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091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5주간 월요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제가 제일 많이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
수도회에 입회한 후, 참 보기 좋았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하는 모습입니다. 빨래며 식사 준비, 담당 구역 청소며 설거지며...특히 식사가 끝나면 서로 먼저 설거지를 하러 들어가려는 바람에 경쟁률이 치열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명품 수도자! 당대 신학의 깊이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던 대신학자로서, 수도회 총장까지 역임하셨던 보나벤투라 추기경님(1217~1274)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가 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여러 측면에서 위기 중에 있던 시절, 그레고리오 10세 교황님께서는 보나벤투라의 빛나는 성덕과 학식을 눈여겨보시고 스카웃하셨습니다. 리옹 공의회 준비를 위해 1273년 그를 알바노(Albano)의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10세 교황님께서는 교황 사절에게 추기경의 서임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빨간 모자를 보나벤투라에게 전해주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빨간 모자를 전달하기 위해 수도원에 도착해보니, 보나벤투라는 주방 안에 들어가 있었답니다.
식사를 마친 보나벤투라는 동료 수도자들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활짝 웃으면서 설거지를 하고 계셨답니다. 빨간 모자를 들고 온 교황 사절을 힐끗 훑어보신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제가 설거지 중입니다. 잠시 후면 끝나니, 그 동안 그 빨간 모자를 나무에 좀 걸어두시겠어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꼭 빼닮아 지극히 겸손하셨던 보나벤투라였습니다. 그는 탁월하고 저명한 대 신학자였지만, 단 한번도 우쭐거리지도 않고, 소속 수도회 이름에 걸맞게 평생토록 ‘작은 형제’로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요즘 메스컴에 자주 등장하시는 분들, 어떻게 하면 앞다투어 자신을 드러내고자 기를 씁니다. 바탕이 부족하고 약한데, 자꾸 덧칠을 하고 꾸며대니,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할까, 걱정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빛나는 덕행이 있으니, 바로 겸손의 덕입니다. 겸손은 덕중의 덕, 모든 덕의 기본입니다. 지식이며 기술이며, 아무리 높이 쌓아올렸다 할지라도 겸손의 덕이 부족하면, 사상누각, 모래 위에 지은 성과도 같습니다.
겸손의 덕이 중요한 이유는? 겸손은 자신도 성화시키지만 이웃도 성화시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덕이기 때문입니다.
보나벤투라의 원래 이름은 죠반니 피단자(Giovanni Fidanza)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 시절 치명적인 병을 앓게 되었답니다. 부모는 아들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근처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아이를 들쳐입고 냅다 내달렸습니다.
신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는 프란치스코 앞에서 이런 약속을 드렸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제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만일 낫게 되면 반드시 아들을 프란치스코에 입회시키겠습니다.”
어머니의 서약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크게 기뻐하면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Oh! Buona Ventura!”(오! 참 좋은 행운이여!)
그러자 아이의 병은 즉시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답니다.
그 뒤로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바꾸었답니다. 보나벤투라로. 약속대로 그는 17세가 되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1257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됩니다.
보나벤투라의 겸손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대 신학자이자,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보나벤투라의 탁월성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알아차렸습니다. 평소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한 할머니가 하루는 보나벤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큰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가시게 되고, 주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실 것입니다.”
할머님의 말씀에 몸둘 바 몰라 하던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응수하셨답니다.
“저보다 자매님께서 더 주님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투라를 찾아와 물었답니다.
“형제가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했던 책은 어떤 책입니까?”
보나벤투라는 지체없이 십자가 하나를 꺼내들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가 제일 많이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
###############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2)천국의 예고편>
점점 연세 들어가시는 분들, 지상생활을 조금씩 마무리 지으셔야 될 분들, 점점 큰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지옥은 또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그곳에서의 생활은 또 어떻겠습니까?
한 형제가 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 들어가 보니 정말 깜짝 놀랄 일 세 가지가 있더랍니다. 너무나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 했다는군요.
