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정악의 개념과 그 형성배경에 대한 재조명
전지영
1. 서
흔히 정악(正樂)은 양반과 지배층의 음악이라는 생각에서부터 중인음악이라는 생각까지 다양하고, 주로 선비들의 심신의 수양과 관련지어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정악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견들은 분분하고, 과연 분류기준으로서의 정악이라는 개념이 타당한지에 관해서도 여러 논의들이 있었다. 많은 논의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통념으로서의 정악은 존재하지만, 정악의 범주와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한 결론이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은 과연 정악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음악적 범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하고, 과연 정악이라는 것이 음악의 특징으로 구분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 한다. 나아가 정악이라는 것이 실은 음악 외적인 요소에 의해 규정된 측면이 있지 않나, 그리고 정악의 이면에는 특정 그룹의 권력 구축의 과정이 내재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이 글에서는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정악’의 범주로 묶여있는 음악들이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범주로 묶이게 되었는지와, 그 과정 속에 감추어져 있는 권력관계의 형성을 추론해보고자 한다.
2. 정악에 대한 정의들
정악의 다양한 개념들에 대해 정리를 해보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있었다. 송지원은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송지원 1992)에서 그 이전까지의 선학들의 정악에 대한 인식들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정악에 관한 논의들을 종합하면서 정악을 결론적으로는 중인이라는 신분을 가진 집단이 창출해내고 향유하던 음악으로 규정했다. 이는 정악을 중인층의 음악으로 규정했던 그 이전의 한만영(한만영 1990: 1-11)과 송방송(송방송 1984: 412-3)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장사훈과 성경린은 아악과 정악을 같은 개념으로 보면서 모두 원래의 어의대로 아정한 음악, 혹은 정대한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민간의 음악이 아니라 궁중에서 연주되던 존귀한 음악이라고 하였다(장사훈 1984: 665; 성경린 1976: 30). 이는 결국 가곡이나 영산회상까지도 궁중음악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혜구는 여러 정악의 개념들을 종합하면서 나름대로 정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이혜구 1993).
① 정 악이라는 용어는 음악(淫樂)의 반대어인 정악(正樂)에서부터 1911년에 발족한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전습된 음악으로 전용(轉用)된 것 같다. 그 전에는 정악이라는 말 대신 음률(音律)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② 정악은 일반명칭으로는 아정한 음악을 뜻하며, 이 경우는 아악의 의미와 같다. 하지만 후에 특수명칭으로 사용되어 음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③ 실내에서 상탄(常彈)되는 음률은 국가의 제향이나 연향에 사용되는 아악과 구별되고, 선비나 문인과 같은 비직업 음악인에 의해서 연주되며, 장악원의 직업음악인에 의해 연주되는 아악과 구별된다.
④ 음률은 관현합주 음악보다는 원래 거문고 독주음악으로, 오락보다는 정인심(正人心)을 주목적으로 한다.
⑤ 음률은 거문고음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거문고보의 음악이 정악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로 정리를 하면서 이혜구는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상황에서 중인의 계급이 없어졌기 때문에 중인음악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고, 관현악의 아악에 비해 정악은 실내악곡이며, 오늘의 정악의 개념은 “속악의 산조에 비하여 고전실내악으로 집약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개념으로는 궁중음악은 정악에서 제외된다.
한편, 정악을 장르 개념으로 본 이상의 생각들과 달리, 황준연은 정악이 조선 후기 계면조가 변화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전통음악을 정악과 민속악의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게 한 원인은 계면조의 변화에 있다. 그리고 이는 계면조가 슬픈 악상에서 벗어나서 담담하게 변화하게 된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계면조 변화]은 조선 후기에 이룩한 음악에서의 새로운 조선 고유색이라 할 수 있다. 민속음악의 영향으로 향토적 심성에 다가간 것도 아니고, 섣부른 모화(慕華)에 의한 중국적 회귀도 아니다. 그것은 조선 고유의 새로운 음악적 지평의 개안이다. 삼음음계의 계면조의 발생, 즉 정악의 발생은 그 시대정신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영산회상과 가곡이 전래의 곡태를 버리고 변화된 것은 선비음악의 실천과 관념의 일치이고 그 음악관의 완성이다.... 요컨대 조선후기의 선비음악은 시대적 문화적 흐름과 마찬가지로 도덕과 음악이 융합된 조선 고유색의 정악으로 표출되었다”(황준연 1998).
