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환영 받는 길
스데반이 죽을 때 무엇을 보았는가? 스데반은 순교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성경은 보통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표현하고 사도신경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기쁨과 감동으로 스데반을 뜨겁게 일어서서 환영했다는 암시다. 언젠가 천국에 입성할 때 예수님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말씀에 반응하라!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가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고 외치지만 초대 교회로 돌아가도 별 것 없다. 초대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성령 충만으로 거룩한 기쁨과 부흥과 교제와 나눔이 있었다. 그런 초대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
개인적인 문제로는 ‘돈을 숨기고 헌신을 자랑하며 위선을 떨었던 아나니아 부부 사건’이 있었고 교회적인 문제로는 ‘구제 문제로 생긴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갈등 사건’이 있었다.
교회생활을 할 때 너무 신나는 일만 기대하지 말고 갈등과 회의가 생길 수도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라. 고통이 없는 드라마는 없듯이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문제로 인해 너무 실망하거나 충격 받지 말라. 교회생활에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방법이나 의견을 양보할 마음의 준비도 하라. 교회에 꼭 필요한 좋은 방법과 의견이라면 언젠가 그 방법과 의견이 반영될 때가 반드시 온다.
교회 갈등에는 좋은 일로 인한 갈등도 있다. 좋은 일로도 생각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기면 더 실망된다. 초대 교회의 갈등도 구제가 잘되게 하려는 의견 차이로 생긴 갈등이었다.
좋은 일이나 좋은 방법만 생각하지 말고 평화와 질서를 위해 때로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도 양보하는 마음을 훈련하라. 그래서 예배와 기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예배와 기도 시간은 평화의 사자가 되겠다고 늘 새롭게 각오하는 시간이다.
결국 구제 문제로 생긴 교회 갈등을 해결하려고 일곱 집사를 선택해 식탁 봉사를 맡겼다. 그런데 식탁 봉사만 하지 않고 복음 전파도 했다. 특히 스데반의 활약이 컸다. 아무도 스데반과의 논증에서 이기지 못하자 대적들은,
하나님과 모세와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로 스데반을 고소했다. 공회에서 대제사장이 “그 고소가 사실이냐?”라고 묻자 스데반이 장문의 변증설교를 했다(행 7:2-53).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적들의 죄와 잘못을 엄중히 지적했다(51-53절).
그때 대적들은 스데반의 말을 자기들에게 한 말로 듣고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처럼 말씀을 들을 때는 기본적으로 내게 한 말씀으로 받으라. 왜 예배 때 말씀을 듣는가? 마음의 찔림을 받기 위해서다.
무슨 말씀이든 “이 말씀은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하고 들어야 말씀이 살아 역사한다. 설교자는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목사님! 오늘 말씀은 제게 주신 말씀이네요.” 그 말은 예배를 잘 드렸다는 암시다.
마음의 찔림을 받은 후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대적들은 스데반으로부터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부정적으로 반응해서 이를 갈았고 심지어는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왜 사람들이 싸우는가? 대개 귀를 막기 때문이다. 입을 잘 여는 대신 귀를 잘 열면 싸울 일이 크게 줄어든다. 듣는 귀나 듣는 마음은 선한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 요소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백성들에게 설교할 때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실제로 빌라도와 로마 군병이었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마음이 찔려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베드로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라고 했다. 그날 삼천 명이 구원받았다. 마음과 귀를 열고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면 이 땅에서도 복된 존재가 되고 천국에서도 환영받는 존재가 된다.
2. 하늘을 바라보라!
대적들이 이를 가는 상황에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위기 때 본색이 나타난다.
스데반이 위기 때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은 그가 평소에 늘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증거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 생활도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 날마다 삼류 드라마만 보면 삼류 인생이 된다.
요새 사람들이 가장 바라보는 것은 돈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그 말씀에서 ‘재물’은 원어로 매먼(mammon) 즉 ‘돈 신(神)’을 뜻한다.
“하나님과 돈 신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바르게 볼 줄 아는 분별력을 기르라. 또한 물질이나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믿음이나 인격의 열매로 사람을 평가하라.
어떤 사람에게 두 동서가 있었다. 큰 동서는 늘 큰 아파트와 외제가구와 자녀의 고액과외를 자랑했다. 그래서 큰 동서 집에 가면 늘 불행감이 생기고 착한 남편이 미워졌다.
