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章 광란(狂亂)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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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가 온통 검푸른 색으로 가득한 가운데 좀 더 짙
은 색깔을 띈 물체가 전면에 나타났다.
옥녀도(玉女島).
옥녀도는 바위섬이다. 섬의 형상이 멀리서 보면 한 무릎을
세우고 앉은 여인의 형상과 닮아서 옛부터 옥녀도 혹은 옥녀
암이라 불러왔다. 물이 없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無人
島)지만 해남도와 해안소를 연결해주는 여정표(旅程票) 역할
을 충실히 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전인미답(全人未
踏)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해적들의 임시 정박지(碇泊地)이기도 했
던 모양이다. 실제로 옥녀도에는 배를 댈만한 자연 선착장이
있다. 또한 오늘과 같이 바다 한 가운데서 도저히 어쩔 수 없
는 폭풍을 만나는 경우에는 임시 거처 역할도 해준다.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잃은 선원들에게는 사막의 녹주(綠洲: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
옥녀도까지만 가면 해일을 시달리는 것은 피할 수 있다. 설
혹 배가 난파되더라도 이삼 일만 굶주림, 갈증과 싸우면 지나
가는 배가 구조해 주리라.
"복창! 후돛을 올려라!"
"후돛을 올려라!"
있는 힘껏 목청을 돋군 천해원들은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복창! 후돛을 활짝 펼쳐라!"
"후돛을 활짝 펼쳐라!"
앞돛을 활짝 펼치니 배는 그야말로 날아가는 화살처럼 바다
를 질주했다.
폭풍에게도 구역(區域)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내
쳐 달려 구역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폭풍은 바다
전반에 걸쳐 폭넓게 몰아친다.
장대비는 그칠 줄 모르고, 굉음을 동반한 번개가 내리칠 때
마다 송장처럼 창백해진 옆 사람의 얼굴이 비쳐진다.
전속력으로 달려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뒷돛에서 돛폭을 활짝 펼치자 배는 걷잡을 수 없는 속력으로
치달렸다.
"이제는 어떻게……?"
할 일이 없어진 천해원은 이제야 공포를 맛보기 시작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가만히 서서 미친년 머리처럼
헝클어진 바다를 보고 있자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공포가 스
멀스멀 피어올랐다.
"객창으로 들어가시오."
"……?"
"하하!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은 것은 천
명……"
그 때였다.
"아니! 남은 것은 천명이 아니라 조정술이겠지."
적엽명의 말허리를 자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범위였다.
뒷돛에 남은 천해원도 할 일이 없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해원들을 객창으로 들여보낸 후, 앞돛으로 건너온 것
이다.
범위를 본 천해원들은 가벼운 목례(目禮)를 던지고 슬금슬
금 자리를 떴다.
해남파 무인들은 경이의 대상이었다.
비위를 건드려서도 안 되고 결례를 범해서도 안 된다. 생활
의 터전이 모두 해남파와 관계가 있고,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
니 어쩔 수 없다. 천해원이라는 꼴 같지 않은 일도 해남파 눈
밖에 나면 할 수 없다. 선주(船主), 선장(船長)…… 그 누구
를 막론하고 해남파의 말을 거슬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적엽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해원들과는 허허롭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범위가 다가오
자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천해원들과 같은 의도에서는
아니었다. 그가 범위를 보는 눈길 속에는 '무시'라는 감정이
담겨 나왔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만이 읽을 수 있을 만큼 찰
나적인 감정이었지만.
"남풍(南風)이군."
범위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적엽명
의 바로 곁에 놓인 아딧줄을 잡아 남풍을 잘 받도록 조정했
다.
손놀림이 능숙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딧줄을 붙잡고 살아
온 사람답게. 강풍을 담은 돛조차 그에게는 어린아이 장난감
에 불과한 듯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시피 했다.
"여기가…… 끄응! 어디쯤일 것 같나?"
돛폭이 반월처럼 둥그렇게 휘어지자 범위는 아딧줄을 물레
에 고정시키며 물었다.
"……"
역시 적엽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범위가 오자 자신은 할 일이 없다는 듯 고물 쪽으로 걸어가
기 시작했다.