황준연에 의하면 정악은 조선 후기 계면조의 변화로 인해 형성된 것인데, 계면조 변화는 선비들의 음악적 실천의 결과였기 때문에, 결국 그에게 정악은 역시 선비음악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것이다.
그밖에 정악에 관한 개념을 정리해보려는 시도는 다양하게 존재했는데, 예컨대 신대철은 정악을 자생적 정악(궁중음악, 선비음악)과 수입된 정악(당악과 아악계통)으로 나누어, 궁중음악과 선비음악으로 지칭되어온 음악을 아울러서 정악으로 간주했다(신대철 2001).
이처럼 정악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고 의견도 분분하지만,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정악의 개념은 아직까지는 없는 상황이다. 다만, 크게 궁중음악 및 선비음악으로 불려지곤 하는 일부 민간음악들을 통칭해서 정악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와 궁중음악을 제외한 후자만을 정악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그리고 학계 뿐 아니라 연주계에서의 통념으로서의 정악은 궁중음악과 영산회상, 가곡 등의 일부 민간음악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3. 이왕직아악부와 정악
정악에 관해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오늘날 ‘정악’으로 분류하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20세기 전반에 정악의 개념이 형성되면서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의해 음악의 각 장르들에 대한 사고에 혼란이 있었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서 가장 먼저 조선의 음악을 기술했던 안확은 조선의 음악을 궁정악과 민중악으로 구분했다. 그의 ‘조선음악사’(1931)와 ‘조선음악의 연구’ 도처에서 이런 구분은 언급되고 있는데, 궁정악은 말 그대로 궁중음악이며, 민중악은 요곡(謠曲 즉, 민요), 시나위, 영산회상, 가곡, 여민락, 취타 등을 포괄하고 있다. 적어도 안확 당시까지도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고 있으며, 후대의 음악인들이 여민락이나 가곡, 취타 등을 궁중음악의 한 갈래처럼 인식하던 잘못은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민요와 풍류를 동일한 범주에서 바라보고 있고, 실지로 음악을 궁정의 음악과 민중들의 음악으로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타당한 분류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정악개념이 모호한 상황인 것은, 적어도 안확 당시까지만 해도 모호하지 않던 분류개념이 그 이후에 모호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안확 이후 일제시대 후반 들어서부터 영산회상이나 가곡, 여민락(오늘날의 승평만세지곡) 등이 궁중음악과 함께 정악으로 묶이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안확은 민요에 관해 ‘민족의 충정에서 천진(天眞)으로 나온바 진정한 조선음악’으로 규정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안확 이후 이런 사고는 쇠퇴하고, 소위 정악계통의 음악들이 크게 중시된 만큼 민속악계통의 음악들이 홀대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말하자면, 안확의 ‘조선음악사’에서는 궁정악과 민중악이 동등하게 사고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정악과 민속악으로 분류가 고착되면서 정악계통의 음악들이 말 그대로 ‘바른 음악’으로 간주되고 중시된 반면, 민요를 비롯한 다수의 음악들은 경시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일제시대 후기를 거쳐 1951년에 이왕직아악부원들을 중심으로 국립국악원이 설립되면서 더욱 공고화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우리의 음악관이 안확의 시대보다 그 이후의 시대에 지배층음악을 고상하고 바른 음악으로 사고하는 전근대적 음악관으로 오히려 퇴행했던 이런 모습은 이왕직아악부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왕직아악부는 말 그대로 조선의 궁중음악을 전승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하규일, 임기준 등을 초빙해서 민간음악인 가곡과 가사, 시조 등을 배웠다. 사실 궁중음악이 아닌 이런 학습과 전승은 이왕직아악부의 설립 취지와는 엄밀하게는 맞지 않은 것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전통음악의 전승과 보존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왕가의 음악을 전승한다는 이왕직아악부의 명분은 마치 가곡이나 영산회상까지도 궁중에서 연주된 궁중음악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하는 현상을 낳았고, 왕가의 음악을 전승하는 이들의 관념 속에 이들 음악은 어쩌면 실제와 무관하게 모두 궁중음악이요 존귀한 음악인 ‘아악’이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왕직 아악부에서 학습되고 전승되지 않은 기타 음악 장르들은 썩 존귀하지 못한 ‘속악’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은데, 결국 궁중음악과 가곡이나 영산회상과 같은 일부 민간음악이 후에 정악으로 분류된 것은 이왕직아악부에서 하던 음악들만이 후에 ‘바른 음악’으로 정악으로 치부되었고, 나머지 음악은 민속악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가사의 경우, 잡가와 함께 주로 19세기 서울 사대문 밖의 상업 지구를 중심으로 연행되고 발달되던 음악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사와 잡가 사이에는 구분이 모호한 부분도 있어서, 두 음악 사이에는 유사한 면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데, 이중 가사가 후에 정악으로 간주된 것은 순전히 가사가 이왕직아악부에서 학습되고 불려졌기 때문이며, 잡가가 민속악으로 분류되는 것은 이왕직아악부에서 본격적으로 불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양식적으로 상당부분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음악이 어떤 것은 정악이고 어떤 것은 민속악이 되는 이런 현상은 정악과 민속악의 구분 자체가 음악 자체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이왕직아악부에서 불려지고 연주되었는가 아닌가에 의해 나누어진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정악이라는 말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는데, 어의(語意)적 의미의 정악은 중국의 고대부터 사용되어온 말이며, 특정 장르의 음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바른 음악’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이는 주로 궁중에서 사용되어야 할 올바른 음악을 이야기하거나, 선비들이나 군자로 지칭되는 이들이 ‘사무사(思無邪),’ 또는 ‘정인심(正人心)’의 음악을 추구하고 지향하던 것과 닿아있다. 