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들을 향한 심판
욜 3:1-8
1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3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5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6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7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8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욜 3:1-8 / [하나님의 백성을 해친 벌] `그러므로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번영을 회복시켜 주는 그날이 오고 그때가 되면 2) 내가 세계 만민의 군대를 집합시켜 ㄴ) 여호사밧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내 백성이며 내 재산인 이스라엘을 해친 것에 대하여 그들에게 벌을 내리겠다. 그들이 내 백성을 세계 만민들 중에 흩어 놓고 내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기 때문이며 (ㄴ. `여호와께서 재판하시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초기 묵시 문학에서 애용하는 암호이다) 3) 내 백성을 나누어 자기들의 노예로 삼고 소년을 팔아서 창녀를 사고 소녀를 팔아 포도주를 사서 실컷 마셨기 때문이다.' 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지역의 모든 족속들아, 너희가 내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너희가 내게 무슨 보복을 하거나 내게 무슨 화를 입히겠느냐?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보복할 일이 많다. 내가 곧 너희의 모든 행위를 너희 머리 위로 되돌려 보내겠다. 5) 너희는 나의 금은 보물들을 모조리 탈취하여 우상을 섬기는 너희의 모든 신전들 속에 갖다두었다. 6) 너희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그들의 조국 강산에서 멀리 쫓아내기 위하여 헬라 사람들에게 팔았다. 7) 그러나 너희가 그들을 팔아서 보낸 그 모든 곳에서 내가 그들을 다시 데려오고 너희가 한 모든 짓을 내가 이제 너희의 머리 위로 되돌려보내겠다. 8) 또 내가 너희의 아들딸들을 유다 백성에게 팔아 이들이 그들을 먼 나라의 스바 사람들에게 팔도록 하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을 향한 열방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열방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심문하리니(1-3)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의 때는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만국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심문할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열방은 세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심문을 받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땅을 나누었으며, 이스라엘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습니다. 열방이 행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이유는 이들이 비록 이스라엘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행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관계된 표현에 ‘내 백성’, ‘내 기업’, ‘나의 땅’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십니다. 예수께서도 택하신 성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쓰셨습니다(마 25:40).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4-8) 열방의 보복은 사람에게만 미칠 뿐 하나님께 미치지 못합니다.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라고 물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열방의 보복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열방이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영적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갈 6:7). 열방이 저지른 두 가지 죄가 더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 물품들을 이방 신전으로 가져갔습니다. 이것은 신성 모독의 죄에 해당됩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과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끌려간 자들과 후손들을 일으켜 나오게 하고 반대로 유다 자손을 팔았던 자들은 노예로 팔리게 될 것입니다. 열방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보응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공의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심는지가 당신이 거두는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은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석탄 한 덩어리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그 한 덩어리들이 함께 모이면 그 힘은 겨울 추위를 물리친다. 그대가 성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석탄 한 덩어리로 인생의 겨울을 물리치겠다는 것과 같다. -이재철 목사의 ‘새신자반’ 중에서-
< 설 교 >
심판을 피하는 2대 요소
요엘 3:1-13 / 이한규 목사
< 전쟁준비는 심판의 전조입니다 >
어렸을 때 이웃 동네와 전쟁놀이를 하면 어떤 때는 새총과 나무 장총으로 살벌하게 싸웁니다. 싸움 지시는 동네 중학생들이 하고 실제 싸움은 초등학생들이 합니다. 저는 뭣도 모르고 졸병 노릇을 하며 열심히 다른 동네 아이들과 새총 들고 싸우면서 마음속에서는 새총에 눈이 맞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중학생의 지시를 따라 싸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야비한 중학생들입니다. 순진한 애들을 싸움 붙여 놓고 자기네들은 전쟁놀이를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이 직접 싸우지 않고 남북을 싸움 붙일 때 냉철하게 대응해서 그들의 병정놀이에 순진하게 희생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은 이웃나라의 전쟁을 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남북이 붙기를 은근히 바라는 이방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즐겁게 하는 병정들이 되면 안 됩니다. 걸어오는 전쟁을 두려워해서 등을 보이면 안 되지만 힘을 기르고 지혜를 모으고 냉철함을 유지해 최대한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요새도 북한은 호전적인 말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북한보다 훨씬 잘 살던 이라크와 리비아가 얼마나 순식간에 무너졌습니까? 남북이 전면전을 벌이면 의외로 북한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조만간 무너질 가능성도 큽니다. 아무리 외부 소식을 차단하려고 해도 차단이 힘들어지니까 북한 정권의 스트레스와 초조감은 커지고 있고 그래서 언어도 더 거칠어지면서 입만 열면 위협과 공갈 등의 교양 없는 언어들을 내뱉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최후의 때를 앞둔 자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지금 북한 국제적으로 고립 상태입니다. 누가 고립시키지 않아도 외부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하는 북한 정권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그 정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또한 진짜 승리를 원하면 은밀히 힘을 길러야 하는데 상대국들을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들쑤시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불안하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북한이 호전적인 말로 위협하는 것은 요란한 빈 수레임을 자인하는 모습입니다.
