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사랑하심
말 1:1-5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말 1:1-5 / [예언의 말씀] 여호와께서 예언자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말씀이다. 2)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사랑]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설명하여 주셨다. `에서와 야곱은 본래 형제가 아니냐? 그런데도 나는 너희의 조상 야곱만을 사랑함으로써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 나는 야곱의 형인 에서마저도 거절해버렸다. 내가 에서의 후손들이 살던 땅, 곧 에돔의 산지를 황무지로 만들고 자자손손에게 물려주던 농경지를 허허벌판으로 뒤엎어 놓았다.' 4) 에서의 자손들은 `우리가 비록 파괴를 당하였으나 이 폐허에 다시 건설하면 된다!' 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다시 건설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다시 무너뜨리겠다. 그때에 사람들은 에돔 땅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역'이라고 부르며 에돔 족속을 언제까지나 주님의 진노를 모면할 수 없는 백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5) 너희 자신도 그런 일을 직접 체험할 것이고, 저절로 이같이 선언할 것이다. `진실로 여호와의 크신 권능은 이스라엘에서 먼 밖에까지 뻗칩니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계시입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오실 메시야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예언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1-2a) 말라기의 활동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귀환 100년 후이며, 스가랴와 학개 시대 이후입니다. 또한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 혹은 그 직후에 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라기가 지적한 백성의 죄와 느헤미야가 지적한 죄가 동일합니다(제사장들의 타락[느 13:29; 말 1:6-2:9], 이방여인과의 통혼[느 13:23-25; 말 2:14-15], 십일조를 도둑질함[느 13:10-11; 말 3:8-12]). 이때는 이미 성전이 재건되었고, 희생제물을 드렸으나 선지자들(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자 백성은 실망하였고 이로 인해 하나님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말라기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과 동시에 그들의 불순종을 책망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2b) 백성의 첫 번째 반문입니다. 말라기서에는 모두 일곱 번의 반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1:2)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1:6)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1:7)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2:17)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3:7)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3:8)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3:13)” 이런 반문들은 그들의 불신과 불순종의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c-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 두 민족을 비교합니다. 하나님께서 형 에서를 미워하시고 동생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창 25:23). 이스라엘(야곱의 후손)과 에돔(에서의 후손) 모두 죄를 범하고 바벨론에게 정복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이스라엘은 용서받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반면, 에돔은 회복되지 못하고 소멸되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의 소멸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였으며(옵 1:1, 8, 20, 21), 그 예언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후회가 없습니다(민 23:19).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순종의 원동력이 됩니다.
적용: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려면 먼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마음 가운데 떠오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보세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선한 사람’은 제퍼슨이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애덤스는 성경의 진리대로 살려고 늘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가 성경의 교훈대로 지낸다면 공의와 인애가 지켜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제 6대 대통령은 퀸시 애덤스. 바로 존 애덤스의 아들이었습니다. 퀸시 애덤스 또한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를 따라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면 사람이 기쁨 가운데 선하게 살 것이다.”
< 설 교 >
주님!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말 1:1-5 / 류공석 목사
여러분들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데, 예전에 유행했던 유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죠? 어느 날 아기 고양이가 어미 고양이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고양이 맞아?”, “그럼, 고양이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런 고양인데.”
그런데 조금 있다가 아기 고양이가 어미 고양이에게 또 묻습니다. “엄마, 엄마, 나 정말 고양이 맞아?” 아마도 이 고양이는 사춘기를 타고 있었나 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꾸 하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어쨌든 이 질문에 어머 고양이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럼, 고양이 맞아. 아주 예쁜 고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 다시 아기 고양이는 묻습니다. “엄마, 나 정말 고양이 맞아?” 어미 고양이는 “그럼, 고양이 맞아” 잠시 후에 또 묻습니다. “엄마, 나 고양이 맞아?”, “그래 맞아.” 이렇게 몇 번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어미 고양이는 계속해서 고양이가 맞다고 확인을 해주는 데도 불구하고 아기 고양이는 자기가 고양이가 맞냐고 계속 묻습니다.
그러자 참다못한 어미 고양이가 뭐라고 했다고요? “그래, 맞아. 이 XXX야” 방송부적절용어를 사용했다지요.
예전에 유행했던 우스개 이야기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꼭 우리들 이야기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가끔 그러지 않나요? “저, 하나님 자녀 맞나요?”, “하나님, 정말 저 사랑하시나요?”
언제 이런 말을 합니까? 나에게 고난이 왔을 때, 실패했을 때, 앞길이 막혔을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 병들었을 때, 슬픔이 있을 때 이런 생각과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런데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항의를 합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것을 그 뜻을 살려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고,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 시대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라기가 쓰여진 때는 기원전 460년경입니다. 이 때는 중동지역의 패권을 잡던 나라가 페르시아였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 내의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강대국의 식민지였고, 이방 민족의 위협이 늘 있었고, 메뚜기와 가뭄이 잦아서 애써 농사지은 것들을 망치기가 일쑤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곧 임한다고 했던 메시야 왕국에 대한 약속도 그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암울하고, 답답하고, 풀리는 일은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을 보면 도무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주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하면서 항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한 적은 없습니까? 현실이 너무나 고되고 힘들어서 “하나님, 저 사랑하는 거 맞나요?” 해 본 적은 없습니까? 상황이 너무나 답답하고 낙심이 되어서 “하나님,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이지요?”하면서 하소연해본 적은 없습니까?
현실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앞길이 풀리지 않고 막힐 때, 연속되는 실패를 경험했을 때, 상황이 숨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겁니다. 혹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기도도 열심히 했고,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주어졌을 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나의 고통스럽고 답답한 현실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고, 하나님은 나의 고통에 대해서 왜 침묵하시고, 내가 그토록 원하는데도 왜 도와주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습니까?
정말 우리의 생각이 맞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맞다면 우리가 실패를 겪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과 슬픔을 당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단정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등식으로 본다면 예수 믿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 바울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맞다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에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진 것 다 버렸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셨습니다.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갖히고 매를 맞고 온갖 고생은 다 했습니다. 게다가 몸에 질병까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질병을 말합니다. 전해오는 전승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력도 좋지 않았고, 간질병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병은 그렇다 치고, 간질병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대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간질이 발작해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을까요?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아마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런 목사님이 있었다면 그 교회에 오래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나중에는 로마에 끌려가서 순교 당했습니다. 말이 순교지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만 평가하면 사도 바울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아예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는데, 왕위에 오르기는커녕 적에게 쫓겨서 유대 광야를 돌아다니고, 거처도 없어서 동굴에서 잠을 자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는커녕 조롱 당하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왕이 되기는 했지만, 이 당시의 상황만 보면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들은 정말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습니까?
No! 결코 아닙니다. 다윗이나 사도 바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드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사랑 여부를 나의 상황과 연관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상황이 평탄하고 풍요롭고 잘 풀리면 곧 축복이고, 반대로 나의 상황이 고통스럽고 힘들고 답답하면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 하면서 신앙적인 회의를 갖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우리는 가지고 있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판단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틀린 데가 많습니다. 위험한 요소가 많습니다.
제가 만약 이 나이에 병이 걸려 죽거나, 사고로 죽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겁니까? 여러분들도 이 예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여러분들을 예로 드는 것이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저를 예로 드는 겁니다.
제가 만약 그렇게 죽는다면 어떤 말들이 들려올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말을 할 겁니다. “류목사님, 죄가 많은가봐.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가봐.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종인가봐.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겠어. 덕이 안돼.”
우리나라에서는 목사는 아무렇게나 죽으면 안됩니다. 덕이 안된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 복인 것은 많습니다만, 그것만이 복은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가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3, 40십을 사나 7, 80을 사는 한 치도 안되는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내가 오래 살면 오래동안 맡겨주신 일 하다가 오라는 사인인줄 알고 늙어서도 충성하면 되고, 조금 일찍 부르시면 “내가 맡겨준 일 다했으니까 와라, 빨리 보고 싶다, 빨리 와서 나랑 살자”는 뜻으로 받아들으면 됩니다. 나를 데려가시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는 겁니다.
전에 한국에서 목회할 때 한 청년 자매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저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다 합심해서 간절히 참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을 걸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그 자매를 사랑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 아버님을 사랑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사랑하셨어요. 처음에 쓰러졌을 때 의사들을 판단은 2,3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달 가까이를 연장시켜주셨어요. 왜일까요? 장례식장에 가면서 생각해 보았는데, 이유가 있더군요. 그것은 준비시키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우선은 가족들입니다.