반면에 작은 동서는 자기보다 못살아도 늘 맑은 소리와 밝은 얼굴로 말했다. “형님! 요새 매일 하나님 말씀을 보고 기도하니까 너무 행복해요.” 그 말을 하는 작은 동서를 보니까 정말 행복이 느껴졌다. 결국 작은 동서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세상적인 것으로 부러워하거나 부러움을 사지도 말라. 부러워할 때는 믿음과 인격을 보고 부러워하고 부러움을 살 때도 믿음과 인격으로 부러움을 사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진 소원이 세상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라.
성공과 지위와 물질을 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정당하게 힘써 얻은 후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쓰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이 천국에서 환영받는다.
3. 기도를 생활화하라!
행7: 60절을 보라.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돌에 맞아 육신은 피투성이가 되고 정신은 혼미해졌지만 그때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 장면을 보면 그가 늘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도를 생활화해야 극한 상황에서도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간단히 표현하면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의 핵심 열매는 신기한 은사나 기적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는 삶과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다. 죽으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쉬지 말고 기도하면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하루 24시간을 기도하라는 말이나 하루 8시간을 새벽기도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또한 기도 많이 하는 기록을 남기라는 말이나 기도 많이 하는 것을 나타내라는 말도 아니다.
기도를 생활화하라는 말이다. 기도를 생활화하라는 말은 문제가 터진 후 문제 해결 기도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문제가 터지기 전에 문제 예방 기도를 하라는 말이다. 화려한 문제 해결 기도보다 은밀한 문제 예방 기도가 더 능력 있는 기도다.
한 평신도 선교사가 옛 친구 목사에게 오랜만에 찾아와 부탁했다. “친구! 어머님이 위독하네. 의사가 며칠 못 사신다고 했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을 인도해주게. 그리고 바쁜 줄 알지만 임종 전에 병원에 한번 와주게.”
그 부탁을 받고 친구 목사가 병원에 가기 전에 기도했다. “하나님! 친구 어머님의 병이 낫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소서.” 병원 심방을 마쳤다. 그 후 그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만약 그때 그 목회자가 자기 기도로 치유된 줄 알고 은근히 자기가 치유의 종임을 자랑하고 선전하면 그런 사람은 더 멀리하라. 치유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 주의 종이 주는 것이 아니다.
주의 종의 역할은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말씀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다. 진짜 능력은 주님을 잘 바라보게 하고 말씀 안에 있게 해서 죽을병에서 치유되게 하는 것보다 죽을병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보다 문제 예방이 중요하다.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좋기도 하지만 사탄의 노략질도 심해진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하라. “하나님! 명절이 다가올 때 저도 인식하지 못하는 내적인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게 하소서. 명절에 가족 간에 섭섭 마귀가 틈타지 않도록 십자가를 다짐하고 만나게 하시고,
민감한 정치나 사회 이슈를 가급적 꺼내지 않고 좋은 대화를 나누게 하시며 비교의식을 버리고 기쁘게 듣는 귀와 듣는 마음을 준비하게 하소서.” 목회자의 대비시키는 말씀과 나의 예방 기도 한 마디가 명절 증후군을 잘 극복하게 만들고 사탄의 노략질도 크게 무력화시킨다.
기도를 생활화하라. 우리나라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도로 살다가 기도로 죽자는 자세로 기도했다. 지금 환경에서 그렇게 신화적인 기도는 드리지 못해도 생활화된 예방 기도를 앞세워 살라. 그러면 힘든 상황에서도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기도를 생활화하면 문제도 예방되고 문제가 생겨도 금방 해결의 길이 펼쳐지면서 점차 성숙해지고 인생의 마지막 때에 기도하면서 죽으면 천국에서 예수님이 기쁘게 맞아주실 것이다.
4. 회개에 탁월하라!
누군가 나의 회개를 촉구할 때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말고 그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회개하라. 그러면 거칠 것이 없는 인생이 된다. 일이 안 풀리고 길이 열리지 않는 핵심 이유를 무조건 나의 회개 부족으로 여기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성도를 가장 기뻐하신다. 문제와 기도제목이 생기면 일단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말부터 해놓고 그 다음에 회개할 것을 살피고 회개하라. 그러면 문제 해결과 축복의 문이 신속히 열린다.
예전에 한 동료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 목사는 회개만 잘하면 반드시 쓰임 받습니다. 목사에게는 회개 사역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말은 상당히 맞다. 목사뿐만이 아니라 성도도 마찬가지다.
믿음 생활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결국 회개를 잘하는 사람이다. 시급한 기도제목이 있으면 회개하라. 더 나아가 종이에 펜으로 회개할 것을 적어가면서까지 회개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최선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문제가 생긴 정확한 이유를 찾으려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라. 그 시간에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 최상의 문제 해결과 축복의 통로가 회개이기에 하나님은 수시로 회개를 촉구하는 천사를 보내신다.
