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이 너무 엉망이다. 전기콘센트는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게 없고 화장실바닥에 물도 제대로 빠지지 않고. 창문이 없어 빨래를 널수도 없고. 가성비가 아주 나쁜 호텔을 잘못 골랐다.
연길기차역과 연길 버스터미널에서 모두 걸어서 5분거리고 외관도 깨끗하여 일박하였는데 내부가 너무 엉망이다.전원중에 제대로 동작하는게 하나도 없어 휴대폰과 배터리팩을 충전못해 엄청 걱정했다. 배터리팩은 13000mA으로 두개를 미리 충전해 두어서 다행이다.
서둘러 짐을 챙겨 6시40분쯤 호텔을 첵아웃 하고 연길역으로가서 어제 탔던 7시쯤 화룡가는 버스를 타고 용정으로 갔다. 기차역으로 가면서 보니 연길시내는 조선어과 중국어로 간판이 일목정연하게 되어 있었다.
주요 도로의 건물들이 이런 유럽풍의 노란색으로 통일되어 있고 간판도 조선어와 중국어를 병기한 것이 도시 전체를 리모델링한 것으로 보인다.
관광자원으로도 연변의 가장 큰 차별점이 조선족 자치구라는 것임으로 비록 이미 많은 조선족 특히 젊은 세대는 전혀 조선말을 몰라도 정부에서 관광자원으로 의무적으로 조선어 병기를 하여 조선어를 눈에 많이 띄게 한다. 그래서 희안하게 번역된 간판들도 많다. 예를 들면 한국어 식당이라는 간판이 꽤 있다. 아마 Korean restaurant을 번역하다 보니 한국어로 한것 같다. 건물의 조명도 잘 통일이 되어있는것을 보니 연길시 전체를 시정부에서 리모델링을 한 것 같다. 중국의 많은 도시들은 지방 정부들이 이런 사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도시의 특징점을 부각해서 관광 자원화 한다.
연길기차역앞 광장. 이곳에서 용정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제 저녁에 탄 화룡에서 연길 오는 버스와 동일한 버스다.
용정은 화룡으로 가는 길에서 삼십분정도 타다가 내리면 된다. 용정은 화룡가는 길의 사분의 일에 있는 중간도시인데 버스표값은 화룡까지 가는 18원을 다 내란다. 택시는 40원을 주어야 하기때문에 하는 수 없이 18원을 내고 화룡행 버스를 타서 7시 35분쯤 용정에서 내려 걸어서 30분를 걸어서 용정중학교로 갔다. 버스를 내려 조금 걷다가 보면 용정시 시정부 검찰청 세무서등 관공서 건물들이 보이고 조금 더 지나면 해란강海兰江이 나온다.
연길에서 화룡으로 가는 IVECO버스를 삼십분쯤 국도변에 내리면
용정입구인데 조선족이 아주 많이 살고 있다. 버스를 내리는 곳에 물레방아와
가야금으로 조선족의 풍물을 상징으로 내세웠다.
거문고뒤의 큰 건물이 용정시 인사국인데 입구에 걸린 많은 간판중에 종교국이라는 것이 있다. 중국에서 처음보는 낯선 단어다.
용정시 인사국을 지나서 걷는 길은 새로 잘 단장이 되어 있다. 해란강을 건너면 용정시내다.
용정시는 해란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다. 지금은 강 양편에 산책로도 조성이 되어있고 강바닥 준설 작업이 한창이다.
해란교. 우리 선조들도 이 강을 건넜을것이다.
물론 해란강은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시민을 위한 강변 산책로도 해란강옆으로 만들어 진다.
해란강을 건너 용정 중심지에 들어서자 말자 용정중학교가 보이며 8시 20분쯤 용정 중학교 도착하였다.
해란시내에 들어서자 이상한 조선말 번역들이 나온다."당의 생명선을 틀어쥐자". 이 말을 들어면 당중앙에서 싫어할건데.
이건 번역하다 말았다. 정작 중요한 부분이 없다.
신축 아파트 단지에는 "남의 장단에 춤추다"라는 말을 이쁘게 돌에 새겨두었다. 도데체 무슨 말인줄 알고 쓴건지. 대성중학교기념관의 조선족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건 조선족을 모욕하는 수준의 짓이라고 분개한다.
용정은 19세기 조선시대 말기 기근과 가렴주구를 피하여 조선족들이 일찍부터 이주를 하였고 밭농사만 되던 간도지역을 벼농사가 가능하도록 피땀을 흘려 일군 것이다. 지금의 용정중학교 안에 자리한 옛 대성중학교는 한국의 뜻있는 분들의 성금에 의하여 옛 대성중학교의 모습으로 1992년 9월 복원된 것이며 한국관광객의 기부금도 현재 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 복원된 옛 학교 건물은 지금 용정 조선족의 역사 민족운동과 윤동주시인에 대한 기념관으로 사용된다.