첫 번째 놀랄 일은 그간 긴가민가했는데, 그간 이렇게 부당하고 죄 많은 내가 과연 천국이란 곳을 들어갈 수 있을까, 엄청 걱정 많이 했는데, 내가 딱 천국에 와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먼저 놀란답니다.
두 번째 놀랄 일은, 천국이 좋은 곳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신부님 수녀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왔는데,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아름답고, 더 좋은 곳이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놀랄 일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온 것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천국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 얼굴을 찬찬히 보니 절대로 여기(천국)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와 있어서 또 놀란다는군요.
날 그렇게 괴롭히셨던 시어머님도 와계시고,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숱하게도 뺑뺑이를 돌리며 날 사람취급도 안했던 군대생활 직속상관이었던 김 병장도 와계시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목숨보다 소중한 겟돈 떼먹고 달아난 자매님도 와계시고...
그만큼 천국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풍성하게 내리는지, 진홍빛 같은 우리 죄들이 눈 녹듯이 씻겨 내리는 곳이라는 것이겠지요.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젠가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예고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 세상 구석구석에는 천국의 조각들이 숱하게 널려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곳 저 곳에는 지옥이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일찍부터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하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지옥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동료들의 하루도 지옥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한 형제가 꼭두새벽부터 싱글벙글 함박웃음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라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천국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천국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 동료들의 하루도 천국으로 변합니다.
결국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는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천국에서 생활하는가, 지옥불의 고통을 겪느냐 역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옥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나가는 것,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 끌어 안기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참으로 묘해서 떨치려고 기를 쓰면 더 큰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십자가, 참으로 큰 괴로움의 원천입니다만, 그 십자가에 의미를 부여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다 못해 주저앉아버림으로써 극도의 고통만 체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잘 끌어안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그 누구든 빼놓지 않고 십자가를 보내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발걸음을 하느님 당신께로 돌리라는 신호입니다. 하느님 당신과 1대 1로 대면하자는 외침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라는 요청입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호의적으로,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입니다. 새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매일 매 순간이 천국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샘플 사용 가능한 신앙>
화장품이나 혹은 이와 유사한 제품들에는 ‘샘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샘플을 조금 써보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샘플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한 하나의 장사수단입니다.
샘플을 사용해보지도 않고 많은 양을 구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샘플을 억지로 내밀며 뿌려보라고 하면 ‘미안해서 사야 되지 않을까?’라는 부담감이 들어 아예 그 쪽으로 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어야 우리는 참으로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도 이런 식으로 전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아주 무시무시한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족이 서로 갈라지게 되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면 가족과도 원수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도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말라는 식입니다.박해 시대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이 말씀이 맞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고발하고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가족을 먼저 생각할지, 믿음을 먼저 생각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때 가족을 선택하게 된다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의 애정 같은 것도 버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찬송에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탄이 내미는 것과의 가치를 재며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와 보면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애정까지도 끊을 각오를 하고 당신을 따라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다가, 물 한 잔만 봉헌할 수 있어도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끝내시는 것입니다.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처음부터 뛰어들기 겁나거든 아주 조금만이라도 받아들여 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물 한 모금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봉헌하는 것이 더 좋은지, 그냥 마셔버리는 것이 더 좋은지 일단 해 보고 결정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일종의 복음 샘플인 것입니다. 저도 강론을 쓰기 싫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생각은 안 나고 올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럴 때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생하면서 사랑받는 게 낫니, 푹 쉬면서 아무 사랑도 못 받는 게 낫니? ... 그냥 안 써도 되게 해 줄까?”
