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귀신 이야기란 것은 이러다 쪄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계절에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나, 이번 회에서는 주인님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빌미로-_- 초겨울의 납량특집을 해볼까 한다…
여름날 부채질 열심히 해가며 마당에 앉아 귀신 얘기 하는 것도 제 맛이지만, 쌀쌀한 겨울, 방에 불 때 놓고 앉아 촛불 하나 켜고 하는 귀신 얘기는 더욱 오싹하다.
더우기, 주인님과 야옹이가 이 사건을 접한 것도 며칠 전이었다. 귀신이란 건 흉가나 고속도로에서만 (왜 고속도로에서 손 흔들며 태워달라는 귀신얘기 많지 않은가-_-)나타나는 줄로 알았던 우리 둘에게 이번의 납량특집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정말로 귀신을 보다니! 아, 그러고 보니 그 귀신에게서 자신이 유령이라는 증거를 제시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유령이 아니라면 내가 곱슬머리가 아니다-_-;;
게임방에서 명랑한 알바활동을 하며, 야옹이와 나는 단란주점하게-_- 밤을 새고 있었다. (우리는 야간 알바다).
야간의 게임방엔 항상 알바가 4명이었다.
정식 알바인 야옹이, 맨날 따라오는 알바의 마누라 ― 주인님, 주간 알바인데 6개월 째 집에 안 들어가고 있는 용팔(-_-아름다운 가명이다)이, 주야간 전천후 대타이자 역시 2개월째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덕팔(아아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가명인가)이….
아참, 전국의 용팔이와 덕팔이들에게 미리 사과를 드린다.
이 4명이 아까도 썼듯 단란하게 게임방을 지키고 있었다.
손님은 머릿수에 치지 않느냐고?
에잇 퉤… 더럽게 장사 안 되는 겜방이라 손님 따위는 없었다.
4명은 각각 컴터 한대씩을 붙잡고 앉아 각각의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야옹이 : (디아블로 중)파월 깔아, 파월! 그 때는 오브를 날려야지 바보때끼야! 랩78에 파월이 그게 뭐냐! 파티 끊어! 파티이이이! 경험치만 깎아먹어!!(지 혼자 전쟁이다)
용팔 : (화상채팅 중) 열 분 살 앙 훼∼? 하 이 염∼ 오 늘 열 나 재 수 엄 떴 더 염 벙 개 퍽 탄 만 나 용 던 만 날 리 궁 ㅠ.ㅠ (손으로 이 한국말 같지도 않은 글자를 치면서 왜 입으로 궁시렁 거리는지 모르겠다)
덕팔 : (포트리스 중) 4444!! 번지∼ 아, 바람이 바뀌었다… 빽샷! 빽샷 날리야지!! 아 띠발 달 맞나 진짜. 더럽게 못하네.
주인님 : (이 난리 쌩부르스 중에서 가장 건전하게 그냥 채팅중) 안녕하세요… 제 주변의 사람들이 이상한 외국말을 하고 지랄이예요… 흐흑 괴로워요 ㅠ.ㅠ
주인님의 대사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이 당최 문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신 분들은 지금 당장 게임방으로 달려가 디아블로, 화상채팅, 포트리스를 연마해 보자.
일주일도 안지나 저 포르투갈어 같은 말이 다 해석된다.
아아아아!! 아니다!! 저 따위 말 배우지 말고 악마의 늪에 새끼발가락 따위도 담그지 말자!! 저거 세 개 다 배우면 폐인 된다.
어쨌든 그렇게 네 사람은 컴터를 붙잡고 이상한 소리나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단 하룻밤 동안 말이다.
주인님은 카운터에 앉아서 채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컴퓨터 모니터 뒤로 각각 게임에 빠져 있는 세사람의 뒤통수가 보이는 위치에 앉아 있었다.
두시간 쯤 채팅을 했을까, 뒷골도 뻐근해오고 잠도 오고해서 주인님은 커피를 타 먹기로 했다.
커피잔에 뜨건 물을 붓고 밥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열없이 올라가는 채팅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였다.
주인님의 바깥 시야로, 낯선 시선 하나가 들어왔다.
앞을 보고 있어도 측면은 대충 보인다.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는 주인님의 옆에서 누군가가 주인님을 쳐다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니라 모니터 뒤에 숨어서 고개만 삐죽 내밀고 말이다.
난 첨엔 그게 셋 중의 하나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래서 커피를 계속 저으며 농담을 했다.
주인님 : 참, 귀여워 죽겠네 귀여워 죽겠어. 토끼 같다 야.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장난이 길구나 싶어 주인님은 커피잔을 들고 쭉 마시며 계속 그 쪽을 옆눈으로 봤다.
