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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462)/ 스웨덴
룰레오의 감멜스타드 성당 마을(Church Village of Gammelstad, Lulea; 1996)
노르보텐 주[County of Norrbotten, Norrbottens lan]의 보트니아(Bothnia) 만 위쪽에 있는 감멜스타드(Gammelstad)는 가장 잘 보존된 ‘성당 마을’로 일찍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 도처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유형의 마을이다. 15세기 초에 지어진 석조 성당 주위로 옹기종기 모인 목조 가옥 424채는 일요일과 종교 행사 기간에만 사용되었다. 이곳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힘든 여행 조건 때문에 당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주변 시골에서 온 신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룰레오 감멜스타드(Lulea Gammelstad)는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전통 성당 마을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 자연환경이 열악한 지리적・기후적 특수성에 전통적인 도시 설계를 어떻게 적응할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경제적・지리적 영향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종교적・사회적 요구에 따라 형성된 환경으로, 주일과 종교 행사 기간에만 쓰려는 의도였다. 룰레오(Lulea) 강과 계곡은 일찍부터 보트니아 만과 라플란드(Lapland) 산맥 사이 그리고 노르웨이 북부의 해안을 넘어가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일찍이 13세기에 해안과 하천 저지대를 따라 비옥한 토지에 농촌 마을이 형성되었다. 시장 중심지는 14세기에 룰레오 구역에 있는 섬에서 발달했다. 웁살라(Uppsala) 대주교의 지원을 받는 스웨덴-핀란드 왕국이 러시아 압력에 대항하려면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구실로 이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들어왔을 때인 14세기 전환기에 현재의 감멜스타드 석조 성당을 지었다. 성당의 보기 드문 규모와 화려한 장식은 이 지역이 라플란드의 모피와 생선 교역에 기반을 두고 번창하였으며, 정치적·종교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음을 입증한다. 이 정착지는 보트니아 만 연안의 상인, 현지 농민, 내륙 지역의 사미 족[Saamis; Lappons, 라프 족) 세 그룹이 회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16세기 중반에는 이들 가운데 농민이 가장 큰 그룹이었다. 16세기 중반 룰레오 교구는 400여 농가가 있는 마을 47개로 구성되었다. 사회 체제는 교구 성당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외곽 마을과 농장에서 교역하러 오는 사람과 성당에 오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 이들은 미사에 참석하였다가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에 성당이 있는 곳과 인접 시장은 성당 마을로 발전했다. 즉 주일과 종교 행사 기간에 성당에 오는 사람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목조 주택과 마구간을 집단 시설로 지었다. 이러한 형태의 정착지가 발달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끔 방문하는 상인을 위한 숙박용 가옥, 스웨덴 북부의 혹독한 겨울 동안 말을 보호하기 위해 성당 근처에 만든 마구간, 주일 미사와 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교구 사람들에 대한 법적 의무 등이 그 원인이다. 스웨덴 북부에는 성당 마을이 모두 71곳 생겨났다. 동시에 상인 마을은 1621년 고의적인 무역규제 정책의 일환인 마을 헌장 선언과 함께 더욱 공식적인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이 시점부터 상인들은 모두 지역의 주민이 되면서 이전의 스톡홀름과 관계가 끊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빙하 시대 말기에 수반되는 점진적인 육지 융기 현상으로 17세기 중반에는 옛 항구를 버리고 17세기 중반에 바다와 더 가까운 무역 중심지로 이전하였다. 옛 항구의 이전과 바다에 인접한 무역 중심지 재배치로 말미암아 새로운 정착지가 만들어졌는데 이곳을 룰레오라고 불렀으며, 니스타드(Nystad; 새 도시)로도 알려졌다. 이전의 성당 자리는 감멜스타드[옛 도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감멜스타드는 인구가 증가해 새로운 교구가 생겨나면서 교구 규모는 작아졌지만 교구의 중심 역할은 지속되었다. 행정과 사법의 중심지였고, 모든 종류의 사회활동에 구심점을 제공했다. 농장의 가축을 지속적으로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온 가족이 동시에 종교 의식에 참여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그 결과 기존 교구민이 1년에 두세 번 갖는 ‘교회의 휴일[church holidays]’ 전통이 발전하였다. 그와 더불어 견진성사를 준비하려는 젊은이들이 해마다 한여름에 2주일간 모이게 되었다. 감멜스타드는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지역의 산업화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남쪽에서 철도가 들어오면서 겨울 동안 바다가 얼었을 때 고립되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자동차가 출현함에 따라 교회 마을에 있는 마구간 대부분이 차츰 사라졌다. 룰레오로의 거주지 이전에도 경제 침체 기간에 어떠한 변화 압력도 없었기 때문에 성당 마을은 자체의 도시 계획을 유지했다. 룰레오 숙소 지역 일부에 20세기에 지은 가옥들은 초기 정착지 외부에 있었고 감멜스타드는 역사적 완전성을 유지하였다. 성당 마을은 건물 424채로 구성되며 별도 객실 555개로 나뉜다. 모든 가옥은 나무로 지었으며, 빨간 칠을 하고 문과 창틀은 흰색으로 하여 돋보이게 만들었다. 거리에 면한 문들은 매우 다양하게 디자인하였다. 창문의 덧문은 건물에 사람이 계속해서 살지 않는 곳에서 꼭 필요했다. 문은 대부분 피라미드 장치, 희생 불로 제단을 묘사하는 기독교 상징으로 재해석되는 고대의 이교도 문양을 간직하고 있다. 지붕은 원래 나무로 만들었지만 금속판이 출현하자 해빙기 동안 화재 위험과 누수를 줄이기 위해 금속을 선호하였고, 특별한 형태의 압연 강판이 전통적인 지붕 재료가 되었다. 성당은 스칸디나비아 북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형태이다. 스톡홀름 출신 예술가들이 건물을 장식했으며 꼭대기에는 대주교의 문장이 있다. 성당에서 분리되어 나온 종탑(1852)은 이 지역의 독특한 특징을 이룬다. 지역에서 주목할 건물로는 성당 광장에 있는 베델 예배당[Chapel of Bethel], 분리주의자 가옥[Cottage of the Separatists], 1754년에 지은 교구 회관[Parish House], 위풍당당한 십일조 창고[Tithe Barn; 1790]가 있다. 또 시장 저택[Mayor's Residence], 함장 저택[Captain’s Residence], 게스트하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민가는 대부분 마을이 형성된 17세기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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