그러면 저는 정색을 하고 “아뇨, 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외칩니다. 사실 큰 고생도 아닌데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도 인정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면에서는 ‘내가 고생하는 것에 비해 그만큼 만족이 오고 있는가?’란 질문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강론을 주일만 올렸습니다. 그것도 아는 지인들에게만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매일 쓰게 되었고, 지금은 여러 군데 올라가고 있습니다.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읽으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만약 주일 강론만 지인들에게 보낼 때 그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적다고 느꼈다면 지금까지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샘플을 써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거의 공짜인 샘플도 써 보지 않고 지례짐작으로 “안 사!”라고 해 버리는 마음일 것입니다.
어떤 연예인이 병역을 기피한 일 때문에 괘씸죄로 입국이 거부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까? 만약 군 생활도 샘플이 있었다면 그렇게 겁먹고 바로 국적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다행히 샘플이 있습니다. 냉수 한 잔을 주는 행위도 하늘나라의 행복을 줍니다. 샘플을 잘 이용해 좋은 것을 많이 사서 부자가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34-11,1 :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에,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 많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런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서의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런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태어나게 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이 주어진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 임금은 자기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자신들에게 큰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번성하고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파라오는 모든 것을 참 지혜롭게 대처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파라오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곧 “너의 후손은 ……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창세 15,13)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마지막까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안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가족끼리 싸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면 가족이라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린다면,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죽음에 빠트리는 일이 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가족을 진정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끄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은,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도 아니고,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또는 구원을 얻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세속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최고의 영적 동반자입니다. 신앙생활을 핑계로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벌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예수님을 사랑하고,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그래서 가족이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있어서, 예수님을 좀 더 사랑하고, 세속적인 것들은 좀 덜 사랑하라는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고, ‘예수님만’ 사랑해야 하고, 세속적인 것들은 사랑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이란, 하든지 안 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것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속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또는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 예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라자로는 하느님, 예수님만 사랑한 사람으로, 부자는 세속적인 것들만 사랑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혼자서만 이기적으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루카 16,19) 이웃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은 죄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사실 그 죄는, “구원과 생명에는 관심 갖지 않고,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 없이 부유한 세속 생활만 사랑한 죄”입니다. 그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했다면, 바로 옆에 있는 라자로도 사랑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이 말씀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과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내용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무게가 다르긴 합니다. 어떻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기쁘게 받아들여서 그것을 끝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의 길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렵고 힘든 시기를 만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기를 만날 때도 있는데,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어렵고 힘든 시기에는 신앙생활을 중단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이다.”라는 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베드로 사도가 말린 일이 연상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아’ 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막거나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를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의 앞길을 막은 것, 그것이 베드로 사도의 잘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 뒤로 가라.”입니다. (그를 멀리 쫓아내시는 말씀이 아니라, “내 앞에서 방해하지 말고, 내 뒤로 가서 내가 가는 대로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막지 마라.”라는 뜻인데, 그의 그런 행동은 예수님에게만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구원에도 걸림돌이 되는 행동입니다. (또 이 말씀에는 “너는 네가 교회의 ‘반석’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똑같은 바위라도,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반석’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한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즉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생각하지 않고, 쉽고 편안한 길만 찾는다는 뜻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그 생명을 얻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세속의 허무한 것들은 모두 능동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모두 버려야만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도,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거나, 또는 그 생명을 얻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
[부산교구 김종이 베드로 크리솔로고 신부님]
<주님께 합당한 자>
화단을 가꾸거나 농사를 짓다 보면 김매기 곧 잡초를 뽑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릎이 시큰거리거나 허리가 뻐근합니다. 하지만 김매기를 해야만 그 화단이나 논 · 밭이 원래의 목적에 맞게 가꾸어지고 꾸며질 것입니다.
물론 그 잡초도 생명이 있고, 저마다의 이름도 있습니다. 다만 화단이나 논 · 밭을 만든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잡초라 부르면서 뽑아냅니다.
