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송] : 시편 96(95),1.6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본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저희를 주님의 뜻대로 이끄시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말씀의 초대] :
요시야 임금은 힐키야 대사제가 건네 준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자기 옷을 찢고 회개한다. 요시야는 모든 사람이 모인 가운데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는다(제1독서). 참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 거짓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여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복음).
[제1독서] :<임금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을 백성에게 읽어 주고,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2,8-13; 23,1-3 그 무렵 8 힐키야 대사제가 사판 서기관에게, “내가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였소.” 하고 말하면서, 그 책을 사판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 9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나아갔다. 그는 임금에게 먼저 이렇게 보고하였다. “임금님의 신하들이 주님의 집에 있는 돈을 쏟아 내어, 주님의 집 공사 책임자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10 그러고 나서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그런데 힐키야 사제가 저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하면서, 임금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11 그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임금은 자기 옷을 찢었다. 12 임금은 힐키야 사제, 사판의 아들 아히캄, 미카야의 아들 악보르, 사판 서기관, 그리고 임금의 시종인 아사야에게 명령하였다. 13 “가서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의 말씀을 두고,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주님께 문의하여 주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23,1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원로를 소집하였다. 2 임금은 모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 사제들과 예언자들,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데리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큰 소리로 읽어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3 그런 다음에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시편 119(118),33.34.35.36.37.40(◎ 33ㄱ)
◎ 주님, 당신 법령의 길을 가르치소서. ○ 주님, 당신 법령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 ○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 ○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 ○ 탐욕이 아니라,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 ○ 헛된 것을 보지 않게 제 눈을 돌려 주시고, 당신 길을 걷게 하시어 저를 살려 주소서. ◎ ○ 보소서, 당신 규정을 애타게 그리오니,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살려 주소서. ◎
[복음환호송] : 요한 15,4.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나도 그 안에 머물러,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알렐루야.
[복 음] :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
주님, 저희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제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 시편 34(33),6 참조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 없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
우리 조상들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상에 감을 올려놓았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좋은 감이라도 그것의 씨를 심으면 똑같은 감이 나오지 않고 거기서 자라는 것은 돌감나무입니다. 고욤나무의 생가지를 째서 거기에 좋은 감나무를 접붙여야 바라는 감이 열립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려면 생가지를 째는 아픔을 겪습니다. 제사상에 감을 올려놓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을 일깨워 주려는 것입니다. 나무에서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에 따라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되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서 불에 던져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믿음의 여부는 그 사람의 말과 행실에서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거듭나려면 감나무 접을 붙일 때처럼 생가지를 째는 아픔이 따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데 따라오는 아픔과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저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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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1> : 좋은 나무, 좋은열매
복음서를 살펴보면 평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부였고 농부였고 병자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과 이리, 가시나무와 포도, 엉겅퀴와 무화과와 같은 비유로 들어 말하면 그들은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배운 학식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도 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소위 특별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그 유별난 무엇인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허함이며 신뢰감입니다.
농부가 벌판에 씨를 뿌립니다. 그 씨앗들은 자라날 것이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반드시 싹이 틀 것이라는 것을 농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은 반드시 싹을 틔웁니다. 농부는 기다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를 맺습니다. 거기에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무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무로부터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장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산은 정치가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닙니다. 산이나 바다로 갈때면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어느곳으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산으로부터 올까요, 바다로부터 올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장을 해제시켜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게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한 그루 나무에게로 걸어갈 때 문득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그 나무로 부터 오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 내부로부터 옵니다. 나무와 더불어 있으면 우리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고 마음편하게 한가로이 노닐 수가 있습니다. 꽃은 갑자기 우리를 습격하거나 나무는 도둑이 될 수 없으며 우리로부터 어떤것도 훔쳐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산에 갈때나 바다로 갈때나 숲으로 갈때나 나무와 함께 있을때나 우리는 경계심을 버리고 무장을 해제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공업화나 기계화, 기술발전이 진전되지 않은 나라일수록 더욱 많은 대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따라서 더 깊이 신뢰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술발전이 없는 사회, 과학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전 생애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겸허함과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그토록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인류의 행복에 조금의 기여도 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줄어들었습니다. 기계장치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덜 필요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자신이 하찮고 보잘 것 없으며 무의미한 존재인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머지않아 컴퓨터가 우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이들까지 우리를 필요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가, 복지단체가 그들을 보살펴 줄 것입니다. 우리의 늙은 부모들조차도 이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설 좋은 양로원들이 있어서 그들을 편안하게 모실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나 자신만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 또한 나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없다면 상대방도, 상대방이 없다면 나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이 점점 메말라가며 믿음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과 더불어사는 깊은 믿음의 차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자료 : 이상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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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3> : 우리의 신앙이 그저 겉만 요란하지 않은지...
제가 여러분을 위해 두가지 아파트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파트를 선택하겠습니까?
‘넓은 주차장, 화려한 외관, 안락한 실내공간, 편리한 편의시설, 최고의 학군, 걸어서 1분 거리의 지하철, 세계에서 제일 높은 아파트. 싸다 평당 100원. 대신 기둥 속엔 철사 두 개, 언제 무너질지 모름, 무늬만 아파트’
‘차 딱 한 대 들어가도 비좁은 주차장, 우중충한 색깔의 외관 및 실내, 걸어서 3시간 걸리는 지하철과 버스 정류소. 학교까지 택시타고 오천원. 천년이 가도 절대 무너지지 않음. 튼튼 아파트’
이 두 아파트의 좋은 면만 갖춘다면 최고의 아파트가 아니겠습니까?
최근에 우리를 슬프게 한 많은 사고 중에 건물을 잘 못 짓거나 부실하게 지어서 생긴 사고가 많습니다. 몇 년전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삼풍 백화점 사고와 씨랜드 사고 등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웃지 못할 많은 가슴 아픈 사고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다 보니 그리고 이익을 남기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로 인한 휴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옵니다. 와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주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성당문을 나서면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성당에 뭐 하러 갔더라...”
사실 우리 신앙은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머리 속의 생각들을 실천으로 옮길 때 그 신앙은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신앙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합니다. 또 어쩔 땐 주님의 이름을 자주 꺼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찾더라도 그 실천이 미약하다면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음을 주님께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신앙의 실천은 바로 반석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으로, 또한 입으로 구원을 집을 지어 나갑니다.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집이 튼튼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짓는 이 집이 부실하다면 삼풍 백화점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작지만 우리 일상 속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말은 신앙인입네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영 저처럼 상태가 안 좋습니다. ‘누구의 행동이 이렇네, 저렇네’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의 참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레네오 성인과 같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앙의 확고한 진리를 옹호했고, 순교로써 그의 신념을 드러낸 분이 바로 이레네오 성인입니다.
‘나의 신앙은 이 정도이니 너희들은 나를 보고 따라 온나.’라는 말보다는 그저 묵묵히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의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만 하고 마는 그런 분이 아니라...그 속에 참된 의지와 신념,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응답과 순명의 정신이 담겨 있었고, 또한 그 안에 무너지지 않는 확고한 삶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그저 겉만 요란한 삼풍 백화점과 같지는 않은지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또한 이레네오 성인처럼 우리 신앙을 굳건히 하고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말씀자료 : 계만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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