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 [新石器時代, New Stone(Neolithic) Age] (기원전 6,000-기원전 1,000년경)
* 신석기 거주 지역 : 강가나 바닷가
* 의식주 생활
- 의복 : 베짜기(가락바퀴, 뼈바늘 사용)
- 생업
어로, 사냥, 채집생활→농경, 목축시작
농기구 : 돌낫, 뼈낫으로 추수
곡물가공 : 돌갈판
-주거생활 : 정착생활(움집)
* 신석기 시대 사회
- 씨족중심의 부족사회-공동생산, 공동분배
- 경험많은 부족장이 생산활동 지휘
* 신석기 시대의 신앙과 예술 : 신앙생활을 바탕한 예술활동이 이루어짐
<<경제활동>>
*신석기시대에는 원시농경이 시작되었다.
불을 질러 잡초를 제거하고 뿔이나 돌로 만든 괭이, 삽, 보습 등으로 간단히 나무 뿌리를 캐낸 다음 그 자리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끝났다. 그러나 농사만으로는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으므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많은 부분을 어로와 수렵·채집에 큰 비중을 두었다.
신석기인들의 수렵, 어로 활동은 구석기인과 다른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 수렵활동
수렵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했을 때부터 시작된 중요한 식량획득 방법이다. 동물은 인간에게 식량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뼈나 뿔, 이빨, 가죽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재료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생활에도 수렵은 상당히 큰 비중을 갖는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뼈는 사슴, 멧돼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삵괭이, 물소, 개 등이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자연환경이 오늘날 처럼 산림과 수풀이 무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중 사슴과 멧돼지가 가장 많이 출토되는데 사슴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일 뿐만 아니라 뼈와 뿔은 골각기로 이용되며, 가죽은 옷을 짓는데 이용되므로 좋은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수렵을 하는 방법도 구석기시대와 달라져 구석기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던 돌창과 돌도끼 이외에도 먼 거리에서 사냥을 할 수 있는 활과 화살을 이용한 사냥법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사냥한 동물들의 뿔과 뼈, 이빨 등은 화살촉과 토기의 문양을 새기는 무늬 새기개, 바늘, 작살, 낚시바늘, 괭이, 낫, 송곳 등을 만드는데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또한 구멍을 뚫어 실에 꿰어 장신구로도 사용되었다.
2. 어로활동
해안가에 거주하던 신석기인들은 어로활동의 결과물로 패총을 남겼다. 동삼동 패총이나 욕지도 패총 등에서는 각종 어패류와 육상동물뼈 등 자연유물, 그리고 이와 관련된 도구들이 출토되고 있어 신석기인들의 생활 모습을 어느 정도 유추 할 수 있다.
남해안 지역의 패총에서는 도미, 농어, 돔, 방어, 참치, 대구, 정어리, 상어, 가오리, 숭어 등의 고기뼈가 출토되는데, 대부분 중형의 어류로 단백질의 함량이 높은 것이다.
한편 먼바다까지 진출하였음을 시사하는 대형의 결합식 낚시바늘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기잡이에는 크게 작살이나 창을 이용하기도 하고 낚시, 그물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패총에서 출토된 석제, 골제의 작살, 낚시바늘 등의 어로 도구는 당시의 어로활동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많은 양의 고래뼈는 당시 신석기인들이 소형의 고래 정도는 직접 포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인들은 먹고 남은 조개를 이용하여 장식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투박조개를 이용한 조개팔찌이다. 조개팔찌는 남해안의 패총유적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는 장신구 중의 하나인데, 동삼동 패총에서 1,500여점의 조개팔찌가 출토되어 주목된 바 있다.
3. 채집활동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어떤 식물이 식용 가능한지, 어떤 계절에 채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여 많은 종류의 나무 열매나 식물의 뿌리 등 다양한 식물자원을 획득하였다. 또한 저장이 가능한 식물들은 식량이 부족한 시기를 위해 저장해 둠으로써 일년동안 식량 이 원활히 공급될 수 있게 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채집물에 대한 자료는 매우 미미한 상태이다. 하지만 서울의 암사동, 경기도 미사리, 합천 봉계리에서 탄화된 도토리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봉계리에서는 집자리내의 저장고에서 호두와 함께 출토되어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저장고를 마련해 도토리와 같은 잘 썩지 않는 건과류를 중심으로 식량자원을 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식물을 채하거나 열매를 딸때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식물의 뿌리를 채집하는 데에는 나무가지나 뗀석기 등의 굴지구가 사용되고, 도토리와 같은 열매나 식물의 뿌리를 가는데는 갈돌과 갈판이 이용되었다.
