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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코 여행6 - 닛코의 도쇼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을 생각하다!
2022년 11월 6일 닛코 (日光) 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는 교외에 기리후리노타키 (霧降ノ滝) 폭포를 보고
돌아와 시내버스를 타고 신쿄 (神橋 신교) 다리를 건너 “西參道 서참도” 에 내려 참배도로로
올라서니 일광산 윤왕사(日光山 輪王寺) 라는 절이 보이는데 참배로는 구름같은 인파가 밀려나옵니다.
신사에는 수많으 인파로 붐비는 가운데 전각들은 금칠을 한지라 번쩍거리는 모습을 보는데 도쇼구 東照宮
(동조궁) 는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세운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의 위패 를
모신 사당 이니 1616년 이에야스가 죽자 닛코(日光)에 웅장한 동조궁을 건조하고 유골을 안장하였습니다.
계단을 오르니 ' 요메몬’ 은 일본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일컬어지니 오쿠미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묘) 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잠자는 고양이’ 조각도 유명한데 ‘닛코(日光)’
라는 이름을 따서 햇볕(日光) 을 쬐면서 낮잠 을 자는 모습이 그려져서 평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영묘 오쿠미야 로 이어지는 200개짜리 돌계단은 한 계단에 반석을 한개씩
이용해서 만들었고, 돌울타리 또한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서 만들었으며.....
기둥문을 빠져나가면 관부선명(官符宣命) 등의 문서가 보관된 ‘고호조 (御宝蔵)’ 가 있습니다.
그 너머에 건물에는 ‘오쿠미야하이덴’ 이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이 보관된 고호토 (御宝塔) 가
있으며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가나에스기’ 라고 불리는 신령이 머무른다는 나무도 있습니다.
본전은 ‘요메몬’ 안에 있으니 구경은 가능하나 촬영은 금지 되어 있으며 내부는 다양한 동물
들이 아름다운 조각으로 그려져 있다지만.....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는 천천히 볼 수
없으며 하이덴 좌우에 ‘장군이 앉아있었던 어좌’ 와 ‘친왕이 앉았던 어좌’ 가 있다고 합니다
매년 5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에는 춘계 대제 가 열리니 17일에는 내빈들이 참례하는 제사
와 ‘신사 하야부사(마상 활쏘기)’ 의 봉납, 그리고 3대의 신체를 모신 가마가 닛코
후타라산 신사에 가는 ‘요이나리 축제’ 등 행사가 이어지는데 일반인이 다수
방문하는 것은 18일로 400년전 행렬을 완전하게 재현시킨 ‘천명 무사 행렬’ 이 거행됩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의 노력으로 1600년 7월 17일 히로시마의 모리 테루모토 는 오사카성에 입성해
히데요리에게 문안하고 서군의 총대장으로 취임하자 미쓰나리는 거병선언을 발표하여
주고쿠(中国), 시코쿠(四国), 큐슈 (九州) 각 다이묘가 추종해오니 10만의 병력 이 모이게 됩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죄상 13개조 고소장 을 발표하며 세력을 규합했는데 서군의 총세는
9만 4천명 에 달했으니 미쓰나리는 병력을 이끌고 2년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숨을 거둔 교토 후시미성 (伏見城) 을 1600년 7월 19일 포위한후 공격하자 불과 2천으로
성을 지키던 도리이 모토타다 는 20분지 1 병력으로 성을 베개 삼아 무려 13일 이나 버팁니다.
미쓰나리측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등 4만 대군이 일제히 공격했으니
도리이 모토타다는 미끼로 버려진 말 이 된 셈이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2천 병사로 13일간에
걸쳐 농성으로 저지하며 결국에는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하니 "미카와 무사의 귀감" 이란 칭송을 받습니다.
도리이 모토타다의 항전은 서군의 발목을 묶어 두었고 이에야스에게 서군과 일전을 벌일
명분을 제공 했으니 서군은 후시미성을 점령한뒤 오가키성에서 농성을 준비했는데
미쓰나리는 부대를 후퇴시켜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에 대적 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합니다.
