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8월 17일(목)
* 시작 기도
주님...
노아 시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기식하는 모든 것을 쓸어버림을 당하여 창일한 홍수에 빠져 죽었으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여 그와 그의 식구 8명은 방주(히, 테바)에 속하여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떠올랐습니다.
출애굽 당시 모든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바다에 빠져 죽어야 했지만,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in Moses) 구름과 바다 가운데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고전 10:2).
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을 말하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예언한 한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신 18:15).
그 예수는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가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과 맞서 싸울 때 그들은 다 죽을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바다 위에 떠올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에 타시자 풍랑이 잠잠해졌고,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습니다(요 6:21).
그렇게 교회는 예수에게 속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온갖 죄악으로 죄악의 바다에 빠져죽어야 할 자들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이 하루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리하여 거듭난 새 사람 새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22:30-23:11
제목 : 십자가와 장사됨 그리고 부활은 카이로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시간 곧 영원한 현재이다.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바울의 변명을 듣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의 말을 더 이상 듣기 싫어하면서 그를 죽이자고 난리를 치며 들고 일어났다.
옆에 있던 천부장이 군인들에게 명하여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서 매질을 하면서 심문을 하라고 하였다.
군인들이 영내에서 바울을 가죽 끈으로 묶을 때 로마 시민을 죄도 정하지 않고 때리는 것이 옳으냐고 하자 백부장은 깜짝 놀라며 이를 천부장에게 보고하였다.
천부장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을 한편 부러워하면서 자기는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로마 시민인 바울을 결박하고 채찍질 했던 것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천부장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알고자 공회를 소집한다.
공회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모였다.
결박했던 바울의 결박을 풀고 그를 공회 앞에 세웠다.
그 때 바울은 공회 앞에서 변론한다.
형제 여러분,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노라고 하자 그 순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회칠한 벽과 같기 때문이오. 당신은 율법대로 나를 재판한다고 거기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자기 스스로는 율법을 어겨가며 나를 치라고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바울 옆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에게 감히 욕을 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이에 바울이 대답하기를 “형제들이여, 나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인 줄 몰랐소. 성경에 말하기를 백성들의 지도자를 욕하지 말라고 쓰여 있는 것을 내가 아오.”
그런 와중에 바울이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섞여 있는 것을 알고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새인이며 바리새인의 아들이오. 내가 지금 재판을 받는 것은 죽은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심문을 받고 있소.”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공회의 의원들이 서로 나누어졌다.
그 이유는 사두개인들은 죽은 사람에게 부활이 없고, 천사나 영도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천사 그리고 영도 다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큰 소란이 일어나자 바리새인 편에 속한 서기관 몇 사람이 일어나서 말한다.
“우리가 이 사람 바울을 보니까 악한 것을 찾을 수가 없소. 만약 영이나 천사가 이 사람을 시켜서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이렇게 분쟁이 점점 심해지자 천부장은 유대인들로 인하여 바울의 몸이 찢길까봐 걱정이 되어서 군인들에게 바울을 건져내서 군대 영내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바울아, 담대하여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를 믿고 여기까지 오는 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3번의 전도여행을 감당하였고 이런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현재 대제사장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대제사장인 아나니아는 바울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예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대제사장의 생각에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전의 바울의 모습처럼,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쫓아가는 그런 열심 있는 바울이어야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곧 자기들이 저주 받은 자로 정죄하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자가 아닌가?
게다가 그런 변절자인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하니까 그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는 진짜 진리가 무엇인지, 유대교에 열심이 특심이었던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믿는 유대교의 전통과 유산이 그의 전부였을 뿐이다.
그것을 든든히 지키고자 그 안에 강고한 담을 쌓아놓은 것이다.
나아가 그런 그는 바울이 볼 때에 강고하여 무너지지 않는 회칠한 담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율법대로 재판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바울 자신을 치라고 하는 것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의 말대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긴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출애굽기 22:28절과 레위기 19:15절의 말씀을 어긴 것이다.
(출 22: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레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이 말씀의 의미는 죄가 판명될 때까지는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무죄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때까지 죄에 대한 심리를 하지도 않았고 죄가 발견되지도 않았다.
그뿐 아니라 범죄를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정식으로 고소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니아가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는 처벌을 명하였기 때문에 이는 명백히 율법을 어긴 행위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바울은 부활의 문제를 꺼내든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극명한 신앙과 신학적 차이가 바로 부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은 바리새인이자 특히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인하여 자신이 심문을 받고 있다고 변론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여기서 부활의 문제를 언급했으며 그가 언급한 부활은 어떤 내용의 부활을 의미하는가?