4. 농경활동
신석기시대 말기에 인류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즉 농경과 목축의 시작이다. 이는 인류를 지금까지와 같은 약탈자가 아닌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는 창조자가 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사람들은 기원전 3∼2천 년 무렵에 야생동식물의 채집에 의존해 온 생활형태에서 벗어나 가축을 기르고 경작과 재배를 통해 곡식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주거지도 구릉지대로 옮겼는데, 후기 빗살무늬토기의 바닥이 평평해지는 것은 이러한 변화에 수반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에 재배된 것으로 확인된 곡물로는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에서 출토된 피 혹은 조와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출토된 조가 있다.
곡물을 재배하는데 사용된 도구로는 개간용으로 사용된 토지 굴지구(도끼류)와 돌이나 뿔로 만든 보습, 괭이, 곰배괭이 등이 있는데 이외에도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나무로 만든 여러 도구들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수확 도구로는 지탑리 유적에서 출토된 돌낫과 궁산패총에서 출토된 멧돼지 이빨로 만든 낫이 있다.
<<사용도구>>
1. 마제석기
신석기시대가 구석기시대보다 발전되는 기술적인 요인의 하나는 석기를 제작할 때 갈아서 만드는 마제수법이다. 신석기 사람들은 다양하고 세련된 마제석기(간석기)를 사용하여 경제생활을 풍부하게 하였다.
돌로 된 가락바퀴와 자연섬유로 만든 그물, 동물뼈로 만든 낚시를 사용하여, 강이나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구석기시대부터 내려온 사냥기술은 창, 투창, 활 등이 발명됨으로써 훨씬 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식량이 더욱 풍부해졌다. 사람의 신체는 더 강해졌으며 두뇌는 더욱 발달하였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전기간을 통해서 모든 석기가 간석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석기의 용도와 기능에 따라 적절히 제작 방법을 달리하여 타제와 마제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돌의 전면을 갈아 만든 것이 많지만 연대가 오래된 것 중에는 필요한 부분만 갈아 만든 것도 적지 않다. 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다.
2. 토기
자연상태의 돌을 단순히 깨는 것이 아닌 갈고 다듬어 사용하던 신석기시대 인은 돌만이 아닌 흙으로 새로운 형상을 창조했다. 즉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기는 신석기문화를 특징짓는 문화요소 중에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토기의 출현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현재까지의 조사 성과로 본다면 BC. 6000-BC.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무늬를 꾸미는 방법에 따라 덧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로 나눈다.
덧무늬토기는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에 맞집어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이며, 주로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빗모양의 무늬새기개로 토기 겉면을 누르거나 찍거나 그어서 각종 기하학적 무늬를 만든 토기이다.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라고 볼 수 있다.
<<종교활동>>
1. 토테미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자연을 사람의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특정한 동물을 자기 씨족의 시조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이로써 다른 집단과 스스로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상으로 숭배된 동물을 토템이라 하며, 토템 숭배 사상을 토테미즘(Totemism)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인들이 널리 숭배하던 토템은 곰과 호랑이었다.
2. 애니미즘
신석기인들은 산·바다·나무와 같은 자연물을 포함한 우주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정령신앙(精靈信仰=Animism)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쉽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물 각자에 의지를 부여하고 그들을 숭배함으로써 재난을 피하려 하거나 풍요를 기원한 것이었다.
3. 영혼불멸의 신앙
토네티즘, 애니미즘과 더불어 신석기시대에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신석기시대의 무덤을 발굴해 보면 시신의 머리를 의도적으로 동쪽으로 향하게 한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늘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영혼의 소생처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즐겨 사용하거나 아끼던 물건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영혼불멸의 신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유물을 통해 보는 신앙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신앙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는 풍요와 다신을 기원하는 몇 가지 유물이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는 가리비조개 위에 두 눈과 입을 파서 사람 얼굴모습을 나타낸 것이 출토되어 이채롭다. 조개 위에 이런 방식으로 얼굴모습을 나타낸 것은 현해탄을 마주보고 있는 일본 신석기 유적에서도 보인다. 이것은 얼굴만이 강조된 일종의 신상으로 여겨진다.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얼굴을 조각한 곳이 강원도 오산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오산리유물은 토기를 만드는데 쓰는 점토덩어리를 길이 5.1cm 크기로 납작하게 눌러 얼굴형태로 만든 다음, 두 눈과 입은 손가락으로 깊게 눌러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우리나라 원시신앙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유적지>
부산 동삼동, 함북 웅기 굴포리, 서울 암사동, 황해 지탑리, 전북 부안 등
함북 웅기 굴포리 서포항과 농포 유적 : 새, 개, 인형 조각품도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