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5 - 다이쇼시대에 조성된 구 후루카와저택을 찾아 구경하며 연호를 생각하다!
11월 7일 아침에 도쿄역 야에스 기타구치 (八重洲 北口)에서 큰 도로 맞은편 골목에 자리한 도요코인 호텔
에서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는 도로 건너편에 도쿄역 야에스주오미나미구치 (八重洲中央南口)
로 찾아가서는 여러 지방으로 가는 버스 중에서 내일 "나리타 공항" 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를 확인 합니다.
그러고는 도쿄역 으로 들어가서는 우여곡절 끝에 기계 에서 오늘 하루 도쿄시내 관광 을
위해 JR 기차와 야마노테센 전철 외에도 시테츠(사철)인 도에이, 에이단 지하철 을
24시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패스인 1,310엔 하는 “도쿄 프리깃푸” 를 구입합니다.
표를 개찰대에 통과시켜서 안으로 들어가 몇바퀴를 돌아 시계 반대방향으로 시내를 한바퀴 도는 야마노테센
(山手線) 전철을 타고 간다(신전) 와 우에노에 일모리를 거쳐 8번째 정거장 코마고메 Komagome 駒込
역에 내려 몇 블록을 지나 구 후루카와 정원 (旧古河庭園) 에 도착해 150엔 하는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구 후루카와 정원 (旧古河庭園) 은 다이쇼(大正) 6년인 1917년에 古河虎之助(고하호지조)
씨의 본저로 사용한 서양식 건물과 정원 이니 건물과 서양식 정원은 j 콘도루가
설계했으며 일본 정원은 도쿄의 정원사인 小川治兵衛(소천치병위) 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 구 후루카와 정원 (旧古河庭園) 의 현재 보이는 건물과 정원은 건축 당시 다이쇼
시대의 모습 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니.... 현재 일본에서도 극히 귀중한
사례라고 하는데, 그 보존 가치를 인정 받아 일본의 명승 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나라의 명승 지정 (國の名勝に指定されている) 은 1905년 조선의 남대문(숭례문) 철거를 막은 재경
거류민단장 나카이 기타로 처럼.... 도로 공사로 철거될뻔 한 것을 1916년에 실업가 시부사와
등이 나서고 주민들도 보존 운동을 벌여서 고하가의 당주인 고하호지조등이 기부금을 내고
해서 보존에 성공한지라 다이쇼(대정) 11년인 1922년에 國史跡に 指定 (국사적니지정) 되었습니다.
다이쇼(大正 대정) 시대 라고 하면 일본인들은 그 연대를 바로 알아 듣지만, 우리로서는
도대체 그게 언제쯤인지 감이 오지도 않는데... 요즘은 덜하지만 예전에는
기차표에 날자 가 서기(西紀)가 아닌 헤이와(平成) 몇 년 으로 적혀 당황했던 적이 기억납니다.
일본은 서기(西紀)를 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나라 연호 를 쓰니 메이지시대(明治 1868~
19120 - 다이쇼시대(大正 1912~1926) - 쇼와시대(韶和 1926~1989) - 헤이와 시대(平成
1989~2019) 를 거쳐 2019년 부터는 레이와(令和) 시대 라고 부르니 금년은 레이와 4년 입니다.
최초의 연호 (年號) 는 기원전 140년에 중국 한(漢) 나라 황제인 무제(武帝) 가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우리나라는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연호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가 중국에서 한자(漢字) 가
들어오면서 중국의 연호를 채택 했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 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지만 우리나라의 전기간을 통해 1% 가 안되는 기간이고 99% 는 중국 연호 를 사용했습니다.
조선은 중국 연호 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사신을 중국에 보내 매년 달력을 받아와서 써 오다가 고종
임금이 1897년에 환구단을 쌓고는 중국의 제후국에서 벗어나 칭제건원 (稱帝建元) 했으니,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 으로 고치고 연호를 건양(建陽) 이라 하며 단기(檀紀) 4230년 이라 했고
1948년 이승만은 단기(檀紀) 4281년을 부활시켰지만 박정희가 서기(西紀) 1961년 이라고 바꿉니다.
중국의 황제가 즉위할 때 정하는 연호(年號) 외에 서양에서는 예수가 탄생한 해 부터 시작하는
주님의 해, 즉 서기(西紀) 가 있으니 금년은 "주님이 이땅에 오신지 2022년 되는 해"
이니..... 우리나라는 "서양 기독교 문명" 을 받아들인 나라라 서기 를 사용하는 것인가 봅니다?
