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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불교사상 스크랩 『중국선종의 성립사연구』를 읽고
내생애 추천 0 조회 66 15.06.01 13:0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선종의 역사는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사라진 강호의 모습과 유사하다. 실제 강호라는 말도 강서 마조와 호남 석두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영웅들이 무공으로 우열을 다퉜다면 선사들의 선기로 자신의 가르침을 선양했다. 강호의 냉혹한 현실처럼 뛰어난 선기를 지닌 선승이라 할지라도 그 후대 뛰어난 제자가 없었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또한 선사들이 당대 자신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자신의 스승으로 조작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불생불멸을 추구했던 역대 조사들…….그들의 삶 또한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와 같은 생사 속에 섞여 녹아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이러한 삶이 생멸이 곧 불생불멸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인가?

 

  이미 『전법보기』, 『능가사자기』, 『역대법보기』에서 신수계와 무주계가 자파의 전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벌였던 법맥조작행위를 살펴보았다. 이런 세속적이다 시피한 수행자들의 태도를 각 계파가 서로의 가르침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해 보았다. 성본스님의 『중국선종의 성립사연구』에서는 이런 법맥 조작이 난무하는 선종역사의 시대별, 각파별 사상과 그 관계성을 많은 문헌을 통해 체계적으로 밝혀가고 있다. 또 많은 선적을 비교 대조하여 선종 각파 법맥의 성립배경과 그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는 보리달마를 초조로 한 중국선종의 성립은 마조계의 조사선의 전개와 함께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중국선종의 성립과 조사선이 완성되기까지의 초기 선종의 형성 및 발전에 관한 제문제와 선종 각파에 대해서도 시대별, 집단별, 지역적인 종파별로 체계적으로 종합 정리하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 연구는 보리달마와 그의 문하, 능가종의 성립과 발전, 동산법문의 형성, 북종선의 성립과 발전, 남종의 등장과 발전, 선종의 성립과 조사선의 전개 순으로 이뤄지고 있다.

 

  중국불교에 있어서 초기선종의 역사는 6세기초경, 北魏시대 인도승 보리달마의 來朝로부터 시작된다. 보리달마를 초조로 하는 초기선종의 성립기는 9세기 초, 中晩唐 무렵 선종의 제 6조 조계혜능의 법손인 마조도일과 그의 문하 제자들의 혁신적인 활약에 의해서 조사선이 완성되는 시대까지의 전후 약 300여 년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남북조시대로부터 수당의 3대 왕조에 걸친 정치·사회적 격변기며 불교계 또한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중국에 정착되어 발전한 중국불교종파의 성립기였다. 이렇게 성립된 종파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서로 연이어서 浮沈하는 동시에 상호작용을 통해 성숙해 갔다.

 

