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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 가는 길에 만난 알리 가족>
야즈드를 떠나 북쪽 이스파한으로 가던 중,도로 위에서 한 이란 가족을 만났다.그들은 흰색의 한국산 중형 차량을 타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다 내 옆을 지날 때 갑자기 차창을 열고 수건을 흔들면서 한참 소리를 지르더니 오른쪽 방향 지시등을 켜고 바로 내 앞에서 약간의
거리만을 유지한 채 한참 더 달려 나갔다.나는 그것이 오토바이를 세워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곧 도로 한 쪽에 오토바이를 세우
게 되었는데 잠시 뒤 내 앞에 선 그 차량에서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라 소개하면서 자
신의 가족을 대표해 이란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건네왔다.알리는 즉석에서 나를 인근의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그후 나는 알리의
집을 방문하면서 이란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조금은 구경할 수 있었다.
<이스파한>
<이스파한>
<이스파한>
<이란의 연인>
이스파한 시에서 머물던 숙소는 오토바이 여행자들에게는 꽤 알려진 곳이었던지 나 말고도 다른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두 팀이나 더 머물고
있었다.다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지나 온 파키스탄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태연한 듯한 그들의 표정은
그 관심이라는 것이 단지 지적 호기심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지만 계속된 파카스탄에 대한 질문은 그들 또한 보통의 인간으로서 미지의 세
계에 대한 두려움이 작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이스파한은 이란식 이슬람 문명의 정수를 보여주는 도시이다.도시 자체가 그들의 종교를 표현하고 있다.그러나 그런 거대함-오랜 역사,찬
란한 문명,종교적 카리스마-은 인간 개인의 상대적 미약함,왜소함을 드러내기에 그것은 실존의 공간에서 인간의 위치란 늘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숙명처럼 받으들이고 살아야 함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공원에서 만난 연인들로부터 사랑이라는 따뜻한 감정과 함께 스카프를 온통 얼굴에 두르고도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여인의 태도
에서 인간은 자유 의지로 끝없이 나아가는 위대한 존재이기 보다는 폭력에 기반한 사회적 억압에 우선적으로 움츠려드는 자연의 일부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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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즈 하피즈(Hafez)의 무덤>
14세기 시인 하피즈는 영원히 잠들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그의 시를 낭송하고,그리고 그를 찾아온다.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두 활동을 통해서인데 보통의 사람들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자신의 존재성도 사라지고 만다.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간 남
긴 업적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과 기억 속에 머물게 되므로 그들의 정신적 존재성은 사라지지 않게 된다.특히 시인이란 인간이 가장 많이 사
용하고,그럼으로써 인간 활동에 가장 필수불가결한 언어 사용을 통해 형태적,의미적,그리고 운률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친밀한 관심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하피즈의 관>
<페르세폴리스>
시라즈에서 멀지 않은 곳에 페르시아 왕조의 유산인 페르세폴리스가 있다.나는 이곳에 들어서면서 그 옛날 기원 전 6세기 경부터 기원 전 4
세기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전개된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의 명운을 건 전쟁과 그 역사의 현장에서 소리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
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기원 전 6세기에 제국을 세운 페르시아 인들의 소망은 지중해에 대한 제해권이었을까,그들은 먼저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크세르크세스 1세 때 그리스 반도에 상륙해 아테네 인들의 자긍심인 아크로폴리스를 철저히 파괴했다.그후 세월이 흘러 기원 전 4
세기 무렵 그리스의 패권국으로 떠오른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에 나섰는데 그 와중에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업적들은 상
당부분 파괴되었고 페르세폴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역사는 크게 소용돌이 쳤고 그 결과 `위대한 인물`들이 만들어졌지만 기억되지 않는
그밖의 사람들의 던져진 삶,그러므로 역사의 소용돌이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페르세폴리스를 방문하는 히잡을 둘러쓴 여인들의 물결>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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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프탄 이란 국경 검문소>
이슬람 국임을 명백히 표방하고 있는 이란 국경 검문소 모습.전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와 현 종교 지도자의 초상화를 출입문 벽에 걸어 놓았
다.1980년 초 회교 혁명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왔다.이란에 들어서면서 나는 자의든 타의든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종교적 정체성과 관련해 서방 세계와 충돌을 빚어오는 동안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을 이란 사회가 자신
들만의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 저력 혹은 동력은 무엇인지 또한 많이 궁금했다.