이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과 삶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내가 택하여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누구 하나 나무랄 것 없이 우리한테 주어진 이 신앙과 삶을 정말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일 목적의식 없이 산다면, 이렇게 선물로 주어진 내 인생을 아무렇게나 키우며 내버려둔다면, 김매기를 할 때 뽑히는 잡초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삶에서 많은 힘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거기에 조금만 더 힘을 보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게 선물로 주어진 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신앙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데 조금만 더 힘을 보태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뽑혀져 나가는 잡초가 아닌, 주님께 받아들여져 하늘의 문 안으로 당당히 들어서는 합당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부산교구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한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썪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 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려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평화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인가요>
마태오 10,34-11,1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누구인가요>
내가 곁에 두고픈 사람이 있어요 내가 받아들이고픈 사람이 있어요 내가 벗하고픈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누구인가요 내가 왜 그럴까요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요
나를 곁에 두고픈 사람이 있어요 나를 받아들이고픈 사람이 있어요 나와 벗하고픈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누구인가요 그 사람 왜 그럴까요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요
=====================
[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십자가의 의미...>
어느 자매님이 아들 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자매는 첫 영성체를 준비하고 있는 손녀에게 “십자가가 뭐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대답합니다. “할머니, 십자가는 동생이 잘못했는데 아빠한테 네가 혼나는 거야!” 남의 잘못을 대신 책임지는 것이 십자가임을 알고 있는 손녀가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이가 그럽니다. “할머니,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잖아요.” 자매님은 손녀의 말과 행동으로 너무나 행복해져서 첫영성체 선물로 손녀가 원하는 선물을 해주었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예수님께서는 두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또 하나는 가는 사람이 없는 좁은 길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가는 길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생기는 갈등입니다. 예수님은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랑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2장 37-39절에 보면...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예수님을 더 사랑하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각각 자기 몫의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집고 끝까지 지고 예수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가려면 읽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얻는 것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갈등으로 시작합니다. 또한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차를 타고 달리다가 보면 터널을 만나게 됩니다. 터널은 동굴이 아니기에 막혀 있지 않습니다. 뚫려 있습니다. 터널을 지나야 별이 보입니다. 신앙도 멈추면 안 됩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터널을 지나야 별이 보인다.’라는 말씀을 주님의 목소리로 알아듣습니다. 그렇습니다. 터널을 지나면 별이 보입니다. 터널은 잠시 지나가는 어둠일 뿐입니다. 분명 그 터널은 고운님들이 가고자 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터널에 들어가는 훈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은총입니다.
아이의 말이 새삼 은총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잖아요.”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고운님들에게 주어진 알맞은 십자가를 잘 안고 간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고운님들이 평소에 원하던 선물을 주시겠지요.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고운님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게 되는 주님의 평화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피곤함이 가득할 때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디 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휴가에 대한 생각은 더욱 더 커지면서 이번 휴가 때에 무엇을 할지 그리고 휴가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다녀왔던 휴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가기 전의 예상이 다녀온 후에도 그대로 맞아 떨어지던가요? 아마 “집 나가면 고생이야. 그냥 집이 최고야.”라는 말씀들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휴가를 통해 지친 몸을 풀고 싶지만, 사실 휴가를 통해서 더욱 더 지쳐서 오게 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지친 몸을 풀기 위해서라면 휴가가 아니라 잠을 자거나 목욕탕에 가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휴가는 이제까지 반복되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체험을 통해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쉬는 시간, 잠자는 시간, 남들 다니는 곳을 그냥 쫓아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휴가를 보내야 할지가 더욱 더 분명해집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동원되고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생각하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그 안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비자들에게 "왜 신앙생활을 가지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행복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행복이 오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때에 비로소 참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도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셨고, 부활하신 뒤에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면서 평화를 빌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막연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것, 세상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평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평화를 추구하십니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이 답이다-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보물같은 성인, 성 보나벤투라 축일입니다. 당시 도미니코회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뤘던 대 영성가 성인입니다. 성 보나벤투라 성인은 만 57세 사셨으니 저는 성인보다 13년을 더 살고 있네요.
