다. 직장에 출근해서 컴퓨터로 온종일 업무를 보아도 아프지 않던 어깨는 집안일 두어 시간 만에 결리고 쑤시고, 허리마저 뻐근해 오기 시작했다.
9. 돼지 앞다릿살 두 뭉텅이를 삶아 아들은 묵은김치에 싸서 먹고, 나는 갓 양념한 김치에 싸서 먹는데 둘째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무사히 김장했는지 안부를 물었다. 언니는 다음 주 토요일 김장에 넣을 참깨를 볶는다고 했다. 나는 겉절이도 아닌데 참깨를 왜 볶냐고 했더니 엄마 양념엔 통깨가 꼭 들어간다고 했다. 셋째 언니한테 가르쳐 준 양념에 왜 통깨가 없었냐고 다시 물었더니 둘째언니와 같은 답이 왔다. 그건 우리 엄마 음식의 기본인데 설마 잊었냐고...
10. 언니들은 환갑의 나이에도 엄마 음식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거의 비슷하게 재현해 낸다. 힘든 일이 있거나 마음이 휑하고 어수선할 때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해서 먹으면 마음이 안정도 되고 큰 위로가 된다고 했다. 나는 어릴 적 엄마의 음식을 많이 잊었다. 서툰 실력에 직접 해서 먹는건 더욱더 힘들 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엄마음식의 힘만은 나도 알것 같다.
11. 어린시절 엄마는 볶은 땅콩을 넣은 골짠지와 마른오징어를 가늘게 잘라 넣은 속새짠지, 굵은 멸치를 손질하여 간장에 넣고 조려서 깻잎 한 장마다 그 양념을 베게 하는 깻잎짠지를 국물이 나오는 배추김치 대신 자주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었다. 짠지 3총사와 더불어 알이 꽉찬 꼬꾸래미에 두부와 무를 넣은 얼큰이찌개, 김치와 밥을 함께 넣고 푹 끓인 김치죽 또한 엄마와의 추억이 유독 짧았던 나에게는 곧 고향이고 엄마다.
12. 평생 직장 다니면서도 가족을 위해 김장은 직접 해주었던 엄마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엄마와 고향이 유독 생각나는 늦가을과 겨울 틈사이 스스로를 달래가며 차가운 겨울을 맞이하고 싶은 건지 저울질하며 올해 김장도 무사히 마쳤다. 바쁘고 힘들고 또 한편 숙연하기도 했던 하루가 묵직한 그리움 지나갔다.
2. 냉동인간/ 박희곤(5)
1사람은 태어나면 죽는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단 한 번도 이 법칙을 벗어난 적은 없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 죽음의 명제에서 벗어 날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그러나 인류는 옛날부터 불멸의 꿈을 꾸며 살았다.
2그것은 고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미라와 같은 것이다. 미라는 수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불멸의 꿈을 꾸며 존재하고 있었다. 고대 춘추전국시대에 전국을 통일한 진시왕도 불멸의 꿈을 꾸고 불로초를 구했지만 그는 환갑도 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3인류는 영원한 생명체를 찾아 수많은 우주를 탐색했다. 영원불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노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달까지 정복하며 그 꿈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 시대에도 아직까지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4그래서 인간은 현대의 과학과 의학을 이용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냉동인간이다. 냉동인간은 냉동기술이 발명되면서 시작되었는데 조직이 냉동되면 썩지 않는 원리에서 기인되었다.
5인류최초 인간을 냉동하여 미래의 의학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냉동한 인간을 해동하여 다시살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을 창시한 사람은 1964년 미국의 물리학자인 로버트 에팅거었다. 그는 1962년 불멸의 가능성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의 냉동보존에 대해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는 시신을 냉동해 놓으면 차후 과학이 발전하면 안전한 해동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6그래서 1976년 미국 버클리 대학교수 심리학자인 제임스 베드포드라는 사람이 최초로 냉동인간이 되었다. 이 냉동인간은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의학적 냉동처리를 하여 영하196℃가 되는 캡슐에 넣어 냉동 보관한다. 미래에 의학기술이 발달되면 그때 다시 해동하여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냉동을 통해 인체의 보존성이 높아지는 이유는 인체가 얼려지는 만큼 온도가 극한으로 떨어짐으로써 인체 안에서 미생물이 살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7이러한 냉동기술로 북한의 김일성 부자도 러시아 기술진으로부터 냉동하여 보관 되여 있다. 미국에서는 약 500명 정도가 냉동 보관 되여 있으며, 현재 냉동을 원하는 대기자만 3000여명이 있다. 현재 냉동인간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총 4곳이며 우리나라에서도 2명이 냉동 되여 있다.