  선종은 장안과 낙양을 근거로 경론을 주석하는 교학중심의 중앙귀족불교인 수당종파불교의 최후에 성립되었다. 선종은 두타행을 주로 수행하는 실천불교로서 그 이전의 모든 종파와 그 취지를 달리했다. 즉 교학 중심의 기존 불교를 극복하고 외래 종교인 불교를 중국인의 생활종교로서 승화시켜 인간의 일상생활 가운데 불교의 참정신을 찾아보려고 한 대중적 불교운동이였다. 따라서 그들은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표방하며 불타의 근본정신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수도 중심이 아닌 기주쌍봉산과 강서 및 호남 등 지방의 山寺에서 그들의 사상을 선양해 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선종이 당대불교사에 있어서 하나의 종파로 형성되기 시작한 원동력은 선이 수도에 진출하여 중앙귀족 및 국가권력과의 결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帝都불교에서 선종의 위치가 일단 확립되자 선종은 그에 수반되는 자파의 宗源을 기술한 역사서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기선종의 史書류들은 각파가 중앙왕실과 결합될 때마다 새롭게 주장하는 자파의 정통성을 왕실의 권위로써 인정시켜 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자파의 입장에서 편집한 것이다. 당·측천무후때 북종선의 神秀, 慧安, 玄?의 入內說法을 계기로 편집된 것이 『전법보기』와 『능가사자기』이며, 안산의 난을 전후하여 남종계의 荷澤神會와 南陽慧忠, 司空山本淨 등의 입내설법을 계기로 하여 曹溪慧能이 달마계 선종의 제 6조의 인물로 인정된다. 신회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 『조계대사별전』, 『육조단경』 등은 오로지 그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사천의 보당종 역시 홍인의 제자 資州智詵의 입내설법을 주장하면서 이색의 전의상속설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역대법보기』이다. 강서의 마조도일 문하의 興善惟寬, 鵝湖大義, 章敬懷暉 등의 유력한 제자들의 입내설법과 활약에 의해서 육조혜능-남악화양-마조도일로 이어지는 새로운 조사선의 법통설이 확정되게 된 것이다. 이런 마조계 홍주종의 조사선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편집된 것이『보림전』이다. 이와 같은 선종역사서나 조사어록의 출현으로 부처님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던 위경은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조사가 부처의 지위와 동등해지면서 어록을 통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후 선종사에서는 많은 조사어록이 나타나게 된다. 어록은 평상의 일상적인 대화나 이야기를 꾸밈없이 들은 대로 기록한 것으로 경전에 대한 훈고주석을 벗어나 곧바로 경전의 정신을 일상생활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실천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각 파들은 중앙권력과 연계되어 자파야말로 달마계의 정법의 상속자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그 근거로서 새로운 자파의 전법상승계보와 선사상을 명확하게 내세우며 기존 종파의 세력에 대항했다. 신회의 남종은 종래의 북종선에 대항하여 대운사의 종론으로 도전하여 새로운 전의설과 돈교의 반야주의적 선사상을 주장했다. 또 무주계 보당종의 경우는 신회가 주장한 남종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그의 그 입장을 뛰어넘기 위해 이색의 전의설을 창작했다. 또한 금릉우두종 이러한 남북이종의 입장을 초월하려는 제 3의 입장으로서 사조도신하의 분파를 강조했다. 그들은 삼론종의 반야사상을 근거로 해서 無心의 사상을 주장했다. 이런 초기선종의 법통설과 선사상은 안산의 난 이후 마조계 홍주종의 선장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종합되어 서천·동토의 전등계보설이 『보림전』에 이르러 완성된다.

 

  이런 역사를 통해 형성된 전등계보설에는 여러 선적의 비교를 통해 많은 조작과 과장이 난무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 계파는 단순히 자파의 전통성을 강조하는 법통설의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존의 선사상을 능가하고 극복하기 위한 자파의 독자적 선사상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이런 선사상의 발전 역사야 말로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달마의 선사상은 한마디로 말해 大乘禪이다. 도선은 『속고승전』 권20 習善篇總論에서 달마의 선법과 행화에 대해 ‘大乘壁觀 功業最高’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 달마의 선을 虛宗이라고 특색 지우는데 허종이란 반야의 근본의이며 반야사상에 의한 대승선이라는 의미이다. 달마는 대승선인 허종의 실천행의 입장을 벽관의 실행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친설로 추측되는 『二入四行論』에 의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논의 기본구조는 入道의 要門으로서 理入과 行入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란 진리가 진리인 원리이며 행이란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이다. 曇林은 달마의 이입에 대해 “경전에 의거하여 불교의 근본대의를 깨닫고 일체중생은 범부도 성인도 모두 똑같은 진성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단지 범부는 객진에 뒤덮여져서 그러한 진성의 본질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달마의 이입설은 어떤 특정의 경전을 규정하지 않고 어떠한 경전이라고 상관없으나 단순한 경전의 교상이나 문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타가 가르친 근본적인 종지를 스스로 깨닫고 알게 하는 실천불교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입의 실천을 위해 달마는 벽관이라는 독특한 선법을 창시했다. 송의 宗鑑의 『禪門正統』 권8, 「禪宗相涉載記」의 보리달마장에는 ‘如是安心 謂壁觀也’라고 한 뒤 그 밑에 ‘客塵僞妄 不入曰壁’이라고 주기하고 있다. 즉 벽관이란 외부로부터의 모든 객진 번뇌와 허망이 들어갈 수 없는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과 통일인 것이다. 마음이 장벽과 같이 自心을 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心不起의 상태인 것이다. 거기에는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과 분별이 모두 탈락하여 정적한 마음, 순일무잡한 상태를 말한다. 宗密은 달마의 벽관을 禪源諸詮集都序에서 ‘達磨以壁觀 敎人安心 云外止諸緣 內心無흘 心如牆壁 可以入道 豈不正是坐禪之法’라고 밝히며 벽관이야 말로 달마이래의 올바른 선법이라고 주장한다. 달마는 妄을 버리고 본래의 진실에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벽관이라는 구체적인 실천행을 제시했고 그 본래의 진실이란 소위 자성청정심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벽관과 더불어 『이입사행론』에서는 行入에 대해 報怨行, 隨緣行, 無所求行, 稱法行이라는 네 가지 실천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보원행이란 현실의 모든 원한과 증오, 고뇌라는 것은 전부 전생 숙업의 과보임을 관찰하고 참고 받아들여 그 원한에 대해서는 인간본래의 도에 힘쓰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연행이란 인연에 따라 겪는 고통과 행복은 전부 인연에 의한 것이며 그 인연이 다하면 모두 허무하게 되는 사실을 관찰하여 順과 逆의 諸緣에 임하여 진리의 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무소구행이란 법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나 사물에 집착하는 것을 중지하고 一切皆空의 진리를 깨달아 탐착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실천행이다. 칭법행이란 자성청정심의 이치에 계합된 삶을 만드는 실천행으로 공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공의 실천으로 달마는 인색과 집착을 떨쳐버리는 공사상의 실천행인 보시바라밀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달마의 이입사행설과 벽관은 대승의 공의 논리를 수행자가 매일의 평범한 생활상에서 실행할 수 있는 마음 자세와 실천덕목들을 설한 것이다.