만약 작년 말에 쓰러졌을 때 돌아가셨다면 가족들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딸만 둘이었거든요. 하지만 두 달의 기간을 통해 가족들이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믿음으로 굳게 서게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본인의 준비였습니다. 듣기로는 그전에는 교회에 그렇게 자주 다니셨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있으면서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알면서 아버지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셔서 데려가시기 전에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장례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하고 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평가하지 마세요. 나의 고난과 평탄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마세요. 내가 받은 것의 많고 적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지 마세요. 그건 이분법적인 사고입니다. 그런 사고를 버리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나의 상황과 상관없이 초월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게 고통이 왔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 마십시오. 내게 실패가 왔다고, 나의 앞 길이 막힌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와 은혜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난과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내 몸의 가시를 없이 해달라고,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응답은 하셨는데,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하는 응답입니다. 그 병을 고쳐주신다는 응답이 아니라 ‘너 그 병 가지고 사는 것이 내 뜻이야’라고 하는 이런 응답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간질과 여러 가지 질병을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기도의 거절에서, 자신이 그렇게 괴로워했던 질병 때문에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공동변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질병 때문에 그는 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교만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잘난 사람입니까? 갖추고 있는 것이 많았고, 대사도였고, 엄청난 계시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교만해지기 딱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질병인 간질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고 겸손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교만의 마음이 들다가도 간질이 발작하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다시금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강함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놓고 기도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고, 그 힘을 가지고 그는 끝까지 충성되이 사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까?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나 모릅니다. 그의 현실과 상관없이, 그의 질병과 상관없이, 그의 고난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그의 서신서에서 거듭거듭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의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고난은 범죄의 결과다. 따라서 너는 죄값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욥도 처음에는 잘 견뎌내었지만, 나중에는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하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고난을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이전에는 귀로만 하나님을 듣더니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내게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고, 그 고난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숨었다고 여겨지고,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의 현실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커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숙하면 고난 가운데서도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데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 힘써야 합니다. 우선은 머리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십시오. 말씀도 귀기울려 듣고,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 많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머리에 있는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성령님께 기도하세요.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세요. 머리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아는 하나님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래서 머리로도 알고 가슴으로도 아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게 되고,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전적의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집 애들이 자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높은 곳에 올라가 저한테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 집 큰 애가 하루는 제가 침대 위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 있는 책상 위에 올라가더니 거기에서“아빠!”하면서 뛰어든 겁니다. 저는 신문 읽느라 주의깊게 보질 않았었거든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 머리가 제 얼굴에 부딪혀서 아프긴 했지만 놓치지 않고 받아주었습니다. 우리 집 애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모한 객기일까요? 그것은 아빠가 반드시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놓고 뛰어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바로 전적 위탁입니다. 믿기는 믿는데‘하나님이 인도해주실까, 하나님이 도와주실까’의심을 한다면 그건 아직 다 맡긴 것 아닙니다. 여러분, 앞길이 막히고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답답하고 의심이 듭니까? 그것은 아직 다 맡긴 것이 아닙니다.
다 맡기면 앞길이 막혀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평안합니다. 그렇게 불안하지 않습니다. 왭니까? 다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적인 위탁이 있으면 당장은 낙심될지 모르지만 금방 안정을 찾고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보면,“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송두리째 다 맡기는 것이 전적 위탁이고, 그러한 것이 믿음입니다. 다 맡기면 평안이 오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럼 앞길이 막혀도, 실패해도, 상황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왜 그가 믿음의 사람인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는지 아세요? 광야에서 적에게 쫓겨다닐 때, 춥고 습한 동굴에서 지낼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조롱당할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청년들을 포함한 젊은 분들 가운데는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업의 길을 준비하다가 실패한 이들도 있고, 취업의 길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장년층의 경우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일이 잘 안풀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당장의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멀리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꾸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그림을 그리시면서 멀리 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예를 들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은 왜 우리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반대로 에서의 후손들이 득세를 하고 떵떵거리며 사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흐름을 보면,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나라가 회복이 되었지만, 에서의 후손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멀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길은 생명의 길이고, 축복의 길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들도 멀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앞길과 더불어 형통이라는 말을 합니다. 형통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형통의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은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순종이 왜 형통의 조건이 되느냐 하면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또 우리 집 애를 예로 들어 죄송한데, 아이들은 보통 자라나면서 좋아하는 장난감이 달라지게 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집 큰 녀석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어느날 부터 조립용 로봇을 사달라는 겁니다. 한번은 장난감 가게를 갔는데, 자기가 마음에 드는 로봇을 사달라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아직 일러요. 조립과 조작이 그 나이의 아이들이 하기에는 어려운 로봇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단순한 것을 사주려고 그러는데, 끝까지 그것 사달라는 겁니다. 그 로봇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사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립은 내가 다 해주었고, 몇일 있다 보니까 다 망가졌습니다. 어떻게 조작을 해야 하는지 몰라요. 어른이 해도 그렇게 쉽지 않은 거더라고요.
무엇을 말합니까? 받을 만한 자격이 되어야 주시는 겁니다. 주고 싶어도 내가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실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자격이 뭡니까? 그 준비가 뭡니까? 순종입니다.
순종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만듭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순종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럼 주실 수 있는 겁니다. 마음 놓고 주실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순종과 믿음이 형통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앞길과 삶을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형통의 의미입니다. 형통은 무조건 잘 되는 것만이 형통이 아닙니다. 앞길이 막힐 때, 사방이 막힐 때,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바로 형통입니다.
또한 내 앞길을 막으시는 것도 때때로 형통이 됩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내가 죄악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는 안될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내 길을 막아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돌이킬 수 있도록 해주셔야만 합니다. 이것 또한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저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있으며, 영원토록 변함없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눈앞에 현실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낙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일어나 평안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I Have Loved You
말라기 (1) Malachi 1:1-5
도입 Introduction: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God loves us.
지난 6월 25일 (월)부터 7월 13일 (금)까지 서아프리카를 방문하는 단기선교를 여러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다녀왔습니다. 세네갈의 다카, 코트디아부로의 아비장, 베넹의 코토누, 토고의 로메, 그리고 가나의 아크라를 각각 방문했습니다. 신학교에서 특강을 하고, 목회자들에게 세미나를 인도하고, 지역교회를 방문하여 특별집회를 하고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각 나라에 파송된 여러 기관의 한인 선교사들을 방문하고, 함께 교제하며, 위로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이번 단기선교를 통하여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관광과 선교는 어떻게 다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관광은 주로 아름답고, 유서 깊은 장소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관광은 한 번 갔던 곳은 가능하다면 다음에는 피하고, 새로운 곳을 찾게 됩니다. 이에 반해서 선교는 주로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제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도 자주 말하였지만, 성령님은 소통 (communication)과 교제 (fellowship)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선교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러 모습으로 사역하는 주님의 자녀와 소통하고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흐르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관광은 기왕에 갔던 곳은 가능하면 피하지만, 선교는 갔던 곳을 또 가고 싶어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에 만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통하고 교제한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동일한 장소, 동일한 대상의 사람들에게 다시 가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선교라고 하면 마치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소통과 교제를 이루시는 성령 하나님은 선교가 일방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키울 때,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저도 이번의 단기 선교를 통해서 강의도 하고 설교도 했지만, 저를 통해서 성령께서 주신 것도 분명히 많았지만, 또한 그곳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저와 우리 선교단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풍성했습니다. 짧은 동영상으로 이미 간략하게 보여드렸지만, 그것에는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소통과 교제의 성령 하나님은 이번 단기선교를 통하여 저와 우리 교회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선교는 극히 일부의 가는 선교와 대다수의 보내는 선교로 구성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의 기도와 후원으로 이번 단기선교가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이 또한 우리 교회에게 부어지는 것이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 흘러넘치는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곳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가장 놀랍고 특별했던 것은 그곳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온 힘과 열정을 다하여 춤을 추며 예배했습니다. 한 분이 춤을 추며 앞으로 나오면 다른 분이 따라서 나오면서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원을 그리며 음악에 맞추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을 온전한 기쁨으로 드러내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제가 현지 한인 선교사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예배에 춤이 없는 경우도 있냐고요. 대답은 100% 춤으로 예배를 한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나 회중이나 모두가 마치 그 자리에 함께 하시어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인격으로 반응하며 예배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부럽고 우리도 어떻게 하면 좀 더 살아 움직이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언자 말라기를 통하여 당신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시며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느냐고 항변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체험합니까? 그리고 우리의 예배와 삶으로서의 예배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것이 되도록 합시다. 오늘은 말라기 1:1-5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 “An oracle: The word of the LORD to Israel through Malachi” (1)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 An oracle: The word of the LORD to Israel through Malachi.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에 있는 책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학생 때, 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말라기라는 책을 접했을 때, 말라기는 마지막 찰나에 주어진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는 뜻으로 혼자 이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영어로도 말라기 (Malachi)이고 히브리어로도 말라기 (מַלְאָכִי)입니다. 히브리어 말라기는 사람의 이름으로 “나의 사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말라크 (מַלְאָך)가 “사자” (messenger)나 “천사” (angel)입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이미 그의 이름으로부터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소명과 사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언자 말라기가 활동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사역함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성전을 재건하여 예배를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수리하여 다시 새움으로 하나님의 왕국의 모습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총독 느헤미야 이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혼란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언자 말라기를 보내시어 이스라엘에게 최후의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말라기가 활동한 시기가 주전 430년경인데, 이로부터 약 400년 동안은 하나님의 사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침례 요한이 출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선포함으로 신약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말라기 4장에서는 엘리야를 하나님이 다시 보내실 것을 약속하심으로 구약의 예언이 끝납니다. 그리고 침례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로서의 사역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는 신약의 첫 부분인 침례 요한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에는 4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습니다.