입으로는 전쟁을 외쳐도 미치지 않았다면 북한 정권은 전쟁을 일으키기 힘듭니다. 수십 년 간 주민을 세뇌하며 잘 살아온 1%의 상위 기득권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순식간에 잃는 모험을 하겠습니까? 리더는 전쟁이란 말을 쉽게 내뱉지 말고 타당한 전쟁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전쟁을 대비하되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처럼 최후의 수단인 전쟁을 그토록 쉽게 언급하는 것도 끝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 북한 지도층은 막말을 해도 막상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도망칠 것입니다. 6.25전쟁 때 중국과 소련을 배경 삼아 훨씬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확실히 이길 줄 알고 벌인 전쟁에서도 못 이겼습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날은 북한 정권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그처럼 결국은 져서 다 잃는 전쟁을 북한 기득권층이 일으킬까요? 결국 가만히 있으면 무능해 보일까봐 말로만 객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만약 김정은이 전쟁을 일으키면 기득권층의 반발로 갑자기 생포되거나 살해될 가능성도 큽니다. 그처럼 그들 정권은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기에 말로 위협하고 힘의 과시를 위해 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북한은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도 없고 전쟁을 할 의지도 없습니다. 불안하니까 불안을 감추려고 호전적인 언행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격지심이 있으면 가벼운 말에도 큰 상처를 받고 열을 내며 달려듭니다. 지금 북한은 겉으로는 자립갱생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돈과 식량을 구걸하며 국가적인 문전걸식을 해서 국가적인 자격지심이 극대화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작은 말에도 크게 상처 받고 호전적인 말을 쏟아내고 힘을 과시하고 싶은데 50-60년 된 무기로는 안 되니까 핵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곧 멸망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됩니다.
며칠 전, 북한 지도부는 한국을 ‘최종파괴’ 하겠다고 또 위협했습니다. 왜 ‘최종파괴’란 용어를 썼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혹시 전쟁에 이겨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가질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우리들이 이미 북한 정권의 실상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대한민국을 점령해도 통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한국을 ‘적화통일의 대상’이 아닌 ‘최종파괴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얼마나 저주스런 말입니까?
그런 저주스런 말을 너무나도 쉽게 내뱉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정치적 이념보다 국민의 생존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념을 앞세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위협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러나 비겁한 기득권자는 너 죽고 나 죽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박탈될 것임을 잘 알기에 북한의 기득권자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쟁 날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합니다.
이제 북한 정권의 끝이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뒤 퇴로가 다 막혀서 개방을 않으면 ‘북한’이 망하고 개방하면 ‘정권’이 망합니다. 안 망해 보겠다고 핵을 개발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북한 정권의 말로를 재촉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시기문제임을 북한 기득권층도 잘 알고 있기에 아무리 사상통제와 감시를 해도 기득권층에서부터 통일 후에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서 반정을 꾀하는 일도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그 날이 갑자기 올 수도 있기에 그런 상황을 맞을 준비를 늘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 이방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대개 이렇게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기근으로 찾아옵니다. 그래도 회개가 없으면 질병으로 심해집니다. 그래도 회개가 없으면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그래도 회개가 없으면 결국 이방의 노예가 됩니다. 그처럼 심판 때에는 이방인들이 심판의 도구로 이용되지만 회복 때에는 심판 도구로 활용된 이방인들이 오히려 심판 받습니다. 본문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이방인들이 심판당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구절에 나오는 ‘여호사밧 골짜기’는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압, 암몬, 에돔 연합군을 물리친 골짜기입니다(대하 20:26). 하나님이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유린한 나라들을 심판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때 이방인들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유린했습니까? 백성들을 잡아 인신매매를 했습니다(3절). 또한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상인들은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해 그들의 신전으로 가져갔고(5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 헬라 지역으로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6절). 그러나 회복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거꾸로 그들을 심판하는데 그때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의해 노예로 해외로 팔리게 된다고 합니다(7-8절).
