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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의 시간들(2)
8월의 마지막 날, 달력 한 장을 뜯어내었다. 9월의 달력이 눈앞에 펼쳐졌다. 새로운 달의 신선함이 깊은 숨을 들이키는
시간과 공간을 보듬어 안고 깊이 폐 안으로 들어온다.
그 시간들이 어떠한 사연을 들고 올지 몰랐다.
지구의 온난화 때문인지 9월인데도 모기가 누운 잠자리를 몹시 소란스럽게 만든다. 지나간 세월이 무슨 요술을 벌였는지,
정신을 흐트려버리고 잔고가 영원인 통장을 들고 벌벌 손을 떨게 한다. 신용카드 결제금액이 찍혀있는 통지서를 멀찌기
던져놓고, 흘러가는 초침소리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두개골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로 듣고 있다.
가정을 살리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온몸을 놀란 고슴도치처럼 동그랗게 말고 얼굴을 파묻어 버리고 있다.
그날 그에게는 해가 뜨지도 않았고 달도 뜨지 않았다. 문이 삐걱거리는 바람소리를 듣고, 눈을 감으면 달이 뜨고 눈을 뜨면
해가 솟는다는 생각으로 작은 보따리를 들고 길을 나섰다.
커다란 덤프트럭이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과 자갈을 쏟아 부우면, 포크레인이 바가지 대신 커다란 정을 달고 마구 부수어댄다.
멀찌기 서있던 불도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마구 구덩이에 몰아넣는다. 산처럼 쌓였던 콘크리트와 자갈들이 깊은
땅 속에 굶주린 괴물이 삼키듯이 사라지고, 작은 돌조각들이 되어 콘베이어 벨트를 타고 땅위로 솟아올라 쏟아져 내린다.
이곳저곳 뿌연 먼지가 높은 산을 뒤덮을 듯이 솟아오른다. 저 먼지들을 잡아 땅에 가라앉혀야한다. 이 일 때문에 손에
분수처럼 솟아나는 물뿌리개가 쥐어져 있다. 물뿌리개는 출입구에 하나, 덤프트럭 하역 장에 하나,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내려오는 작은 자갈들이 쌓이는 곳에 하나, 이 작은 자갈들을 불도저가 밀어 쌓는 곳에 하나, 모두 네 곳에 있다.
일이 벌어진 곳을 바람처럼 쫒아 다니며 물을 뿌려 댄다. 쏟아지는 먼지와 튀어 오르는 흙탕물을 위아래로 뒤집어쓰며
뛰어다녔다. 저녁 무렵이면 뒤집어 쓴 방진복위에 내린 먼지와 흙탕물이 뒤범벅이 되어 잡탱이 눈사람이 되었다.
더운 날 방진 마스크와 방진복을 입고 땀을 많이 흘려 장화 안은 물이 그득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일 속에서 내 몸을 돌볼
겨를이 없다. 에어스프레이로 몸의 먼지를 털고, 방진복을 벗을 때, 땀이 고여 쿨렁거리는 물소리를 내는 장화 속에서
하얗게 부풀어 오른 발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갔다.
해가 질 무렵, 하루의 일당을 받는다. 일당은 하루 최소한의 경비를 빼고 아내가 관리하는 가정 통장에 바로 입금하였다.
직업소개소에 일 할을 떼어주고, 소개소에서 알려준 숙소에 몸을 뉘였다. 그곳이 환경은 열악하지만 어느 곳보다 싸기
때문이다. 몸을 뉘일 때, 쓰린 상처의 아픔을 느낀다. 팔다리가 쑤시고 꺾일 듯 밀려오는 어깨와 허리의 통증을 느낀다.
물을 뿌리기 위해서는 온갖 장애물을 순간순간 치워야 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을 많이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종이접기 하듯이 살고 집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얼굴, 얼굴에 쏟아지는 아내의 눈빛은 한겨울 얼음을 녹이는 따스한 봄날의 햇살 같았다.
양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손은 두꺼운 솜이불같이 포근하였다.
풍성히 차려진 밥상이 품고 있는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았다.
날이 지나고 아내에게 살아온 노력을 확인하여 주고 싶은 욕망이 생겨 통장을 보여주고 싶었다. 확인한 순간 눈이 커졌다.
캄캄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텅 비어 있었다. 손을 떨면서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통장이 거의 비었잖아.”
“쓸 때가 있어 썼어요.”
“어디에?”
“동생 아들이 이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축하금으로 주었어요.”
“아니, 당신 지금 정신이 있어? 지금 카드대금도 막지 못할 형편에 그게 말이 돼?”
