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도 쉬어가는
식영정(息影亭) 일원
명승 제57호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산 75-1
식영정은 1560년(명종 15)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다. 김성원이 쓴 시문집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공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 창평의 성산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다(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고 기록되어 있다.
01. 식영정의 구성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고 마루는 ㄱ자형으로 우뚝 솟아 있는 노송과 한여름 붉은 꽃의 무리로 온통 뒤덮인 배롱나무가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식영정 뒤편에는 〈星山別曲〉 시비가 서 있고, 그 뒤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로 산세가 연결된다.
본래 정자의 ‘정(亭)’이라는 글자는 언덕 위에 집을 지어놓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식영정은 모범적인 정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02. ‘식영정(息影亭)‘이라는 이름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장자》의 〈제물편(齊物篇)〉에 등장하는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바보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끝없이 달아났다. 그러나 제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끝까지 그를 쫓아왔다. 더욱더 빠르게 달려도 절대로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이 다해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 누구나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있는 곳,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세계(息影世界)’라 불렀다. 식영정은 바로 이러한 식영세계를 상징하는 곳이다.
03. 식영정의 주인 임억령(林億齡)
식영정의 주인이었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후를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벗 삼아 생활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여기고 산림에 묻혀 산 선비로 진퇴를 분명히 한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사종이란 ‘시문에 뛰어난 대가’라는 의미다. 해남의 석천동에서 다섯 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청백리로 불렸던 조선 사림의 정통인 박상(朴祥)의 제자가 되었다.
임억령은 30세가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가 금산군수로 재직할 당시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났는데, 그의 동생 임백령(林百齡.?∼1546)이 사화에 연루된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은거했다. 그는 명종조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담양부사를 끝으로 은퇴한 후 이곳 식영정에서 은일했다.
식영정에는 당대를 풍미한 시인묵객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시를 짓고 노래를 했다. 이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공 양산보,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었다. 이들이 바로 ‘식영정가단(息影亭歌團)’을 형성한 인사들이다.
특히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일컬어 ‘식영정 사선(四仙)’ 또는 ‘성산 사선(星山四仙)’이라고 칭했다. 식영정 사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들 식영정 사선은 식영정과 환벽당을 오가면서 각 20수씩 총 80수의 〈식영정 20영〉을 지어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다.
성산(星山)은 식영정의 뒷산인 별뫼를 말한다. 광주호가 만들어지면서 현재는 지형이 변형되었지만 과거에는 식영정 앞 창계천(蒼溪川)을 따라 경치가 뛰어난 장소가 많았다. 자미탄(紫薇灘), 노자암(鷺慈岩), 견로암(鵑로岩), 방초주(芳草州), 부용당(芙蓉堂), 서석대(瑞石臺) 등 식영정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 곧 〈식영정 20영〉이다.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은 정철과 함께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유년에 창계천(蒼溪川) 건너 작은 동산 위에 지어진 이미 포스팅한 환벽당(環碧堂)에서 함께 공부했다.
04.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詩碑)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성산의 사계절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가로 가사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시가와 산문의 중간 형식인 가사문학은 담양 지방의 정자원림, 특히 이곳 식영정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정철은 이곳에서 가사와 단가, 한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정철이 김성원을 흠모하여 지은 가사로 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식영정은 송강문학의 산실로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기도 하다.
05. 정자원림(亭子園林)
식영정은 부용당, 서하당과 함께 정자원림을 구성하고 있다. 부용당과 서하당은 식영정 아래 낮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부용당 앞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을 올라야 언덕 끝에 자리한 식영정을 만날 수 있다. 계단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식영정 정면에서는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의 수면이 보인다. 과거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온통 흐드러지게 핀 창계천의 여울이 아름답게 펼쳐졌을 것이다.
식영정은 환벽당, 소쇄원과 함께 일동(一洞)의 삼승(三勝)이라 일컬어졌다. 일동의 동은 동천(洞天)을 의미하는데 동천이란 산수가 빼어난 아름다운 경승지로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와 같은 곳을 상징하는 지명이다. 이러한 동천의 경승 중에서 특별히 수려한 정자원림 세 곳을 선정하여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했다.
식영정 일원은 성산 아래에 위치한 식영정과 부용당, 서하당, 연못 등 전통원림 시설을 비롯하여 우거진 송림, 조망의 아름다움이 명승의 요건으로서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창계천 주변에는 식영정을 비롯하여 서하당, 부용당, 환벽당, 취가정 등 많은 정자가 있고, 이웃에는 별서정원으로 유명한 소쇄원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볼거리】
충장사, 풍암정, 환벽당, 가사문학관, 서하당,
왕버들군, 소쇄원
[출처] 담양 식영정-담양 가볼만한 곳|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