<이란 경찰의 에스코트?>
이란으로 들어와 100킬로미터 정도 더 이동하면 자헤단(Zahedan)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
스탄 출신들이 많다.자헤단은 위험한 도시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범죄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 듯 나의 경우는 국경 검문소에서 안전을 위해
이란 국경 수비대원을 뒤에 태우고 자헤단까지 이동을 해야 했고,자헤단에 도착해서는 이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국경 수비대 건물 안으
로 들어가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무장한 차량을 뒤따라 케르만(Kerman)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국경 수비대를 따라서>
자헤단에서부터 이틀 동안 줄곧 이란 국경 수비대 차량을 따라 이동해야만했다.여기서도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구간별로 릴레이 에스코
트가 이루어졌다.대개는 지역이 바뀌는 경계 지점에 다음 지역 국경 수비대 차량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동은 신속하게 진행이 됐는데 가끔
은 경계 지점에서 한참 기다릴 때도 있었다.그것은 국경 수비대 차량은 단순히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쪽 벌판을 늘 예의주
시 하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길도 없는 사막으로 차량을 몰고 들어가 누군가를 트럭 짐칸에 싣고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붙잡혀온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다.이란으로 불법 월경을 하다 이란 국경 수비대에 잡혀 억류된 후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되는 것 같았다.실제로 나는 어떤 지역 국경 수비대 건물 안에서 다음 지역 에스코트 차량을 기다리느라 한두 시간 머물면서 그 수비
대 안 마당에 줄지어 앉아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강제 송환을 기다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었다.그들
이 무슨 이유로 이란으로 넘어 오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흙바닥에 맥없이 앉아있는 그들을 보면서 아프가니스
탄 사람들의 고난에 찬 삶과 그들 나라의 피폐한 현실에 마음 가득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의 현대
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너무나 굴절되고 왜곡된 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둘려왔다.1980년대 소련의 침략,소련
이 물러간 뒤 탈레반에 의한 학정,그리고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의 주무대가 됨으로써 겪은 참상 등은 한 민족이 겪은 고통으로는 지나
치게 가혹한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나는 그당시 이란 국경 수비대에 억류되어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에 동정적인
감상이 차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의 의미,합리적인 리더십,그리고 이해관계를 따르는 외교적 판단 같은 현실적인 가치 요소들의 필요
성을 내 머리속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증막 같이 후끈거렸던 이란 남부 지역>
<도로 공사 근로자들>
<끝없는 사막>
<시라즈 성>
<이란식 케밥>
<시라즈 시장>
<까페>
<이란식 샤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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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쉬키에서 타프탄으로>
누쉬키 이후 타프탄에 이르는 동안의 풍경은 한 마디로 황량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건조하고 삭막하기만 한 풍경이 나에게 때로는 아름
답게 느껴졌던 것은 이곳에도 어딘가에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때문이었다.이 외진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다,그리고 그것 때문에 나는 위안을 얻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긍정한다는 것은 나에게 적잖이 기이한 일이었다.오토바이 여행을 하
면서 나는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가,수없이 자문했었다.나는 그것을 분명히 설명할 수 없었고 마땅한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다만 나
는 여행을 가기 전 너무 많이 지쳤었고 사람들에게는 싫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허나 길 위의 삶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었고,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만남들은 나에게 부자유를 강요하지 않음으로 내가 점차 사람들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을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그것은 결국 내 전
체 삶을 통해 포기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넓히는데 필요한 경험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주위는 온통 황무지와 사막 뿐>
<무제>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이정표>
<검문소>
<타프탄>
파키스탄 마지막 도시 타프탄에 도착했다.나는 무사히 도착한 것에 안도했고,별탈없이 험로를 달려온 오토바이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꼈
다.
<기도>
<환전상>
<타프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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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물탄(Multan)을 지나 만난 검문소>
훈자에서 돌아온 뒤에 이슬라마바드 주재 이란 대사관을 방문하니 한 달 기한의 이란 여행 비자가 나와 있었다.위험한 나라인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것도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흥미로운 나날이었지만 1980년대 초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의 등장과 회교 혁명 이후 옆나라 이란은 지
구촌을 휩쓸고 있는 서구적 현대화의 물결과는 다른,그들만의 종교적 세계를 고집하면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기독교적.자본주의적 질서
에 대해 거의 홀로 외롭게 주관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실정인데 그런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은 전체 여행 일정 중에서도 특별한 경
험이 될 것임을 나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육로로 이란을 가기 위해서는 파키스탄 중부 물탄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뒤에 발
로치스탄 주도 퀘타를 지나고,아프가니스탄과 거의 접경을 이루며 나있는 고립무원의 길 2,000여 킬로미터를 지나야만 한다.
물탄을 지나자 마자 큰 검문소를 만났다.경찰은 여행 허가증을 요구했는데 사전 정보가 없었던 내게 그 허가증이 있을리 만무했다.경찰은
허가증이 없는 나에게 기다리라고 했다.한 30분 남짓 기다리자 무장 경찰이 탑승한 경찰 트럭이 도착했다. 검문소 경찰은 나에게 앞으로
가게 될 구간은 위험 지역이다,저 차량을 뒤따르면서 함께 이동하라는 말을 일러왔다.그래서 나는 지역 경찰들이 담당 구간별로 릴레이를
하며 에스코트를 해주는 서비스를 받으며 퀘타까지 이동을 하게 되었다.사실 파키스탄 경찰이 외국인 한 명을 위해서 이렇게 에스코트 서
비스를 제공할 정도면 이 지역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실제로 퀘타에 도착해보니 관공서들 정문 앞에는 콘크리
트 블럭으로 만든 방벽이 설치돼 있었고,그 방벽 뒤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잔뜩 긴장한 채 경계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었
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궁벽하기까지 한 발로치스탄 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많이 살고 있고,아프가니스탄과 접하고 있다
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마약까지 암암리에 많이 유통되고 있어서 테러와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나는 반사적으로 거의
최대치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오토바이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물탄 이후,로랄라이(Loralai),누쉬키(Nushk
i),달반딘(Dalvandin)에서 각각 하룻밤씩 머물며 계속 이동한 끝에 2008년 8월 23일 파키스탄의 마지막 도시인 타프탄(Taftan)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로 공사중>
<퀘타를 지나서>
<공동 묘지>
<간이 주유소>
<흙으로 만든 도시>
<유목민들과 산 너머 아프가니스탄>
<가게 앞에서 만난 파키스탄 사람들>
<학교>
<마을> [출처] 이란3 - 알리 가족을 만나다|작성자 경계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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