 

  능가종은 『능가경』에 의거한 달마-혜가계의 후예를 자임하는 소위 능가사들의 일파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달마로부터 시작되는 실천불교의 참정신을 계승하고 있는데 『능가경』의 사상은 이들의 선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실제로 『능가경』은 달마의 선법과 거의 관계가 없는 전등사가들의 시대적 요청이였으며 실제 능가종의 사상은 반야경전에 의거하고 있다.『능가경』에는 진실은 문자를 이탈했으며 문자에 의존하지 말고 뜻에 의거해라는 말이 곳곳에 설해져 있다. 이런 一字不說의 주장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 것은 모두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법보기』나 『능가사지기』에서는 自覺聖智를 능가경의 중심사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각성지란 自內證의 聖智의 증득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獨一靜處에서 自覺觀察하여 일체의 내외 망상을 여의고 여래선에 드는 것이다. 여래선이란 여래지에 들어 자각성지相의 三種樂에 머물며 중생을 교화하는 불가사의한 行化를 말한다. 자각성지는 선종에 있어서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독일정처는 그러한 자각의 실천적 요소인 것이다. 이런 『능가경』의 사상은 초기 선종에 수용되어 신회는 여래선사상을 가지고 남종선의 內證으로 주장하고 있고 마조도일은 佛語心을 宗으로(부처의 말은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하는 새로운 조사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동산법문은 도신과 홍인이 쌍봉산에서 開演한 선불교를 가리킨다. 도신의 선사상은 능가사자기 도신 전에서 『문수설반야경』의 一行三昧에 의거했다고 전한다. 『문수설반야경』에서는 일행삼매란 법계가 한 가지 상이며 법계를 繫緣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신의 이런 일행삼매는 이와 달리 『대승기신론』에 의거하여 마음을 살피고 확인하는 근원적인 일심의 깨달음의 성격을 가진 새로운 일행삼매를 제시한다. 즉 일행삼매의 좌선법이 자신의 청정한 불성을 보고 깨닫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행삼매의 좌선에 대해서는 도신의 저술인 『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 잘 나타난다. 그는 일심의 근원을 깨닫는 실천행으로 知心體, 知心用, 常覺不停, 常觀身空寂, 守一不移라는 5종의 방편문을 설하고 있다. 지심체와 지심용은 본원청정한 마음, 그 마음의 근원과 작용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상불각정은 그 마음이 움직여 한 순간도 정체하는 일이 없는 것이라는 마음의 상태를 설한 것이다. 상관신공적은 자기의 주체가 무자성공임을 관하고 심신과 내외를 통일할 때 널리 법계에 골고루 미치며 더욱이 일체 존재에도 장애하는 것이 없어진 것을 말한다. 수일불이는 動과 靜에 항상 주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불성을 밝게 보도록 하여 빨리 선문에 들게 하는 방법을 설한 것이다. 이처럼 심의 체와 용, 그리고 그 마음과 경계, 마음의 본질 등을 설하여 배우는 이에게 올바른 인식을 하게 하고 또 그것을 자기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실천문으로서 수일불이를 설하고 있다.