그리고 조양구락부를 이은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이미 1911년부터 공식적으로 ‘정악’이라는 말을 가지고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악’이 지칭하는 이런 말 뜻 그대로의 의미는 특정 음악장르를 지칭하는 것이기보다는, ‘바른 음악’으로서의 어떤 지향점이나 ‘이상적 음악’으로서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현실의 음악적 모습과 음악을 둘러싼 환경을 끊임없이 개선해 가는데 그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정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른 음악’ 혹은 ‘좋은 음악’을 익히고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말임과 동시에, 이 때문에 여기에는 당시에 선진국의 문화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던 양악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정악전습소에서까지의 정악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 즉 ‘바른 음악,’ ‘좋은 음악’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정악이라는 말을 사용하긴 했어도, 그들의 ‘정악’이 오늘날 정악처럼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음악장르인 것처럼 행세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왕직아악부에서는, 조선정악전습소에서까지 어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자신들의 음악적 지향과 추구를 나타내던 말이었던 정악이, 그 단계를 넘어서 음악의 분류체계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왕직아악부의 정악은 자신들이 ‘바른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자신들이 담당하던 음악들을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음악장르인 것처럼 만들었고, 여기에는 이전 시대에 ‘바른 음악’을 사고하던 선비나 군자로 통칭되는 이들의 음악뿐 아니라 그들과 무관한 일부의 음악까지 포함되었는데, 이는 이왕직아악부에서 배우고 연주하던 음악은 그 뿌리에 관계없이 후에 모두 ‘정악’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사용되는 정악의 의미는 이전시대에 사용되던 사전적 의미의 ‘바른 음악’으로서의 정악의 의미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왕직아악부에서 했던 음악’이라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사전적 의미의 ‘정악’이 이왕직아악부라는 여과장치를 거치면서 본래의 의미와 상관이 없는 새로운 의미로 화학적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현행 정악에 대한 개념과 범주가 모호한 것은, 본래적 의미의 ‘정악’과 이왕직아악부를 거친 이후의 ‘정악’ 사이에서 우리가 혼돈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왕직아악부라는 (국악계 전체로 볼 때) 소수의 인물들에 의해 정악이라는 카테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해방이후 국립국악원의 설립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부산에서 설립된 국립국악원은 이왕직아악부 출신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표면적으로’ 해방 직후 남한에서의 국악계의 중심은, 소수에 해당하는 이왕직아악부원들을 제외한, 다수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던 대한국악원이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왕직아악부원들이 여기에 합세하지 않은 것은 존엄한 궁중음악을 전승해야 하는 아악부를 속악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국악원의 하부조직으로 편입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이 생각의 이면에는 존엄한 왕가의 음악을 하던 이들로서 속악을 하는 이들과 한데 어울릴 수 없다는 이왕직아악부 출신 음악인들의 인식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1951년 국립국악원 설립은 대한국악원에서 소외되었던, 소수에 해당하는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의 청원과 이승만 정권에서의 인맥의 배려로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은 한국전쟁 이후 계속해서 남한에서 국가 음악기관의 핵심을 이룰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인식대로, 그들이 연주하던 음악은 계속해서 바른 음악(정악)으로 굳어졌고, 그들이 하지 않았던 음악들은 모두 속된 음악(속악)으로 간주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물론 국립국악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한된 아악만이 아닌 전체 국악을 아우르면서 소위 민속악 계통의 음악들도 포용하고 포괄하려는 노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국립국악원의 핵심 직책은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에 국한되었다.