오늘은 잠시 세상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두렵고 무서운 적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아무리 작고 약해도 일치 단결해 있으면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내부의 분열이 참 무섭고 두렵습니다. 강하든 약하든 내부의 분열로 망한 개인이나 공동체들이 대부분입니다.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망했습니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내부의 분열에는 답이 없습니다. 누구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개인이든 공동체든, 나라든 ‘내적 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문득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바쁜 지도자는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문대통령이 생각났습니다. 84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나날의 일정은 정말 초인적입니다. 참 여유없이 힘들고 바쁜 삶중에도 전세계에 대한 자상한 관심과 매일 주옥같은 말씀과 웃음띤 얼굴을 보면 정말 살아있는 성인이요, 세계의 정신적 대통령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전 교황님의 강론 주제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깊은 바다의 고요와 같다.”(The peace of Jesus is like the calm of a deep sea)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요. 겉으로는 시끄럽고 어지럽지만 내부 깊이에는 주님의 깊은 평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가장 힘들고 바쁜 지도자가 한국의 문대통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칭찬과 더불어 받는 비난과 수모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 역동적이고 그러나 참 많은 크고 작은 무수한 내외적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국입니다. 혹자는 ‘미국이나 호주는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어제는 식탁대화중 "문대통령은 너무 착해서 문제다."라는 어느 형제의 말에 공감하면서 즉시 떠오른 것은 참으로 착할 때, 부족한 것은 하느님이 다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착함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요 겸손입니다. 착할 때 부족한 것은 좋은 이웃이, 좋은 하느님이 도와 주십니다. 문대통령은 12일 오후 전남 무안을 찾아 ‘블루 이코노미 비전 선포식’ 연설을 하면서 사전 원고에 없던 “전남의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합니다. 요즘 한일간 갈등으로 겪는 내적 고독과 어려움을 표현한 듯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평자의 글도 잠시 인용합니다.
“한반도 평화문제는 미국이나 유럽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대체로 관심이 없고, 서방 언론들도 우리한테 별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의 주류 사회에는 우리의 우군이 없습니다. 있다면 한 사람 있는데, 트럼프죠. 문제는 그의 동기가 노벨평화상에 대한 욕심과 재선을 노린 계산이라는 거죠. 한편으로 잘 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기회를 좀더 근본적인 성찰의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돌아보면 촛불의 힘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약속대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고, 김위원장도 어차피 이대로는 갈 수 없으니까 호응을 하게 되었고 워싱턴 정가의 이방인인 트럼프도 일단 긍정적으로 나오면서 모처럼 절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죠. 그래서 1년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고, 북미정상도 두 번 만났죠. 사실 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에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위기는 기회라 합니다. 한일관계가 복잡 난해하지만 분명한 것은 100년전의 한국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불행의 역사를 반복할 수 없습니다. 새롭게 비상할 수 있는 위기의 기회라 봅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의 보호와 우리의 인내와 지혜로 우리가 개척해야 합니다. 세상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어디도 없습니다. 1차적 관심은 자국의 이익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새벽 언뜻 본 기사도 시사적이었습니다.