어떻게 이방인들이 노예가 됩니까? 힘을 키우고 전쟁 준비를 하다가 결국은 전쟁에 져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심판 전에 꼭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멸망할 사람들이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 말씀을 보면 심판을 앞둔 민족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은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를 소집하고 보습으로 칼을 만들고 낫으로 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 준비를 하며 교만한 언어로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은 멸망의 전조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단번에 심판하려고 그들이 연합군을 이루게 할 때가 많습니다(11절). 그러므로 대적의 연합군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된 연합군은 오히려 더 오합지졸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그처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추수 때가 가까이 왔다고 요엘은 선포합니다(13절).
< 심판을 피하는 2대 요소 >
이 말씀을 보면서 핵 개발을 하며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북한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느낍니다. 이때 민족의 장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본문 10절에서 호전적인 전쟁광들이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드는 것이 심판이 임박한 증거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거꾸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2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평화를 추구하는 삶
전쟁을 두려워하지는 말되 전쟁은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칼을 쓰면 대개 칼로 망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군대와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베드로가 칼을 빼서 말고란 하속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마 26:52).”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교육의 최대 목표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칼을 만드는 교육은 망하는 교육입니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칼을 만드는 교육이었고 아테네의 교육은 보습을 만드는 교육이었습니다. 결국 아테네가 이겼습니다. 지금 북한은 증오와 살기로 보습을 만들어야 할 재원으로 핵을 만들며 동족의 가슴을 겨냥해 칼을 만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리 통일이 절실해도 전쟁을 통한 통일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 분단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분단은 정치와 경제 발전을 크게 막습니다. 또한 강대국에 기대면서 민족의 주체성도 약해지고 칼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세우면서 민족의 양심도 약해집니다. 자세히 보면 퇴폐문화와 한탕주의도 대개 칼을 든 자로부터 옵니다. 결국 민족의 장래를 막는 제일 원흉은 분단의 비극이기에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민족이 되려면 분단의 비극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극복합니까? 월남은 무기로 통일했고 독일은 돈으로 통일했지만 우리는 평화의 복음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마침내 해방의 때가 된 줄 알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 필요가 없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 성령을 받고 로마를 향해 갈던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그 보습으로 로마를 점령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성령이 임한 마가 다락방은 제자들의 가슴을 쳐서 칼을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든 영적인 대장간이었습니다. 당시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계속 칼을 품고 있었고 말고의 귀를 칠 때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칼을 칼집에 꽂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었고 그 보습을 들고 로마로 가서 로마를 정복한 것입니다.
그처럼 성령을 받아 칼을 보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단과 타락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자본주의와 짝하며 외적인 성장신화에 사로잡혔던 교회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삶을 앞서 실천하며 방어적인 전쟁대비는 하되 호전적인 마음은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그처럼 칼을 보습으로 만들려고 해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2. 평안을 추구하는 삶
외적인 평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내는 내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언제 얻습니까? 기본적으로 일단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는 평안을 빼앗습니다.
요새 사랑의 교회 사건으로 한국 교회가 또 큰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축 문제에서 담임목사의 박사논문 표절 문제로 옮겨졌습니다. 그 문제로 요새 많은 박사 목사님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언제 논문 검사하자고 할까봐 장로님들 앞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다고 합니다. 큰 교회 담임목사라면 당연히 걸쳐야 한다고 생각해서 편법으로 받은 외국 신학교 박사 학위가 부메랑이 되어 지금 많은 박사 목사님들의 표정이 이런 표정이라고 합니다. “나 떨고 있니?” 죄는 평안을 빼앗습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실수로 아빠가 키우던 거위를 새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그러자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서 그 거위를 땅에 파묻었습니다. 나중에 아빠가 물었습니다. “철수야! 거위 못 봤니?” 그때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때부터 철수는 아빠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죄 때문에 평안을 잃은 것입니다.