결국, 현행 정악이라는 것은 이왕직아악부 출신 음악인들이 연주하고 부르던 음악들이며, 그들이 한국 전쟁이후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면서 그 범주가 고착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잡가와 가사의 관계에서 보듯이 음악의 실제와는 무관하게 나누어진 정악과 민속악의 개념은 특정 그룹에 의해 연행되던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으로 나누어졌다는 면에서 다분히 전근대적이며, 이 때문에 현행 정악과 민속악의 개념은 일제시대와 해방, 그리고 분단을 거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가 음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이 설립 이후 균형 있는 음악발전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적 직책이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에 한정됨으로써 그 중심이 궁중음악과 정악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자신들이 왕가의 음악들(실지로는 일부 민간음악까지 포함하는 것이지만)은 ‘바른 음악’이고 그렇지 않은 음악은 ‘속된 음악’이 되어버린 현상은, 정악이라는 것이 실지로는 어떤 음악이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전근대적인 신분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편, 이왕직아악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음악이 모두 존귀한 음악이고 아악(雅樂)이었기 때문에 자진한잎이나 도드리 등과 같은 ‘아정하지 않은’ 명칭보다는 ‘아정한’ 악곡명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1930년대 후반에 당시 함화진의 아악부 악보를 베껴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국립국악원 소장 아악부 악보의 대금보, 피리보, 현금보 등에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낯선 이름들이 악곡명칭으로 등장하는데, 경록무강지곡(景無彊之曲, 여민락 만),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 낙양춘), 태평춘지곡(太平春之曲, 본령), 서일화지곡(瑞日和之曲, 해령),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여민락),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 밑도드리),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 잔도드리),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보허자), 황하청(黃河淸, 보허사), 표정만방지곡(表正萬方之曲, 관악영산회상),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 평조회상), 중광지곡(重光之曲, 현악영산회상), 천년만세(千年萬歲, 뒷풍류),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 취타), 절화(折花, 길군악), 금전악(金殿樂, 별우조타령), 경풍년(慶豊年, 자진한잎),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 가곡)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이름들은 궁중음악을 담고 있는 관찬악보인 이전의 ‘속악원보’나 ‘대악후보’에도 없는 명칭들이고, 18-19세기 무수히 많은 민간악보에도 보이지 않으며, 일제시대 초기 악보인 ‘방산한씨금보’ ‘학포금보’에도 없는 이름들이다. 즉, 전통적인 악곡명칭이 낯선 아명들을 하나씩 더 갖게 된 것은 이왕직아악부 시절인데, 이는 물론 보다 근본적으로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궤에서 보이는 정재(呈才)에 따른 음악들에서 이런 유사한 명칭들은 쉽게 등장하는데, 이는 실지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라 모두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매우 ‘근사한’ 음악의 제목만을 옮겨다놓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정재 몽금척(夢金尺)에 사용되는 음악은 요천순일지곡(堯天舜日之曲)이고, 헌선도(獻仙桃)의 음악은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수연장(壽延長)의 음악은 수요남극지곡(壽耀南極之曲),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의 음악은 송구여지곡(訟九如之曲), 실지로 연주되는 음악은 모두 보허자 령이었다. 