-‘현대사의 고비마다 거리의 미사로 민중이 갈 길을 앞서 걸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돌이킬 수 없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매주 월요일 미 대사관 앞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미사를 거행한다. 첫 미사는 15일 오후 7시다.‘-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아시아의 등불같은 나라입니다. 전국에는 얼마나 많은 성지가 있습니까? 전 국토가 역사박물관 같고 성지같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가 한반도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며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어제로서 창세기 야곱과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에로 끝나고 오늘부터는 탈출기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걸출한 지도자들은 사라지고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의 압제하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합니다. 요셉같은 지도자는 없어도 하느님은 친히 축복의 약속대로 그들을 돌봐주시어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처럼 친히 이집트인들의 압제하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봐주신 똑같은 하느님께서 우리 한국을, 한반도의 백성을 돌봐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각성과 기도,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사랑 실천이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참신한 충격으로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거짓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참 평화요 거짓과 진리를 가르는 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선악이, 진위가. 명암이 탄로되니 분열이지만 이는 참된 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과정의 잠정적 분열입니다. 적당히 두루뭉실한 거짓 평화가 아닌 정화된 참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그 누구도 당신 보다 사랑하지 마라 하십니다. 노골적으로 미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오로지 당신께 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랑할 때 모두에 대한 집착없는 초연한 눈밝은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면서 제 본분의 책임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당신께 합당하다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대인관계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들이니 모두를 주님을 맞아들이는 환대의 자세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이들 하나하나 역시 ‘주님의 사람’으로 생각해 소중하게 대할 때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내안에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믿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와 지혜, 겸손을 선물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한반도 땅과 사람들에게 참 평화와 더불어 일치를 선물하십니다.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시편124,7-8)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과도 같은 화답송 시편 마지막 구절입니다.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을 주러 왔다>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랑이 되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씩 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면 다른 것들은 다시 돌려받게 됩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한 번 더 가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진전되면 그 사랑하는 이는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해 주신 당부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래서인지 말씀 행간에 예수님의 다정한 격려가 배어 있지요.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앞 부분(마태 10,34-39)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께 합당한 제자의 모습을 제시하시고, 뒷 부분(마태 10,40-11,1)에서는 당신의 제자에게 부여될 위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훗날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주시는 대목(요한 20,19.21)을 기억하는데, 한 입으로 두 말 할 리 없으신 예수님께서 지금 무슨 이유로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이제 막 사도로서의 사명에 들어선 제자들은 따름을 위한 버림과 떠남에 이제 막 입문한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곁에 머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에 뛰어들기에는 여전히 기존의 것들과의 유대와 결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평화"란 그동안 가족을 포함해 세상과의 관계에서 유지해온 적당히 안정적인 위로 상태일 것이고, "칼"은 그간 맺은 관계들을 뒤흔들고 뒤엎고 잘라내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도록 새 질서를 잡는 힘을 가리킬 겁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우리는 부정적 결론 앞에서 마치 위협이나 으름장처럼 느껴 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편안한 뉘앙스로 바꾸어 읽어 보니, "나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합당하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끔찍이 아끼는 부모나 자녀일지라도 자기를 지으신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임을 인식하고, 모든 만물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실 때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도 차츰 제 자리를 잡아갑니다.
"받아들이는 이/사람."(마태 10,40)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말씀에는 엄청난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부족한 죄인이라도 제자들이 곧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결국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풀 한 포기, 쌀 한 톨에도 우주가 들어있듯, 보잘것없이 가난한 영혼 안에도 하느님께서 깃들어 계십니다. 받아들임은 상대의 내면 겹겹 안에 깊숙이 숨어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지요.