불기(佛紀) 는 석가모니가 열반한 해를 불기 원년 (서기전 544년) 으로 삼으니 금년은 2566년 이며,
이슬람력은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 (율리우스력 622년 9월 24일)
을 원년으로 삼으나 양력이 아닌 음력을 사용해 1년이 354일 이니 정확한 해를 계산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인 연호(年號) 를 일본에서는 원호 (元げん号ごう) 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
에서 서력기원을 약칭하여 서기(西紀) 라고 하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서력(西暦)
이라고 하며, 그에 비해 자기네 연호를 서력 에 대응하여 화력(和わ暦れき) 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은 서기 645년 고토쿠 천황(일왕) 이 즉위한 후 처음으로 다이카(大化) 라는 연호 를 채택
했으며..... 650년에는 하쿠치(白雉) 라고 개원했으나 잘 쓰지 않다가 686년 덴무왕이
잠깐 슈초(朱鳥)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후 중지했으며 그후에 701년 몬무 천황(일왕) 이
다이호(大宝) 연호 를 채택한 이후로는 오늘날까지 1,522년간을 끊임없이 연호를 사용 합니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고려나 조선 과 달리 1,522년간 끊임없이 독자적 연호 를 사용한 일본에서
새 천황이 즉위 할 때는 반드시 새 연호를 만들고 그외에 나라에 자연재해가 계속될 때
개원(연호변경) 하는 관례가 있는데..... 정부 기관이나 지방 자치단체가 일본 국내만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어 공문서와 호적이며 주민등록은 서기가 아닌 "자국의 연호" 를 써 왔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재일 외국인이거나 외국어로 작성하는 문서 등에는 대체로 서기 를 많이 쓰니.... 출입국
재류관리청은 일본의 사증심사와 재일 외국인의 재류관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재류카드 는
물론이고, 전부야 아니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발표나 발급하는 문서 등은 웬만하면 서기 로 씁니다.
일본사 교과서에는 자기나라 연호 가 많이 나오는 편이지만, 수학, 영어, 국어, 지리, 세계사, 공민,
과학등 타 과목의 교과서에는 서기 표기가 많이 나오는 편이며, 특히 외국어 교과서는
서기로만 나오지만..... 그러나 병원의 진료 차트는 서기가 아닌 연호 로 표기하는 곳이 많습니다.
세계화의 진전 으로 일본에서도 연호 사용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니 마이니치 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쇼와시대였던 1975년 에는 연호와 서력기원 중 연호를 주로 쓰는 사람이 82% 에 달했고 서력
기원은 4%, 둘 다가 13% 에 불과해 연호 사용이 압도적이었으나, 레이와 연호가 정해질 즈음인
2019년에는 연호 34%, 서력기원 23%, 둘 다 34%로 연호와 서력기원의 사용률이 비슷해졌습니다.
2019년 아키히토 일왕이 나루히토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5월 1일부터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 가 사용
되었는데, 새 연호는 일본 최초의 운문집인 만요슈(萬葉集 만엽집) 의 제5권 매화의 노래 32수의
서문에서 따왔으니..... 매화의 노래라는 와카(和歌) 는 나라 시대의 가인(歌人) 오토모노 타비토
(大伴旅人665-731) 가 서기 730년에 자기 저택에서 '매화 잔치(梅花の宴)' 를 열었을 때 읊었다고 합니다.
「初春令月、氣淑風和、梅披鏡前之粉、蘭薰珮後之香。」
「초봄의 길한 달, 기운 상서롭고 바람 평온하니, 매화는 거울 앞 가루를 날리고,
난초는 살결 같은 향을 풍기네.」 『萬葉集』 「卷五」 梅花の歌 三十二首 序
初春(초춘) 은 '초봄' 과 '신년' 이라는 두가지 의미로 해석할수 있고, 令月(영월)은 음력 2월 또는 '길한 달' 을
의미하니 새 연호를 발표한 2019년 4월 1일은 음력으로 2월 26일로 氣淑(기숙)은 '상서로운 기운' 이라는
뜻인 淑氣(숙기)에서 나온 말이니 해석에 있어 논란이 됐던 부분은 마지막 4구 하이고(珮後) 라는 표현입니다.
珮(하이) 는 한국 한자음으로는 '패' 라고 읽는데 몸에 다는 장신구 를 뜻하니 일본어로는 훈독
으로 '오비모노' 라고 읽는데...... 나라 시대 때의 의복 장신구를 일컫으니 장신구는
몸을 치장하는 물건이므로, '장신구 뒤의 향기' 라는 말은 몸, 혹은 살의 향기 를 암시합니다.
珮(하이)가 일본의 상용 한자 에 포함되지 않은 글자라서 일본에서 조차 '대체 珮後(하이고) 가 무슨
의미냐?' 하는 질문이 많았으니 구조상으로는 3구 鏡前(경전) 의 前 과, 뒤 4구 珮後(하이고)
의 後 가 전후 대비를 이루어 '거울 앞의 가루, 장신구 뒤의 향기' 라는 운율을 조성 하고 있습니다.
