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그런 날 있었나 / 임 선영
임 씨에 성을 달고 있었으나 출가외인인 난 늘 시집 일에 자식들 일에
매달리며 사느라 친정 집 나들이에 소홀했었다.
우리 정서에는 한 가정의 아낙으로써 우선은 시집 집안의 일이 우선 인
시절을 살았다.
그런 세월은 언제부터인지 나이라는 숫자를 나에게 남겨놓고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주웠다.
추억을 건져내어 같이 수다 떨 수 있는 날이 돌아온 것이다.
간뎃집 할머니, 대섭집 할머니, 새집 할머니, 대문집 할머니, 사정거리 할머니
양철집 큰 어머니, 한 샵말 고모집 온 동네가 할머니 집이고 큰 집이고 고모 집이었던
내 고향 금마면 동고도리, 동고도인 문패 달린 우리 집은 늘 방학 때면 서울대학 뺏지
달은 오빠들을 필두로 각 집안 오빠들이 모여드는 집이었다.
사촌 언니들과 같이 지내던 우리 집은 밤새 호야 불 켜 놓고 무슨 이야기인지 너무도
재미있게 지내는 오빠 언니들을 보면서 아랫목 이불속에서 턱 고이고 사다 놓은
오징어 땅콩 찐 고구마 먹는 재미가 솔솔 하여 잠도 오지 않던 밤이었다.
친척들은 늘 그렇게 재미있게 지내는 것인 줄 알고 우린 금쪽같던 시절을 보냈다.
완순이 오빠, 호순이 오빠, 겸순이 오빠, 용순이 오빠 27 연대 연대장이었던
익순이 오빠는 얼마나 눈이 부시게 잘 생겼는지 시골 꼬마였던 내 눈에도 너무 훤해서
" 정말 미남은 저렇게 생겼구나" 웃기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였다.
지금 이 나이 되어 회상하며 그 시절 정말 꿈 같고 보물 같던 그때가 어린 성장 과정에
가족의 소중함 혈연들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두고두고 내 삶의 한 구석을 찾이하며
그리운 곳, 보고픈 사람들, 정이 넘실대던 고향으로 가슴에서 늘 춤을 추웠다.
나는 그 아름답던 회상을 잊을 길 없어 글로 남겼고 그림으로 그렸고 그래서 난 어설픈
글쟁이가 되여있었다.
고향에서 씨를 내린 할머니들의 혈손들이 자라 전국 여기저기 퍼져서 삶을 유지하다가
종친회다 하여 하나 둘씩 모여든 장소 재작년 다르고 올해 달라 그 오빠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 되어 보이지 않는 자리 참 인생무상이며 가슴 뭉클하다.
핵가족, 개인의 시대에 점점 家族이라는 말은 家는 있지만 族이 사라지는 시대라 한다.
가족의 형태가 다양화 되여가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으며 점점 다양화 되여가는 것은
천륜은 점점 사라지고 연대로 남는 형태가 되어가고 멀리 있는 친족조차 그 수가
줄어들어 인친 < 인터넷 친구> 동친 < 동네 친구> 이 더욱 협력적이고 연대감을 주는데
중요한 존재가 되어있다고 말하고 있는 시대가 되여있다.
그러한 시대 조류 속에서 <종친회>란 모임을 갖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 친족 모임은
참으로 귀하디 귀한 모임인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멀리서 " 선자야, 과일 좀 담아와라, 네가 제일 훙허물 없네" 환하게 웃으며 팔십
중반인 오빠가 망팔인 내 어린 시절 이름을 부르며 심부름을 시킨다.
"알았어요, 오빠"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늙은 몸이 날쌔진다.
이 아니 기쁨이던가, 어디 가서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단 말인가.
내 아명을 서슴없이 불러주는 자리는 바로 꽃자리가 아니던가.
전주 중앙 시장에서 스텐 요강을 사서 머리에 이고 가다 아이스케키 장사를 만나
사 먹다 보니 너무나 시원해서 손자들 생각에 몆 개를 더 사서 요강 단지 속에
넣어서 이고 전주에서 금마를 오고 보니 다 녹고 막대기하고 설탕물만 남았다는
웃기는 옛날이야기 남긴 우리 오새 할머니 우리 언제 그런 날 있었던가?
그 할머니가 너무너무 보고파지는 종친회 날이었다.
핏줄의 연을 함부로 하지 않고 모여든 우리 친족들 내년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
하기를 기도하면서 글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