용정중학교정문. 오른쪽에 복원된 대성중학교기념관과 이상설선생 기념관이 있다.
학교 입구에 교훈을 조선말로만 써 두었다.
대성중학교와 윤동주시인 시비
오른쪽 제일 앞이 이상설기념관과 기념비, 그왼쪽이 대성중학교 기념관과 윤동주시비, 가운데가 용정중학교이다.
이상설선생 기념관과 기념비
학교 담벽에는 윤동주 시인의 동시도 적혀 있다.
6개의 민족학교가 통합되면서 세워진 용정중학교를 기념하는 기념비
기념관입구에 쓰인 대성중학교 복원기
기념관은 작은 공간이지만 용정으로의 조선족의 이주 역사, 민족학교 연역, 항일 운동사, 윤동주시인관련 내용을 잘 설명해 두었다.
용정을 중심으로 한 항일 유적지들.
대성중학교를 포함한 6개의 민족학교가 용정중학교로 통합된 이력이다.
일제가 조선에서 조선민족을 탄압할 때부터 이상설선생의 서전서숙을 시작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1920년 부터 1926년 사이에 6개의 민족학교가 설립되고 일제 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곳이다. 윤동주시인도 이곳 용정에서 태어나 대성중학을 나왔다. 6개의 민족학교는 시간을 거치면서 통합이 되어 1946에 용정중학교 하나로 통합이 된다.
용정의 이주 초기는 서당에서 하는 교육이었지만
이상설선생의 서전서숙이 세워지면서
명동학교
정동학교
대성중학교
은진학교
광명학교
동흥중학교
명신여학교
성경학교
광명여학교등 수많은 선각자에 의한 민족학교들이 설립되어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키는 것은 물론
악기를 가지고 음악 수업도 하고
요리실습도 하고
가사실습도 하고
여학생도 소풍가고
남학생도 소풍가고
악대부에
야구부
축구부는 물론
스케이트부와 체조부까지.
이 정도면 용정이 일제시대에 거의 조선반도보다 더 크고 훌룡한 교육도시였을것 같다.
일정수 이상의 관광객이 오면 이 조선족 여성이 설명을 해준다.하루에도 수십번은 할텐데 꽤 열심히 설명한다.
기념관 제일 마지막에는 성금함이 있다. 기념관과 학교를 위해 요긴하게 쓰인다고 한다.
윤동주시인이 해방이 되던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 후 화장되어 용정으로 돌아와 용정에서 장례를 치를때 장례식을 문익환목사의 아버지 즉 배우 문성근씨의 할아버지가 집도했단다.
용정에서 치러진 윤동주시인 장례식. 문익환목사가 집도하였다.
윤동주시인이 문익환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용정을 중심으로한 항일전쟁의 사진들도 있는데 그 중에는김일성과 현재 북한 군부의 핵심인 최룡해의 아버지 최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항일운동 사진중에 김일성과 현재 북한의 군사령관 최룡해의 할아버지 최헌도 있다.
대서중학교 기념관 바로 앞에는 윤동주시인의 추모비위에 서시가 쓰여있다.
대성중학교 졸업생인 윤동주 시인의 "서시" 시비 앞에서
윤동주선생 추모비와 대성 중학교 기념관 바로 옆에는 최초의 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헤이그밀사로도 활약한 이상설선생의 기념관과 기념비가 있다.
대성중학교에서 바로 연결되는 옆건물이 이상설선생 기념관이다.
이상설선생은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몇달에 거쳐 헤이그에 도착해 일본의 부당한 조선침략을 알린다.
초기의 용정이 먹고 살기 위해 넘어온 조선족위주였다면 이 용정을 민족 교육과 정기의 중심으로 만든 분이 이상설 선생이다.
이상설선생 기념관까지의 관람을 마치고 대성중학교기념관건물 밖으로 나오니, 운동장에 많은 학생들이 달리기 아침 운동 중이었다.
대성중학교 기념관과
용정중학교 사이의 운동장에서 아침 구보를 하는 학생등.
학교 담벽에는 조선족 고유 풍속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창을 하는 그림이나
부모님을 공경하는모습등을 한 벽면 가득 그려두었다.
9시35분쯤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연길로 가는 작은 버스를 탔다. 오늘 아침 용정으로 올 때의 버스보다는 많이 낡았지만 버스값이 5.5원으로 착하다.
10시20분쯤 버스의 종점 연길동북아버스터미널延吉东北亚客运站에서 목단강牡丹江으로 가는 오후12:10분 버스표를 72원에 사고 택시를 타고 남는 시간에 연길서시장延吉西市场을 둘러보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기본료는 5원인데 6원나왔다. 연길서시장은 70년대 시장 분위기다.
연길서시장입구
연길서시장 중심부, 시장안에 많은 골목들이 있다.