 

  도신은 특히 일행삼매의 실천과 좌선의 방법으로 수일불이를 제시하고 있다. 수일불이란 空性의 눈을 가지고 주의하여 一物을 관하며 낮과 밤의 구별 없이 오로지 전정력을 쏟아 항상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일물이란 바로 자성청정심을 말한다. 도신은 수일불이의 가르침을 따라 실행하게 되면 민연하게도 마음이 저절로 안정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入道安心의 구체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달마가 말한 안심의 가르침과 거의 같은 입장이며 달마의 벽관을 수일불이의 실천행을 재편하여 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도신의 수일불이는 북종계 선사상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산법문의 도신과 쌍벽을 이루는 그의 제자 홍인의 선사상은 그의 저서 『守心要論』에 잘 나타난다. 그 중심사상은 守心 혹은 守眞心, 守本眞心의 설법이며 그것은 홍인일대 선사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홍인은 수심의 一法이야말로 열반의 근본이며, 입도의 要門이고 십이부경전의 宗이 되는 것이며 삼세제불의 祖가 된다고 강조한다. 수심이란 자기의 청정한 불성을 확인하고 잘 지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수심의 실천 방법으로 『관무량수경』에서 설하고 있는 16관법중의 최초인 日想觀과 수심을 결합, 홍인 독자의 수심의 좌선법을 설하고 있다. 즉 一日想을 관하도록 하는 것과 같이 마음에 一字를 관하고록 하고 있다. 여기서 일자란 근원적인 진리이며 일체망념이 없어진 평안스러운 진심의 상태인 것이다.

  홍인은 수도의 근본은 불생불멸하며 분별도 없는 자기의 본래 청정한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자성성정심이 바로 本師이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念하는 것보다 수승하다고 설한다. 이런 自性本來淸淨心과 佛性思想은 수심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 홍인의 사상은 철저한 자심본래청정의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며 이런 선사상의 사고는 제자 혜능계의 남종선 自性開顯의 돈오선의 사상적 바탕이 된다. 또한 홍인의 수심론은 도신의 일행삼매의 좌선과 수일불이의 선사상을 계승하여 더욱 한층 발전시킨 것임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동산법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좌선과 작무를 생활화 했다는 점이다. 천태지의나 현장, 불공 등의 고승들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 원조나 보호를 받지 않고 수행승들의 작무와 노동으로 자급자족의 생산불교가 탄생한 것이다. 도신의 경우 500여명, 홍인의 경우 1000여명이 산사에서 좌선과 작무를 병행해 갔다. 물론 지방 귀족과 도속들의 참예와 공양은 있었지만 이런 경향은 이후 조사선의 일상생활속의 불교운동의 원류가 된다.

 

  북종의 신수의 선사상은 『觀心論』과 『大乘無生方便門』에 잘 나타난다. 신수는 『관심론』에서 대승경전의 해석을 경전의 의미에 따르지 않고 실천적인 입장에서 내성에 맞추어서 해석한 觀心釋의 방법을 쓰고 있다. 그는 觀心一法이 모든 불법수행의 요체이며 일체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며 일체법의 唯心의 소생이기에 만약 마음을 요달하면 만법은 모두 갖추게 된다는 了心修道를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요심은 자심을 깨닫는 것으로 金剛佛性인 자심을 깨닫는 것이다. 신수는 일체 선악이 모두 이러한 자심에 의한 것이며 심외에 따로 구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신수의 관심일법은 스승 홍인의 수심의 교설에 의거하여 출발한 사상이며 이를 계승하여 한층 더 발전시킨 실천사상이다. 신수의 관심은 수심보다도 한층 적극적인 일심의 실천이다. 관심은 본래 자성청정한 금강불성의 자심을 요달하는 가장 구체적이며 자각적인 실천사상이다. 그는 홍인의 『수심요론』의 말과 『열반경』의 일체중생 개유불성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금강불성의 입장으로 불성이 무명에 뒤덮여 있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다고 설한다. 신수는 불성은 즉 覺性이라고 하여 관심일법에 의한 본래청정불성을 자각하고 또 타인에게 깨닫게 하여 지혜의 명료한 것을 깨달으면, 즉 해탈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승무생방편문』에서의 중요한 사상은 心不起이다. 이는 북종선의 기본 사상으로 大乘無生의 입장이며 즉 자성청정의 원리를 가리키고 있다. 『대승무생방편문』에서 보살계의 수계의식을 시작으로 좌선의 실천으로 진행하는 것은 심불기라고 하는 북종선의 실천사상의 입장을 보여준다. 대승보살계의 근본정신은 타의가 아닌 자발적인 자각이다. 이러나 자각과 자기비판의 구도심을 곧바로 심불기의 좌선의 실천행으로 돌입하게 하는 북종선의 보살계의를 응용한 행화방법은 효과적인 것이다. 이런 방법은 남종은 물론 정중종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바로 離念인데 이는 바로 佛의 본질이며 깨달음의 상태를 不動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종선의 실천요체로 표현된 중심사상이다. 이념은 청정법신을 看하는 것, 청정본각을 看하는 것이며 이념과 看이 하나가 되는 것을 주안으로 하고 있다. 看이란 깨달음의 실천을 말한 것이며 이념이란 그렇게 간해 본 覺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념은 앞에서 말한 심불기의 세계를 一句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신수계의 북종선은 동산법문의 일행삼매로 주장된 좌선의 실천과 수심설을 한층 더 강화하여 허공과 같이 無物이며 청정한 淨心體를 간하라고 주장하는 淸淨禪을 확립하고 있다. 청정선에서 ‘간하여 한 물건도 없는 것을 간하라’하고 ‘시방세계를 透看하니 청정하여 一物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본래청정한 淨心의 體를 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북종선에 대해 신회는 ‘住心看淨’이라고 요약하여 비판하고 있다.