그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부활의 문제를 대두시켜서 그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켜 자신은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꼼수를 부린 것인가?
그리고 그가 언급한 부활의 의미는 바리새인들이 인정하는 차원의 부활인가?
여기서 바울이 부활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자신이 그들의 불화로 인하여 그 사이에 몰래 빠져나가려는 꼼수가 아니디.
나아가 단순히 바리새인들이 믿고 있는 그런 부활의 차원은 더더욱 아니다.
바리새인들의 부활신앙은 그들의 조상 때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앙과 신학에 근거하여 부활을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를 근거로 하여 부활신앙을 주장한다.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사람이 죽으면 나중에 부활한다는 바리새인적 막연한 부활신앙이나, 그저 자신이 처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려고 부활을 언급했다는 것은 비약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이 죽음에 처할지라도 오직 전해지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장과 로마서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언급한다.
복음은 두 차원이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존재 자체가 복음이요,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장사됨 그리고 부활 곧 메시야적 행위가 복음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복음이라는 것에는 별 거부반응이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곧 십자가와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 연합해야 하는 것에는 거부반응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특히 무덤에 장사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다.
많은 경우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으로 공히 인정한다.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사복음을 이야기 하면 처음에는 신선해서 눈을 크게 뜨고 듣다가 나중에 자신 또한 이런 무덤에 장사되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은 결코 십자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셔서 3일 동안 무덤 안에 계셨다.
이 3일의 무덤이 부활과 생명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요 장소다.
만약 십자가에서 장사됨을 건너뛰고 바로 부활로 이어지면 그 부활은 실제가 아니라 상징만 남게 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결코 그것이 생명으로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통합복음을 알기까지 물론 부활을 알았다.
그러나 그 부활은 바리새적 부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죽으면 나중에 부활한다는 막연한 부활신앙이었지만, 나는 적어도 예수님과 관련된 부활을 믿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죽으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었던 나 또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부활신앙이었다.
그런데 내 안에 부활이라는 확실한 개념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삶을 통해서 장사됨이 없었기 때문에 부활은 언제나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했었고 실재가 되지 않는 상징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죽으면 내 영혼은 천국에 갈 것인데 굳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몸이 부활할 필요가 무에 있을까 하면서 부활의 불요성(不要性)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주님의 재림시 마지막 날 육신의 몸이 부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 나를 장사지내는 무덤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나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곧 로마서 6:4절 말씀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지금 무덤에 장사됨이 없으면 새 생명으로의 부활은 그저 요원할 뿐이다.
따라서 그 부활은 상징만 남게 된다.
물론 그 신앙을 폄훼할 수는 없지만 참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업을 것이다.
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이런 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잘 알 수 있다.
죽기 싫고, 무덤이라는 상황적인 고난이 싫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였다.
물론 장사복음을 알지 못할 때였지만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의 행동에서 그렇게 우러나왔다.
고난은 싫고, 영광은 받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심판을 통하여 장사복음을 듣게 되었고 이 복음이 목회에 출구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없이 나는 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을 주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를 듣고 받아들인 자는 생명으로 살 것이나 거부하는 자는 여전히 이 땅에서 남들 보기에 보란 듯하고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 칠 것이다.
그러나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 이전에 여기서부터 누리는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
주님이 주신 고난의 상황을 자신의 무덤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몸부림을 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때로는 응답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받지 못하기도 하겠지만, 그 신앙은 결국 괴물과 같이 변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 잘 되기만을 원하는 그런 이기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렇게 살아왔던 나를 주님께 고발한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의 주권을 100% 믿고 내게 임하는 고난이 나를 장사하는 무덤임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행할 것은 오직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주님과 더 깊이 연합하여 내 생명이 아들의 생명 곧 주님의 생명으로 바뀌어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오늘(영원한 현재)이 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십자가와 장사됨 그리고 부활은 결코 논란이 될 신학적 주제가 아님을 믿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신 구속사건이기에 나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마땅히 살아야 하는 것임을 믿나이다.
주님과 내가 연합하여 나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거하여 아버지의 품에 함께 온전히 거하는 줄 믿나이다(요 6:54-5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련한지라 온전히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하여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은 이성적인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으로 그리고 날마다 주의 말씀을 통하여 진짜 무덤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 깜깜한 나 자신을 발견하여 그곳이 바로 나의 완전한 무덤이요 내가 장사된 자리임을 깨달아, 주님이 아니면 내가 살 수 없음을 알고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새 생명을 얻어 주님과 연합한 자로 살게 하소서.
오늘이 그런 날이요 영원한 현재임을 믿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