"그가 제자라서."(마태 10,42) 게다가 제자라는 이유로 호의를 입게 되면 호의를 베푼 이에게까지 상이 돌아간다고 하시니, 낯선 사람들과 선교 현장을 앞두고 긴장한 사도들의 어깨가 조금은 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1독서는 탈출기 도입부입니다. 이집트와 온 세상을 기근에서 구하고 이집트를 강대부국이 되게 일조한 요셉에 대해 알지 못하는 파라오의 등장으로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탈출 1,22) 파라오는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어리석음의 전형입니다. 스스로는 이를 "지혜"(탈출 1,10)라고 착각합니다만, 어떠한 지혜도 대립과 증오, 적대 관계와 죽음을 야기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탈출 1,12) 나가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우방이나 아군으로 끌어안아 함께 번영하는 길을 모색하기보다 적으로 규정해 억압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맏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 파라오는 사실 받아들임을 거부한 대가로 국가적 참사를 야기한 인물이라 기록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교 여행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과 마주하겠지만, 자기들을 받아들여 줄 이들에게 되갚아 줄 축복을 한 아름 안고 파견되는 것이니, 그 발걸음 또한 자신감 넘치고 당당할 수 있을 겁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내 아버지도 그와 함께할 것이다."라는 뜻의 예수님 격려는 이제까지 익히 들어온 어려움의 순간마다 제자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예수님의 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평화는 혈연과 민족을 뛰어넘는 새 질서입니다. 기존의 고리른 과감히 끊고 상대가 누구이건 그를 보내신 예수님,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을 얻는 진짜 지혜가 요구됩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께 예언자 대접을 받고 의인 대접을 받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의인을 의인으로, 제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도 발걸음도 가볍게 주님의 파견을 받아 떠나십시오. 여러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선물로 안겨주시고, 또 여러분이 만나게 될 주님의 제자들을 온전히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듯 받아들임으로써 복된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성 보나벤투라의 이름처럼,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bona ventura!)가 오늘 벗님의 축원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우리를 앞질러 오는 은총
이쯤에서 한 가지 분명하고 확고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우리의 불완전, 우리의 성격, 우리 역사의 연약함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사랑과 용서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당신 사랑의 계획을 실현하려면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와 만나셔야 한다.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렇게 썼다. “윤리적 진전은 은총의 결실일 수 있지만 은총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은총을 받는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다. 은총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하느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은총은 마치 오지 않는 것처럼 올 수도 있다. 만일 은총이 오도록 강요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오만해져서 은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때 은총이 오지 않는 것과 같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소서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오늘 복음을 '문자적 의미'로만 받아들이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이 평화이고, 평화의 주님이신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니...
그래서 오늘 복음을 '영적 의미'로 이해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참평화 앞에서 적당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되고, 복음적 갈등과 갈림길 앞에서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단호한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볼 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그것이 곧 너를 위한 사랑이요, 가족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첫째는 하느님 사랑이요,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먼저 행해져야 한다는 의미로 오늘 복음이 다가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주님을 따르는 여정 안에서 때로는 가족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 십자가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그럴 때 가족과 싸워야 하고, 가족을 멀리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그럴 때 일수록 오히려 더 주님을 굳게 믿고 따라가야 하며, 주님의 극진한 사랑이 가족에게로 더 잘 전해져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늘은 '성 보나벤뚜라축일'입니다. '보나벤뚜라'라는 말은 좋은 운수, 곧 행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운(축복)을 충만히 받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오늘날 지배적인 문화 안에서는 외향적이고 직접적이고 가시적이고 즉각적이고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우선시 됩니다. 실재적인 것이 외양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62항)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괜찮은 사람>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물 한잔 건네주는 이'
살다보면 고약한 사람을 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무시하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처럼 배은망덕한 태도ᆢ 봐주기 힘듭니다.
자기 위신 깍이면 파르르 못견디고 사랑으로 주어진 권한을 힘으로 착각하며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사람, 예수님이 한대 때려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힘든 사람안에서 같이 울어주는것을 택하십니다.
택배 아저씨에게 시원한 음료 한잔 건네는 손길이 사랑스럽고 약한 사람 소중히 대하며 용기주고 무엇보다 처진 날개를 펴게 해줍시다.
작고 약한 사람 함부로 대했다면 부끄러워하고 사과할 줄 알아야죠.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존중해주고 인격적 대우를 할 때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됩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날까지'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칼과 평화의 팽팽한 긴장 안에서 무엇을 향해야 할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가장 위험한 칼이 실은 우리를 살리는 은총의 칼이 됩니다.
묶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거짓 자아를 벗겨냅니다
칼을 통하여 잘라낼 것을 이제 잘라냅니다.
칼의 중심에는 신앙을 지켜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평화를 일구어내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아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칼과 십자가로 우리를 되살리시는 주님의 구원을 믿습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매순간 주님을 향합시다.
===================== Since 2013. 10. 24 정리/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시면 함께 나누겠습니다.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