 

  신회는 대운사 무차대회에서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을 통해 북종은 달마의 방계이며 그 교설이 방편법문인 점교라고 하며 이는 우둔한 이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비판하고 했다. 신회는 신수가 ‘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하도록 가르치는 것에 대해 그 작의성을 비판한다. 이어 『유마경』의 ‘不於三界 現身意 是爲宴坐’이며 ‘心不住內, 亦不在外, 是爲宴坐, 如此坐者, 佛卽印可’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북종의 좌선은 보리를 장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신회는 宴坐를 좌선방편을 빌리지 않는 남종돈교의 사상적인 근거로 삼고 있다.

 

  신회는 달마의 가르침은 여래선인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본래구족하고 있는 무루지를 개발하고 모두 佛智見을 열러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종선의 좌선방편이나 명상의 정신집중이나 관심주의는 달마의 바른 뜻이 아니며 무념의 근저에 있는 마음의 자각을 중시했다. 그래서 좌선을 정의하길 좌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요, 선은 자기의 본성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몸을 앉게 하여 마음의 움직임을 멈추어 선정에 들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念不起를 좌로 하는 것은 즉 無念의 입장인데 신회가 주장하는 무념은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見本性은 見性을 말하는 것으로 자성의 자각, 즉 깨달음을 의미하고 있다. 신회는 좌선관심의 방편을 빌리지 않고 단도직입하여 일시에 견성하여 깨달을 것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남종선의 실천사상으로서 頓悟見性禪을 제시했다. 그는 먼저 돈오하여 불성을 보게 되면 지혜는 자연히 점차로 증장하게 된다는 頓悟漸修의 선사상을 중국선종사상 최초로 주장했다. 이런 신회의 돈오선은 당시 선종각파의 새로운 선사상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선사상사의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우두종의 선사상은 空宗과 泯絶無寄宗으로 대표된다. 공종이란 우두종의 별칭으로 般若皆空을 종지로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이들은 삼론종계 출신인 우두법융을 초조로 하며 삼론종의 반야사상에 자파의 선사상적 근거를 구했다고 보인다. 남종의 반야선의 입장을 無心으로 한층 더 심화시킴으로써 자파의 독립을 겨냥했고 絶觀의 선사상을 주장했다. 절관은 『絶觀論』에서 나온 사상으로 絶觀忘守란 本來無心하기 때문에 관할 마음도 없고 지켜야 할 마음도 없다는 것으로 觀心의 법을 超絶하고 守心의 법을 버려야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절관이란 『유마경』에서 말하는 ‘不觀是菩提’의 입장이며 철저한 반야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민절무기종이란 것은 일체존재가 부정한 空寂임을 종지를 삼는다는 의미이다. 원래 空寂하기 때문에 佛도 중생도 법계도 번뇌도 모두 몽환과 같다는 것이며 佛도 법도 없고 일체가 迷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요달한다면 本來無事인 마음은 기댈 곳도 없어 전도망상을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반야진공관의 실천법이며 철저한 부정행이고 또 그 부정까지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관행이기 때문에 반야의 知가 전재되고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淨衆宗의 無相의 선사상은 引聲念佛과 無憶, 無念, 無忘이라고 하는 三句가 그 중심이 된다. 『역대법보기』에 전하는 그의 설법은 먼저 인성염불을 하여 이성의 숨을 전부 자 내뱉게 하고 목소리가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고 없을 때 기억을 없애고 생각을 없애어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억이 바로 戒이며, 무념이 定이며 무망은 바로 慧라고 말한다. 이처럼 무상의 중심사상은 無念이며 念不起를 그 근거로 하고 있다. 무념은 삼학을 구족하고 있으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 계정혜의 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념설은 신회의 돈오선에 영향을 받았다. 무상의 삼구 역시 신회의 자성 삼학과 유사하지만 空寂知의 철학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삼구의 실천으로 전개하고 있는 삼학이다. 즉 신회의 삼학설에서 한층 더 발전하여 철저한 무념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삼구와 삼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무상은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인성염불로 도속을 교화했기에 그를 염불선계의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이는 정통의 觀念念佛이나 口稱念佛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제시한 삼구의 心要說法과 직결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무념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행이였다. 종밀은 인성염불을 일자염불과 유사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一字念佛이란 처음 한 글자를 선택하여 목소리를 길게 뽑으면 佛을 염하며 그리고 목소리가 점차 미세하고 또 소리가 없어지게 되어도 佛만을 念하는 방법이다.