범위는 그의 뒤를 바짝 따르며 계속 말을 붙였다.
"우리 같이 해남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는 나반(羅
盤:나침반)이 필요 없지."
범위는 손을 들어 거무스름한 물체를 가리켰다.
"옥녀도야. 이제 절반쯤 왔나? 후후! 모순되게도 폭풍 때문
에 빨리 온 거야."
적엽명은 예비 돛이 있는 곳으로 걸어와 탈진한 듯 축 늘어
져 있는 늑대를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방갓을 깊숙이 눌러
쓴 후, 예비 닻으로 몸 전체를 감싸버렸다.
범위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뒤따라왔다. 그리고 바닷물에
흥건히 젖은 예비 돛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뱃일이 능숙하던데…… 어디서 배웠나?"
"……"
적엽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었다.
예상했던 반응.
범위는 왼손으로 적엽명의 오른쪽 어깨 뒤, 거골혈(巨骨穴)
을 슬쩍 짚었다.
거골혈(巨骨穴)은 어깨뼈와 양팔의 뼈가 만나는 지점으로
대마혈(大麻穴)이라고 한다. 점혈(點穴) 당하면 일시간 팔과
반신이 마비되어 무력해진다.
인체 삼십육(參拾六) 대혈(大穴) 중 하나로 쉽게 내줄 수
있는 혈도가 아니었다.
적엽명은 몸을 잠시 움찔했을 뿐 손아귀를 밀쳐내지 않았
다.
'무공을…… 모른단 말인가?'
범위는 직접 눈으로 봤으면서도 의아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인이라면 아무 저항 없이 한쪽 어깨를 빌려주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고수? 정작 고수라면 몸을 움찔
거리지도 않을 테고. 늑대를 껴안고 있는 사내가 움찔거린 것
은 혈도를 짚인 사람이 본능적으로 꿈틀대는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었다.
"누구나 무시당하는 것은 싫어하지."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너는 누구냐? 이름은? 직업은? 가족은? 고향은? 해남도에
들어가는 이유는?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사연은 어때? 아무거
나 좋아. 하나라도 시원한 답을 듣고 싶은데?"
"……"
"대답하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할거야. 너도 무공을 익혔으
니 알겠지만 내 손에 힘이 가해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
측할 거야. 그건 무조건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군."
범위는 자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다. 해남오지가 되기 위해서 서른 두
번의 비무를 치를 때도 항상 여유만만 했다. 그런데 지금 거궐
혈까지 붙잡고 있는 유리한 위치에서 긴장을 느끼고 있다니.
범위는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로 인정이라고는 한 올도 담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만약 대답을 하지 않거나 섣부른 행동을
한다면 끝을 보겠다는 심산으로.
'반드시 정체를 알아내고 말 거야.'
* * *
거의 한 시진동안 사정없이 휘몰아치던 폭풍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옥녀도가 검은 형태를 드러낼 무렵 먹물 같던 바다가 짙은
회색으로 바뀐 것이다.
잔물결은 여전히 출렁거린다. 하늘은 아직도 먹구름이 가득
했고, 금방이라도 또 다시 폭우를 쏟아 부을 듯 심술궂은 표
정이다. 여름 날씨 답지 않게 바람도 세차다. 냄새도 비릿하
다. 바다 한 가운데서 맡는 바람 냄새는 늘 비릿하기 마련이지
만 폭풍을 잠재한 바람은 냄새가 유독 강하다.
"선장이 실종되었다고?"
부선장 문장(文漿)은 난감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실종되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 된다.
범선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선장실에 있던 사람이 죽다니.
유일한 추측이라면 주돛이 부러졌을 때, 다급한 마음을 이
기지 못하고 삼판으로 뛰어나갔을 것이라는 가정(假定). 그렇
다면 수없이 덮쳐온 해일 중 하나에 휩쓸려 끌려 들어갔으리
라.
그래서 파도가 맹위를 떨칠 때는 삼판에 나가지 말아야 한
다.
나가봤자 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자칫 파도에 휩쓸리기 십
상이다. 선장은 선장실에서 돛대에 몸을 묶고 있는 천해원을
조정하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을.