즉, 보허자 령 한 곡이 정재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으로 연주되고 있었던 것인데, 그 결과 명목상의 음악과 실지 연주되는 음악의 괴리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이렇다 해도 실제로 사람들의 관념 속에는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이니 요천순일지곡(堯天舜日之曲)이니 하는 것이 실지 연주되는 음악의 제목이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최후의 관찬악보인 ‘속악원보’에는 분명 이런 요란한 명칭들은 보이지 않고, 음악의 제목들은 모두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악부 악보에서 이런 낯선 이름들이 보이고, 그 명칭들이 명목상이 아니라 실지 연주되는 악곡명으로 사용된 것은 결국은 ‘존귀하고 아정한’ 음악을 담당한다고 여겼던 이왕직아악부원들의 필요에 의해서였다고 추측되는 것이다. 또한 궁중음악이 아닌 영산회상이나 가곡 계통의 음악에까지 모두 아명이 붙여짐으로써, 이왕직아악부에서 연주하던 모든 음악들이 ‘존귀한 아악’이요 ‘바른음악’으로 사고하고 심지어는 가곡이나 영산회상까지도 궁중음악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이왕직아악부의 음악은 모두 정악으로 고착화되게 된 것이다.
4. 정악의 이면과 권력 관계
결국 정악에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경험과 해방 및 한국전쟁 이후의 이왕직아악부 출신 인사들의 권력화의 과정이 함축되어있으며, 신분관계에 의한 음악분류라는 전근대적인 음악관이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악 개념의 고착화에는 이왕직아악부 출신을 중심으로 국립국악원이 설립되었던 것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정악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런 권력관계는 지속적인 재생산을 통해서 강화되어왔는데, 예를 들어 1955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의 설립은 전통음악 보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초창기에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사승(師承) 관계에 상당부분 종속됨으로써, 권력 개념으로서의 정악의 개념을 강화하는데 일조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어 보인다. 해방 이후 국립국악원을 운영해왔던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의 가치관과 사고가 국악사양성소라는 제도 교육을 통해 전승되고 재생산됨으로써 정악 중심의 사고가 계속해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국악사 양성소와 국립국악원을 축으로 하는 커다란 권력구조가 형성되면서 이왕직아악부 출신 인사들의 가치관과 사고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강화하게 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결국 정악의 이면에는 해방 이후 이왕직아악부 출신 음악인들의 전통음악에 대한 권력구조 구축의 과정이 내재해 있으며, 현행 정악의 개념은 따라서 특정 인물들의 권력관계 형성의 과정에서 고착화되고 강화되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
오늘날 가곡과 영산회상의 아름다움이나 가치에 대해 이견을 다는 경우는 없을 만큼, 정악곡들이 우리에게 주는 자부심은 크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정악곡들의 범주는 모호하며, 모호한 이유는 그것이 음악 자체보다 음악 외적인 요인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특정 인물들의 권력구조의 구축과정이 내재해 있지 않나 의심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하더라도 영산회상이나 가곡의 가치가 퇴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념과 범주에 대한 인식이 변한다고 해서 음악 자체의 가치와 아름다움까지 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악은 존귀하고 정악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음악은 그렇지 않다는 전근대적 인식이나, 정악은 선비문화의 음악이라거나 중인 음악이라거나 혹은 궁중음악이라는 제한된 사고들이 다시금 재고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한일궁중음악교류연주회(서울 5. 23-5. 24), 왕조의 꿈 태평서곡(6. 7-6. 11)