“지금껏 형편 따지다가 한 번도 따뜻하게 챙겨주지 못했어요. 이제 나이 먹고 언제 해 줄 수 있을지 몰라 인생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여 해 주었어요.”
“그래도 자기 현재의 형편을 생각해서 해야지 어떻게 벌어온 돈인데 그렇게 없애 버릴 수 있어요?“
“빚을 얻어서라도 하고 싶었어요. 그나마 당신이 벌어주어 내 돈으로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생한 시간들이 초침으로 뽀개어져 온 몸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 초침들이 머리부터 찌르기 시작하더니, 가슴을 타고, 팔을 타고 발 끝가지 흘러 내려갔다. 발끝에서 되돌아온 초침이
목청을 찌르고 분노를 실어 폭발음을 내었다. 그렇게 먹던 밥상이 뒤집어졌다.
벌초하는 예초기 소리가 한 여름 매미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벼가 깊숙이 묵상에 빠질 때, 추석이 가까워졌다. 산을 돌아보아도 벌초하는 사람들이 모두 늙은 이들 뿐이다. 60대 중반을
넘어 70을 바라보는 몸을 끌고 얼마 전에 선조님과 부모님 산소 일곱 분을 벌초하였다. 그 때를 생각하며 장인어른, 장모님의
산소를 처남들과 함께 벌초를 나섰다. 그곳에 예초기를 들고 나서는 사람들은 역시 늙은 몸들이다. 장성한 아들들이 있는데,
보이지를 않는다. 나의 아들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 벌초에 가끔 같이 왔었었다. 하지만 처갓집 자식들은 한 번도 보지를
못하였다. 분명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뭉클뭉클 거품이 치솟아 올랐다.
작은 처남에게 물었다.
“아니, 군대를 갔다 온 자식이 있는데 왜 안 데려왔어?”
“아이, 아직 어린애예요. 집 사람이 위험한데 못 가게해요.”
“어리다니? 군대까지 갔다 온 놈인데 무엇이 위험해?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앞으로 누가 벌초해? 가르쳐야지. 앞으로
늙은이들이 계속 할 수 없잖아.”
“그래도 집사람이 아직 어리다고 벌초하는 데가 위험하다고 못 가게해요”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무엇인가 떨어져 목구멍을 턱 막아버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별이 까만 장막을 배경으로 부서지듯 빛을 뿜으며 박혀있다.
증기기관차 화통이 연기를 뿜어내듯 담배 연기가 입 안에서 뿜어져 별빛을 가린다.
화와 분노는 뻥 뛰기와 같다. 조그만 좁쌀이 한 순간에 손바닥만 하게 커져버린다.
‘공무원까지 합격한 놈이 무슨 어린놈이야. 벌초하는 것이 위험하다면, 이세상은 핵전쟁이다.’
‘그런 놈이 합격했다고 축하금을 보내? 그 돈으로 우리 집 개와 고양이에게 맛있는 것을 해 주는 것이 더 좋겠다.’
입 안에서 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허공에 더 짙어지고 안개처럼 덮혀 눈을 감게 하였다.
손이 머리의 분노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고 글을 써내려갔다.
‘앞으로 처갓집 식구들과 의절하겠으며, 누구도 우리 집에 오지마세요.’
잠꾸러기인 아내가 아침부터 일직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북새통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 타향에 가 있던 아들딸이
내려온다고 언제 마중 나갈 것인지 물어보며 듣고 있다. 내일이 추석이다.
밤이 어두어졌지만, 왠지 모르게 활력이 돋고 생기가 돈다. 뚱뚱한 아내가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허공에 떠서 날아다닌다.
아이들이 터미널에 몇 시에 도착하느냐며 수시로 전화하고, 손을 비비며 시간을 기다린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제트기 발진하는 속도로 달려갔다 우주선 속도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오랬만에 집 안이 가득하고
웃음꽃이 피었다. 딸이 짐을 풀고 달려왔다.
“우리 외갓집 가자. 추석 전날 항상 갔잖아. 언니가 기다린데.”
아들이 거들었다.
“아, 빨리 가고 싶어. 형은 안 오나?”
처갓집은 2남 3녀의 가정이다. 그런데 요즈음 보기 드물게 형제자매가 가까이 살아 급한 일이 있을 때, 119보다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장모님이 이른 새벽에 천천히 걸어오시어 아이들을 돌보아 주셨다.
그러다보니 처갓집 형제자매의 모든 아들딸들이 장모님의 손에서 길러지게 되었다. 엄마아빠는 모두 다른데, 옹알리때 키운
엄마는 한분이 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외가 친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통 형제자매로 살았다.