"망령이 났나?"
사태가 급박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장이 알고 있는
선장 추형은 배가 침몰하는 순간까지도 위험을 무릅쓰고 삼판
에 기어나갈 사람이 아니다. 절대 확신한다. 그럴 시간이 있
으면 난파를 대비하여 거루나 구급식량을 챙길 사람이었다.
"선장님 외에 또 실종된 사람은 누구냐?"
"천해원 네 명하고 소예가 안 보이는 데요."
"음……! 천해원들이야 파도에 휩쓸렸으니 확실히 죽었고……
그 계집애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다 뒈진 거야? 객창에 얌전히
쭈그려 앉아있지 않고……"
문장은 희생자가 몇 명되지 않는다는데 다소 안도하면서 해
도(海圖)를 들여다보았다.
"바람을 잘만 받으면 되는데……"
해남도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옥녀도에 머물 것인지 결
정하기가 쉽지 않다. 선장 같으면 무조건 앞으로 나갔을 터이
다. 파도가 높지만 해남도에 당도할 때까지 큰 폭풍은 없을
것이라면서. 자신도 같은 생각이지만 지금은 주돛이 없으니.
"일단 정박합시다."
대부(大副:일등항해사)가 옆에서 겁먹은 얼굴로 의견을 제
시했다.
옥녀도는 해안소와 해남도의 중간이다.
나아갈 길과 돌아갈 길이 절반씩 남은 셈이다.
"아냐. 아까 삼판에서 돛을 조정하던 늑대사내를 모셔와.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해남파 무인들은……?"
"하필이면 해남파 무인이 타고 있으니…… 도와주지도 않으
면서…… 거참! 할 수 없지. 의견을 물어봐. 네 명 전부."
"쳇!"
대부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상실로 향했다.
"음……! 선장이 실종되다니……"
"오셔서 의견을 개진해 주십죠."
"아니오. 각자 맡은 몫이 있는 법이니…… 부선장이 내린
결정에 따른다고 전하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바다에서는 바다사람이 왕인 법이지. 나는 괘념치 말게."
깨끗한 갈색무복으로 갈아입은 외관영주 석두는 머리를 단
정하게 묶는 중이었다.
시중드는 시녀는 소화(少花)이지만, 그녀는 객창 안에 없었
다. 석두가 시중드는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객창에 들어서
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면 다른 시녀로……'
'아니다. 시중 받는 것이 껄끄러워서 그러니 마음에 담지
마라. 난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거든.'
'그러세요? 그럼……'
소화는 속으로 비웃음을 던지며 물러갔다.
사내들은 으레 그렇다. 처음에는 군자(君子)인척 의연한 태
도를 보이다가도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면 심심파적으로
담소(談笑)나 나누자며 말을 건네 온다. 그 다음은 무식한 것
들이나 배웠다는 사람들이나 모두 매 한 가지.
그러나 이번만은 소화의 예상이 빗나갔다.
석두는 차를 끓이는 일부터 의복을 챙겨 입는 것까지 모두
손수 했다. 짧은 뱃길이니 크게 시중 받을 일도 없지만 차까
지 손수 끓여 마시는 상실 손님은 처음이었다.
"그럼 그렇게 전해드립죠."
대부는 일이 의외로 순조롭게 풀린다는 생각에 절로 흥이
났다.
그는 정말 정박하고 싶었다. 선장까지 실종된 마당에 위험
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긴 죽기보다 싫었다.
"참! 그 사람 어디 있지?"
"그 사람이라뇨?"
"천해원들과 함께 돛을 조정한 사람 말이야. 늑대와 같이
승선한."
"아! 그 늑대 사내! 글쎄요……? 고물 쪽에 있는 것을 봤는
데……"
"고물?"
"예. 분명히 그리로 갔습죠."
"고물……"
석두는 뒷짐을 지고 뿌옇게 흐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무엇인가 짜릿한 것이 뱃속에서 치
미는. 절대 강적을 만난 것처럼 손끝이 바르르 떨려온. 분명
처음 만났는데도 오래 전부터 만난 것 같은 느낌.
