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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라, 지금은 울어야 할 때*
정혜원(동화작가·아동문학평론가)
1. 사유思惟, 심연深淵의 노래
김율희 작가는 1986년 김춘수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시와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1990년 첫 동화집 『노란 장미 열한 송이』 발간 이후 장편동화 『책도령은 왜 지옥에 갔을까?』, 『책도령과 지옥의 노래하는 책』, 『나다를 찾아서』, 『코코코 나라』 등 다수의 동화집을 낸 중견작가이다. 이 중 『책도령은 왜 지옥에 갔을까?』는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또 한국아동문학작가상, 한정동아동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문체부장관상 등의 굵직한 상도 수상하였다. 현재는 국제PEN한국본부 편집장으로 있으며 대학과 각 기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해 왔다.
한국아동문단에 동화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들은 다른 장르보다 많다. 수많은 작가 중에 김율희는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물론 작가가 좋은 작품을 써서 독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일이지만, 조금 욕심을 내보자면 김율희 작가는 깊은 사유의 작가라 말하고 싶다. 좋은 작가는 많은 책을 마구 쏟아놓기보다 자기 성찰과 깊은 사유를 통해 진정성 있는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른 작가들은 깊은 사유와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다른 작가도 그런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이렇게 비중 있는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차 독자가 어린이이기 때문에 다소 가볍고 쉽고 서사가 촘촘하지 못하거나 식상한 것도 수시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네 작품을 통해 작가의 깊은 사유, 그로 인해 파생한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려 한다.
2. 구원, 자타(自他)의 상생
작가들은 모두 이 세계에 촉을 세우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 촉이 어디로 뻗느냐에 따라 작품도 달라진다. 요즘처럼 세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때가 또 있었던가 싶게 언론에서는 하루가 달리 사건 사고로 도배를 한다. 그가 작가로서 노력하고 또 그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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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희 작가의 시 「슬픔의 돌」에서 인용
련된 일을 계속해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미 개인적 구원을 얻은 작가란 생각이 들
게 한다. 물론 어떤 사람을 다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지금까지 수십 년 그가 살아온 행적을 보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고 작품도 그를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들이 왜 쓰는가? 무엇을 쓰는가에 대해 질문을 하면 많은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쓰고 무엇을 쓰는 것일까. 그의 작품을 통해 추측해보면 그는 세상을 선한 방향으로 돌리고 싶고, 인간의 성찰을 통해 구원하겠다는 야심 찬 의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보다 보니 필자도 아동문학 문단에 자꾸 날이 선다. 시리즈로 나오는 동화집이 너무 상업적이거나 놀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의 심리에 기대어 자꾸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그러나 『책도령은 왜 지옥에 갔을까?』와 『책도령과 지옥의 노래하는 책』은 두 권으로 된 시리즈이지만 당연히 할 말을 한 작품이다. 수년 전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적잖이 놀랐다. 책도령은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의 끝판왕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이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캐릭터이다. 수많은 교사나 부모들이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라. 책 속에 길이 있다.’라고 조언한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을 읽었으면 성찰을 하고 자기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많이 읽은 책도령이 지옥에 갔다는 설정은 독자가 쉽게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흥미와 의구심으로 시작하여 작품을 읽어가면서 그 문제도 풀리게 된다. 그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다른 종교도 다 수용하고 있고 이해의 폭도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권의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 구원’이라고 했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구원’은 가장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불교나 여타의 종교도 비슷하다. 사실 요즘같이 각박하고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구원’의 문제를 다른 장르도 아닌 아동문학 장르에서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어린이는 성장 과정에 있고 아직 많은 지식이나 경험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다양한 방식과 소재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하튼 ‘구원’이란 개념은 어려운 건 확실하다. 