지금도 나이 30이 넘었지만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어릴 때 같이 살아온 것이 아이들에게는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이들도 세상을 닮아 가는지 만남이 나누어져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아이들이 외친다.
“아빠 빨리 가자. 보고싶단 말이야.”
“이번 추석에는 갈 수 없다.”
“왜? 옛날에는 아빠가 제일 먼저 가자고 했잖아?”
“응, 그래도 올 추석은 우리 가족끼리 지내자.”
아이들이 왜 그러하냐고 물었을 때, 천천히 느리게 말을 하였다.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모래같이, 자갈같이 거칠어진 생각들을 이야기하며,
“아빠 엄마의 생각과 시간은 너희와 다르니, 너희들은 옛날과 같이 시간을 내어 서로 만나고 함께 즐겨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
말없이 말끔히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윈도우브러시처럼 얼굴을 닦아내려갔다.
“알았어요. 엄마아빠 신경쓰지 마세요 우리가 알아서 할께요.”
가슴 속에는 기저귀 갈 던 모습만 있었는데, 세상을 이해하는 어른이 되어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벅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칼을 들고 밭에 나섰다. 한 여름부터 아웅다웅 다투며 살아온 배추가 임산부 배불뚝이만큼 포기가 차서 김장을 시작하였다.
품에 안고 나르고, 고운 소금을 뿌려 얌전하게 하여 빨간 빛이 도는 양념으로 옷을 곱게 입혀 보금자리에 차곡차곡 앉혀 주었다. 곱게 담은 김장 통을 들고 돌아서는데, 누가 손을 쳐서 떨어뜨릴 뻔하였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화단 뿐,
그 위를 지나가는 바람뿐이었다. 아내가 버무린 배추와 무를 통에 담아 김치 냉장고에 채우고 나누어줄 통을 따로 차곡차곡
쌓아 놓은 다음,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바라보았다. 돌아서는 발꿈치를 따라 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자기야, 형님 불러서 겉저리로 같이 점심 먹으면 어때?”
아내는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한동안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하지마요, 나 힘들어요. 밥 해주기도 힘들고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다 할 수 있어요.”
“그래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이번 기회가 좋을 것 같은데....”
“생각이 있으면 다음에 하세요.”
아내는 김장 버무리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힘이 들어서 느려져야 할 시간인데, 손 돌아가는 속도가 비행기
프로펠라같이 돌아갔다. 거울이 따로 없었다. 속이 훤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흥, 당신 처갓집과 의절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무슨 말이야? 밴댕이 속대가리 같으니라고...’
아내의 손길은 화가 난 듯이 양념을 배추에 치대고 있다. 부드럽게 버무려야 할 것을 휘두르고 있다. 한 마디 말실수가
모든 것을 망치게 하고 있다. 자격지심에 김치가 담긴 통을 더욱더 깨끗이 닦아 자리에 가져다 놓고 돌아서는데 콧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집에 누가 오셨나?’
문 밖에 나가 둘러보았는데 아무도 없다. 말 한마디에 무안함을 느껴 담배를 물고 연기를 뿜어대는데, 또 콧노래가 들려온다.
그런데 집 안에서 들려온다.
‘집 안에는 아내 밖에 없는데...?’
초스피드 자동으로 온몸이 집 안을 향하여 돌아섰다. 그곳에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김장을 버무리고 있었다.
‘아! 화를 내며 말을 하였지만 마음은 달랐구나!’
다음날, 아직 해를 맞이하지 않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새벽.
기도와 묵상을 마치고 불을 밝힌 그곳에 곱게 잠든 아내의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볼이 불그스레하고 얼굴이 맑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얼굴이 이 모습일까?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숨을 죽이고 자리를 비웠다. 그 모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터벅거리는 발 꼭지를 따라 집 안에 들어섰다. 식탁에 좋아하는 나물과
생선찌게가 그득하다. 반찬그릇을 내 앞에 돌려주는 것이 온 몸에 전기가 흐르듯이 살겹다.
방긋이 웃어 보이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젓가락을 식탁에 두드린다.
“내일 우리 가족 모임 있어요. 옛날에 항상 하던 연말 모임인데, 당신 안 가죠?”
그동안 처갓집에서 잘 한 것도 없지만 항상 나를 불러주고, 나 없으면 재미없다고 동네방네 북치고 장구치듯이 불러대었었다.
그런데 의절하겠다고 선언하였으니, 돌아설 수 없다.
사실 처갓집의 장손이며 기둥인 큰처남에게는 서운함이 없다. 오히려 살아오며 희노애락을 서로 나누며 살았기 때문에
친형제보다 마음이 두텁다.
“자기가 알고 있잖아. 나는 안가.”