스데반은 당시의 유대 교권주의자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천사였다. 그 천사의 음성을 인간적으로 기분 나쁘게 들으면 축복의 문도 닫히지만 그 음성을 나의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으로 들으면 축복의 문도 열린다.
어느 날 도로에서 운전하는데 갑자기 옆 차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고 소리친다. “똑바로 운전해!” 그때 너무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말고 인생 운전을 똑바로 하라는 천사의 음성으로 들으면 별로 기분도 나쁘지 않고 하나님이 앞날의 인생 사고도 막아주신다.
하나님이 예배 말씀을 통해, 어떤 사건을 통해, 혹은 남의 입술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을 주실 때 그 음성을 경고의 음성으로 듣고 회개하면 앞날에 있을 환난이 막아진다.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가족 누군가가 정색하며 짜증내면 하나님이 그에게 나의 회개를 위한 천사 역할을 맡겼다고 여기라. 그리고 즉시 자동적으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일단 말부터 한 후,
회개할 것을 찾아 회개하면 그 가족이 밉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맙게 보인다. 그것이 영성이다. 회개할 것을 찾으면 반드시 있다. 문제가 없이 아주 편안할 때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회개 찬스로 활용하라.
어떤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아무 문제가 없고 가족이 편안할 때도 더욱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부족한 것이 많은데도 이렇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하며 나태하게 사는 저를 용서하소서.” 문제가 생겨도 회개하고 형통한 때도 회개하라. 그렇게 늘 죄송해하는 회개의 심령을 가지면 그 영혼은 늘 맑고 밝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혼이 된다.
당시 스데반의 말을 듣고 대적들은 회개는커녕 오히려 이를 갈고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스데반은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잘 믿어도 미래가 늘 좋게 펼쳐지지는 않는다. 복된 삶이 고통 없는 삶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 때로는 산고의 진통도 겪게 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때 예수님이나 스데반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렇게 말씀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46).” 스데반도 비슷하게 고백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지극히 평온했다. 본문 60절 하반부를 보라.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누가는 스데반의 죽음을 평온하게 잠드는 것으로 묘사했다. 어떻게 그렇게 평온하게 죽을 수 있었는가? 예수님이 서서 환영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믿음과 용기를 구하라. 지금 우리나라는 믿는다고 돌로 쳐서 죽이지 않지만 대신 교묘한 비판과 반대의 돌팔매질이 많다. 그런 비판과 반대 앞에서 위축되지 말라. 순교의 피는 교회 부흥의 씨앗이 되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평가된다.
가장 복된 삶은 회개를 희생으로 발전시키는 삶이고 가장 위대한 기도는 스데반처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하는 기도다. 회개와 용서 기도를 겸비한 인생은 거칠 것이 없는 인생이 된다.
사람에게 죄가 있으면 반드시 피를 봐야 죗값이 치러진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아무개야! 네 피 좀 보자!”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제물에 안수해서 자기 죄를 전가한 후 하나님께 제물의 피를 바침으로 죄 사함 받는 길을 열어주셨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을 피 보게 하셨기에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그 피로 인해 죄 사함을 받는다. 만약 예수님의 피가 없었으면 스스로 피를 보여야 하기에 현재에 피 보는 인생이나 앞으로 피 볼 인생이 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 박고 그 후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주어진 회개의 메시지를 거부했기에 지난 2천년 동안 세계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본 민족이 되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예수님의 피를 보이지 못해 앞으로 피를 볼 사람이다. 둘째, 예수님의 피를 보여서 내가 앞으로 흘려야 할 피를 면제받은 사람이다. 셋째, 예수님의 피를 보임으로 내가 흘려야 할 피를 면제받았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희생의 피를 드리는 사람이다.
셋째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작정하면 스데반처럼 “하나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하는 넉넉한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때 문제도 해결되고 축복도 받고 그를 통해 선한 영향력도 넘치게 나타날 것이다.
살면서 끊임없이 주문처럼 고백하라. “회개하자. 회개만 하면 된다.” 그 고백을 이렇게 발전시키라.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용서하고 희생하며 살자.” 그런 고백을 앞세워 살면 거칠 것이 없는 인생이 된다. 늘 스스로 물으라.
“오늘 내가 천국에 가면 예수님이 벌떡 일어나 스데반처럼 기쁘게 맞이해주실까?” 이 땅에서 조금 고생스럽게 살아도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복음을 위해 희생함으로 천국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기쁘게 환영받는 복된 심령이 되라.
-이한규 목사-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드립니다.
아멘아멘 ^^
아멘!! 감사드립니다.
아멘 !
아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아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