그 상황을 파출부 아줌마가 보고 일을 시켰습니다. “철수야! 설거지 좀 해라!” 철수가 말했습니다. “아니? 왜 아줌마 일을 저 시켜요?” 그때 아줌마가 말했습니다. “너 거위 죽이고 땅에 파묻었지?” 그때부터 약점이 잡힌 철수는 부모님만 없으면 파출부의 종이 되어 설거지와 청소를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결국 사탄의 종이 됩니다.
어느 날, 종처럼 지내던 철수가 너무 힘드니까 맞을 각오로 아빠에게 울며 고백했습니다. “아빠! 사실은 제가 거위를 죽였어요. 그리고 겁나서 땅에 파묻고 거짓말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다 알고 있었단다. 아빠에게는 거위보다 네가 더 중요해.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죄를 숨기면 더 고통스럽단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두드려 주자 철수는 대 자유를 얻고 마음의 평안도 얻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평안을 잃고 사탄의 종이 됩니다. 사탄은 못된 파출부처럼 우리 죄를 들먹이며 협박합니다. “아무개야! 너는 어찌 그리 양심이 없냐? 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생각해 봐! 네 주제에 무슨 교회를 다녀? 너 정말 철면피구나!” 그때 고백하십시오. “사탄아! 네 말대로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어! 잘못도 많이 했어!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이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어! 저리 비켜! 나는 교회 나갈 수 있어!”
죄 사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합리화나 회피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심령의 자유와 평안을 찾으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생각은 사람 기준에 의한 바른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못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행동도 잘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보다 사람의 중심을 더 살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목사님 교회에 심한 골초가 있습니다. 주일 예배 때 교우들은 그분 근처에 가서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담배 냄새가 확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아멘!”도 잘하니까 목사님은 그 성도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담배를 피면서도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것이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때로는 부족한 모습을 노출해도 예배하는 마음 한 가지만 있다면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는 사람이나 은밀하게 헌신하는 사람도 고맙지만 술 담배를 하면서도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도 고맙습니다. 자신은 “술 담배를 해서...”라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을 목사는 “술 담배를 해도...”라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생각과 목사의 생각이 그렇게 다르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다를 수도 있습니다. 주일아침에 부부싸움을 했거나 다른 일로 속상해서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어도 변함없이 주일성수를 하면 본인들은 잘 체감하지 못해도 목회자는 그분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목자장 되신 예수님도 똑같이 고맙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처럼 부족한 모습이 있어도 꾸준히 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제일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배하다 보면 언젠가 부족한 것을 극복하고 대 평안을 노래할 때가 올 것입니다.
< 살면서 분명해 해야 할 것 >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내적인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한 성도가 내적인 평안을 얻으려면 살면서 분명히 해야 할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기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추구하는 일이 자기에게 맞는 정당한 일이라고 확신하면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안과 행복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도 평안과 기쁨이 잃지 않았던 것은 삶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임을 아는 사람만이 결혼 자격도 있고 행복과 평안도 얻습니다. 고귀한 대상에게 스스로 매이는 것은 고귀한 자유를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 매이고 교회에 매이는 것은 고귀한 자유와 대 평안을 얻는 최대 전제조건입니다. 그처럼 마음과 몸과 삶을 모두 예수님의 손에 맡기면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천국 소망이 분명해야 합니다. 종말이 불확실하면 아무리 소유가 많고 권세가 있어도 평안이 없고 그때는 몸이 조금만 아파도 겁이 덜컥 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과 머리에는 복음과 천국 소망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처럼 늘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천국의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천국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면 다른 문제는 다 작게 느껴지면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습니다.
넷째, 나눔의 삶이 분명해야 합니다. 평안은 나눔과 비례합니다. 나눌 줄 모르면 마음이 궁핍해지고 결국 삶도 궁핍해지지만 잘 나누면 마음이 풍성해지고 결국 삶도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잘 나누려는 마음도 구하고 잘 나눌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도 구하십시오. 가난하면 잘 나누기도 힘들고 삶이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또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청빈한 삶이란 최선이 아닌 차선의 삶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차선의 삶이 최선의 삶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종 셋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결산할 때 다섯 개 맡은 자가 말했습니다. “주님! 열심히 일했더니 다섯 개가 더 생겼습니다.”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두 개 맡은 자도 말했습니다. “주님! 저도 열심히 했더니 두개 더 생겼습니다.” 역시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그때 한 개 맡은 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주신 것을 잘 보관하려고 땅에 묻어두고 저는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야단쳤습니다.