8첫 번째 사람은 80세 되는 여자로 혈액 암 환자이었다. 이 사람은 아들에 의하여 2020년 5월 사망 후 러시아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냉동보존처리 되어 있다. 두 번째 사람은 2021년 8월 31일 50대 여자 담도암 환자로 남편에 의하여 냉동인간으로 보존 되어있다. 이 사람들은 1차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냉동 처리한 다음 러시아로 옮겨져 2차 처리를 한 후 냉동 캡술에 보관 되어져 있다.
9인간을 냉동을 하려면 심폐정지가 일어난 후 의학적으로 사망이 확인되면 비로소 냉동절차가 이루어진다. 이때는 아직 조직의 장기나 세포가 살아있는 상태이다. 사망선고 이루어진 후 가능한 빨리 얼음 챔브에 넣어져 냉동과정을 거치게 된다.
10이때 몸속의 혈액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제거되고 혈액대신 방부제 역할을 하는 보존용액인 글리세롤(glycerol)을 몸속에 채우게 된다. 이것은 장기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11그 후 심장 수술하는 방법으로 흉골를 열어 심장을 통해 보존액을 주입하는 인공심폐기의 역할은 인체를 냉동 시 전신으로부터 혈액을 제거하고 혈액대신 부동액을 채우는 역할을 하여 냉동의 목적을 달성케 하는 것이다. 인체의 냉동과정은 물이 얼음화 되는 과정이다. 인체의 세포 속에 물이 얼게 되면 부피가 늘어나 세포속의 물이나 단백질이 변형되어 세포 파괴가 일어난다. 즉 세포의 부피 증가나 세포 파괴가 이루어지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게 된다.
12따라서 세포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전신에 채워져 있는 혈액은 전부 제거하게 된다. 이처럼 동결 방지제는 몸속에서 얼음처럼 되는 결정화하지 않고 바로 유리화 같은 상태로 변하게 되어 장기 손상 없이 인체를 안전하게 보존되어 지게 하는 것이다.
13이때 신체장기의 두께나 크기에 따라 심부의 온도변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급격한 온도변화는 장기에 손상을 줄 수 있으므로 천천히 주입하여 장기의 손상을 방지한다. 보존용액인 글리세롤을 넣어 보존처리한 다음단계는 인체를 저장탱크에 넣는 것이다. 이 저장 탱크는 액화질소를 수증기처럼 분사해서 급속히 냉동하게 되는데 그 후 인체는 영하196℃가 되는 액화질소 탱크에 냉동인간을 보관하게 된다. 이때 액화질소의 증발로 인하여 소모되는 량에 따라 일정기간동안 다시 채워주어야 한다.
14또한 불의의 전기사고나 전쟁 지진 등에 의하여 액화질소가 부족한 상태에 대비하기 위해 인체를 거꾸로 보관한다. 그것은 뇌를 먼저 손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냉동인간은 냉동과 해동을 동시에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냉동할 때 생기는 손상을 방지할 수 있고 또 해동 시킬 때 손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었을 때, 냉동인간은 다시 살아 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5이와 같이 많은 연구를 통하여 냉동인간을 위한 기술은 머지않아 곧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생명과학자들은 냉동인간은 비현실적이고 현재 장례문화의 한 방법인 빙장이라고 까지 한다. 고대의 미라와 같은 문화처럼 변형된 방법이라는 것이다.
16그러나 냉동인간이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까지는 아직 많은 난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윤리적인 면이나 법률적인 문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인간이 죽었다 깨어나면 행복한가의 문제는 지금에 파라다임으로는 평가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17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소망인 불멸의 생명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희망대로 의료기술이 발전하여 냉동된 인간을 해동해 되살려낼 수 있다면 우리 인류는 불로장생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18과연 냉동인간은 다시 부활하여 영원불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꿈꾸는 영원한 생명의 소원이 이루어 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것은 미래의 시간과 인간을 창조한 신만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비 오는 날 생각 나는 음식
1. 빈대떡
1. 가을비가 온다. 지붕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가 좋다. 비가 오면 유년 시절 먹던 빈대떡이 생각난다.