판소리 수궁가 어전회의 대목에서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벼슬이름만 따서 등장한다. “승상은 거북, 승지는 도미, 판서 민어, 주서 오징어, 한림학사, 대사성 도루묵, 방첨사 조개, 해운공 방개, 병사 청어, 군수 해구, 현감 홍어, 조부장 조기, 부별 낙지, 장대 승대, 청다리, 가오리, 좌우나졸 근근 모조리 상어 솔치 눈치 준치 멸치 삼치 가재 개구리까지 명을 듣고 어전에 입시허여 대왕에게 절을 꾸벅꾸벅”하는데, 용왕은 이 광경을 보고 “내가 용왕이 아니라 오뉴월 생선전 도물주가 되었구나”라고 한다. 물고기들이 말도 안되는 벼슬이름들을 하나씩 맡아서 등장하는 것이 어전회의를 주재하는 용왕이 보기에도 우스웠던 것이다. 나는 오늘 우리의 궁중음악이 이런 수궁가 어전회의와 같은 상황이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월드컵에 맞추어 국립국악원에서 한일궁중음악교류연주회(서울 5. 23-5. 24, 부산 5. 27-5. 28), 왕조의 태평서곡(6. 7-6. 11)라는 큰 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지적과 비판이 이어졌다. 한일궁중음악교류연주회는 홍보는 일반인들에게 많이 했으면서도 좌석의 다수를 초대로 채웠고, 영부인의 참석으로 일반인들 뿐 아니라 국악 종사자들까지도 엄청난 불편을 입어서, 그 성과가 국악원측의 노력을 따라주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그런 것은 관주도의 대형행사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고, 한일 양국의 교류는 관주도보다는 민간차원에서 보다 활성화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왕조의 꿈 태평서곡은 예년과 다름없이 고증의 잘잘못을 따지는 이론적 지적들이 있었지만, 그런 지적들은 엄밀히 공연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학자들의 이론적 지식의 나열과 큰 차이가 없다. 사라진 옛것을 복원하는데 완벽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이론적 지적들은 참고해서 보완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두 공연을 위해 국립국악원 측에서 얼마나 애를 썼고 관계자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를 대충 알기 때문에, 이들 공연에 대해 비평을 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어쩌면 편안한 방관자 입장에서 남의 공든 탑을 폄하하고 깎아 내리는 ‘못된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적하고 싶고 해야될 것 같은 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궁중음악’에 대해서만 언급을 해야겠다.
이들 공연은 모두 궁중음악과 관련된 공연이었고, 연주된 음악들로는 한일궁중음악교류연주회에서 문묘제례악, 상령산, 청성곡, 태평가(가곡), 평조회상, 수제천, 낙양춘, 수룡음, 종묘제례악, 그리고 왕조의 꿈 태평서곡에서 대취타, 낙양춘, 염양춘, 수제천, 경풍년, 여민락(승평만세지곡), 본령, 보허자, 천년만세, 표정만방지곡, 수룡음 등이다. 이들은 모두 현재 정악곡으로 인식되고 있는 곡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연주되는 청성곡, 수룡음, 염양춘, 경풍년, 천년만세 등의 이름을 가진 곡들이 궁중에서 연주되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고, 여민락(승평만세지곡)이나 평조회상도 의심스럽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정악과 궁중음악을 혼동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궁중음악을 담고 있는 관찬악보로 가장 최근의 것은 내가 알기로 속악원보이고 이 속악원보는 고종 29년(1892)에 중수되었다. 여기에는 종묘제례악, 낙양춘, 여민락 만, 여민락 령, 여민락 관보와 현보, 보허자, 영산회상 등이 실려있다. 물론 이 속악원보는 각 권에 따라 그 연대가 다르지만, 영산회상 현재의 영산회상이 아니라 현행 영산회상의 아주 古形이며, 여민락 관보와 현보도 마찬가지다. 영산회상이나 여민락이나 보허자는 모두 초기에는 궁중음악이었지만, 조선후기에 민간에 흘러들어와서 민간에서 발달한 음악이고, 궁중에서 전승된 음악과는 차이가 있다. 보허사(현악보허자)나 여민락(승평만세지곡), 현악영산회상 등은 내가 알기로 민간음악이고, 민간의 거문고 연주자들에 의해 악보화되어서 민간악보로 전하고 있으며, 보허자(관악보허자), 여민락 만과 령 등은 궁중에서 전승된 음악이다. 조선 후기 관찬악보와 민간악보에 실린 악곡들의 차이가 이를 반증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들을 민간음악, 궁중음악 가리지 않고 모두 정악으로 부른다.