청빈(淸貧)이란 말에서 ‘맑을 청(淸) 자’는 좋아도 ‘가난할 빈(貧) 자’는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결국 청빈한 삶은 최선의 삶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많이 벌어 많이 나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열심히 벌어 좋은 일에 많이 쓰게 하소서.” 하늘나라 장부에는 번 돈은 나와 있지 않고 쓴 돈만 나와 있습니다. 축복의 샘은 퍼내야 계속 솟아납니다. 그처럼 퍼내지 않으면 조금씩 썩다가 나중에는 물 근원까지 썩습니다.
돈을 사랑해서 나누지 않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돈은 ‘잘 쓰는 도구’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돈을 잘 나눌 때 기쁨과 행복과 평안도 최고치로 올라갑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삶은 돈을 너무 쌓아놓아서 하나님이 안중에 없을 정도까지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나눌 줄 모르는 부자는 천국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항상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께 온전히 매이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나눔의 모델을 꿈꾸며 최대한 나눔으로 심판의 손길을 벗어나 대 평안을 노래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심판하시는 하나님
욜 3:1-8 / 이상호 목사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곧 기업으로 세우신 이스라엘 주변국들을 심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를 빼앗고, 가족을 해체시키고, 그들의 영적 삶의 근거였던 성전을 파괴하는 그 주변국가, 4절에 보면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을 우리 하나님께서 심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위해서?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주변국가들을 주님께서 불러다가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문하시겠다는 거예요. 옛 성경에 국문이란, 가끔씩 사극을 보면 조선시대에 죄를 지은 사람을, 혹은 반역의 그룹들을 잡아다가 임금이 친히 심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손과 발을 묶어 놓고, 그리고 긴 나무로 팔다리를 엮어 껴서 뒤에서 그것을 잡아당기면, 팔다리가 부러지는 아주 극심한 그런 형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두를 벌겋게 달구어서 가슴과 등판을 지지는 장면들을 우리가 보게 되지요. 그게 국문의 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그 나라들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불러서 심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2절 후반에서 3절에 이르는 하나님이 정말 분노하실 만한 일들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을 전부 포로로 잡아다가 곳곳으로 민족을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나의 땅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제비 뽑아 내 백성을 취하고,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을 쭈욱 읽어보면 5절에서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은과 금으로 만든 하나님 앞에 예배를 위해서 준비된 거룩한 성물들을 그들이 빼앗아다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의 제단에 도구로 사용을 했다는 거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치욕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시고, 내가 그런 일들을 행한 그들을 내가 심문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이 일을 보면서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그 근본적인 저변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상황을 설명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복음전파 이후에 참으로 많은 시련의 때를 겪었습니다. 조선 시대 후반에 너무나도 많은 핍박을 통해서 순교자의 피가 절두산 한 강변에 피가 다 물들일 정도로 순교의 피가 흘렀습니다. 그런 고난의 시기를 거쳐 가면서 근대에 와서 또 일제의 36년 동안에 수많은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구금되고, 감옥에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6.25를 맞으면서 또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공산당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를 지나오면서 가장 배고팠던 50년, 60년, 70년대까지 이제는 우리가 살아야 되겠다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는 그 시기까지 사실 알고 보면 기독교의 전성기였어요.
그렇게 조선시대 후반에 핍박이 심하고, 일제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심했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로 보면, 기독교, 기독교 지도자들을 보면 곧 민족의 지도자, 사회의 지도자라는 등식이 성립을 했어요. 독립서명을 한 33인 중에 2/3가 기독교 목사님, 장로님, 성도들이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주고 있어요.
그러나 60년, 70년까지 오는 동안 기독교 인구는 100만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인구를 볼 때는 100만도 되지 않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대단했어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어느 종교가 우리 사회에 아주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종교냐? 물어보면, 단연 1번은 기독교였습니다. 고아원,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에서 수고하고 헌신하고 섬기는 사람이 누구냐, 당연히 기독교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100만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했어요. 기독교가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70년, 80년대에 무려 4,5배 엄청난 부흥을 이루면서 80년 초반에는 드디어 기독교가 1천 만 명이 넘어갔어요. 세계의 기독교 역사에 이렇게 급성장한 역사는 없었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습니다. 3천5백만, 4천만을 이야기 할 때 1천만이었으니까 놀라운 일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1천만이 넘는 기독교의 부흥에 너무 우리는 취한 나머지 그 때부터 우리는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어요. 역으로 사회적 흐름을 보면 그 때부터 사회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한 종교가 불교입니다.