2.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 “How have you loved us?” (2-3a)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2 "I have loved you," says the LORD. "But you ask, 'How have you loved us?' "Was not Esau Jacob's brother?" the LORD says. "Yet I have loved Jacob,
3a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3a but Esau I have hated,
예언자 말라기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보통 우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현재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현재완료형을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처음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그 순간부터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실 것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시고 선포하시는 하나님께 참으로 당돌한 질문으로 도전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How have you loved us?) 하나님이 자기들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사랑하셨고 그리고 앞으로도 어떻게 사랑하실지 구체적으로 증거를 대라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아침에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아멘!”으로 찬양하며 받아들이고, 드러내고, 선포해야 마땅합니다. 만일 누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셨어요?”라고 물어본다면,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요한복음 3:16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콕 집어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다. 세상의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통하여 그 예수님을 저와 여러분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의 가정의 자녀로,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로 살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는 항변에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에서와 야곱 형제는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이 아니냐?” 말라기는 주전 430년경 사람입니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은 무려 주전 1900년경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리브가에게서 얻은 쌍둥이가 바로 에서와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에서와 야곱이라는 이름을 말씀합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창세기 25장을 찾아봅시다. 21절부터 봅시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했는데, 아들 쌍둥이를 임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 둘이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서 서로 싸웁니다. 고민하던 리브가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2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큰 자는 형 에서이고, 작은 자는 동생 야곱입니다. 에서의 후손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야곱은 그의 생애 가운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며, 그가 낳은 열두 아들이 곧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들이 그들이 리브가의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동생인 야곱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에서를 선택하시지 않으시고, 야곱을 선택하심으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는 백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단 말인가? 사랑의 하나님이 누구나 다 똑같이 사랑하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마땅하지만, 에서를 미워하시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야곱인가, 아니면 미움을 받은 에서인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 정도로 집요하게 다룹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선교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거나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 길을 택하겠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동족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유리한 점이 많이 있는데도 그들이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을까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 중에서 왜 일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만, 또한 많은 수는 거부하는가? 그래서 6절에서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로 그의 독자를 안내합니다. 아브라함은 오늘날의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350km 정도에 있던 수메르 족의 고대 도시국가 우르(Ur)에서 약 2100년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은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 바로 땅과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 모두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땅은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그냥 이주민이었을 뿐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는 결혼 후 20여년이 지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내 사라의 제안으로 첩 하갈을 맞아들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난 아들만 온전하게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해에 드디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제 이삭이 장성하여 결혼하여 쌍둥이로 에서와 야곱을 임신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11절부터 봅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이 이삭과 리브가의 자녀로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태중에 잉태하였을 때, 그들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 거죠. 야곱은 어머니 태중에서 어떤 선을 행한 것도 아니고, 에서는 또한 어떤 악을 행한 것도 아니죠.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나 상태라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한 어머니 태중에 있는 둘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리브가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본 창세기 25:23 마지막 부분이죠.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로 오늘 본문인 말라기 1:2절의 마지막 부분과 3절의 첫 부분을 인용합니다. 로마서 9:13을 읽어봅시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더 나아가 수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14절을 봅시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Is God unjust?) 그리고 즉시 답을 선포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Not at all!)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제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출 33:19하)을 인용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모세와 그의 백성을 택하셔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함께 소리를 내어서 읽어봅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원하고, 믿고, 분투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우리가 원하게 되고, 믿게 되고, 분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모세의 경우와 반대,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능력을 보일 대상, 그래서 하나님의 준엄하신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도록 하실 대상으로 선택하신 바로의 예를 17절에서 듭니다. 그리고 중간 결론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다시 함께 읽읍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 그렇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9절에서 다시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무슨 말이죠? “내가 믿지 않은 것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나의 불신에 대하여 심판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는 말이죠.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다시 토기장이의 예를 듭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는 무한하신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의지와 유한하고 부족하고 죄인인 사람의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의지로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이 믿지 않을 자를 믿지 않도록 선택하시고 그 믿지 않음을 근거로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사람은 이렇게 둘 다 의지가 있어서 이렇게 인격 사이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토기장이와 그가 진흙으로 만드는 그릇 사이는 어떻습니까? 토기장이는 의지가 있지만, 그릇은 의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토기장이시신 하나님이 만든 그릇입니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듯이, 토기장이이신 하나님도 귀하게 쓰실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동시에 만드신다는 뜻이죠. 그리고 22-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에게는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긍휼의 그릇, 하나님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그릇은 유대인으로만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이방인으로만 이우러지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일부와 이방인의 일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은 호세아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까지의 창세기, 출애굽기, 이사야, 호세아, 말라기, 로마서 등의 말씀을 통하여 다름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선포하십니다. 원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뜻이죠.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믿는 사람이 곧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임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자로서 사도 바울과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인 긍휼의 그릇인지, 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진노의 그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민에게 나아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선교여행 도시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결과를 이렇게 전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이렇게 우리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압니다.
3.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Great is the LORD - even beyond the borders of Israel!” (3b-5)
3b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3b and I have turned his mountains into a wasteland and left his inheritance to the desert jackals."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을 향한 심판을 예를 드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항변하는 이스라엘에게 증거를 보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터전을 읽고, 그 터전에는 짐승들이 사는 곳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4 Edom may say, "Though we have been crushed, we will rebuild the ruins." But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They may build, but I will demolish. They will be called the Wicked Land, a people always under the wrath of the LORD.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거역하며 자신들이 무너뜨림을 당하였지만, 다시 쌓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쌓으면 다시 허무십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악한 지역으로 그 족속을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으로 선포합니다.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이제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보고 깨달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만 아니라, 이스라엘 밖에서도 역시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결론 Conclusion: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증인이다. We are the witnesses of God of love.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계획으로 택하심을 받았고, 그리하여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세상에 이 사랑을 전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 주님 예수님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작정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이 작정하신 사람을 믿도록 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여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이웃과 가까운 곳과 할 수만 있다면 먼 곳에 있을 사람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영적 질병의 증세들
말라기 1:1~14 / 피영민 목사
서론
“말라기”의 문자적 의미는 “나의 사자”, “나의 천사(my messenger)”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이름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말라기서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B.C. 539년에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켜라. 그리고 내 백성이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어라.” 이렇게 계시하셔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B.C. 538년에 스룹바벨의 인도로 약 5만 명 정도가 1차로 귀환했고 B.C. 458년에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귀환을 했고 B.C. 444년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3차 귀환을 했습니다.
“말라기”가 선지자의 이름을 의미한다면 그는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시대인 B.C. 430년경에 활동했을 것입니다.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고 해도 이 책이 기록된 것은 B.C. 430년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 때문에 혼이 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병들어있었습니다.
말라기 1장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적인 질병이 무엇인지를 진단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질병을 생각해보면서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도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Ⅰ. 영적 질병의 첫 번째 증세: “영적인 무감각”
이스라엘 백성들은 네 가지 영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 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신 거냐고 대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말 1:2~3).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들이 아무리 성을 쌓고 나라를 건설해도 하나님께서 헐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택하심의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미워했다는 것이 아니라 택하지 아니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형이고 남성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매력적이고 사냥도 잘하여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야곱은 아우인데다가 비겁하게 사기나 치고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택했다면 야곱을 택하지 않고 에서를 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택하심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택하심의 은혜가 인간의 조건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야곱과 그 후손들을 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사랑한 증거가 무엇이냐고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 때문에 B.C. 587년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자랑하던 솔로몬의 성전도 파괴되고 백성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다시 해방시켜 주신 것 아닙니까? 고레스 왕에게 역사하셔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도 짓고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그런 의식이 없었습니다. 뻔뻔스러운 얼굴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느냐고 대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병든 사람의 특징입니다.