머리가 덥수룩한 남자애였다. 땡그란 눈으로 모니터 뒤에 숨어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또 내밀었다가… 첨엔 웃고 말았는데 그 형체도 분명치 못한 걸 계속 보고 있으려니 점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 : (용팔이 저게 계속 장난을 치네 ^^. 머리 덥수룩하고 눈 땡그란게 용팔이가 틀림없어. 근데 자꾸 보니까… 용팔이가 아닌 것 같잖아… 우에에엥 ㅠ.ㅠ)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난 목이 더 말라왔고 커피를 자꾸 마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정체불명의 눈 땡그란 녀석은 계속 날 낼름낼름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오기가 솟아난 난 고개를 홱 돌려 그 자식을 쏘아보았다. 갑자기 그 녀석이 휙, 사라졌다. 팔에 닭살이 주루룩 돋는게 느껴졌다-_-;;.
주인님 : 어… 어… 사, 사, 사, 사라…지네…
야옹이 : (디아블로 하다가) 와? 와 혼자서 중얼중얼 하노?
주인님 : 어, 어, 어… 요, 용팔아. 방금 니가 모니터 뒤에서 내 쳐다본 거 맞제? 응? 응? 제발 맞다고 해도 ㅠ.ㅠ
용팔이 : (담담하게)맞아요.
주인님 : 헉, 진짜 니가 그랬나? 아이씨^^;; 놀랬다 아이가. 와 그랬는데, 내가 이쁘면 옆에 와서 뽀뽀를 할일이지.
용팔이 : 우웨에엑∼ 무슨 소리예요 누나! 방금 누나가 제발 맞다고 대답해 달라메요!
주인님 : 그럼 정말 니가 아니란 말… 이… 냐… ㅠ.ㅠ
난 진짜 귀신을 보아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해졌다. 소름을 돋았지만 무섭다는 것보다 게임방 카운터에 귀신이 나타났다는 게 웃겼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야옹, 용팔, 덕팔 세 사람은 진지한 토론에 빠져 들어갔다.
야옹이 : 호오, 그 놈이 누굴꼬, 이 게임방이 원래 터가 안 좋다 카더만은.
덕팔이 : 누나가 기가 허해서 헛것을 본거 아닐까요.
야옹이 : 헛것을 그렇게 오랫동안 보나. 그라고 주인이 인상착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저렇게 쓸데없이 건강이 넘치는데 무슨 기가 허하긴 허해…
용팔이 : 제가 사장님한테 들은 전설이 있는데욧--+
야옹이 : 허억, 전설이라니? 이 카운터에 얽힌 얘기가?
용팔이 : 저 일하기 전에 알바 생이 한명 있었는데, 사장이 점심값을 안줘서 매일매일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대요…
야옹이 : ㅠ.ㅠ 그건 우리 얘기 아니가?
용팔이 : ㅠ.ㅠ 말하고 보니 그렇네요.
야옹이 : 하여튼,
용팔이 : 하여튼 굶주림에 지친 알바생은 어느 날, 모진 결심을 했어요…
야옹이 : 허억, 사장을 잡아 먹었나?
덕팔이 : 그럼 아까 저녁 9시에 마감한다꼬 올라온 사람은 누군데요?-_-.
야옹이 : 미안하다 넘겨짚어서…
용팔이 : 알바생은, 그만, 매상에 손을 대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어요!!
덕팔이 : 허어어억!!
야옹이 : 허어어억… 저런… 부러운 놈 ㅠ.ㅠ
용팔이 : 하지만 그 알바 생은 그만, 매상을 뽀린 걸 사장에게 들켰지요.
덕팔이 : 어쩐지 카운터에만 앉으면 어깨가 아프더라니.
야옹이 : 목매 죽은 거하고 어깨 아픈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덕팔이 : 형, 그 얘기 몰라요? 어떤 고딩 학생이 책상에만 앉으면 어깨가 아파서 자기가 책상에 앉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봤더니 어깨 위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 버선발이 놓여 있더라는거….
야옹이 : 어쨌든… 음, 그럼 그 놈 귀신인 게로군.
용팔이 : 그 놈 자살 안했는데요.
야옹이 : 뭐? 그럼 들켜서 어떻게 됐는데?
용팔이 : 짤렸죠-_-.
덕팔이 : 그게 끝이냐아아아!!
용팔이 : 그럼 끝이지! 꼭 사람이 하나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잔인한 인간들.
귀신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용팔이 나름대로는 '카운터에서 매상 훔친 알바생'과 '카운터 모니터 위에 나타난 귀신' 사이의 연계성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 같았으나… 그들은 모두 내가 헛것을 본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토론을 접었다.
주인님 : 나는 억울하다, 억울하단 말이다! 내 시력이 얼만데 헛 거를 보노!!
야옹이 : 좌우 0.2 잖아-_-.
주인님 : ㅠ.ㅠ 으흐흑, 그래도…
야옹이 : 아아… 니는 눈감고 앉아서 시력강화나 해라, 난 3층에 올라가서 잘란다.