미쓰나리는 동군의 진격이 예상 보다 빨랐기에 병력을 뒤로 물려 세키가하라를 전장 으로 삼는 것이 유리
하다고 판단했던 것인데 또한 서군 장수 중에 죽은 히데요시의 처남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가 이에야스
에게 회유당해 마쓰오산에서 진군을 멈추고 눈치를 보고 있었기에 설득 하기 위한 이유 였을수도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신 함으로써 동군이 승리 를 하는데
히데아키는 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고다이인의 오빠 인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3살때 히데요시의 양자 가 된후 하시바 히데토시라고
불리며 단바(교토) 의 가메야마 10만석을 받았고, 1591년에는 히데요시의 성을 받습니다.
하지만 1593년 8월에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 를 낳자 필요 없게된
히데아키는 다음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자 로 보내져 이름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로 바뀌었으며..... 1594년 11월에 히고(구마모토) 의 미하라성 성주로 부임합니다.
히데요시는 아들이 없었으니 누나 닛슈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아 간바쿠(關白) 지위를 물려주니
도요토미 히데쓰구 였는데..... 이제 진짜 아들이 태어난지라 장래를 염려해 1595년 모반혐의를 씌워
히데쓰구를 고야산 으로 추방한 후 할복 시키는데 단바의 영지중 일부는 이시다 미쓰나리 에게 주어집니다.
히데아키 는 사건에 연루 되면서 단바의 가메야마 10만석 영지를 몰수 당하고 추방되나 고모 히데요시
의 정실 고다이인의 도움으로 돌아왔으며 이무렵 양아버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은거하면서
양자 히데아키 에게 지쿠젠국과 지쿠고국 등 2개국(후쿠오카) 52만석 의 거대한 영지를 물려줍니다.
1592년 임진왜란 일본군 총대장 이 히데요시 밑에서 자란 어린 우키다 히데이에 였듯이 1597년 정유재란
총대장은 16세에 불과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로,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이 명나라군에 포위당하자
남해안 26개 왜성에서 8만 병력을 차출해 조명연합군을 격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군감 이시다 미쓰나리 는 히데아키가 총대장으로서 부산성을 수비하지 않고 경솔하게 울산
으로 병력을 냈다고 참소 하니 그는 히데요시로부터 에치젠(후쿠이현) 기타노쇼 18만석으로
영지 감봉 처분 을 받았으며 고바야카와 가문의 영지는 이시다 미나리가 대신 하여 관리하게 됩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고다이로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정 에 의해 영지 감봉과 이동 처분은
무효화 되었으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큰 신세 를 진 셈인데 이게 다 이에야스의 원대한
계획 중에 하나이니 1만 3천을 지휘한 19살 히데아키 는 결국 배신하여 서군을 공격하면서 전세는 결정됩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히데요시 아들을 지지하는 서군에 승리해 일본을 통일한 이에야스에게 1603년
고요제이 천황(일왕)이 쇼군을 임명하니 에도 도쿠가와 막부 가 설치되는데.... 2년후 쇼군직을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1607년 슨푸성(시즈오카)으로 내려오니 오고쇼라 불린 상왕 이 된 것입니다.
세종 1년 1419년 6월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실행한 대마도 정벌은 세종조 일이기는
하나 사실상 병권을 계속 쥐고있던 상왕인 태종이 주도한 것 이었으니 이 시기 일본에서도
쇼군 히데타다 보다는 배후에 슨푸성(시즈오카) 의 이에야스 가 계속 다스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구 는 신라시대에도 수십차례나 침범해 4세기말 수도 서라벌이 포위 되니 내물왕이 광개토
대왕에게 노객 이 되겠다며 구원을 빌 정도로 피해가 컸었는데.... 1223년 고종때 김해를
약탈한걸 시작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극성을 부리니 해안가에는 사람이 살수 없었습니다.
이후 공민왕 (1352~1374) 때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 에 까지 출몰
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0년간 무려 100회가 넘는 침입 으로 고려는 쑥대밭이 됩니다.
우왕 (1375~1385) 때를 보면 10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나 달했으니 강화가
함락 되고 수도 개경이 왜구에게 위협 당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
지는데 해안 지방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변해 황폐화 됩니다.