대한민국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치적 상황이 비슷합니다.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36년간 식민통치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능력으로 해방되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3‧1 운동은 훌륭한 민족운동이지만 이것 때문에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역사로 해방됐습니다. 불신자였던 고레스 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셨듯이 대한민국도 하나님께서 많은 불신자들을 사용하셔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일으켜 주셨습니다. 산업화를 통해 경제적으로 발전시키시고 민주화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발전시켜주셨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배은망덕한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택하심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를 택하여 지옥에 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번 명절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득한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Ⅱ. 영적 질병의 두 번째 증세: “영적인 반항심”
말라기서에는 곳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항적인 말투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 1:6).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말 1:7).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말 2:17).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말 3:8).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말 3:13). 하나님을 향한 반항은 인간 죄성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도록 해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알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이 될까봐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 사단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향해 반항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인류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 죽음과 질병 가운데 고통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겸손히 인정하고 자신의 허물을 되돌아보며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은혜와 축복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반항을 한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멸시했다고 하시면 우리가 언제 그랬냐고 대들고 너희가 내 것을 도적질했다고 하시면 뻔히 해놓고서 우리가 언제 도적질 했냐고 모른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근거를 갖고 말씀하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근거 없이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큰 질병입니다. 반항의 영은 사단과 귀신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죄인이다. 너희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구주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 죄를 용서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용서를 받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을 통해 반항적인 영은 모두 쫓아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Ⅲ. 영적 질병의 세 번째 증세: “영적인 부주의”
레위기 22장 17~25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에게 분명히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면 잘 살펴봐야 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이 짐승 중에서 값이 나가지 않는 흠 있고 점 있는 것으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점 없는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느냐? 제물이라는 것은 결국 신약시대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흠 있는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죄를 위해 드려질 제물은 흠 없고 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이니 그 예표로서 너희도 흠 없고 점 없는 제물을 가져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흠 있는 제물을 가져오고 이것을 제사장들은 부주의하여 잘 살펴보지도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9~10). 너희 총독도 받지 않을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냐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도넛을 파는 집에 심방을 간 적이 있는데 기도하고 나니까 커피 한잔과 도넛 두 개를 주면서 하는 말이 머리 벗겨진 사람은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들 집에 가서 음식 공짜로 안 먹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심방가면 공짜로 주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머리가 벗겨져서 성질나 죽겠는데 머리 벗겨진 사람은 공짜 좋아한다면서 도넛을 주니까 먹고 싶겠습니까? 차라리 안 주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도 이와 같습니다. 너희도 먹지 않을 흠 있고 점 있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받지 않을 것이고 너희가 은혜를 구해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어떻게든 최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부주의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Ⅳ. 영적 질병의 네 번째 증세: “예배를 경멸하는 것”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말 1:13). 제사를 드리면서 제사장들이 코웃음합니다.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과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고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 정해놓은 제사와 제물을 피곤하고 귀찮은 일로 여긴 것입니다. 예배는 성도들의 특권이고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예배하면서 은혜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어디 놀러가서 테니스를 치다가 은혜 받았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또 고스톱을 치다가 은혜 받았다는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은혜는 예배 중에 기도하다가 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야구선수도 3할이면 대타자인데 목사가 어떻게 매번 설교할 때마다 홈런을 치겠냐고 하면서 매번 은혜가 없을지라도 속상해하지 말고 넘어가라고 했습니다. 가끔은 은혜를 못 받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예배하면서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싫어하고 귀찮아하며 경멸하는 것은 영적으로 큰 병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는 사람들이 예배를 즐거워합니다. 제가 1990년 연길에서 설교하고 이어서 두만강 근처 왕청이라는 곳에서 또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고 축도를 했는데도 사람들이 집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한 번 더 설교를 듣기 위해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설교하고 축도를 했는데도 사람들이 집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니까 또 설교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설교했습니다. 그래도 집에 가지 않아서 다른 분에게 설교를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갔다 온 페루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페루에는 신학교가 제대로 된 곳이 없어서 농사짓다가 어느 날 은혜 받고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목사가 됩니다. 목회를 하면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들이 어디서 말씀 세미나를 한다고 하면 구름떼처럼 몰려와서 밥도 안 먹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흥이 일어날 때는 사람들이 예배를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기다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예배를 즐거워했습니다. 부흥회 한다고 하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흥회를 한다고 해도 잘 오지도 않고 주일날 예배시간이 몇 분만 넘어가도 시계를 쳐다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 중간에 나갑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는 표정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예배를 받으십니까?” 이런 표정으로 앉아계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항적인 영입니다. 제가 보니까 늘 웃고 다니는 사람은 하는 일이 다 잘 됩니다. 반면에 늘 인상 쓰고 다니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망합니다. 가정도 남편과 아내가 늘 웃고 다니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늘 인상 쓰고 다니는 가정은 매일같이 싸우고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웃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결 론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표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즐거워하는 영혼은 건강한 영혼입니다. 우리 영혼이 병들게 되면 우리가 현세와 내세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1:14). 사기를 쳐서 흠 있는 것으로 제물을 드리고 저주 받을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큰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은혜를 주실 수 있고 심판도 내리실 수 있는 권세 있는 큰 임금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의 빛을 비춰서 복을 주시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 인간은 못 쓰겠다고 하시면 그 사람의 인생은 망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병들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싫어하자 너희에게 줄 은혜를 이방인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계속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싫어하고 귀찮아하면 다른 이에게 돌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말 1:11).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자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이 은혜를 받고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 민족에게로 은혜를 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는 영혼,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분별하는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도 축복하시고 우리 교회도 축복하시며 우리나라도 계속해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최근 대한민국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자꾸 멀어져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줬냐고 하면서 교회를 향해 욕을 퍼붓습니다. 교회는 지옥에 갈 영혼들을 구원하는 복음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를 욕하고 하나님을 등지면 우리도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과 같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물질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것을 다 나눠 갖자는 것인데 나눠 가진다고 해서 잘 살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에 사탄이 내놓은 걸작품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십계명에서 재산과 관련해 사유 재산을 보호해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유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법률로 정하여 강제로 나눠주게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사상인 것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은혜를 주십니다. 이번 명절을 통해 택하심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감사하고 예배로 영광을 돌려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바른 방향으로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선포
말라기 1:1-5 / 이영훈 목사 / 성동성결교회
하나님 없이 돌아가는 세상 영적 감동이나 탄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선지자 말라기서를 통하여 하나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첫째, 경고
하나님은 말라기를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증거 하시는데 사람을 세우셔서 그의 인격과 삶의 경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느 시대이든 준비된 사람을 들어 즐겨 쓰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 종들의 목소리를 청종하도록 하셨습니다. 말라기가 활동한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기대나 희망을 아예 접어버린 시대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었고 선지자를 세워서 경고하시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경고라는 히브리어는 ‘맛사’이며 ‘짐’ 또는 ‘부담’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마음을 가볍고 즐겁게 하는 말이 아니라 힘들게 하고 안타깝게 하고 괴롭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느니라.’고 말했듯이 주님의 책망은 은혜와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면 책망을 은혜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서 7장 5절에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고 잠언 25장 12절에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고 했고 잠언 6장 23절에 ‘명령은 등불이요 빛은 법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니라.’고 했습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곧게 하는 사람은 갑자기 멸망을 당하고 그 저주를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잠29:1)
둘째, 사랑
영적인 침체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사랑을 느끼지도 감동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선지자가 예언한 영광스런 왕국을 세우지도 못했고 여전히 총독의 지배 하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하였노라고 해도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라는 말이 본서에서 7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3:13 ‘무슨 말로’ 번역된 것을 포함) 하나님은 이들에게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으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사랑으로 동생인 야곱이 장자의 기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혈통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야곱에게 긍휼히 가득한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으로 보면 야곱이 에서보다 앞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둘 다 동일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에서보다 이기적이고 야비하며 속된 표현으로 싸가지가 없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저희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향한 열린 마음 까닭에 야곱을 받아 주신 것입니다.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말은 그를 차별대우한 것이 아니라 죄 된 모습 그대로 정죄아래 내버려 두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 주권적이고 긍휼히 가득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3) 하나님을 대신하라는 목적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세워 세상을 향하여 자신의 뜻을 펴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내세워 세상이 하나님을 부르며 찾도록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 민족을 구별하여 열방이 이들을 통하여 축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랑을 받고 선택을 받은 존재임과 이방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처해야하는지 그 주소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네 자신의 것만 챙길 이들이 아니다. 지금 네가 누구인지를 알고 어디에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나를 대신하여 서서 세상을 변화 시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하여 가이딩 비전(guiding vision)을 제시해야할 존재들입니다. 이일을 위하여 정열을 쏟아야 하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영감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성실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연민에 빠져 방향 감각도 잃어버리고 세상에 하나님께 나아갈 방향제시도 못하는 인생들이 되 버린 것입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는 말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고 영적 무감각 속에 거하는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의미를 잃어갈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매번 드리는 제사에 짜증이 낫고 백성들은 더럽고 부정한 제물을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차라리 성전의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5)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높은 담을 넘어 이방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영적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이방인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능력 있게 증거 될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이방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이 목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만과 불평을 토한다든지 하나님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의 자리에서 스스로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아야 할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침체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무감각과 무감동 그리고 무관심의 자리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야곱을 사랑하였고’라는 말씀과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예배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담대하게 서야합니다. 12월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하나님의 사랑 선언, 이방 민족에 크게 될 여호와의 이름을 묵상합니다. 말라기의 말씀은 이미 역사 속에서 성취된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이방 민족 중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졌는지! 그러나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적 세계가 오늘 우리들 가운데 재현되고 있지 아니한지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변화되고 준비된 모습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대강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우리를 사랑
말라기 1:1-5 /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528장) / 조영식 목사
들어가는 글
오늘은 11월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하는 구약의 마지막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말라기를 기록한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고 합니다(1절). 우리가 경고판을 부치는 이유는 위험하다는 신호를 주려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경고판을 보았을 때는 위험을 예상하고 주의를 기울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경고판을 무시했을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신앙도 이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신앙의 위험 신호를 보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무시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죄악에 빠지질 수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섯 가지의 주제로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첫 번째 경고가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신앙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첫 번째 경고는 무엇인가?