어린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아야 하는 개념과 경험에 대해 작품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뛰어넘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까지 가는 데는 독자의 시차가 좀 있을 수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기후변화, 환경오염, 기근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조금 편차를 보이긴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결국 전쟁을 하는 것도, 기후나 환경이 오염된 것도, 처처에 일어나고 있는 기근도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인재이고 그 핵심에는 비뚤어진 인간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묻지마 범죄’를 볼 때 지옥에서 악마들이 풀려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것 역시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 불운을 희망으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우성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만 간주할 수 없는 것이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너무 빠르고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는 이 세계에 작품이 과연 독자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이룬 문명을 보면 기립박수라도 쳐야 할 만큼 매우 훌륭하지만, 거기에도 빛과 그림자처럼 각각 입장이 다르고 평가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런 세계를 보고 절망했을지 모르나 바로 절망이란 병에서 누구든 건져 올리는 일에 앞장선다. 극단적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타자를 해치는 이런 상황에서 사실 ‘구원’은 너무 멀리 있는 이데아인지 모른다. 그가 작가인 이상 그의 의지와 신념은 변하지 않고 더 깊은 사유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우리는 지나친 유교 사회에서 개인은 존중받지 못한 채 몸부림쳤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자유가 방임이 되고 어디든 넘쳐 흐르는 물욕 때문에 정치도, 경제도, 종교도 다 변절하고 말았다. 한쪽에서는 각성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한쪽에서는 귀를 틀어막고 계속 물신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소중한 삶을 좀 먹고 있다. 어떤 때는 인간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구원’을 논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보면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이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책도령은 자기만을 위한 존재다. 현대인과 매우 닮아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독서만 하고 타인과 전혀 나누지 않는 삶을 강하게 비판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책도령을 과감히 지옥으로 퇴출시킨다. 책도령 입장에서는 즐겁고 행복했을지 모르고 나름대로 성찰하며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지 모른다. 비록 소승적 구원일지라도 말이다. 작가는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더 넓고 이타적인 세상, 즉 이 세상에 이데아를 꿈꾸는 사람일지 모른다.
후편은 더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지옥에서 노래하는 책 달이’란 캐릭터는 옥황상제가 지옥으로 보내준 책인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달이는 염라대왕의 마음마저 사로잡는 힘을 가진 존재이나 어느 날 사라진다. 사라진 ‘달이’를 찾아오라는 염라대왕의 엄명을 받은 책도령은 인간세계로 나간다. 다행히 책도령이 ‘달이’를 찾지만 달이는 인간세계에서 할 일이 있다며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책도령이 따라 다니며 돌아가자고 설득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달이는 책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책인 존재이다. ‘달이’가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을 향해 노래를 부르면 그들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작가는 우리 세계가 아무리 쓰레기장이나 폐허 같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변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지옥 같은 이 세계가 다시 정과 희망, 정의가 흐르는 천국 같은 세계가 되길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살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때 이타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욕망 때문에 타자를 희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처럼 원망과 상처, 아픔이 존재하지만 반대로 희망과 치유와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들이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로 구성한 세계이긴 하지만. 작가는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양방향이 모두 잘 소통하는 세계, 아픔이 없는 세계를 만들어 내려 한다. 전편에서 책도령을 중심으로 한 서사가 소승적 구원을 말했다면 후편은 책도령과 달이의 서사가 주를 이루면서 독자에게 이타적인 삶, 대승적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독한 이기주의에 빠진 우리 세계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동화란 장르를 통해 인간의 구원 문제에 접근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철학적 물음과 어려운 개념이 들어갔기에 저학년 어린이보다는 고학년이나 그 이상의 청소년과 성인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3. 자성自省, 또 하나의 울음바다
그의 작품 『나다를 찾아서』는 언어를 소재로 삼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통하지 못하는 언어에 대한 경각심에서, 『코코코 나라』는 거짓이 참을 이기는 사회에 경각심을 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앞에 언급한 두 작품보다 세태를 고발하고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훨씬 적극적이다.
『나다를 찾아서』란 작품은 언어를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고 있다. 언어도 태어나서 성장하고 사멸한다. 그런데 요즘 언어는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성인이 소통하기 어렵게 비틀어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언어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인간 간의 소통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언어가 소통보다는 불통하지 않나 하는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 세계 속에 말과 글이 다 있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계속 외계어 같은 말은 만들어 내고 말도 되지 않는 방법으로 말을 축약시킨다. 그렇게까지 말을 줄일 만큼 그들이 거국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바쁜 것도 아니다. 설사 바쁘다고 하더라도 명사가 동사가 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작가는 언어란 소재를 가지고 또 남몰래 해일 수 없는 밤낮을 앓으며 고심했을 것이다.