2. 할머니는 빈대떡을 비 오는 날보다 명절날 많이 해주셨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빈대떡이 먹고 싶다. 녹두를 물에 불렸다가 갈아서 거기에 김치, 돼지고기, 숙주나물, 버섯, 파 등 갖가지 양념을 넣어서 반죽을 한다. 마당에 솥뚜껑을 뒤집어 걸어 놓고 무 자른 것으로 기름을 바르고 두툼하게 부쳐주셨다. 고소한 냄새가 온 마당을 적신다. 나는 옆에 앉아 침을 삼키며 노릇노릇하게 익기를 기다렸다. 할머니는 식구가 많아 만만하게 먹일 수 있는 게 빈대떡이었기에 한 채반 가득 빈대떡을 부쳐 놓으셨다.
3. 모든 전들이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 난다. 하지만 어릴 적 먹었던 빈대떡은 따뜻하게 데워먹지 않고 식은 것을 할머니 몰래 하나씩 집어 먹는 게 더 맛있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선지 결혼 후에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대로 명절에는 빈대떡을 부쳤다.
4. 시댁 식구들도 유독 다른 전보다는 빈대떡을 맛있어 하며 잘 드셨다. 여기에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시아버님을 비롯하여 모두가 빈대떡을 안주로 한잔씩 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5. 할 때마다 조금만 해야지 하면서도 하다 보면 손이 커서 한 양푼 가득 만들어 작은 집과 나누어 먹었다. 유난히 손이 많이 가기에 쉽게 해 먹기가 어렵다. 요즘은 시중에 빈대떡을 파는 곳도 있어 사서 먹어볼 수도 있고 집에서 하는 것보다 더 맛있을 수도 있다.
6. 빈대떡을 집에서 만드는 것은 명절 때만이라도 모여서 나누어 먹고 어릴 적 맛보았던 빈대떡의 추억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어른이 다 돌아가시고 시동생들도 명절에 오면 가기 바쁘다.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없어 만들어도 신이 나지 않는다.
7.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이 돈 없는 양복 입은 신사가 먹었던 떡 벌어진 요릿집 음식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빈대떡이지만, 다른 요리보다 자신 있게 만들어 먹을 수 있기에 서민의 대표음식으로 빈대떡을 손꼽은 모양이다.
8. 우리의 삶이 빈대떡처럼 고소한 시간만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짠맛, 매운맛, 눈물맛 같은 시간을 이겨내고 빈대떡 반죽처럼 어우러져 고소한 맛을 내는 것이 인생이리라. 오늘 저녁은 빈대떡을 부쳐 남편과 막걸리 한잔 해야겠다.
2. 국수
1.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음식 중, 하나가 국수다. 별 반찬이 없어도 잘 넘어가는 음식이다.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자주 해 먹는다.
2. 국수는 인류가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던 음식이다. 면발의 긴 모양 때문에 수명이 길어진다고 생일날 먹었다.
3. 결혼식날도 먹었다. 요즘은 결혼식이나 집안 잔치 때, 화려한 뷔폐에서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던 때는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으로 멸치 육수를 우려낸 잔치국수를 대접했다. 면이 준비되면 빠르게 요리로 만들어 하객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국수를 먹여준다'라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상대방에게 결혼을 언제 하느냐고 묻는 이야기를 할 때도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라고 묻는 관습이 남아있다.
5. 결혼식 뷔페 메뉴에도 잔치국수나 우동이 빠지지 않고 잡채나 비빔국수 등이 제공된다. 설령 양식 풀코스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매뉴에 스파게티가 있거나 소량이나마 국수가 차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국수는 생일날 먹으며 오래 살고, 결혼식에서 축하 음식으로 먹으면서 부부가 평생을 같이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의미가 깊은 음식이다.
6. 국수를 해 먹기 위해 냄비에 물을 올리고 멸치, 다시마를 넣어서 육수를 만든다. 팔팔 끓는 물에 국수를 넣고 엉키지 않도록 잘 젓는다. 부르르, 보글보글, 하얀 녹말이 맥주 거품처럼 넘친다. 찬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국수가 투명해지도록 삶아 얼음물로 씻어 소쿠리에 애기 주먹만하게 한 움쿰씩 말아 놓는다.