오늘 말라기에서 하나님의 첫 번째 경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2절). 그들이 되묻는 이유는 주님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에서 첫 번째 경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위험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 주면 한국교회가 한해를 감사하는 주일을 맞이합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한 해 동안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의 불평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2절). 한 해 동안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감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율법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킨 대가로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안식일을 지켰고, 정결법을 지켰기 때문에 충분히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율법으로 행한 의로움을 더욱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를 자랑할수록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라기가 주는 첫 번째 경고는 율법의 자랑 때문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2절).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는가?
우리가 율법으로 행한 의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더 자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첫 번째 경고의 결론으로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라고 합니다(5절).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라는 믿음의 원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만 크신 분이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도 크신 분이 됩니다(5절).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크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이 행한 율법의 의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해 동안 자신의 행위와 하나님의 사랑 중에 어느 것을 더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어느 것을 더 큰 것으로 아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고 감사가 더 깊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제한할 수 없을 만큼 크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이스라엘 안에만 있는 하나님으로 제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제한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스라엘 밖에도 있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5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으로 제한하는 만큼 하나님의 크기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크기를 제한할수록 주님께 받는 사랑도 줄어들게 됩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불평합니다(2절).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크기를 제한하지 말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해 동안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크기를 제한한 적은 없습니까? 만약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크기를 제한하면 할수록 원망과 불평의 크기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크기를 제한하지 말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맛보며 더 많은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장소와 상관없이 크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성전 안에서만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성전 안에만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성전이 무너지면 하나님도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중심으로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성전 안에만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성전 밖에서도 계시는 크신 하나님이 되십니다(5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성전 안에서와 밖에서 크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일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섬기는 하나님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크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동일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한다고 답변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2절) 되물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2,3절). 여기서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야곱은 선택하였고, 에서는 버렸다는 교리적 해석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과 버림이 결정된 것에는 쉽게 동의를 할 수가 없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라기 본문은 에서와 야곱이 살았던 결말을 보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기록한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후에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교훈을 찾아서 적용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기에 야곱은 선택을 받았고, 에서는 미움을 받았습니까? 야곱과 에서 중에서 누가 율법으로 더 의롭게 살았느냐를 비교하면 “오십 보, 백 보”로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 더 타락했느냐를 찾는 것이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유일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또한 그 하나가 야곱이 하나님께 구원받은 이유도 됩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에서 엄밀하게 선택의 의미는 구원이 되며, 버림의 의미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을 받았던 그 하나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고 합니다(4절). 그 결과로 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심판을 받았습니다(4절). 또한 야곱도 형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재주와 노력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얍복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리를 절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창32:31). 야곱처럼 주님께 돌아오면 선택이 되었고, 에서처럼 돌아오지 않으면 버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행위로 살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도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나옵니다(눅15장). 어느 아들이 율법으로 더 의로웠느냐가 아닙니다. 두 아들 중에서 누가 아버지께 돌아왔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와서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를 알고 감사가 넘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말 1:1-5 / 채규헌 목사
제가 설교할 때마다 가끔 저희 집안 얘기를 합니다. 제 아내 이야기도 하는데 이야기하다보면 대개의 경우는 허물이 나옵니다. 오늘은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아내가 함께 살면서 저를 참 많이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뭘 보고 느끼냐면, 언제나 먹을 걸 줄 때마다 보다 더 큰 것, 좀 더 좋은 것을 제게 줍니다. 그걸 보면 분명히 ‘아, 이 사람이 날 사랑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러분도 집에서 그렇지 않아요? 남편에게 좀 더 좋은 걸 주지 않습니까? 남편에게 작은 것을 주고 자기가 큰 것을 먹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좋은 것으로 준다는 말입니다. 저도 거꾸로, 제 아내에게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려고 노력합니다. 차라리 제가 좀 어렵고 힘들더라도 아내를 위해 봉사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세상의 사랑도 마찬가지지만)이 바로 그런 면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편을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저 사람이 나에게 뭘 해 주겠지.’ 이렇게 협상하면서 무역하는 게 아닙니다. 상대편에게 줄 때에는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거저 주는 것이죠. 꼭 사랑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의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어떤 예술가가 자기 작품을 사랑하는 것, 어떤 조건이 있겠습니까? 도자기가 조금 삐뚤어져도 내가 만든 거니까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애완동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일방적으로 해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운 것이 역시 부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를 구약에서든지 신약에서든지 지속적으로 부부의 관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장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진정 그 사랑이 서로 꽃피기 위해서는, 조건없이 상대방에게 최상의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도 가장 좋은 것으로 기대합니다. 최고의 것을 기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관계” 입니다. 좋은 것을 받아서가 맛이 아니고, “관계” 입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질투” 라는 개념이 성경에 나옵니다. 부부간에 질투가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죠? 남편이 다른 여자하고 돌아다니는 데도 “잘 갔다 와.” 하는 부인이 있다면, 그것은 조금 모자라든지, 사랑하지 않던지 그렇겠죠.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도 질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질투가 있어요.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의 관계를 서로 갖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라기 1장도 바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사랑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왜 그러는 줄 아십니까? 그 당시의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 아주 피폐하고 어려웠습니다. 그 당시가 어떤 때인가를 잠깐 봅시다. 먼저 성경에서 중요한 연대를 잠깐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출애굽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전통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때에 출애굽은 B. C. 1,450년경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B. C. 1,400년경입니다. 그로부터 400년 뒤에 이스라엘에 통일 왕국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B. C. 1,000년 전후로 해서 사울과 다윗, 그런 왕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 왕 때 남과 북이 갈라집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뒤에 여로보암이 세운 북왕국 이스라엘, 또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세운 남왕국 유다, 이렇게 갈라졌습니다. 그러다가 B. C.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는 B. C.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합니다. 그 때 완전히 이스라엘의 왕국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70년간, 예레미야서에 예언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 7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해서, 스룹바벨이 유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돌아와서 다시 성전을 짓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하는 때가 정확히 70년 뒤인 B. C. 516년입니다. 그렇지만 성전이 다시 봉헌되더라도 이스라엘의 왕국이 다시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 때가 페르시아 시대인데(바벨론을 페르시아가 멸망시킵니다) 성경에서는 “바사” 라고 나옵니다.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그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살던 그 시대, B. C. 400년~B. C. 450년 사이에 씌여진 책이 말라기서 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삶이 어땠냐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옛날 일정 시대에 어떻게 살았나 하는 것을 대충 미루어 짐작하면 됩니다. 아주 생활이 팍팍하고 힘들었던 시대입니다.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그 당시는 어렵고 힘든데,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 같지 않고, 먹을 것도 부족하고, 사는 것도 힘들고, 핍박을 당하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셔도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이렇게 이렇게 지켜준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게 5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복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도도 안 들으시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6절부터 나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먼저 제사장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거기에 아비와 아들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를 공경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제사장들아 너희가 나를 공경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은 백성들에게도 하는 것인데 1차적인 책임을 먼저 제사장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문합니다. “언제 여호와 앞에 드리는 예배를 멸시했습니까? 주의 상을 경멸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르는 이유가 제사장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제사장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너희가 나의 예배를, 나의 이름을 멸시하였도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자, 예배가 경홀히 여김을 받고 예배가 멸시당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더럽혀졌거나 완전치 못하거나 아니면 그 예배자가 드리는 예물이 완전치 못하거나 더렵혀졌거나 그럴 때에 예배가 더렵혀지고 예배가 멸시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옛날에는 다 그랬지만) 예배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연보를 드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지금 우리 구역 예배에서도 연보를 드리는 이유도 사실은 거기에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연보를 드리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예물이 없이 나가는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받으시고, 예물을 받으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어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예물은 받으셨는데, 가인과 그 예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그랬습니다(창 4:4-5). 