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하는 중에 왜구는 양광, 전라,
교주도에 침입해 살육을 자행하자 1389년 2월 박위는 전함 100척으로 대마도 를
급습해서는 정박중인 배 300척을 태우고 가옥을 불질렀으나.... 도민들은 산속으로 도망칩니다.
왜구를 죽이거나 포로등의 전과는 없이 조선인 포로 100인만 구해 귀환하니 1223년 고종
부터 1389년 까지 166년 동안 700여차례의 왜구의 침략을 받은 후에야 겨우 한번
반격한 것이니 고려는 군자지국, 선비의 나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이었기 때문일까요?
1398년 1월 대마도 사절이 조하에 참예한후 예물을 바치고 쌀과 콩 을 받아 갔으니 도주
소(宗貞茂) 등이 보낸 자들인데, 부산포와 내이포 에 한해 출입 하도록 하고 행장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해서 염포(울산) 와 가배량(통영) 에도 왜관 을 설치합니다.
하지만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때는 60여회 나 되었는데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중 비인현(충남 서천) 을 침입하고 해주를 노략질하며 황해도절제사
이사검의 병선 5척이 왜구에게 포위 되자..... 태종은 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 을 결정합니다.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경상· 전라· 충청 3도 병선 227척에 1만7천 병력 으로 65일치
식량을 준비해 1419년 6월 20일 대마도 에 도착하여 왜군 114명을 참수 하고
21명을 포로 로 잡았으며..... 1,900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29척의 선박 을 노획해 불태웁니다.
2만 에 가까운 압도적인 무력을 투입했음에도 적병을 사살하거나 섬을 점령하는 뚜렷한
전과 없이 오히려 절제사 박실이 산속으로 진격하다가 복병을 만나 장수와 군사
180 명이 전사 하자..... 조선군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반격하지 못하고 철수 하게 됩니다.
그러나 철군한날 왜구가 재침 하므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중지하였는데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어서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에 통상을 허락하고 공물에 대해 쌀과 콩 을 주어 달랩니다.
왜구는 조선이 부산등 3포를 열어 통상을 허락 하니 대폭 줄어들었지만 임진왜란 수십년 전에도 왜구
가 전라도에 침입하는등 이어지다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규슈의 섬 까지 장악하니 완전히
근절된 것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가라이리(중국 입성)” 를 명분으로 임진왜란 전쟁을 일으
켰을때 이에야스 는 규슈 가라쓰의 나고야성에서 히데요시와 함께 머물며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후 에도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 외교관계를 재개해 통신사 를 요구할때 이걸 내세우니 “나는 관동
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년 일에 대해서 미리 알지못했고 히데요시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진실로 조선과
나와는 원한이 없고, 화친 하기를 바란다” 라고 수교를 요청하니 조선은 왜관을 재설치 하고 1607년을
시작으로 쇄환사를 보내 포로를 일부 데려왔으며 1636년 부터 500명 가까운 통신사 일행이 12회 파견 됩니다.
도쿠가와 후손들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후 메이지유신으로 도쿠가와 에도 막부가 무느지는 1868년
까지 268년간 일본을 통치 했는데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출병하지 않았으니 침략전쟁과 무관하고,
또 쇄국정책을 실시해 일본인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엄금했으며 위반시 사형에 처함으로써 조선과
명나라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를 근절 시켰으며 268년간 대외 침략을 한번도 하지 않은 평화정권 입니다.
동서고금 5천년 인류 역사에서 외교 근본은 "원교근공(遠交近攻)" 이니... "이웃한 나라는 예외없이
철천지 원수" 라! 로마와 카르타고, 그리스와 터키, 프랑스와 영국, 독일과 프랑스, 중국과 베트남,
버마와 태국, 인도와 파키스탄이 그러한데, 조선과 일본은 1600년부터 1875년까지 275년간
전쟁없이 선린우호 평화롭게 지냈으니.... 인류 역사에 이런 "긴 평화는 전무후무한 사례" 입니다!