시장 주변에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얼마 지나면 동대문같이 될까?
원래 연길음식으로 좋아하는 명태껍집김밥明太鱼包饭과 명대대가리 순대를 하는 명태음식점을 찾았는데 없다. 하는 수 없이 손님이 많아 보이는 홍콩반점에서 짬뽕을 먹었다. 한국의 홍콩반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 먹을만 하다.
연길 서시장안의 홍콩반점. 아침열한시인데 손님이 거의 다 찼다.
해물에 목이버섯을 넣어 맛이 좋다.
근방에 커피브레이크라는 커피숍에서 커피한잔을 즐기는 여유도 가졌다.
한국식 커피숍이다.
이번 여행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은 커피
다시 5원을 내고 택시를 타고 연길동북아버스터미널延吉东北亚客运站에 도착하니 11시 45분이다.
연길동북하버스터미널
연길 버스터미널은 상당히 크다.
러시아로 가는 버스 노선도 있다.
12시 10분 목단강牡丹江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
연길에서 목단강으로 가는 버스표
목단강으로 가는 버스
발해의 두 번에 걸친 160여년간 해동성국의 수도인 동경성东京城,발해진渤海镇과 화산폭발로 폭포등 많은 절경을 가진 중국 5A경구인 경박호镜泊湖를 가기위해 흑룡강黑龙江省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인구 270만의 흑룡강성에서 세번째로 큰도시,목단강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꾸불꾸불한 산길을 네시간쯤 달리고 고속도로를 한시간여 달려 5시간이면 목단강에 도착한다. 중간에 한번 나무쪼가리 몇대 데고 플라스틱통을 준 야외 화장실을 휴게소삼아 한번 서고 두세번 기차건널목에서 기차 통과를 대기하면서 버스가 서서 장시간 버스를 타도 크게 담배가 피우고 싶어 담배마려운 일은 없는 것 같다.
목단강으로 가다가 잠깐 쉰 휴게소(??) 굉장히 자연친화적이다. 여자쪽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아마 여자는 이 버스를 타면 곤란할 것 같다.
버스가 흑룡강성을 접어들 무렵부터 가을녘의 누른 벼들이 무러익은 더넓은 평야가 나타난다. 이지역이 중국에서 가장 품질이 좋기 유명한 흑룡강성 오상쌀 黑龙江五常大米산지 부근이어서 쌀농사를 많이 짓는 모양이다.
목단강에 가까와 질수록 논은 더욱 더 넓어진다.
버섯 양식도 엄청난 규모로 하고 있다.
버스는 东京城을 거쳐 고속도로를 타서 목단강으로 향한다. 동경성과 경박호은 목단강에서 가는것이 가장 교통편이 좋아 목단강에서 이틀을 머물며 내일은 경박호를 가고 모래는 동경성을 간 후 오후에 하얼빈으로 버스로 가면 된다. 버스는 오후 17시 10분이 되어서 목단강버스터미널牡丹江客运站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내려 택시타고 목단강기차역牡丹江火车站옆의 동일보행로로 갔다. 택시비 7원. 기차역 옆의 동일보행로 东一步行路는 목단강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폭 사오십미터의 보행자전용도로로 오징어,양,닭, 굴같은 각종 구이와 각종 먹거리나 가방 신발등을 파는 노점상들 가득 차있고 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는 목단강의 명동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엄청난 인파로 메워진 동일보행로에는
이렇게 맛있는 꼬치를 파는 집이 줄지어 있다.
밤이 깊어 지면서 꾸이집앞은 더욱 사람들이 많아지고
스낵바 이층에서는 여자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른다. 원래 세레나데는 남자가 부르는 것 아닌가?
나도 양꼬치羊肉串 5원과 족발구이八戒烤猪蹄 10원을 먹었다. 양꼬치도 엄청맛있고 족발구이는 가게앞이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100년 전통의 牡丹江의 이 가게에서만 맛볼수 있다는 명성에 걸맛게 아주 맛있었다. 숯불에 족발을 구운후 매운 소스를 바르고 땅콩가루를 묻힌후 파를 살짝 얹어서 먹는다.
백년 전통을 주장하는 돼지족발구이집
먼저 숯불에 족발을 구운 후
매운 양념과 땅콩가루를 뿌려주는데
상당히 맛있게 먹었다.
번화한 곳을 조금 벗어나자 초월빈관卓越宾馆라는 호텔이 보여 들어갔다. 일박에 120원으로기차역과 번화가에서도 가깝고 나름 깔끔하다. 하얼빈에 6개의 체인점이 있다고 했다. 첵인을 하고 방에서 밀린 빨래를 마친후 아까 그 번화한 거리를 산책삼아 한바퀴 돍고 슈퍼에서 맥주와 포도 감자칩을 35원어치 사서 호텔에 돌아와 11시반쯤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