예물만 받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거든요.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에 관한 관점을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필경 예배자가 가지고 오는 예물은 불완전한 것을 가지고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어땠습니까? 전부 피폐하고 어렵고 힘들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아주 살기가 팍팍한 가운데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예물을 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물을 드립니다. 그런데 예배자가 예물을 가지고 나온 것을 보니 소나 양을 비리비리 꼬인 것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거기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요즘 경기도 안 좋고 힘든데 이거라도 드리는데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그냥 이것 드려도 하나님께서 잘 받으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도 들으시고 축복하시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제사장들에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나님께서 책망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듣기에는 얼마나 사랑이 많은 제사장입니까? “그렇지, 우리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제사장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네가 나의 제사를 경홀히 여기고 내 이름을 멸시하고 그리하여서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올 축복과 기도의 응답을 네가 막았도다.”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꾸지람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야기할 네가 내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그들을 내가 받아야 되는데 받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예물을 내가 받아야 되는데 받지 못하게 하고, 진정 사랑의 관계가 되지 못하므로 그들이 기도할 때 내가 듣지 못한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1차적 책임이 제사장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온다, 또 온전한 예물을 주님 앞에 가지고 온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사장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제사드리는 사람과 그 사람이 드리는 예물, 이 두 가지-가 다 온전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속에, 예물이 불완전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하나님께 온전히 향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예물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마음, 온전히 드리는 예물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 ․ 헌물도 먼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구별해서 드린다는 것이죠. 이게 필요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까? “아, 그 분에게 먼저 드려야 되니까, 그냥 제일 높은 분이니까.”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보통 우리 부부 관계에서 정말 서로 사랑한다면 상대편에게 더 좋은 것을 드리고 최선의 것을 주려고 하는 마음과 똑같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완전한 나를 드리기 원하고, 완전한 예물을 드리기 원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의 중심에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병약한 것, 병든 것, 다리를 저는 것 이런 것들로 골라서 드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과연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바로 그 질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 말씀에 가난한 사람은 10만원 가지고 고민하고, 부자는 10억 가지고 고민한다는 겁니다. 어차피 고민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단위가 틀릴 뿐이라는 겁니다. 누구나 삶의 고민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처음 것을 드리지 못하는 그 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성미를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서 좋은 쌀은 자기가 먹는 것도 아니고, 팔아야죠. 그래서 돈을 만져야죠. 그러니까 자기도 나쁜 쌀을 먹습니다. 그런데 팔아서 돈으로 만들 좋은 쌀을 성미로 낼 수 없죠. 자기가 먹는 것으로 냅니다. ‘나도 먹는데 뭐, 목사님도 먹지.’ 과수원을 해도 좋은 알들은 돈이 되는 거니까 팔아야죠. 자기는 썩은 것 다 파서 먹는 것 아닙니까? 돈 되는 것을 가지고 목사님께 갖다 드리는 것, 잘 안됩니다. 자기가 먹으려고 모아 놓은 것, 썩고 벌레 먹은 것 그 중에서 갖다 드리면서 “목사님, 벌레 먹은 게 진짜 맛있는 거예요.” 그러고 드립니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냐, 자세냐?”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야기하시는 한 마디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8절에 보면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 당시는 속국이니까 총독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가져가 봅시다. 총독에게 쌀을 드린다고 칩시다. “총독님, 우리 집에 쌀이 있어서 총독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좋은 쌀은 다 팔아먹고 우리 먹는 것과 똑같은 것 그것을 좀 드립니다. 내가 먹는 건데 당신도 드십시오.”, “요즘에 배가 풍년이라 좀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좋은 알은 팔아야 되니까 이 썩은 것, 벌레 먹은 것 저도 먹으니까 같이 먹읍시다. 그리고 우리 집 앞에 길이 좀 무너졌는데 포장 좀 해 주면 안 됩니까?” 총독에게 드려보십시오. 매나 안 맞고 나오면 다행이죠. 어찌 그 일을 하나님께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쌀을 드리고 소나 양을 드리고 그런 일에서는 물론 두드러지게 표시나 나겠죠. 눈먼 것, 병든 것 다 표가 나겠죠. 그러나 오늘날에는 표가 안 납니다. 전부 지폐로 드리니까요. 이게 병든 예물인지 건강한 예물인지 안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너무나 쉽게 자기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대로 다 쓰고 나머지가 있으면 드리겠나이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생활이 어려우니까 이번 달에는 씀씀이가 더 많아서 십일조를 못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여유가 좀 생기면 드릴께요.” 그게 뭡니까? 그게 끝물이예요. 그게 찌꺼기라는 말입니다. 먼저 내 씀씀이와 내 삶에서 써야 할 것들을 다 제쳐놓고 나머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려고 할 때 그것이야 말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정한 예물, 더럽혀진 예물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남는 대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내 소산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법을 여러분이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진정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것보다도 우선 먼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최고의 것으로 먼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부 종이돈이니까 안 보이지만 하나님은 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 하는 것도 잘 생각해보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을 속이고 나를 속이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십일조를 하지만 많은 경우에 떼먹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 십일조를 가끔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형편 될 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게 다 끝물이라는 겁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진정한 고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감사 연보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말 서로 사랑의 관계라면 매일 매일 서로 간에 사랑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헌금입니다. 십일조는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헌금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님 것입니다. 그 다음 헌금 중 제일 중요한 헌금은 감사 헌금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로 드리는 것, 이것이 내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을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화목제적인 것입니다. 자유롭게, 내 자유의사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과 내가 사랑을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고백해 가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와 십일조를 온전히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고, 그 다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의 마음을 언제나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간에 “주님을 사랑합니다.” 는 고백이 표현되는 장이 바로 그 연보에 있습니다. 제가 그 전의 교회에서도 했듯이, 언제나 감사절이 있을 때에는 이 물질에 대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기 있는 대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저는 그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진정한 축복의 통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원합니다. 그것을 말하지 않는 죄를 범치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시키고 싶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진정 사랑의 표현, 그 인색한 가운데 억지로 드리는 것 말고 넉넉히 드리는 사랑의 표현이 주님 앞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기서 약속하신 대로, 기도를 듣고 기도에 응답하고 풍성히 더하여 주신다는 축복이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에게는 말라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러한 각박한 성도들이 아니고, 자기도 각박하고 하나님의 응답도 받지 못하는 그런 메마른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아니고,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온전한 예물을 드리고 또 하나님의 사랑도 풍성히 받는 그런 주님의 복된 백성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짐
말 1:1-5 / 이종윤 목사
세상에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자에게 주시는 경고(짐)입니다. 흑암에 묻힌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종들이 받은 계시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옮기듯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짐입니다. 옛말 중에 "자식은 애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은 사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애를 더 태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었으나 동시에 사랑하는 짐이었습니다.
Ⅰ. 하나님은 사랑의 짐을 지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2절)에서 사랑하였노라는 미완료형으로 계속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슬픔과 근심을 드렸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항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고, 반역으로 주의 성령을 근심케 했으며, 완악함으로 주님을 탄식케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어떻게'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첫 번째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력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포로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사하기는커녕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하셨는지' 대답해달라고 합니다. 배은망덕의 죄인 것입니다. 그들은 또 눈 먼 것, 저는 것을 바치고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주님 이름을 멸시했냐'고 묻습니다. 더러운 떡을 주께 바치고서 '어떻게 주를 더럽게 했냐'고 말하고,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면서 악을 행하고는 '어떻게 우리가 여호와를 괴롭게 해드렸냐'고 합니다. 순종할 줄 몰라 못한 것이면서 다른 것을 핑계하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돌아가리이까'라고 말하고, 십일조와 봉헌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어떻게 주를 대적하였느냐'면서 자기 의를 주장했습니다. 이런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짐이었습니다.
Ⅱ.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에서가 기득권을 가진 첫째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야곱과 그 후손을 사랑하셨으며, 약하여 방어능력이 없었을 때 하나님은 힘과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버림받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시키셨고, 악에게 빠졌을 때 바벨론 포로로 끌어내어 회개케 하시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축복과 심판, 세움과 무너짐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배은망덕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Ⅲ.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자
'한 하나님께 지음 받은 너희가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는가'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라 하실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그 시대 사람들은 질투, 미움, 속임, 다툼을 했습니다. 한 수도사에게 또 다른 수도사가 찾아와서 무슨 영문인지 모르나 자기 수도원을 찾는 이가 없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것은 무지라는 죄기 있기 때문이라고 하소연 받은 수도사는 진단했습니다. 당신들 수도원엔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한 하나님이 계시는데 당신들이 그분을 몰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날부터 누가 하나님인지 몰라 서로를 섬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형제를 대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지속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짐같은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 사랑하듯이 사랑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를 위해 사랑의 짐을 지는 방법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말 1:1-5 / 허태성 목사
말라기는 주전 5세기경에 활동하던 선지자로서 그가 어떤 선지자였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자신은 감추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한 선지자였다. '말라기'서는 구약의 맨 마지막 책으로서 불과 4장 55절로 이루어진 짧은 성경이지만 그중에서 47절을 하나님을 1인칭 주어로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헌신이 식어버린 가운데 그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다시 돌이킬 수 있는지를 말라기는 기록하고 있다. 오늘부터 10번에 걸쳐서 말라기를 강해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가을에 은혜를 베푸사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회복이 있기를 소원한다.