원래 불교는 사회를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일부 핍박의 시대가 있었지만 그들은 전부 산으로 가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는 다 사찰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랬던 그들이 점점 산 속에서 자신들만의 득도가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사회 속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동네마다 2, 3층에 개척교회를 보는 것은 쉬었지만 무슨 포교당 해서 절의 한 부분들이 들어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동네 가운데 사찰이 생기고, 동네 가운데 중심적인 어떤 종교적 단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최근에 통계를 보면 사회 복지기관에 섬기는 종교적 분포가 바뀌고 사회적 영향력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회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안목들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계에 유력한 한 스님이 기독교 목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교회에서 헌금들 하는 것을 보면 참, 목사님들이 안 됐다고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부흥회라서 헌금해라, 주일헌금해라, 무슨 헌금해라, 그런 얘기하는데, 기독교는 가만히 보면 푼돈 가지고 괜히 목사님들이 고생한다는 거예요. 헌금해라 그랬다고, 시험에 들어 나오니, 안 나오니 그런 소리 하면서 시달리고, 그래봐야 당신들이 뭐, 하는 게 있느냐는 거지요.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떤 구청이나 시에서 사회복지시설을 만들고 이제는 다 정부에서 민간에게 위탁경영을 하는데, 사회복지위원회가 결성되어서 이 단체를 운영할 기관들을 모집하면 기독교, 천주교, 불교 기관들이 와요. 서로 자기들이 운영하겠다고 합니다. 좋은 의도지요. 섬기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 단체를 섬길만한 운영자금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기독교 이 단체는 얼마나 준비할 수 있습니까? 그 중에서 그 곳에 관심 있는 교회가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한 2억 정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주교는 얼마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한 얼마정도 되어있습니다’, 근데 불교는요 ‘우리 50억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30억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복지위원회에서 당연히 그 기관 운영을 불교에 주어버리는 거예요. 그들의 말로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스포츠센터, 무슨 노인복지, 종합복지, 장애인복지 기관들을 많이 가져갔어요. 멀리 갈 것 없어요. 우리 공주는 갑사, 동학사, 신원사 등 큰 절들이 있고 스님들이 하는 얘기가 목사님들은 교회에서 헌금얘기 제대로 못하고, 해 봐야 기껏 1억, 2억 가지고 와서 무슨 사회봉사 하겠느냐고, 우리는 시시하게 절에 오는 사람들한테 헌금 얘기 안 한다는 거예요. 그냥 한 두 사람이 몇 억, 10억, 20억 시주하고 가니까 째째하게 우리는 그런 얘기 안 한다는 거지요.
여러분,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물론 기독교와 불교의 그 어떤 헌금이나 시주에 기본적인 컨셉이 다르지요? 우리 기독교는 과부에 두 렙돈을 가장 많이 한 거라고 우리 주님이 칭찬하시고,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떡 하나 헌신하는 거 그거 귀하다고 축복하시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사실 그들과 그런 부분에서 같은 조건에서 말하기는 어려움이 있어요.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바라볼 때 결과를 놓고 보는 거예요.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할 수 없는 기독교의 분위기, 조금만 이야기 하면 ‘아이구, 이 교회는 무슨 헌금이야기만 해?’이야기 하면서 교회를 떠나지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이제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섬기겠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100만이 되지 못했던 시대에 우리 기독교는 대한민국 제일의 시민들로부터, 교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 가장 유익한 공동체였어요. 그런데 1000만이 넘는 그런 시대에 가장 유익하지 않은 그런 단체로 되어버렸다고 하면, 이건 많이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지요. 이스라엘이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의 주변국가에 그 민족이 찢기고, 나라의 땅덩어리가 찢기고 그들의 영적인 터전인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이유가 군대가 부족하고, 그들의 국방력이 약해서 그랬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호하건대 결코 그것이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된 백성으로서의 성결되고 신실한 삶을 잃어버렸을 때 이미 그들은 힘 빠진 삼손처럼 사회를 향해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정말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 우리 성도들이 이 시대에 깨어있는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좀 예수 믿으면 유치하게 살지 맙시다. 조금만 뭐라하면 시험들고 안 보이는데 담대합시다. 사탄의 밥이 되지 맙시다.