인류가 혼탁한 언어 사용으로 말을 잃어버리자 주인공 ‘소리’는 언어의 여신 ‘나다’와 ‘말씀의 거울’을 찾으러 우주도서관으로 간다. 동화나 소설에서 사건이 생기면 집을 떠나 모험을 하는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마치 외국 판타지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보는 느낌이다. 소재가 특이하고 낯설며 한국 사회가 가진 문제를 작품화하여 흥미롭다.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은 다른 여타의 작품과 마찬가지이고 아주 지난한 과정을 겪는다. 작가는 말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질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 즉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무리 헝클어진 실타래라도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길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쉬운 길을 두고 자꾸 다른 방향으로, 샛길로 빠져드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또 언어는 다른 폭력보다 더 강할 수 있다. 언어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타자의 마음을 해치기 때문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시작은 한국사회의 언어, 말에 대해 일침을 놓는 것이며 세태를 고발하는 것이다.
언어의 여신 ‘나다’는 인간의 죄로 인해 언어가 타락한 세계에 분노하며 동굴 속으로 숨어 버리자 세상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시인’이라고 불리는 아버지와 ‘소리’는 신의 선택을 받고 ‘말씀의 거울’을 찾아 나선다. 나다(Nada)란 캐릭터는 ‘우주 전체를 채우는 영적인 소리를 뜻하는 고대 인도의 단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영적인 소리인 ‘나다’는 과학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신비하고 미스터리한 존재이다. ‘나다’는 ‘깨끗하고 곱고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들의 욕심과 이기심과 대조를 이룬다. 또 이런 인간의 탐욕을 비판하면서 종내는 언어가 눈처럼 깨끗하게 정화되고 제자리를 찾아가길 희망하고 있다.
‘소리’란 캐릭터는 언어와 청각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 왜 하필 이런 캐릭터를 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한 번도 말을 하거나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절실하고 온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란 결론에 이른다. 그의 아버지는 시인이다. 시인 역시 세상을 관찰하고 쓰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소리’가 ‘나다’를 잘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며 함께 위험한 여행을 떠난다.
“잘했다. 우리 소리, 장하구나.”
시인이 ‘소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소리’는 시인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뭔가 해낸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다.(153쪽)
소리는 반인반수의 나라, 절벽, 불타는 나무, 생각의 나무, 나선형의 계단 등을 지나게 된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게 된다. 누구도 ‘나다’를 찾지 못했지만, 순수로 상징되는 ‘소리’는 ‘나다’를 찾아가는데 성공한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그리워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 한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워하던 엄마와 해후를 하고 말도 하게 된다. 언어를 찾아 나선 ‘소리’는 약한 어린이이고 그중에서 극심한 장애를 가진 캐릭터이다. 그런 캐릭터로 하여금 성공하게 한다. 물론 극적인 효과도 있지만, 우리 언어의 순수성,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소리’의 대장정을 통해 언어의 중요성과 회복을 강조하고 있고 여기에 판타지가 지닌 재미까지 더해져 몇 배 더 문학적 재미를 배가하고 있다.