이렇게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이 뒤섞여있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단 자진한잎이나 보허사(현악보허자)나 여민락이 경풍년, 수룡음, 염양춘(이상 자진한잎), 황하청(보허사), 승평만세지곡(여민락)과 같은 ‘근사한’ 이름을 달고 있고, 이런 이름들은 과거 궁중에서 연주되던 당악곡들의 이름과 같다. 그리고 왕조의 꿈 태평서곡은 1795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봉수당진찬(奉壽堂進饌)을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의궤에 실린 악곡명칭들을 최대한 살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악곡들의 명칭이 모두 엉터리인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자진한잎, 보허사(현악보허자), 여민락 등이 경풍년, 수룡음, 염양춘, 황하청, 승평만세지곡 등으로 둔갑한 것은 이왕직아악부시절이다. 1930년대 후반에 당시 함화진의 아악부 악보를 베껴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국립국악원 소장 아악부 악보의 대금보, 피리보, 현금보 등은 1930년대 이왕직 아악부의 음악을 전해주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해괴한’ 이름들이 악곡명칭으로 등장하는데, 경록무강지곡(景록⑴無彊之曲, 여민락 만),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 낙양춘), 태평춘지곡(太平春之曲, 본령), 서일화지곡(瑞日和之曲, 해령),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여민락),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 밑도드리),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 잔도드리),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보허자), 황하청(黃河淸, 보허사), 표정만방지곡(表正萬方之曲, 관악영산회상),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 평조회상), 중광지곡(重光之曲, 현악영산회상), 천년만세(天年萬歲, 뒷풍류),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 취타), 절화(折花, 길군악), 금전악(金殿樂, 별우조타령), 경풍년(慶豊年, 자진한잎),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 가곡)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름들은 궁중음악을 담고 있는 관찬악보인 이전의 속악원보나 대악후보에도 없는 명칭들이고, 18-19세기 무수히 많은 민간악보에도 보이지 않으며, 일제시대 초기 악보인 방산한씨금보나 학포금보에도 없는 이름들이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왕직아악부에서 우리의 악곡명칭들을 모두 당악곡 명칭으로 바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명칭을 바꾼 것은 자진한잎이나 뒷풍류(현행 천년만세), 가곡 같은 민간음악뿐 아니라 여민락 만, 여민락 령, 낙양춘, 보허자(관악보허자) 등과 같은 궁중음악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행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바뀐 명칭을 가진 곡들은 모두 오늘날 개념의 정악이다.
여기서 이왕직 아악부원들의 사고방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이름들이 있음에도 굳이 어려운 한자어의 당악곡 명칭들로 악곡 이름을 바꿔놓은 것도 사대주의적인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이들 당악곡의 명칭들이 기존 악곡의 정체성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점도 한심하다. 즉,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하는 음악을 모두 과거 궁중음악의 악곡들로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예컨데 장수와 관련된 수연장지곡이나 새봄의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유초신지곡이나 송(宋)의 사악(詞樂)의 명칭들인 황하청, 수룡음, 금전악 등의 이름들이 각각 도드리, 평조회상, 보허사, 자진한잎, 별우조타령 등에 붙여진 것은 그야말로 음악과 전혀 상관없이 악곡명칭이 붙여진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실소를 머금게 하는 이런 모습은 마치 수궁가 어전회의 대목에서 물고기들이 벼슬이름만 맡아서 등장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왕직아악부에서 이렇게 음악의 명칭들을 바꾸어놓고 나서, 이들 ‘고상한’(실지로는 우스꽝스런) 이름을 달고 있는 이름은 모두 민간음악과 궁중음악 가리지 않고 정악곡으로 인식되었고, 이들 이외의 음악은 형식이나 향유층 등에 상관없이 모두 민속악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조선의 궁중음악을 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왕직이악부는 후에 궁중음악 뿐 아니라 가곡 등과 같은 민간에서 전승된 음악까지를 포괄하게 되면서, 궁중음악의 혼란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궁중음악과 일부 민간음악들 모두 이왕직아악부 시절에 해괴한 명칭들이 물고기 벼슬이름 붙이듯 붙여졌고, 후에 모두 정악곡이 되었고, 이왕직아악부의 음악이 아닌 나머지는 배타적으로 오늘날 민속악이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오늘날 궁중음악 연주회에서는 궁중음악이 아닌 곡들이 궁중음악의 명칭을 달고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데, 왕조의 꿈 태평서곡에서는 당악정재 하황은 다음에 천년만세가 연주되었다. 