7. 다음은 고명인데 국수에 올리는 고명을 보면 그 색깔에 눈이 먼저 맛을 본다. 상큼하고 진한 초록색의 오이를 채 썰고, 호박도 살짝 볶는다. 삶의 고단함에 영양을 주는 지단을 부치고, 화려한 색을 지닌 당근을 곱게 채를 썰어 볶아 삼색의 고명을 얹는다.
8. 고명은 탄수화물만 있는 국수에 영양을 생각해서 올리지만 먹는 맛과 씹는 맛, 아삭거리는 청각까지 즐겁다. 색색의 고명을 면 위에 올리는 것이 살아가면서 좋은 일이 있는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 같은 느낌이 든다.
9. 고슬고슬한 김 가루를 뿌리고 멸치 다시물을 붓는다. 생의 짠맛인 간장에 눈물 나는 쪽파와 매운 맛 같은 고춧가루를 넣고 섞는다. 살다 보면 매끄럽고 고소한 삶이 내게도 오는 것 같이 참기름도 한 방울 치고 마지막으로 깨소금으로 뽀얗게 분을 뿌린다. 이렇게 만든 국수를 남편을 주고 나는 물을 넣지 않고 식초와 고추장을 넣어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10. 비오는 날, 빗줄기처럼 먹음직스러운 국수를 먹으며 노란 지단처럼 따뜻한 배려와 청청한 오이 같은 정직함과 호박과 같은 푸근함과 무덤덤한 맛의 당근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살면 깨소금같이 고소한 일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11. 갓 담은 김치 겉절이 한 접시와 함께 먹으면 부러울 것 없는 포만감이 밀려온다. 앞으로는 국수처럼 매끄럽고 술술 잘 지나가는 시간만 있기를 바라며.
4. 기억이 온다 / 이명조5
1어느 날 새벽이었다. 시골 기와집 대청마루 끝에 걸터앉은 망연자실해 있는 엄마 등 뒤, 다섯살 여자 아이가 얼굴 파묻고 울고 있었다. 희뿌연 마당 구석에 검은 두 팔 벌린 감나무 나뭇가지 옆에 잿빛 두루마기 노인 서 있었다.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었다.
2여든 살 강복순은 파킨슨병으로 벌벌 떨다가 죽었고, 일흔 한 살 진종현은 갑자기 뇌졸증으로 죽었다. 예순 셋 이봉석은 화장실에서 쓰러져 죽었고, 스물 넷 김인자 선생님과 열 두살 김지화는 물에 빠져 죽었다. 스무 살 이애조는 경부선 열차에 치어 죽었고, 열한 살 한정순은 장티푸스로 죽었고, 아홉 살 박기한은 뇌종양으로 죽었다. 내 동료와 제자들이었고, 내 부모와 동생이었고, 내 남편이었다.
3하얀 벚꽃 지고, 연분홍 배롱나무꽃도 지고, 담쟁이 잎도 떨어지고, 흐드러진 코스모스꽃도 졌다. 그 발자국 따라 기억들이 따라 온다. 한꺼번에, 때로는 하나씩 따라 온다. 흰머리 뽑다가 遠視눈 굽은 손가락 휘청대고, 가늘어진 머리카락 저녁 아궁이 불쏘시개 쪼그라지듯 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운이 좋았던 덕분에 나는 그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4지난 꿈속에서 그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나는 내가 미워졌다
기억들아!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다. 그 기억들 품고 나는 제대로 죽고 싶다. 어떻게 죽는 게 제대로 죽는 걸가?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고 또 생각 한다. 긍지를 잃지 않으려고!
5. 미역국 /홍미애3
1. 냉동실 안쪽 깊숙이 차지한 예쁜 포장지가 보였다. 몇 번이나 꺼내어 먹는다면서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다. 아끼는 후배가 건강 챙기라며 한우 국거리와 구이용 세트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도 어려운데 나를 생각해 주는 갸륵한 마음이 고마웠다. 받은 고기로 구이를 먹을까 망설이다가 마침 축제 때 받은 미역이 있어 국거리를 꺼내 들었다. 미역을 적당량 물에 불렸다. 부드러운 미역이라 순식간에 불어나 버린 미역을 적당량 옮겨 담고 고기는 참기름과 간장으로 밑간을 했다. 식구들이 맛있다고 빈 그릇을 채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국을 끓였다.
