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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사람들이 일하고 있을 때, 시청역 과 충정로 그리고 서울역 사이에 자리한 공원은 단순한 근린공원 그 이상의 존재감을 자랑했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짙은 벽돌은 서울역 7017과 서울스퀘어를 뒤로한 채 남다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곳은 맑은 날씨보다 우중충한 날씨가 더 잘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순간을 담기 전, 공원 구석구석을 거닐며 공간의 구조와 예술품 더불어 서소문 역사공원에 담긴 의미들을 곱씹으며 재촉하고자 했던 그 마음부터 조심스레 내려놓아 본다.
오늘날 뛰어난 접근성을 자랑하던 이곳은, 약 200년 전 조선시대에도 물류와 사람이 몰리던 곳으로 그 결을 함께 하고 있었다. 공원 바로 앞으로는 서울역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철로가 덩그러니 놓여있어, 간접적으로나마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 잠시의 편안함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그 대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운명.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당시의 흔적들은 곳곳에 자리한 예술품들을 통해 가늠해 볼 수밖에 없었으나 전주 전동성당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미리 겪어봤던 나로선 그저 담담하면서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1. 고난의 시간
시구문. 조선시대 때 이곳은 주로 시체가 배출되던 문이 자리했던 곳으로, 사람의 삶과 죽음이 동시에 공존했던 곳이다. 게다가 '예기'에 따라 사형장은 사직단의 서쪽에 자리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사형장이 자리했으며 동시에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물류로 인해 사람들이 몰리던 곳이기도 했다. 즉, 형 집행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세움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좋은 곳이라는 말.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수많은 소중한 생명들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조선에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유학자들은 그것을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으로 받아들였다. 청나라 북경을 오가던 사람들에 의해 '과학적인 것' 들과 함께 별 다른 의심 없이 이 땅에 들여오게 된다. 대표적으로 '천주실의'라는 서적이 있었으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유학자들은 이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정약용, 이승훈, 권철신 등과 같은 남인계 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모임을 갖게 되는데, 당시 그들에게 천주교는 하나의 진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불교의 아류 정도로 여기던 분위기 정도였지만, 1784년 조선에 파견된 성직자 하나 없이 이승훈은 스스로 베이징으로 건너가 공식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으며 신자로 거듭난다. 여기까지는 그저 논쟁의 대상으로서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으나, 지구 반대편에 자리한 교황청의 결정으로 인해 이 땅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100년에 걸친 고난의 시간이 찾아오게 된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제사를 금지할 것을 명령했고, 이 사실은 1790년 조선에도 전해지게 되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사건은 터지고 만다. 교황청의 결정을 접한 조선의 천주교 신자 '윤지충'은 진신 사건을 터뜨렸고, 과정에서 신주를 불태우며 앞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을 시인하고 만 것이다. 해당 사실은 조정에 까지 들어가게 되고, 그 사실은 접한 조선 정부는 뒤집히고 바로 진상조사를 벌이게 된다. 조사 결과 해당 소문은 전부 사실로 드러나게 되는데, 조서 과정에서 윤지충은 변명은커녕 오히려 "천주님께 죄를 짓느니 사대부에게 죄를 짓는 게 낫다"라고 말하며,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후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전동성당이 세워져 있다.
해당 사건을 시작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약 100년 간 크게 5차례에 걸쳐 탄압당하게 되고, 와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개입되며 교세가 사그라들 정도로 박해가 진행된다. 와중에도 사람이라면 사실 본인의 생존을 위해 배교라는 선택지를 택할 수도 있다 사료되나, 병인박해 당시에는 대부분의 신자와 외국인 선교사들까지 양심을 지키기를 택한 채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당시의 모습은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상세히 묘사가 되는데 종교가 없는 나 조차도 그 장면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병인박해로 인해 순교한 신자들은 약 8,000명 정도가 됐으며, 병인양요를 거쳐 1888년에 조선과 프랑스 사이의 수교가 이뤄지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끝이 난다. 더불어 박해의 시발점이 됐던, 제사 금지 명령도 1939년에 자라 지게 됐으며, 당시 순교한 자들은 2014년에 교황이 방문하며 시복 됐고, 2019년에 이곳이 서소문 역사공원으로 조성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본인들의 신념을 지켰던 그 모습을 기리며 가만히 묵념의 시간을 가져본다.