만요슈(萬葉集 만엽집) 는 아무리 늦어도 서기 759년 이전에 와카(和歌) 노래를 엮은 책 으로 5세기 부터
8세기 중반 까지 350년간 지어진 4,516수의 시가 를 모아서 엮은 책인데 만엽집의 엽(葉) 의 의미를
'코토노하(言の葉)', 즉 말(言葉, 코토바) 이라고 풀이한 설이 있으니 '많은 시를 엮은 책' 이라는 뜻입니다.
만요슈는 아직 가나(仮名) 가 없는 시기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향찰" 과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를 빌려 표기하는 '만요가나' 로 쓰여, 고대 일본어를 연구할 때 매우 가치가 높은
자료이기도 하며.... 시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유교, 도교, 불교의 내용을 차용한
것도 있으며 모두 20권으로 759년경에 최종 편찬자는 오토모노 야카모치 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향찰(鄕札) 로 지은 고대 시가인 향가(鄕歌) 는 일본 보다 시기도 늦고 양도 매우 적지만
1075년 균여전에 11수 그리고 1281년 일연의 삼국유사에 14수 가 전해지니 25수 전반에 걸친
주해는 조선인(한국인)들은 4서 5경 유교 경전 이 아닌지라 관심이 없었는지.... 일본인인 "오구라
신페이" 가 처음으로 이루었고 이후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양주동이 더 나은 해독 을 합니다.
籠毛與 美籠母乳 布久思毛與 美夫君志持
(こもよ みこもち ふくしもよ みぶくしもち)
此岳尓 菜採須兒 家吉閑 名告紗根
(このをかに なつますこ いへきかな なのらさね)
虛見津 山跡乃國者 押奈戶手 吾許曾居
(そらみつ やまとのくには おしなべて われこそをれ)
師吉名倍手 吾己曾座 我許背齒告目 家呼毛名雄母
(しきなべて われこそませ われこそはのらめ いへをもなをも)
바구니 / 바굼 들고 / 호멩이를요 / 호멩이를 들고
이 언덕에서 / 나물 캐는 애 / 집안 말해요 / 이름 말해요
(소라미츠) / 야마토란 나라는 / 모두 통틀어 / 내가 다스리네
모두 통틀어 / 내가 지배하네 / 짐이야말로 밝힐까 / 집안도 내 이름도
만요슈, 1권 잡가(雜歌) 제1수
만요슈 노래의 저자는 수백명 도 더 되는데 그 중에 가장 빼어난 이는 덴무왕(天武天皇) 의 비(妃) 누카다
오키미 額田王(액전왕) 를 드는데.... 이 여인은 덴지왕의 동생인 대해인(덴무) 의 처 로 “십시”
라는 딸 까지 두었는데도 형으로 왕이 된 중대형(덴지왕) 이 누카다를 빼았으니 큰 불화의 시작 이라....
결혼식후 사냥 연회 에서 대해인은 두번째 처인 우노 가 있음에도 누카다 에게 미련 을 버리지
못하고 다가가니..... 이에 당황한 덴지왕(天地天皇) 의 비인 누카다가 시가 를 읊습니다!
꼭두서니 자란 밭 인줄 친 밭을
이리 저리 서성대면 밭지기는 안 볼까요
그렇게 그대사 소매를 흔든다면.
그러자 훗날 형인 덴지왕(천황)이 죽자 673년에 임신의 난 쿠데타 를 일으켜 조카를
죽이고 덴무왕에 오르는 대해인 왕자 는 다음과 같이 화답 했다고 합니다.
꼭두서니처럼 아름다운 그대가 미울라치면
이미 남의 마누라인데도
내 어찌 사랑하리오.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 향가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 : 양주동 해석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열치매
나토얀 ᄃᆞ리
ᄒᆡᆫ 구룸 조초 ᄠᅥ가ᄂᆞᆫ 안디ᄒᆡ
새파ᄅᆞᆫ 나리여ᄒᆡ
기랑(耆郞)ᄋᆡ 즈ᅀᅵ 이슈라.
일로 나리ㅅ ᄌᆡᄫᅧᆨᄒᆡ
랑(郞)ᄋᆡ 디니다샤온
ᄆᆞᅀᅡᄆᆡ ᄀᆞᇫᄒᆞᆯ 좇누아져.
아으 잣ㅅ가지 노파
서리 몯누올 화판(花判)이여.
(구름을) 열어젖히니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를 모르실 화랑의 우두머리여.
첫댓글
하아... 참 멋진 아이콘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