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서원(章山書院)
변호사 정승호 ・ 2021. 4. 18. 18:42
장산서원(章山書院)
장산서원(章山書院)은 1780년(정조4년) 지금의 경북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에 잠계
(潛溪) 이전인(李全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나,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다가, 2006년경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복원
되었다.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의 묘소는 지금의 경북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에 있다.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유일한 핏줄이기는 하나,
서자(庶子)였다. 이언적은 본처인 함양박씨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해 사촌동생인
이통(李通)의 셋째아들인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소실(小室)인
양주석씨와의 사이에 난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있었다. 이전인(李全仁)은 부친인
이언적이 평안도 강계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고
그가 돌아가시자 겨울에 3개월에 걸쳐 강계에서 경주까지 시신을 운구하였다.
이전인(李全仁)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언적의 서손자(庶孫子)이자 이전인(李全仁)의 아들인 이준(李浚)은 영일정씨 김천
문중의 입조(入祖)인 정이교(鄭以僑)의 둘째 아들인 정공건(鄭公虔)이 첩에서 낳은
서자 정무인(鄭武仁)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그는 1583년(선조16년) 평안도 등지에서
오랑캐가 창궐해 변방이 어지러워지자 찹쌀 80석을 헌납하고 그 자신은 물론 그 후손
들까지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이른바 사로(仕路)의 허통(許通)이 공식적으로 허락
되어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1599년(선조32년)에는 무과 급제하였으며, 1608년(선조41년)에는 다시 군량미를 납부함으로써 통정대부(通政大夫) 및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를 받았고, 1610년(광해군2년)에는 마침내 통정대부(通政大夫) 청도군수(靑道郡守)가 되기까지 하였다.
더욱이, 이준(李浚)은 회재 이언적을 제향(祭享)하는 옥산서원 건립에 주도적으로 참여
하였고, 건립과 운영에 필요한 노비와 다수의 전답을 기부하였다. 그렇지만 경주지역
내의 사족(士族)들의 의식은 사뭇 달랐다. 지방에서 사족(士族)의 행세를 하려면 향소
(鄕所)에 허참(許參)하지 않으면 그 구실을 할 수가 없었다. 이준(李浚)은 비록 사로
(仕路)를 개척해 벼슬길에 나아갔고 공신까지 되었으나, 경주지역 사족(士族)들의
인정을 받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향원(鄕員)의 자격을 얻는 일이었는데, 일언지하에 거부당한다.
이러한 거부결정으로 인해 경주 여주이씨 옥산파는 크게 그 운명이 교차되었다. 이후 200여년 이상 지속되는 수많은 사건들, 예컨대 17세기 이래의 옥산서원 원임(院任)
참여 문제, 도산서원과의 불편한 관계, 장산서원 건립과 운영, 서얼허통(庶孼許通)의
문제 등에 있어서 인근사족들의 도움을 얻지 못한 것은 향원(鄕員)으로서 행세할 수
없었던데 기인한 바가 크다. 특히, 19세기 이후 옥산서원을 둘러싼 독락당(獨樂堂)의
옥산파와 무첨당(無忝堂)의 양동파 간의 적서(嫡庶)간 향전(鄕戰)의 치열한 전개
과정은 경주 양동마을 여주이씨 무첨당(無忝堂)에 소장된 ‘옥원사실(玉院事實)’
이라는 필사본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경주 여주이씨 옥산파는 줄곧 신분상승을 도모하며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의 현양 사업에 치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1665년(현종6년) 이전인(李全仁)이 회재
이언적의 학통을 계승했음을 시사하는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을 간행하면서
적서(嫡庶)간 시비의 발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덕천서원(德川書院), 도산서원
(陶山書院)과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영남 남인계열과 결별하고 그 반대편에 있던
당파, 즉 송시열 계열의 노론세력과 연대하여 활로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경주 여주이씨 옥산파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 노론세력과 연대하여 1780년(정조4년) 숙원 사업인 장산서원(章山書院) 건립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전인
(李全仁)을 제향하는 장산서원(章山書院)을 노론세력에 힘입어 건립할 수밖에 없었고,
운영에 있어서 양반 자제가 아닌 평민 자제가 주로 입교하여 수학한 점은 경주 여주
이씨 옥산파를 서자(庶子) 가문으로만 바라본 당시의 아픔과 소외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한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준(李浚) 이래 경주 여주이씨 옥산파는 그들이 가진
재부(財富)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고, 무과 혹은 사마시로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현달한 관인을 배출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자존심을 건 치열한 생존본능과 대를 이은 경제적 치재(治財) 능력은 오늘날 경주 여주이씨 옥산파의 혈통에 여전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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