 

  보당종 무주의 선사상은 무념설로 이는 신회의 무념설을 계승하여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그의 무념은 즉 무분별의 입장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상의 원천을 보리달마로부터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무주는 무상의 삼구설법과 삼학설을 무념의 일구로 귀결시키고 철저한 무분별의 입장에 서 있다. 이런 철저한 무분별로 인해 종밀은 그의 선사상을 滅識이라고 평한다. 왜냐하면 그는 종래의 수계의식을 무시하고 예식이나 독경, 사경 등 전통적 종교의식을 행하지 않고 모두 망상이라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체의 교상을 전부 부정하고 아무런 구속도 없는 철저한 무분별로 無心에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무애의 지나친 돈교를 주장한 보당종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으며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이런 중국선종의 선사상은 마조도일에 이르러 祖師禪으로 자리 잡는다. 조사선은 마조도일의 유명한 平常心是道와 卽心是佛이라고 하는 명구가 나타내 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일상생활에 철저하면서 그 가운데 불교의 참된 정신을 찾으려는 일종의 생활종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마조는 도란 수행을 필요하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만 염오하지 않도록 하라고 제기한 뒤 사람들이 수행하여 깨달으려고 한다거나 부처가 되려고 하는 조작과 분별심은 모두 생사의 마음으로 본다. 도란 그러한 조작과 분별심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주장한다. 평상심이란 즉 보통 예사의 마음인 것이며 소박한 일상의 마음으로 차별적이고 분별적인 작위성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을 말한다. 이런 평상심은 인간의 본심은 원래 자성청정심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조는 인간의 本源自性淸淨心의 주장을 평상심이란 말로 바꾸었다. 그리고 종래에 이상적으로 생각해 왔던 도를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현실생활 가운데 구현하게 하는 조사선을 확립했다. 하지만 마조는 修證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수증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단지 오염되지 않는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수행에 사로잡히고 집착되는 않는 수행인 것이며 본래청정한 자성을 증오하는 것이다.

  마조는 본래성에 입각한 조사선의 실천에 대해 보살행을 제시한다. 그는 일체의 분별적인 차원을 넘어선 보살행을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생활의 현장에 응용하여 현실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조계의 홍주종에서는 인간의 일체의 행위나 언어, 동작 모두가 불성의 전체작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임제의 선사상으로 계승되어 어디에서나 걸림 없는 절대 자유인,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無事의 귀인인 無位眞人으로 나타난다. 또 백장은 선원청규를 제정해 종래의 계율을 혁신하여 노동을 수행으로 승화시켰다. 이처럼 즉심시불을 宗으로 하고 평상심시도를 일상생활 곳에서 실행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인간의 종교가 바로 조사선인 것이다.

 

  이러한 초기중국선종의 선사상은 반야사상과 불성사상, 유심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깨달음이란 인위나 조작을 떠난 본래 청정한 공의 자성을 보는 것이며 본래청정한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자성을 현실생속활에서 회복하게 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당대 교학위주의 기존 불교에서 자칫 소홀해 질 수 있는 불교의 참정신을 회복하고자 한 사상운동이다. 선종의 각 파들은 이런 취지를 함께 공유하고 있지만 시대 및 지역에 따라 생겨나는 상대파의 사상적 한계에 대해서 비판하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지금의 한국 선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극복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초기중국선종의 성립사의 고찰은 나의 수행에 좋은 거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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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8.09 01:40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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