2. 신경 써서 잘하려 하면 나는 꼭 실수를 한다. 깊은 맛이 왜 우러나지 않을까. 밥을 먹기 위해 바쁘게 음식을 차렸다. 모두 누구의 생일이냐 묻더니 국물을 떠먹는다. 그래도 가족들은 누구 하나 맛없다고 숟가락을 놓지 않고 묵묵히 먹어준다. 일주일에 한 번은 미역국을 끓인다. 국이 없으면 밥숟가락에 힘이 없는 남편 때문에 일단 국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자주 끓이는 국이지만 엄마의 손맛처럼 깊은 국물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이 더욱 생각난다.
3. 먹을수록 나의 침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엄마표 미역국은 내가 딸을 출산했을 때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잘 건조한 미역으로 황탯국을 끓여주었다. 기름에 볶지 않고도 사골 국물처럼 뽀얗게 우러난 국물 맛은 어떤 맛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맛이었다. 엄마는 몸조리가 끝날 때까지 산고에 시달렸던 내 육신을 깨끗이 씻어주고 말려주었다. 그 힘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미역 줄기처럼 내 몸을 감싸 주었고 엄마의 사랑과 정성으로 몸도 마음도 회복되었다. 따뜻한 국물을 먹고 나서야 깊은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 딸에게 국을 끓여주며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아가는 인생길 고비마다 비바람과 태풍을 만날지라도 양지바른 곳에 잘 말린 미역 줄기처럼 짜지도 비릿하지도 않게 그렇게 살라고 엄마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4. 한때는 그랬다. 엄마는 큰 솥도 부족해 아예 드럼통을 사다가 미역국을 끓여 놓았다. 많은 자식을 위해 누구든 와서 각자 그릇에 담아 가라고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식구 많은 나를 더 챙겨주었고 밑반찬까지 뚜껑에 이름을 적어 놓았다. 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미역국을 잘 먹었기 때문에 반찬 걱정 없이 지냈던 그때가 좋았다.
5. 엄마의 감정이 묻어있던 국물 맛과 손때묻은 그릇들이 이제는 그리움이 되었다. 엄마 마음처럼 넓은 바다의 품, 그 속에 건져 올린 미역줄기처럼 깊고 진한 미역국을 먹을 때 엄마의 젖줄처럼 심장이 따뜻해진다. 나의 근원이며 뿌리인 엄마가 끓인 미역국을 이제 먹을 수 없다. 아버지를 바로 따라가신 엄마는 나란히 영천 호국원에 안장되어 계신다. 곧 엄마의 기일이 다가온다.
6. 바지락 전복 홍합 황태의 다양한 맛으로 미역국을 끓여준 엄마는 그래도 가장 무난하게 잘 먹는 것이 소고기국이라 했다. 엄마의 국 끓이는 재료를 별것 아니라 설명하면서 건미역과 소고기 등심, 다진 마늘과 참기름, 꽃소금과 물이 전부니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맛있겠지. 그게 가족에 대한 사랑이란다. 하고 말씀하시던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소녀 같은 엄마였다.
7.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고 기름기를 살짝 머금어 깊은 맛이 우러난 미역국을 시험 칠 때 모르고 먹었다. 불안했지만 턱걸이로 아슬하게 합격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작은 마음이 모여 따뜻한 미역국에 밥 한 그릇으로 선한 영향력이 보태졌던 엄마의 일상들. 엄마가 만들어낸 국물 맛은 마치 푸른 바다의 느낌으로 헤엄쳐 나오는 싱싱한 미역줄기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8. 이제 다시 냉동실 문을 연다. 좀 더 맛있는 뽀얀 국물 맛을 내기 위해 남아있는 미역과 소고기를 소분해 둔다. 정글처럼 복잡한 냉동실 속에 다시 곱게 포장해 넣었다. 며칠 후 지겨울 틈 없이 또 미역국을 진하게 끓여볼 작정이다.
9. 엄마가 끓여줬던 미역국은 곪고 아픈 곳, 수많은 상처에도 치유되는 온기를 나눠 주는 것 같다. 엄마는 딸에게 미역국을 끓여줄 때마다 많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 내 딸이 아이를 낳으면 넓고 깊은 바다의 마음으로 미역국을 끓여주리라. 온몸이 따뜻해지는 그 미역국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