피씨방은 2,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3층은 야간에 영업을 안 하기 때문에, 알바생들이 거기서 간이침대를 펴고 자곤 했다. 야옹이는 간이침대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가고, 난 계속 채팅을 하면서 억울해 하고, 용팔이와 덕팔이는 각각의 세계(포트리스와 화상채팅)로 돌아갔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역시 사건은 내가 억울하게 기가 허한 뇬으로 마무리 되는데서 끝나지 않았다.
새벽 3시. 야옹이가 잠든 지 한 시간이 겨우 지났을 무렵, 갑자기 와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야옹이가 굴러 떨어지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항상 궁금했었다. 맨날 대범한 척 하는 야옹이가 진짜 귀신을 보면 어떤 말을 가장 먼저할지. 물망에 오른 단어들 중 젤 유력한 거 세개는 '엄마아아!' '사람이면 게임비를 내고 귀신이면 물러가라!' '넌 누구냐!!’였었다.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야옹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 씨☓'이었다. 하긴, 자다가 귀신 보면 나라도 그러겠다-_-;;;;.
주인님 : 야옹아, 진정하고, 자, 무슨 일인데?
야옹이 : 에이씨! 내가, 내가 3층에서, 3층에서 자는데 말이다! 자다가 눈을 떴는데! 에이씨!
용팔과 덕팔과 나는 걱정스런 얼굴로 야옹이를 삥 둘러 앉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면 걱정스런 얼굴 이면에 이 웃긴 상황에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걸 느끼고 있었을 거다.
헌티드 힐> 같은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 귀신이 나오는 집 안에 있으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별 해코지 안하는 귀신을 접하고 보니 무섭다는 생각보단 재미있었다. ^^;;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래도 그랬을 거다. 혼자 당했다면 얘기는 좀 틀려지겠지만 건장한 남자가 셋이나 더 있는 데야 뭐. 혹시 그 남자들은 건장한 주인님을 보면서 안심하지 않았을까-_-.
혼비 백산한 야옹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불 꺼진 3층에 간이침대를 펴고 야옹이가 자고 있는데, 어디서 타닥타닥 하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경계에서 야옹이는 그게 꿈이라고 잘못된-_- 판단을 내리고 말았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한참 동안이나 들으며 잠을 다시 청했다. 타닥타닥타닥타닥…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소리가 10분 넘게 들리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침내 야옹이는 담요를 들치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고, 머어찐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눈이 땡그랗고 머리가 덥수룩한 남자였다. 핵심적인 인상착의가 내가 본 그 녀석과 비슷했다-_-. 3층 전체엔 불이 꺼져서 깜깜한데, 그 녀석이 앉아 있는 컴퓨터 쪽만 환했단다. 녀석은 야옹이가 새파랗게 질려서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려댔고, 야옹이는 비명을 지르며 침상을 박차고 2층으로 뛰어내려온 것이었다.
주인님 : 야옹아 곰곰히 생각해봐라, 꿈 아니었나? 그 귀신 옆에 디지몬이 뛰어다니고 있었다든지.
야옹이 : 내가 바본 줄 아나! 꿈하고 현실도 구분 못 하구로!!
용팔이 : 아까 누나한테 헛 거 본거라고 해서 억울한가 봐요-_-.
주인님 : 그래! 얼마나 억울한지 알겠제!!
야옹이 : 지금 그게 중요하나!! 3층에 귀신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 때였다.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나올라 치면 꼭 촛불 꺼지고 바람 부는 걸 유치하다고 비웃었던 내 자신을 그때 뼈 속 깊이 반성했다. 살다보니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다. 갑자기, 모든 컴터가 일시에 다 꺼지며 형광등이 팍 나갔다. 아하하하하! 참 멋지다! 하룻밤에 귀신이 두 번이나 나타나고 정전까지 돼?!!
용팔 : 형,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누나가 본건 누나가 원래 정신없는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이 자식이--+) 형마저 이러면 진짜 여기 귀신이 있는 게 된단 말 이예요!
덕팔 : 우, 우리 나가서 계단에 앉아 있어요… 여기 더 있으면 무슨 일이 날 것 같단 말이예요 ㅠ.ㅠ
주인님 : 저, 저기 난 택시 타고 집에 가모 안되나?
용팔 : 그래!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야간 알바는 형이지 우리가 아니잖아!
덕팔 : 그래! 형만 여기 있고 우리는 나가서 다른 게임방 가자-_-.
인간은 최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일행들 중 하나를 귀신이 잡아갔을 때의 상황이다) 얼마든지 동료를 배반 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야옹이는 동료의 배반을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야옹이 : 다른 게임방엔 정전 안 되었을 줄 아나!!
좌중은 우울해졌다 ㅠ.ㅠ . 넷은 겜방을 버리고 도망을 가지도 3층에 올라가서 진상을 파악해 보지도 못한 채 2층 문 앞에 모여 앉아 대책회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