5천년 세계 역사에서 이웃나라는 100년 평화 도 드문데 한국과 일본은 275년간 평화롭게 지냈으나
일본에서 존왕양이론자들이 1868년 "무진전쟁 반란" 을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를 무느뜨리고
천황(일왕)을 옹립해 메이지 신정부 를 구성한후 일본의 사절단이 동래에 와서 왕정복고 사실을
알리는 서계를 1868년 12월 19일 전달하자.... 흥선대원군 집권하의 조선 측은 접수를 거부 합니다.
사절 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 을 사용한 점, 황제, "황조"(皇祚), "황상(皇上)" 같은 중국의 천자만이 쓸수 있는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접수하지 않았으니 이제 조선과 일본 사이 275년간
이어진 평화는 깨지고 긴장 관계로 들어가 끝내는 1875년 운양호 사건 무력 충돌 로 이어집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측 서계(書契)의 형식 및 용어가 구규(舊規)에 어긋난다 는 이유로 끝내 거절하였으니
메이지 일본 정부와 새로운 관계 맺기를 거부한 이면에는 유교적 도덕이 지배하는 중화 문명세계와
유교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야만세계로 이분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일본을 중화문화권 밖
으로 이탈해 서구 양이(洋夷) 들과 같아진 야만국 이라고 보는 왜양일체의 부정적 일본관 때문인가 합니다.
결국 1875년 대포 2문을 장착하고 65명이 탄 일본 군함 운양호 단 한척이 영종진 에 이르러 포격후 22명
육전대를 보트 2척 에 태워 상륙시키니 450명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 을 내고 대포 35문과
총 130여정을 뺏긴채 도주 하는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는 없고 경상 2명 이라? 그런데 일본인
부상자 2명은 조선군의 사격 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트로 상륙해 뻘밭에 빠져 다친 것이니 기가 막힙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부인 10명에 자녀 16명 을 두었으니 호색한으로 너무 많지 않은가 싶지만,
조선의 세종은 13명의 부인에게서 자식이 25명, 태종이 29명, 성종 28명, 선조 25명, 정종
23명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조선은 500년간 청상 과부들의 재가도 금지 한 반면에
남자들은 새장가는 물론이고 본부인을 두고도 첩 을 들여 두 살림을 차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해서 조선말에 드디어 사달 이 나니 1899년 서울 경복궁 인근 북촌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모임 ‘찬양회’
가 상소를 올렸으니! “한 지아비가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덕의를
잃는 행위” 라고 먹으로 쓴 흰 헝겊을 장대에 매단 뒤 덕수궁 인근에 세우고는 그 옆에 30,
40대 여인 50여명 이 앉아 “상감(고종 황제) 께서 먼저 후궁을 물리치라” 고 외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서자로 3남인 히데타다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계자로 2대 쇼군 이 된건 하마마쓰성에서
그가 태어난해 9월에 장남 노부야스 가 이에야스의 정실 이마가와 가문 출신 어머니
쓰키야마도노와 함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며... 차남 오기마루 는 히데요시와 전쟁
후에 강화를 하면서 히테요시에게 양자(인질) 로 주었으니 그 다음인 3남이 계승한 것입니다.
6살때 잡혀와 인질생활을 하던 이에야스 가 열세살 됐을 때 영주의 눈 밖에 나서 한가한 시간을 갖게된
이마카와 가문의 군사였던 승려 셋사이 가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 과 같으니
조급해 하지말고 길게 보아야 하니 기왕이면 온세상을 짊어지라 는 가르침은 이에야스 평생의
좌우명이 되니 훗날 슨푸성(시즈오카) 에 은퇴해 죽으면서 후손들에게 남기는 "유훈" 이 되었습니다.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うて遠き道をゆくが如し、いそぐべからず、不自由を常と思へば不足なし、
こころに望おこらば、 困窮したる時を思ひ出すべし、 堪忍は無事長久の基、
いかりは敵とおもへ、 勝事ばかり知りて、 まくる事をしらざれば、 害其身にいたる、
おのれを責めて、人をせむるな、及ばざるは過ぎたるよりもまされり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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