오늘 본문에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랑의 외침이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I have loved you)"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고백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 사랑은 의심의 메아리로 돌아왔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은 사랑했다고 우기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고 우긴다. 이상한 사랑싸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계속해서 당신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말씀하신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형만한 동생 없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에서는 동생 야곱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조건으로 치면 에서가 야곱보다 더 사랑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다. 여기서 '사랑하셨다'는 말은 '택하셨다', '구원하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반대로 '미워하셨다'는 말은 '유기하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둘 다 죄인이지만 조건으로 따지자면 에서가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다. 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에서의 산은 황무지가 되었고, 에서의 산업은 시랑에게 붙여졌으며 에돔은 무너뜨림을 당해 황폐한 곳을 다시 건축하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헐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악한 지경,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 지경 밖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신 분이시다!' 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어찌하여 바라는 영광은 임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이런 고난이 계속된다는 말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아울러 열심도 식어버리고 그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1:1을 보면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를 하고 계신다. 이것을 받아 전하는 말라기 선지자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도 무거우시다. 답답하시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여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데 그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사랑했느냐고 되물으니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니가?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고맙다고 인사는커녕 오히려 보따리를 안 준다고 화를 내니 정말 환장할 일이 아닌가? 10달 뱃속에서 키우다가 죽음과도 같은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낳아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힘써 길렀더니 고작 하는 말이 '이럴 거면 왜 나를 낳았어?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라고 덤벼드는 자식이 있다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인생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 누군가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시련을 만나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373장 찬송가에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라는 가사가 있는 것처럼 모든 문제는 사랑이 없는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다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는 남에게 사랑을 줄 만큼 여유롭지가 못하다. 누군가에게 받아야만 줄 수가 있다. 그래서 어려서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하고,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들로부터, 그리고 결혼해서는 배우자로부터, 교회에 와서는 목회자로부터, 그리고 인생의 과정에서 만나는 친구와 선후배와 직장 동료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가 못하다. 사랑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많은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본래 세상은 그런 곳이고 사람은 다 그런 것이다. 너무 세상에게 사람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기대하면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오직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한 분이 계시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에 택하셨다. 별 볼일이 없는 나를, 아니 죄값으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나를! 그리고 나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내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크기를 생각해 보라. 왜 우리의 삶이 무미건조해졌는가? 그 사랑을 잊었기 때문이다.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자!
사랑의 회복
말 1:1-9 / 김병수 목사
말라기서는 구약의 제일 마지막 선지서입니다.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몇 차례의 귀환을 통하여서 돌아온 후 느헤미야를 통하여 성벽을 재건하고,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중심으로 성전을 건축 한 후 약 50년에서 - 100년 후 정도에 기록된 책이라고 추정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포로로서 돌아온 후 성전만 완공되면 모든 것들이 다 회복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학개 선지자를 중심으로 많은 유다 백성들은 꿈과 비젼을 가지고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을 지은 후 하나님께서는 학개 2장 7절에 보면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시므로 포로에서 돌아온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한번 더 다윗과 솔로몬 왕때의 영광이 회복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들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회복의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징조는커녕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아직 바벨론의 속국으로 있었기에 세금을 내야하고, 정치적으로 나라를 통솔할만한 왕이 세워지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며, 군사적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고, 사회적으로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다 백성들은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실망은 바로 하나님과 연관되어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도 별로 의미도 없고 이전에 가졌던 꿈과 비젼 그것은 한낱 허망한 꿈으로만 여기며, 그 마음에 낙망함이 가득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기대감이 없다고 그들의 조상들이 지금까지 섬겨왔던 하나님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제사도 대충 대충 좀 안 좋은 제물이라도 그냥 바쳤고, 십일조도 그냥 적당하게 알아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말라기서의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라기서의 상황을 염두해 두시면서 오늘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다시 한번 더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고백이 바로 말라기서입니다.
오늘 말라기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이 어디에서 어긋났으며, 어떻게 그 사랑이 회복되어지며, 처음 사랑들이 회복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경고
구체적으로 들어가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굳어진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경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경고는 언제 합니까? 경고는 아직도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합니다. 잘 할 수 있는데 자꾸 곁길로 가고 잘 하지 못할 때 경고를 주어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세우기 위해서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1)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첫 번째 말씀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씀입니다. 심한 책망의 말씀이 나와야 하는데 책망의 말씀보다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유다 백성들의 반응 또한 전혀 뜻 밖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때 뿐만 아니라, 이전의 선조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사랑하셨다면 결코 이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두시지는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만을 향한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채워지게 될 대가를 향한 사랑으로 변질되어졌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외면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달라고 하면 그것이 칼이든, 그것이 독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내어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때릴 때도 있고,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하실 때도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오해도 받고,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심히 아플 지라도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의 소망은 없습니다. 그 의심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그들을 책망치 않으시고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야곱과 에서를 비유하여 말씀하시는데 2절 하반절에 보면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하나님이 사랑하는지 의심을 가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상식으로 하면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정상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야곱을 사랑하시고, 야곱 족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유다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신 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 본문 3절을 잘 못 읽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3절 말씀만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편애하시는 하나님, 왜 에서를 사랑하시지 않고, 야곱을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보면 편애하시고, 어떻게 보면 독선적인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미워하였다’는 말은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가만히 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야곱을 선택하신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에서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에서는 가만히 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분명한 사실 앞에 겸손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보면서 지금 힘들고,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매를 대는 것은, 그 자녀를 미워하고 이제 그 자녀를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매를 대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기 위한 한 방법일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삼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형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짓된 사랑이라고,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 사랑을 의심한다면 정말로 어리석은 모습일 따름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처음 사랑들이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처음 사랑의 회복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더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외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을 한번 확인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정말로 처음 그 사랑이 여전히 있으며, 더 깊은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처음 사랑은 다 없어지고 지금의 형편 가운데서 왜 좀 더 잘되게 해 주지 않습니까? 왜 좀 더 건강하게 해 주지 않습니까? 왜 좀 더 권세와 힘을 가지게 해 주지 못합니까? 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며 살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돌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늘 기억하며 그 사랑 안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과 사랑을 누리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 사랑의 회복
그렇다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가지 예배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한 예배는 공적인 예배이고 또 한 예배는 삶의 예배입니다.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나타내므로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고, 삶의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함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예배 모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며,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그 부분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책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망하는 첫째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 그렇습니다’ 하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할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이렇게 댓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댓구합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할 만큼 다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잘못했다고 하면서 축복도 안 해주고 실망만 가져다 줍니까?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범죄함을 고발합니다. 7,8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자기들이 저질렀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답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답답한 마음을 9절에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한 순간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렇게 인도하시고 보호해 오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땅에서 복되게 하며, 이 땅에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조건을 달고 무엇을 잘하기 때문에 더 잘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더욱 망령된 일을 행하는데 거기에 축복을 부어주면 더욱 멸망의 길로 가기 때문에 지금 그 축복의 길을 막고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10절 말씀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성문을 닫아걸어서 아무런 정성도 없고, 아무런 공경과 사랑이 없는 제사를 드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은 이러한 것을 되풀이하여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엇인가 회복되어지기를 기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자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려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섬기는 것입니다. 그나마 섬기지 않으면 더 안 좋은 일이 자기들에게 일어날까 봐 마지못해서 억지로 제사만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사랑을 용납할 수 없으신 것입니다.
(2) 예배를 통한 하나님 사랑의 회복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보면서 우리를 한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얼마큼 사랑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있으며,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 제사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의 모든 것들 다 보고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예배를 드리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제물이 깨끗한 지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마음이 정말 기대와 소망을 가진 것인지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존경하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면 존경함을 받지 못해서, 억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경해 달라고, 귀한 것으로 예물 드려 달라고, 제사 드리는 시간을 귀하게 여겨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하시며 홀로 영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믿음의 선조들과의 약속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에베소 교회가 책망 받을 것이 있는데, 그 책망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사랑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약에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촛대는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임마누엘의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말 감격하여 드린 예배를 다시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존경하는 삶의 예배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후암교회 예배 가운데서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한 예배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영광 받으실 곳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온전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온전히 돌려 드릴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언약 백성을 향한 책망
말 1:1-5 / 이삼규 목사
지금부터 약 71년 전, 전 대륙이 2차 세계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불길 속에 싸여 있을 때, 안일하고 태평스러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난데없이 재빠른 B29 비행기의 편대가 나타났습니다. 잠시 후 시가지 상공을 배회하며 누비던 비행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얀 삐라를 하늘에 날리고, 수평선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온 시민들은 갑자기 뿌려진 삐라를 들고 우왕좌왕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인즉 조그만 종이쪽지는 미국공군에 의한 것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경고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시민에게 경고한다! 모든 시민은 8월 6일 아침 00시까지 50리 밖으로 대피하라!"