아마도 의궤에 천년만세를 연주한다는 근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중한 궁중음악이 계속 연주되다가 느닷없이 세악편성의 천년만세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어색하다. 오늘날 연주하는 천년만세는 영산회상 뒤에 붙는 계면가락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도드리를 일컫지만, 이런 음악들이 천년만세로 둔갑한 것은 이왕직아악부시절이고, 진짜 천년만세는 오래전에 전승이 끊어진 궁중음악이다. 실지로 많은 민속악 전공 악사들은 어려서부터 민간풍류를 배웠음에도 자신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천년만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뒷풍류를 천년만세라고 부르기에 매우 당황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이왕직아악부에서는 악곡명칭을 왜곡했고, 자신들이 하는 음악만 정악으로 사고하면서 정악개념을 왜곡했고, 이 때문에 정악 민속악이라는 엉터리 분류가 시작되었으며, 아울러 궁중음악의 정체성이 왜곡되었다. 이런 왜곡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정악과 궁중음악은 혼동되고 있다. 즉,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전통음악에서의 여러 가지 혼란들은 이왕직아악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조의 꿈 태평서곡에서는 오늘날 남아있는 궁중음악 레퍼토리가 많지 않은 까닭에 현행곡으로 고증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점이 이해가 되지만, 한일궁중음악교류연주회는 국제적인 행사였음에도 그런 무대에서 가곡 태평가나 수룡음이 궁중음악으로 연주된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이왕직아악부 시절에 음악이 그렇게 엉터리 이름으로 변질된 것은 기본적으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시대 국가기관인 장악원의 전통이 계승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절름발이 계승이 된 까닭이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궁중음악과 의례의 상당부분이 전승이 단절되었고, 그러다보니 궁중음악이 아닌 것들이 궁중음악으로 둔갑해서 전승될 여지가 생긴 것이다. 이왕직아악부가 없었으면 그나마의 궁중음악도 전승이 단절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런 이왕직아악부의 존재가 우리 근대사의 질곡을 담고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궁중음악의 전승이라는 역할을 맡았던 이왕직아악부는 조선시대 장악원과 현행 국립국악원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악원과 국립국악원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도록 하지 못하는, 뒤틀린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왕직아악부의 존재는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장악원의 전통이 있는 그대로 이어졌다면 우리는 보다 다채롭고 분명한(혼란스럽지 않은) 궁중음악을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 후대의 음악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말도 안되지만 사용하고 있는 물고기 벼슬 이름같은 악곡명칭들을, 진짜 조선시대의 궁중음악에 사용되었던 명칭들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음악까지 같은 것으로 오인할까 염려스럽다. 승상은 거북, 승지는 도미, 판서 민어 등과 같이, 수룡음은 자진한잎, 만년장환지곡은 가곡, 중광지곡은 현악영산회상 등의 엉터리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본다. 이런 명칭이야 말로 어찌보면 일제를 거치면서 얻은 찌꺼기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모든 정악곡을 궁중음악과 동일시하는 오류도 고쳐져야 하고, 궁중음악의 영역은 순수하게 궁중음악으로 지켜져야지, 민간음악을 궁중음악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출처는 어떤모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첫댓글 고생 많네~ 헛고생 그만하게
신경써 줘서 고마워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글 올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글 내용은 모르겠지만, 저 같은 사람은 그저 대금 소리 제대로 내는게 제일 큰 과제인지라.....^^
관심을 갖는 분과 그렇지 않은분과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마츄어란 어쩌면 그런 관심이 모자라서 아마츄어 인지도 모르죠 !! 그러나 아마츄어들도 기본을 알고 즐겨야 한다는 입장에 의견을 같이 합니다. 지나치면 아마츄어가 프로가 되려하고, 그런것들이 모여 프로와 아마츄어간 갈등요인이 된다는 거죠 !! 적당히 알고 적당히 즐기고..... 중용의 묘가 필요할 것 같다는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