2. 공원 그리고 박물관
공원과 지하 공간에 박물관으로 조성되며 지금까지 서소문 역사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에 깃든 이야기와 의미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 자리한 순교자 현양탑을 시작으로 공원 의자에 놓인 누워있는 예수상까지 자리해 그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충분히 녹여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이 한국 최대의 순교 성지이자,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 인정되며,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코스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뒀다. 생각보다 엄청났던 그 순교자의 규모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으며, 오래전 지인과 함께 방문했던 절두산 성지가 문득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구에서부터 놓여있는 작품들에 절로 감정을 이입하다 보면 하늘을 향해 뻥 뚫려 있는 부분을 향한 그것들의 시선들이 애달프게 느껴졌다. 숭고하다 라는 말을 감히 써도 될까?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공원으로 들어오는 입구 그 왼쪽에는 뚜껑이 온전히 닫혀있는 우물이 자리했다. 그 우물은 당시 사형이 집행되고, 사형수들의 피를 씻어내고자 마련된 우물이었다는 사실을 접하곤 그저 오래도록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형이 집행됐을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설치 작품들 중, 순교자들의 얼굴이 새겨진 작품들과 그 숫자에 맞게 나열된 사발들은 느낌이 상당히 강렬했다. 중간에 소개해 주시는 분을 맞나 그 사발에 대해 자세한 설명과 순간을 담은 영상을 접할 수 있어, 공간에 담긴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킬 수 있었다. 백사 사발은 무명 순교자들의 지명을 상징한다는 이야기, 더불어 그릇들 마다 그들의 혼이 담겨있다 생각하니 잠시 멈춰 다시금 그들을 위한 시간을 가져본다.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 혼이 담긴 공간, 그 가운데에서 의도치 않은 보물을 만나볼 수 있었다. 효창공원에는 거사 이후,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었고, 이곳에서는 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두 글자 '경천'. 살아생전에 그는 절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세례명은 토마스였다.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오만가지 감정들을 동반했으며, 당시, 진품명품에서는 이걸 보고 가격을 매길 수 있는 물품이 아니라며, 가격 책정을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무한한 감사함을 가져본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3. 문화
공원이 정돈되면서도 편안했다면, 박물관과 내부 건물은 어떤 목적을 갖고 이곳을 찾더라도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만 했다. 내부에 설치된 영상관에서 이곳과 관련된 영상을 관람한 후, 주변을 돌아보면 매력적인 요소들의 연속이었다. 대칭, 빛 게다가 짙은 채도의 벽돌들 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상설전시가 열리고 있는 박물관 내부는 곡선과 직선 그리고 반영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조화로운 모습을 선사했다.
그것들 중, 한눈에 들어온 작품은 크기도 크기였지만, 그 작품의 구성과 세밀함이 방문자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한국 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기념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십장생을 밑그림으로 나누어 각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형화해 나전칠기 기법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작업 방식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두 마리의 토끼 그 이상을 담아낸 작품이었기에 지금은 잊힌 그 해설사 분의 작품 설명을 들어가며 어느새 순간에 몰입해 있었다.
비단 그것들 뿐만 아니었다. 바깥으로 이어진 공간에는 하늘과 맞닿아 아련함을 동반했으며, 바로 옆에 놓인 숨겨진 공간에 설치된 조형물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영혼의 안식처와 같은 분위기를 동반했다. 코로나 시국으로 국내 여행이 한 동안 활성화가 됐을 때, 이곳도 마찬가지로 SNS를 통해 여행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더욱이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짙은 채도의 벽돌과 대비되는 하늘을 담고자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구도를 잡아내기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간혹 사진작가와 모델 분들이 함께 작업을 위해 부지런히 소통하는 장면도 목격됐다. 그중, 나도 포함돼 있었고 이미 SNS에 올라온 수많은 게시물들을 통해 그 가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문득 고건축들 주변을 거닐다 한복을 입고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 남겨진 현대 건축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빛, 대칭 그리고 의미 등 건축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이미 겹치는 것들이 참으로 많았다.
절제와 균형. 서소문 역사공원의 매력은 이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 뭐 하나 높은 건물들이 없었으며, 추모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몰려 있더라도 다른 관광지들과 같은 소음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게다가 설치 미술품들을 통해 '사랑' 그 자체를 표현한 종교의 의미를 담아, 곱씹어 볼수록 정말 양파와 같은 매력을 지닌 곳이었다. 종교를 떠나 서로의 이념과 생각들이 다르다고 반목과 갈등을 일삼기보다는 존중과 인정 그리고 배려를 통해 어우러져 살아갈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참담했던 순간들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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