후안 노르티스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 시대의 기독교는 유람선을 탄 유람객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함을 탄 그리스도의 군병들이 되어야 한다.” 사회를 향해서, 우리가 당당히 서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순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을 향해서 빛과 소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내 신앙 하나도 제대로 간수를 못해서 나가니 마니, 믿느니 마니 이러고 있고, 그거 해결하고 그거 수습하느라고 목사가 정신을 못 차린다면 어느 새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겠습니까? 정신들 차립시다.
저는 이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입고 무장한 그리스도의 병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들의 문제 때문에 헤매고 있을 시간, 시간을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을 심문하신다고 하지만, 저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위해 이스라엘을 심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왜? 내 백성, 기업으로 삼은 내 백성들이 이 지경이 된 데에는 주변 강국들의 힘보다는 그들이 안에서 무너진 영적인 상태를 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채찍이 자녀를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불러서 내가 외형적으로는 너희의 모든 땅과 너희의 모든 가정과 너희의 신앙의 터전을 흩어버린 그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을 내가 심문하겠지만 사실 너희가 그런 이방인들의 밥이 되고, 영적인 상태를 내가 심판하겠다. 베드로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깨어라. 지금 이 시대는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아서 헤매고 있는데, 깨어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깨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영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각이 깨어 있어야 하구요.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늘 군사들은 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훈련의 땀은 피곤하고 어렵지만, 훈련된 사람들만이 귀한 전쟁에 쓰임받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무슨 전쟁이 일어날지 항상 전쟁을 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어야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십자가의 군사들로 이제는 졸지 않고, 이제는 세상을 향해서 흐르는 물에 흘러가지 않고, 빛과 소금으로서 이 시대에 주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온전히 감당하고 믿음의 삶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들이 행한대로 갚으리라
요엘 3:!-8
요엘서 3장은 요엘의 제 2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들이 심판을 당하고(3:1~13),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복되어 복을 얻는 내용입니다(3:14~21). 그리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들이 심판을 당하는 이야기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오늘 다룰 첫 부분(3:1~8)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선포되는 부분이고, 다음 부분(3:9~13)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시고 결국 저들이 완전히 멸절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2a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앞에서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치신 하나님이시지만, 이제는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며 저들을 심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만국을 모아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겠다고 하시는데, 여호사밧 골짜기라는 지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의 여섯 번째 왕, 남북으로 나뉜 후에는 네 번째 왕의 이름이지만, 그 이름 자체가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이런 표현을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을 친 다른 이방나라들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재판정에서 피고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이방나라들을 고발하는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서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할 그 때”라는 기록을 통해 요엘서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지만 여러 반론들이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유다 백성들이 그 황폐화된 땅으로 돌아와 “남은 자”로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때라고 보면 됩니다.
2b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3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5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6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흩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나누며, 그 백성들을 끌어갔으며, 그중 어린 아이들, 소년과 소녀를 노예로 팔아버렸고,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보물들을 빼앗아 자기들의 이방신전으로 가져갔고, 유다와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들에게 팔아서 멀리 떠나게 했다는 죄목이 주어집니다. 이 죄목의 핵심은 바로 노예로 팔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였다가 독립해 나온 민족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핵심가치를 두 가지로 요약하라면 자유와 생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을 노예로 끌어가고, 또 팔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들이 신전의 재물들을 가져갔다는 죄목도 추가되어 있는데, 이 역시 그 신전의 기물들을 의인화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 사람들을 끌어다가 다른 나라의 노예로 삼듯이, 성전의 기물들을 끌어다가 이방신 신전을 섬기는 노예가 되게 했다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유민인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은 것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7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8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저들의 죄를 그대로 갚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노예로 삼았듯이, 저들도 다른 나라에 의해서 노예가 될 것입니다. 특히 “스바 사람”에게 팔겠다는 하나님의 선포는 그 당시 근동지역의 입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나라로 생각되었던 스바에 노예가 되게 하겠다는 것으로, 고향으로부터 가장 먼 곳까지 쫓겨나 노예가 되는 신세가 되리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은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노예로 끌려간 그곳에서 다시 돌아와 새롭게 그 나라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더 이상 인간 역사 가운데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특별대우를 하시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벌하셨던 것처럼, 교회도 불신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그만큼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지 않았기에 당하는 징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공격한 자들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대적들이 반드시 그들이 행한 대로 당하게 하십니다. 교회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긍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로서의 자긍심을 품고 세상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