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아직 따뜻하다
이상국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 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 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수상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이상국 창비 1998.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것이다
황지우
初經을 막 지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인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넣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수상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것이다 황지우 문학과지성사 1998
백석문학상1998~ 백석문학상은 1997년에 시인 백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문학상이다. 故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2억원을 기금으로 1997년 10월 20일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 위원회(위원장 백낙청, 운영위원 최원식, 이시영, 정형모, 이정재)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첫 시행은 1999년에 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한다. 출판사 창비에서 운영하고 있다.
*출연자 김영한 (1916년 (서울특별시) - 1999년 11월 14일) 지금의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가 예전에는 우리나라 3대 요정중 하나였다는거 알고 계신가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유명한 시인 백석의 평생의 연인 자야 김영한(법명 길상화)씨께서 법정스님에게 10년이나 부탁하여 시주한, 당시 시가 약 천억에 달하는 요정이었다고 해요.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반한 자야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만난 법정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하겠다 했지만 법정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고 해요.
자야가 "시주를 받아주세요, 스님"하면 법정스님은 "시주를 받을수가 없습니다, 보살님"하면서 10년이나 승강이를 벌이고, 그러다 결국 법정스님이 개인 명의가 아니라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받게 되었다고 하죠.
그럼 이 엄청난 시주를 하신 자야와, 천재시인 백석은 어떻게 만났을까요?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났을 때는 백석이 일하던 학교 교사 회식이 있었는데, 당시 함흥에서 였다고 해요. 26세였던 백석과 22세였던 자야는 첫 만남에 반했다고 하죠.
백석은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하면서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줬다고 해요.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시를 썼다고 해요. 백석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바로 자야를 두고 쓴 시.
후에 자야가 이때를 회상하며 한 말이 있는데, 다 늙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여보, 나 왔어"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백석이 보인다고... 참 몇십년이나 변함없는 사랑이죠.
그러나 부모님은 기생출신인 자야를 인정하지 않으셨고, 백석은 둘이 함께 만주로 가자고 했죠. 하지만 자야는 앞길 창창한 지식인에 장래가 촉망되는 시인 백석의 앞길을 막을까 갈수 없다고 했어요. 결국 1939년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고, 그러다 해방을 맞고 백석이 신의주에 와 있는 동안 6.25 전쟁이 터집니다.
그러면서 분단된 남과 북에서 둘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돼요. 자야는 백석을 그리며 사업을 하고, 백석이 공부했던 영문학을 공부하며 재물과 지식을 쌓았는데, 혹시라도 백석이 돌아오면 그가 편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돈을 모은 자야가 지금의 길상사인 대원각을 사들여 요정을 열고, 3공화국 시절에는 정부 주요 인사들의 단골요정으로 유명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10년의 실갱이가 있고나서 1997년 10월 길상사가 개원하고, 자야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습니다.
창건법회에서 길상화 보살이 말하길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기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때 인터뷰에서 천억이나 되는 땅을 시주한 것이 혹 아깝지는 않으신지, 어떤 마음으로 시주하신건지 묻자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 일을 한 것인데, 있는 것을 드렸으니 별 일 아니다"라며, "내 가진 모든 것이 그이(백석)시 한 수만 못 해"라고 말했다고 해요.
길상화 보살, 자야의 유언은 눈이 푹푹 나리는 날에 유해를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는 것이었다고 해요. 눈 오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백석에게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실제로 99년 11월 13일 길상사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자야는 다음날인 11월 14일 육신에서 벗어나 길상사 뒷뜰에 뿌려졌죠.
길상화 자야가 그리도 기다렸던 백석은, 남북 문학회가 열렸을 때 백석에 대해 묻자 "러시아 시 번역하던 그 백석 말하는건가"라며 북한에선 전혀 이름이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원로들이나 간혹 이름을 알았다고. 1962년 북한에서 창작활동이 금지된 다음부터 어렵게 어렵게 살다가 95년 1월, 백석은 세상을 뜹니다. <출처 네이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처] 자야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작성자 마인 [펌]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