그는 선창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흐음……! 선장이 실종? 그럼 배는 문장이 몰겠구만."
"그럽습죠. 부선장님도 뛰어난 분이긴 하지만 선장님에 비
하면……"
"옥녀도는 해남도와 해안소의 중간이야.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은데?"
"그러시다면?"
"나는 이 꼴 같지 않은 선실 하나 차지하기 위해서 은자 넉
냥을 뿌렸지. 뱃멀미는 또 어떻고? 이보게, 자네 같으면 돌멩
이 투성인 빈 섬에서 비바람을 맞고 싶겠나?"
"그, 그럼?"
"해남도로 가."
"지금 폭풍이……"
"하하! 그건 알고 출발했어.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무 조각
이라도 베어야지. 안 그래?"
"아무리 그래도 주돛이……"
눈길이 좁혀진다. 그리고 가슴을 저리게 하는 살광이 쏟아
져 나온다. 대부는 정박하자는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바다 생활 십 년이면 갈대 잎 하나로도 천 리를 간다고 들
었는데…… 그것이 광동(廣東) 선원들의 자부심이지."
"아, 알겠습니다. 그, 그렇게 전합죠."
"아니, 아니. 전하는 것으로는 안 되지. 계속 나가라고 전하
게. 꼭 나가라고."
"예……"
대부는 겁에 질려 일어섰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렇듯 반 강압적
으로 몰아붙이는 데야.
이 사내의 이름은 한광. 손속이 가장 잔인하다는 유살검이
다. 다른 무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 사내는 알고 있다. 선
착장에서부터.
소문 대로다. 부드러운 얼굴에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살살
흘리면서 하는 말이라고는 공갈과 협박이 반반씩 섞였으니.
이건 마치 계속 가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투가 아닌
가.
"참! 늑대를 데리고 승선한 친구…… 지금 어디 있지?"
하얀 무복을 입은 사내도 갈색 무복을 입은 사내와 똑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 * *
범위는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고문(拷問)을 해서라도
정체를 밝혀내기로 작정했다.
'너는 누구냐? 이름은? 직업은? 가족은? 고향은? 해남도에
들어가는 이유는?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사연은 어때? 아무거
나 좋아. 하나라도 시원한 답을 듣고 싶은데?'
물었다.
적엽명은 대답해야 한다. 속시원한 대답을. 약간이라도 미
심쩍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면 확실한 사실을 알 때까지
거궐혈을 놓지 않을 생각이다. 만약 끝까지 버틴다면 평생 팔
병신으로 살게 되겠지.
"……"
사내는 거궐혈을 잡히고도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럼 이해하게 해주지."
범위는 손가락에 삼 푼의 힘을 가했다.
삼 푼이라고는 하지만 제법 아플 것이다. 뼛골이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겠지. 내력을 가미한 힘과 범인(凡人)의 힘
과는 차원이 틀린 것을.
끄릉……!
사내의 품에서 늑대가 굴러 떨어졌다.
'아악!'
범위는 분명히 소리 없는 비명을 들었다.
사내는 제법 근골(筋骨)이 억센지 입을 벌려 소리를 토해내
지 않았지만 바르르 떨리는 몸통이 참담한 비명소리를 대신했
다.
"나는 사람을 죽여 봤다. 네 명. 모두 하나같이 고수였지.
내 손은 그런 손이야. 풋내기를 죽인다면 오점(汚點)으로 남
을 거야. 그러고 싶지 않다. 네가 누구이며 무엇 하는 인간인
지 말해. 빨릿!"
다시 일 푼의 힘을 보탰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충격이다. 옷을 헤쳐보면 멍이 들었
겠지. 무인의 손아귀란 그런 것.
사내의 방갓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비명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분근착골(分筋搾骨)의 힘을 실었어. 그런데도 참아내다니.
비명조차 삼켜버리고.'
이번에는 범위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일을 잘못 시작했다.