집 안에 들어서니 깜깜하다. 아내가 가족 모임이 있으니 늦게 들어올 것이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고양이 별이가 튀어나오며
야옹거린다. 저녁밥을 달라고 온몸을 비비며 보챈다. 아내가 가기 전에 조기탕을 끓여놓았다. 보채는 별이를 달래며,
“별아, 아빠 오늘 혼자 먹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빠랑 같이 밥 먹자.”
준비해 두었던 닭 가슴살과 조기 한 마리 살을 발라 별이랑 같이 소주 잔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누워 바둑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토막 난 시간,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TV 화면에 가득 찬 바둑판이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잠이 들었던 것이다.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는 아내가 옅은 불빛 사이로 실루엣을 그리며 조용히 지나다니고 있다. 말이 없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목을 트고 올라왔다.
“자기야, 오늘 즐거웠어?”
“..........”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같이 모여서 놀았어?”
“.........”
아내는 서둘러 마지막 희미한 TV마저 꺼버리고 모로 누워 버렸다.
해가 둥굴레 바퀴처럼 몇 날을 굴러갔다. 오늘도 밥상이 풍성하다. 그런데 아내는 묵묵히 얼굴을 들지 않고 숟가락만 굴리고
있다. 어느 날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맑은 얼굴이 아니다.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족 모임 하던 날, 많이 싸웠어요. 언니들 울고 하였어요.”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길레 싸웠어?”
“자기 때문이야. 자기가 왜 가족 모임에 안 나오고 처갓집과 의절하겠다고 하였는지를 말하였어요. 지난 날 우리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마지막 장례까지 하여 드렸고, 십 수 년이 넘는 세월동안 김장을 하여드렸는데, 그 고마움을 모르고 힘들다고
하니, 마음이 돌아선 것이라고 하였더니 서로 다른 말을 하여 싸웠어요.“
산꼭대기에서 작은 돌이 굴러 내려오더니 눈덩이처럼 커져 마음속에 덜컥 떨어져 내려앉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찬물로 세수하여도 정신이 맑지 않았다. 가슴을 활짝 펴도 무거워 앞으로 구부러졌다. 웃는 얼굴에 반쯤
가려진 슬픔이 아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때, 자꾸 무릎이 구부러지려고 하였다.
풍성히 차려진 밥상이 목구멍을 거칠게 하였다.
“자기야, 언제 시간 내서 형님 부부와 같이 식사를 하자. 나는 자기 형제들 중에 어떤 사람에게 서운함이 있었더라도, 형님한테는 미안한 마음이야. 더구나 가족 모임에서 나 때문에 싸웠다니, 더 미안하지. 젊을 때부터 부모님을 대신해 가족을 이끌면서 고생을
하였는데, 나이 먹어 좋은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크겠다.“
“오빠가 나 대학교까지 다 가르쳐 주었어요. 오빠 보면 너무 안쓰러워요.”
울음보 아내는 이내 폭발하였다. 조용히 다가가 멈출 때가지 안아주는 길 밖에 없었다.
전화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멀리에 있던 서로의 목소리를 한자리에서 모으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자리가 화기애애하여야 할 터인데, 말없이 들고 내리는 술잔 소리만 허공에 흩어진다.
“자네 왠 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형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무엇이 죄송한데?”
“처갓집 식구들과 의절한다고 하였는데, 사실 형님은 아니거든요.”
“..........”
“그럼 내 한잔 따라주어야지. 술잔을 받으면 모든 것은 지워지지.”
술을 많이도 마셨다. 소주 다섯 병으로 온 몸을 방부처리하였다. 터벅거리는 발걸음이 끌고 간 넓은 공터에 목구멍을
넘어온 것들이 쏟아져 내린다. 처음은 작은 신음소리, 가슴속에 들어앉아 있던 바위덩이가 모래처럼 부서져 흐느낌으로
뿜어져 내리고, 마지막 남은 부스러기를 커다란 웃음으로 흩날려버린다.
형님이 차에 비스듬이 올라타며 손을 흔든다.
“앞으로 우리 자주 만나세.”
“예, 형님!”
짧은 순간의 화와 분노가 묶어버린 매듭이 하나 풀어졌다. 아직 네 개의 매듭이 남아있다.
안에서 타오르던 분노의 불길은 이미 사그러져 재마저 흩날려 버리고 없는데, 덩그란히 남은 매듭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날리고 있다. 처음 풀어진 매듭을 통하여 남은 매듭을 풀어야겠다.
“성모 마리아님, 하나의 매듭이라도 풀 수 있게 하여 주시어 감사하나이다. 마지막 남은
매듭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흔적 없이 풀어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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