먹고 마시며 무사 안일하게 지내던 수십만의 시민들은 영문 모를 경고장에 대하여 각기 나름대로 가슴을 조여 가며 수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이 공갈이다", 어떤 이는 “거짓말일 게다”, 어떤 이는 "그 때 가봐야 되지 않느냐"는 등 무서운 경고를 받고도 꼼짝달싹 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소수의 무리만이 급히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정든 히로시마를 눈물과 함께 작별하고 50리 밖으로 도피했습니다. 그 후 경고대로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시민들은 과연 오늘 하루 동안에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하는 의문을 마음에 품고 초조와 긴장의 도가니 속에 휩싸여 어서 빨리 그 시간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랬습니다. 그 때 서쪽 하늘에서 소리 없이 빠르게 다가오는 B29 전투기가 있었습니다. 온 시민들은 엄습해 오는 두려움으로 자포자기와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고, 이곳저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울부짖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이미 막혔으며, 피할 기회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다가온 전투기는 상공 두어 번 순회하더니 시커먼 하나의 물체를 떨어뜨렸습니다. 순간 폭음과 함께 시커먼 죽음의 구름은 온통 시가지를 흔들고 뒤엎어 버렸습니다. 죽음과 저주의 도시로 변한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격으로 인하여 당시 히로시마시 인구 약 33만 명 중 14만 명과 나가사키시 인구 약27만 명 중 7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86년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추정한 사망자 숫자는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피폭사망자 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피폭자 통계가 불확실하고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 피해 통계 중 한국인의 인적 피해는 10%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45년 단편적인 추정이지만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통계에 따르면, 히로시마 한국인 수를 8만 1,862명으로 집계하고 있고, 당시 추정 피해상황은 약 히로시마에서 총 피폭자 7만 명 중 사망자 3만 5,000명, 생존자 3만 5,000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서는 총 피폭자 3만 명 중 사망자 1만 5,000명, 생존자 1만 5,000명으로 보았습니다. 즉 한국인은 두 도시에서 약10만 명이 피폭되어, 그 중 5만 명은 사망, 5만 명은 생존하였다는 수치입니다. 이 통계는 또한 생존자 중 4만 3,000명이 고국으로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잔류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원자탄의 위력을 잘 알지는 못했으나 삐라에 쓰인 경고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소수의 무리들은 7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의 증인으로 살아 있습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71년 만에 처음으로 원폭 피폭지 히로시마를 방문한 바 있습니다. 물론 정식으로 사과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사과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은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인 희생자들에 대해서 안중에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여기 미 공군의 경고보다 더 확실하고 큰 경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엄청난 경고를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세상은 멸망할 것이며 또한 심판하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여호와의 경고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에 사역했던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기에 ‘경고’라는 말은 ‘맛사’라고 하는데 ‘짐, 들어 올림, 운반, 부담’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메시지는 선포하는 자나 듣는 언약 백성 모두가 ‘무거운 부담’ 즉 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했던 말라기 선지자는 동족의 영적 상태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닮은 것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전반적인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구원받은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자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상태는 바로 우리의 신앙적 조상들이 과거에 처했던 상태와 너무나도 똑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면 안 될 정도로 우리에게는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승리를 자축하지만, 그 승리로 이끌었던 길고 긴 고난의 길을 완전히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왜 소중하게 생각합니까? 역사를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헛고생’이라는 비극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끔찍한 고난을 겪었지만 고난 후에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19살의 청년이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하다가 전동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청년은 공고를 졸업하고 비정규직으로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격무에 시달리다가 2인 1조로 수리를 해야 한다는 안전 규칙을 지키지 못해 사고가 난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두 번이나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서울시나 서울 메트로 아무런 잘못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세 번째 사건이 터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메피아’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삼시 세 판을 겪어야 문제가 해결될까요?
세월호 사건도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면 제2의 세월호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경험의 가치를 평가할 때 우리는 ‘어떤 일을 겪었느냐?’하는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그분께로 ‘얼마나 더 가까이 갔느냐?’라는 기준에서 평가하십니다.
우리를 고난으로 몰아넣었던 것을 극복하는 승리야말로 진정한 승리입니다. 반면, 극심한 고난에서 회복되었지만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런 고난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한심한 자리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경고하실까요? 잘못된 데서 돌이키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약’이라는 개념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옛 언약은 돌판에 새겨주셨으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비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언약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누구도,그 무엇도 깰 수 없는 관계가 그분과 우리 사시에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언약의 관계에서 큰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언약의 관계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의 잘못을 오래 묵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언약관계라 해서 양측의 관계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의 관계에는 부정적인 면들도 있는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정적인 면들을 잘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의 필요를 풍성히 채워주십니다.하지만 그분은 언약 백성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들을 못 본 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위험들 중에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훗날 그분의 심판에 직면하는 상황을 막으시고자 지금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그분에게 지금 책망을 받지 않는 자들은 결국 그분의 진노의 심판에 직면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나를 살펴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살펴보시는 것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시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히 12:6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내가 언약 백성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게 경고하시고, 나를 책망하시고, 내 안에 숨어 있는 예상치 못한 악함을 여지없이 폭로하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그분은 우리의 어떤 부분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내가 지옥불과 멸망으로 이끄는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는 것은 그분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그분의 책망을 무시하면서 그분 안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분은 죄를 조금이라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거룩한 본성에 거슬리는 것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것을 폭로하고 책망하십니다.
병들어 있는 언약 백성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병에 걸려 있었을까요? 피영민 목사님은 4 가지 영적 질병에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1)영적 무감각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 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신 거냐고 대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말 1:2~3).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들이 아무리 성을 쌓고 나라를 건설해도 하나님께서 헐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택하심의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미워했다는 것이 아니라 택하지 아니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형이고 남성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매력적이고 사냥도 잘하여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야곱은 아우인데다가 비겁하게 사기나 치고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택했다면 야곱을 택하지 않고 에서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도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택하심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택하심의 은혜가 인간의 조건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야곱과 그 후손들을 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사랑한 증거가 무엇이냐고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 때문에 B.C. 586년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자랑하던 솔로몬의 성전도 파괴되고 백성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다시 해방시켜 주신 것 아닙니까? 고레스 왕에게 역사하셔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도 짓고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그런 의식이 없었습니다.뻔뻔스러운 얼굴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느냐고 대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병든 사람의 특징입니다.
2)영적 반항심
말라기서에는 곳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항적인 말투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 1:6).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말 1:7).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말 2:17).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말 3:8).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말 3:13).
하나님을 향한 반항은 인간 죄성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도록 해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알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이 될까봐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 사단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향해 반항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인류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 죽음과 질병 가운데 고통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겸손히 인정하고 자신의 허물을 되돌아보며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은혜와 축복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반항을 한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멸시했다고 하시면 우리가 언제 그랬냐고 대들고 너희가 내 것을 도적질했다고 하시면 뻔히 해놓고서 우리가 언제 도적질 했냐고 모른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근거를 갖고 말씀하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근거 없이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큰 질병입니다. 반항의 영은 사단과 귀신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영적인 부주의
레위기 22장 17~25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에게 분명히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면 잘 살펴봐야 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이 짐승 중에서 값이 나가지 않는 흠 있고 점 있는 것으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점 없는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느냐? 제물이라는 것은 결국 신약시대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흠 있는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죄를 위해 드려질 제물은 흠 없고 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이니 그 예표로서 너희도 흠 없고 점 없는 제물을 가져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흠 있는 제물을 가져오고 이것을 제사장들은 부주의하여 잘 살펴보지도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9~10). 너희 총독도 받지 않을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냐는 것입니다.
4)예배를 경멸하는 것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말 1:13). 제사를 드리면서 제사장들이 코웃음칩니다.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과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고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 정해놓은 제사와 제물을 피곤하고 귀찮은 일로 여긴 것입니다. 예배는 성도들의 특권이고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예배하면서 은혜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어디 놀러가서 테니스를 치다가 은혜 받았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또 고스톱을 치다가 은혜 받았다는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은혜는 예배 중에 기도하다가 오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들의 이런 영적 모습을 보면서 말라기 선지자는 무거운 부담을 갖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혹시 병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역할
우리 기독교가 세상에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문화 속에 넘치는 죄악 된 생활 방식을 꾸짖고 있습니까?
요즘 교회들은 화려한 건물을 자랑합니다. 많은 수의 성도들이 교회에 다닙니다. 과거의 어느 때보다 사회적 활동이 왕성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화려한 건물과 교인의 수가 많으면 자신감으로 충만해집니다. “저 교회는 좋은 교회가 틀림없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나쁜 교회일리가 없다”라는 논리가 팽배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숫자 게임’의 덫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만한 대형교회의 교인이 되기보다는 거룩한 삶을 사는 작은 교회의 교인이 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번성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신 것이 분명하다”라는 논리를 위안으로 삼는 많은 무리보다는 항상 하나님께 책망을 받으며 날마다 죄를 버리는 소수의 무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번성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지(標識)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지는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은 그분께 책망을 받고 멸망의 길에서 돌이킵니다. 우리는 죄의 길을 버리고 거룩함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을 성경에서는‘좁은 길’이라고 부릅니다(마7:14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무거운 부담’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 앞에 서서 판단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날마다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고, 성령께서 우리 삶의 악을 지적해주시도록 기다릴 때입니다. 그렇게 해야 시간이 다 가버리기 전에 우리의 악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 지나가버리기 전에, 우리의 인생을 결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책망을 듣고 돌이키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복 받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