이런 자는 죽을지언정 마음에 내키지 않는 말을 토해낼 위
인이 아니다. 다시 일 푼의 힘을 더한다면 뼛골을 으스러질
테고, 그래도 지금처럼 태연하게 받아낼 독종(毒種)이다. 차
라리 살살 구슬려 신분내력이라도 알아내는 편이 좋았을 것
을.
범위는 도대체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에서 방갓
을 잡아챘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짚었을 뿐이다. 여태
껏 무저항으로 일관하던 사내가 방갓을 벗기려 하자 몸을 뒤
로 눕히며 일수(一手)를 쳐냈다.
타타탁……!
순식간에 칠합(七合)이 교환되었다.
"이, 이런!"
범위는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경악성이 하
나 가득 물결쳤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내가 일수를 쳐오는 순간, 거궐혈을 으스러져라 움켜잡았
건만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사내는 어깨에 기름칠이
라도 해 놓은 것처럼 슬그머니 빠져나가 버렸다.
방금 경험한 일이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범가에서 전수되는 해랑검법(海浪劍法)의 기초는 손아귀 힘
을 기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랑검법 자체가 바다에 몸
을 담고 익히는 것이라서 거친 파도를 가르는 힘이 선결되어
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력(內力)까지 원활히 유통되고,
좀 더 나아가 진기(眞氣)를 원하는 부위에 집중시키는 단계에
이르면 바위도 으스러트릴 수 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러나 범위는 그런 의문에 오래 매달릴 여유가 없었다.
사내가 쳐낸 일수.
지금도 등에서 식은땀이 자르르 흐르는 이유는 거궐혈을 빼
낸 다음 매섭게 날라 온 수공(手功)때문이었다.
곡택혈(曲澤穴), 극문혈( 門穴), 내관혈(內觀穴), 대능혈
(大陵穴), 노궁혈(勞宮穴)……
정확히 손목에서 팔꿈치 사이에 있는 혈도, 수지궐음심포경
(手之厥陰心包經)만 노리는 일격은 지공(指功)도 수공도 아니
었다. 언뜻 보면 갓난아이가 손을 허우적거리는 듯한, 그러면
서도 일정한 법칙이 있는 공격이었다.
처음 보았다. 그런 권법(拳法)은.
"무슨…… 무공이냐!"
한참이 자난 후,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범위가 냉랭
하게 물었다.
"……"
사내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처박은 채
말이 없었다.
끄르릉……!
삼판에 나뒹군 늑대가 비실거리며 일어나 사내의 무릎 사이
를 파고들었다.
범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둘 중에 하나는 죽는다.'
사내는 자신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절대고수가 분명했
다. 병장기는 지니고 있지 않지만 권법(拳法)에 대한 조예가
놀라우니 검법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경지에 이르러 있으리라.
스르릉……!
섬칫한 소리와 함께 손잡이에 은회색 진주 다섯 알이 박혀
있는 오진검이 뽑혀졌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인데도 검날은 오뉴월 뙤약볕에 반
사된 듯 시퍼런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그는 자신이 왜 검을 뽑는지도 알지 못했다.
사내의 정체를 알려고 했던 의도나, 유소청과 무슨 관계인
지 궁금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무조건 사내와 싸워야
한다는 일념(一念)뿐이었다. 그리고 생(生)과 사(死).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것인가.
"싸우기 싫다."
드디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
묻은 채.
"해남파 무인은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필요 없는 살상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대의 눈에는 살기가 뻗
치고 있다. 왜인가? 왜 나를 죽이려 하는가?"
순간, 범위는 쇠망치로 뒷머리를 후려 맞은 충격을 맛봤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왜 검을 뽑은 거지?
처음부터…… 그를 심문할 권리조차 없었던 것을.'
무인 대 무인의 비무(比武).
그것만 생각했다. 일수를 교환하고 난 다음 한순간, 그것인
줄 착각했다. 검을 뽑고, 싸움을 강요하기에는 아무런 명분이
없다. 비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일반적으로 비무를 요청하면
응해주는 것이 무림인의 도리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
니다.
범위는 혼란스러웠다.
그 때였다.
저벅! 저벅! 저벅……!
삼판에 고인 물이 밟히는 소리, 익히 귀에 익은 발걸음 소
리가 들려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