『코코코 나라』도 역시 세태를 풍자하고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전 작품과 달리 작가가 직접 관여하고 있고 목소리도 커졌다. 작가로서 더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설정은 『피노키오』에서 차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세계의 규칙인데,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것, 그것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최고의 선(善)인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거짓말을 하며 삶을 영위해나간다.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코가 길어지는데 코가 긴 사람이 이 세계 안에서는 바람직한 인간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훈장처럼 대단한 명예처럼 알고 살며 이와 관련된 사업도 성업 중이다. 이 세계는 현재 우리 세계와 매우 닮아있다. 우리 사회 시스템에서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종용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말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하며 살아간다. 허언증이 만연한 사회, 소시오패스가 공공연하게 지배하는 사회는 결국 파멸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판치고 사회 곳곳에서, 생활 속에서 기생할 때 우리의 법과 질서는 무엇을 하는지, 또 종교와 교육은 왜 이렇게 방관하는지 경탄할 노릇이다. 우리가 교육을 받고 종교를 믿는 것은 자기 구원뿐만 아니라 이 세계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작가는 코가 길어지는 세계, 거짓말이 난무한 세계를 설정해놓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비리를,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아가는 사회에 일침을 놓고 있다. 또 한술 더 떠서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 바이러스를 작품에서는 ‘Z-바이러스’란 전염병으로 설정하여 이 세계의 총체적 난국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와 전쟁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사회 구성원 누구나 선으로 알고 있었던 사회 이념이 거짓이란 걸 알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허망할 것인가. 할아버지 ‘코장’은 변화를 수용하지 않아서 그대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것이 ‘코장’의 명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생각이 달라졌다. ‘코나’와 아버지 ‘코수’는 사회가 바라는 대로 거짓말을 잘하며 지낸 사람들을 대변해주고 있고, ‘코나’ 동생 ‘코덜’과 ‘코나’ 어머니인 ‘코정’은 거짓말을 잘못하는 사람들, 즉 그 세계에서는 사회 부적응자들이다. 구십 구명이 옳다고 한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크게는 정의를 위한 것이지만 작게는 미움 받을 용기, 따돌림당할 용기, 손해 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퍼진 바이러스를 예방하려면 마스크를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이미 길어진 코를 줄이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코덜과 코정은 마스크를 쓸 수 있었지만, 코가 긴 코나와 코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날마다 하던 거짓말을 하루아침에 참말을 하며 산다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세계는 카오스와 같은 혼돈의 세계, 통제불능의 세계가 되며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은 어떻게든 코를 줄이려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통용되던 이념을 뒤엎고 금기시한 참말을 해야 코가 짧아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세계 안에서 전쟁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존하는 세계도 참말, 선은 책 속에서나 꽂혀있어라, 하며 누군가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이 참말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며 얍삽한 소시오패스가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 빛이 어둠을 이기고 선이 악을 이긴다는 말은 성경이나 불경에 숨어 있어야 하나, 위기감마저 든다. 이 작품은 우리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목소리가, 움직임이 더 커진 것은 우리 현실이 진심으로 걱정되는 것이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작가적 통탄과 책임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작가가 놓지 않는 것은 희망의 끈이다.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세계에서 희망은 가족들의 심연에 있던 진실이었다. 바윗덩이 같은 거짓을 내던지고 실낱 같은 희망을 갈구하는 힘은 역시, 진실이고 참이었다. 이 작품은 한 개인으로서, 작가로서 이 세계에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 「슬픔의 돌」에서
‘내가 보이면 울어라’한 것처럼 결국은 우리에게 자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이 모든 것을 거스르고 제멋대로 살다가는 어느 날 파멸이 목전에 있을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시 「슬픔의 돌」을 일부 인용해본다.
지구의 가뭄
人間의 가뭄
人間 精神의 가뭄
‘내가 보이면 울어라’
지금은 울어야 할 때,
처절하게 울어야 할 때
절벽 앞에서 우리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김율희 「슬픔의 돌」 일부 인용>
4. 희망, 살아있는 자의 기도
김율희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큰 애정을 품은 사람이다. 한 작품, 한 작품 내놓는 것마다 그가 사유의 바다에서 큰 소리로 울며불며 숙성시켜서 빚어내기 때문이다. 천주교인이지만 그 종교에 머물지 않고 다른 종교를 포용하며 우리 세계의 문제를 작품 세계에 재구성하고 메시지를 진중하게 건네는 것도 그의 긍정적인 면이다. 그의 희망은 이 세계가 서로 소통하며 살 수 있는 곳, 깊은 인식으로 새롭게 변화된 삶을 보길 원한다. 그러기에 다채로운 목소리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움직임으로 작품을 보여준다.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은 우리 세계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져 실신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둠에서 커튼을 걷고 나오게 하는 힘, 점점 빠져드는 늪에서 건져 올리는 힘. 이것은 우리 동화가 할 수 있는 고결한 일일 것이다. 김율희 작가 역시 이것을 꿈꾸는 수도자가 아닐까.
<끝>
<열린아동문학>겨울호, 제26권 제5호 통권 99호(202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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