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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67
4월16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4_U2bi33B5k?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
(방송 미사 리스트)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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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 기쁨의 원천, 부활>
병자성사를 집전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가끔씩 튀어나오는 말입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 너무 하십니다. 이 젊디젊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언젠가 한창 인생이 꽃 피어나야할 자매, 아직 시집도 안간 어린 자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났지만, 정말 간절히 기도 바치며 병원으로 갔습니다.
“주님, 지금 병환 중에 있는 이 자매가 당신의 은총을 간절히 애원하며 주님의 종을 불렀나이다. 당신은 고통 중에 있는 일들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셨으니, 저의 성사집행을 친지 주제하시어 이 교우에게 필요한 은총을 하락하옵소서. 아멘.”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았던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병자성사에 임하는 자매, 그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성체를 모신 후 그분 얼굴에 얼핏 스치는 희미한 미소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부활이란 것이 이런 것이겠지. 예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순간이 부활하는 순간이겠구나.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인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죽음조차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겠구나. 그 진리를 깨닫는 순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이로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몸소 보여주시는데, 그 절정은 당신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도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봐라, 이렇게 너희들과 똑같이 먹기까지 하지 않느냐? 그래도 안 믿겠느냐?”며 음식까지 드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의혹과 의심, 두려움을 떨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시공의 조건에 구애를 받지 않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언약을 완수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순간에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임재(臨在)’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앉거나 서거나, 집밖으로 나서거나 자리에 들거나 우리와 함께 온전히 현존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발현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뵌 제자들의 반응은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은 너무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스승님, 이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전에 두고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직도 지난 성금요일의 끔찍한 환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부활을 내면화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습니다.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인지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나무라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는데도 긴가민가 하는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당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이르게 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단단히 닫힌 우리들의 눈과 귀, 마음을 열기 위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염원에 따라 우리 영혼의 눈이 활짝 열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건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그분의 향기에 취해 살아가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은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역시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우리 행복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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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통과 시련 없는 영광은 불가능합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 없는 부활은 어불성설입니다!>
꽤 오랜 기간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따랐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나 믿음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인간이 완전히 죽었다가 완전히 되살아나는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그런 모습 앞에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부활 앞에 우리 역시 제자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갈팡질팡, 긴가민가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입장에서 꽤나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이 정녕 참되다는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끝끝내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다그치시고 자극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복음 24장 38~39절)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놀라워하면서도 아직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손에 드시고 맛있게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도 안쓰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틈나는 대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수난당하고 죽었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임을.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님과 함께 하는 데서 오는 지상적인 기쁨과 영광, 가슴 뛰는 미래만을 선택했지, 그분에게 주어진 지상 사명이요 숙명과도 같은 수난과 십자가 죽음은 외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고통과 시련 없는 영광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수난과 십자가 죽음 없는 부활은 어불성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기 한토막을 맛있게 드신 행위!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육체와 더불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는데, 그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또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아직도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 위해서 얻은 고통스런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지니고 계셨던 그 몸으로 부활하신 분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손과 발의 상흔은 당신의 육체가 십자가 위에서 희생된 그 육체이며,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희생의 재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거듭 우리들 신앙의 눈, 영혼의 눈,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야 예수님의 부활도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눈이 활짝 열려야 고통과 십가가 죽음 그 너머에 자리한 영광된 삶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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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경은 믿음을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aU6meUGm7p8
오늘도 어제에 이어 성경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심으로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사도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당신이 육체를 지니고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서 예수님은 생선토막을 드시며 참으로 육신으로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다음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 말씀을 이해시키십니다. 그러자 그들도 부활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활을 믿게 하신 다음에 생선토막을 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부활을 믿게 하신 다음에 그 믿음을 성경을 통해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 믿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헛갈려서는 안 되는 것이 믿음이 성경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지, 성경이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로운 믿음을 준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이르게 한다고 믿는 데서 모든 이단과 사이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로마에서 성서학을 배우는 최고의 대학인 비블리꿈 조교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하는 포르투갈 사제였는데, 그는 제가 성경을 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것을 알고는 교의 신학적인 선입관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리에 대한 믿음이나 선입관 없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연구할 수 있어야 올바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모든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를 탈출시킨 것은 이집트 백성이 나쁜 이들이었기 때문이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으니 그는 바오로 전공이 아니라 모른다고 했습니다.
코린토 전서 10장 1절 이하에 보면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생명의 양식으로, 생명의 물을 쏟아내는 바위는 그리스도로 해석을 합니다. 이는 바오로가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의 교리라는 선입관’이 생겨 이전의 눈의 비늘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선입관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했다가는 메마른 역사 공부에 머물게 됩니다.
성경은 교회의 믿음에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의 믿음에 저항하기 위해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언가 주장하려면 근거로 삼을 것이 있어야 하는데, 교리는 안 되고 성경을 진리라 믿게 만들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믿어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첫 공의회를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아리우스 이단은 성경의 ‘지혜’를 그리스도로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라는 그들의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창조 때부터 하느님을 도왔던 첫 피조물인 지혜를 그리스도라 주장하여 교회가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과 함께 걷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의 사제가 됩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떨고 있는 그에게 교회가 말하는 속죄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에게 빛을 주었습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에 꽂힌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 계단 성당에서 무릎으로 속죄하며 오르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걸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라는 기치를 걸고 교회에 저항합니다. 그 구절은 믿었지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며 교회에 죄 용서의 권한을 준 구절은 무시했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 서간도 처음엔 성경에서 제외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자유자재로 해석하여 개신교에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종파만 200여 개가 넘습니다. 각자 성경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여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믿는 것이 다른 것이고 그래서 각자 성경이 다르게 해석되는 것뿐입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진리라고 믿고 있어서 신천지의 성경공부에 쏙 빠집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공부를 해서 그 믿음에 다다르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렵고 지치고 외로운 이들에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천국처럼 따듯하게 해 주기 때문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곳이라면 천국이겠고, 또 그렇게 해 주는 이만희가 새로운 구세주라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자체로 진리라고 믿으면 절대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주입하는 그 집단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 가르치는 사람들의 믿음을 주입시키는 수단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미 믿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 이웃에게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믿게 하시고 그것을 성경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믿는 것이지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가톨릭교회만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찾기 위해 성경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 성경이 없어도 교회는 굳이 성경에 의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진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신약성경도 편집하게 된 것입니다.
시골 할머니의 신앙이 성경 박사보다 클 수 있는 이유는 그분들은 성경으로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큰 진리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먼저 눈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비늘이 떨어졌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지금 더 시급한 것은 성경공부가 아니라 가톨릭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심판이나 지옥, 교회에 대한 믿음도 온전하지 않으면서 성경공부를 해봐야 또 다른 이단적 생각만 깊어지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을 먼저 믿게 하시고 그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성경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교회이고 교회의 가르침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믿는 진리를 확증하고 전하기 위해 유용합니다.
https://youtu.be/aU6meUGm7p8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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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4,35-48 :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가?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 이미 무덤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 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어떤 개인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한 부활은 상상조차 못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있던 제자들에게 실재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신 것이다. 당신의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자 하셨다. 이렇게 하시려고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이 행적을 통하여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되어 있으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고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즉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바로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는 것이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들이 증인으로서 전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제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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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도끼를 잃어버린 사람이 도끼를 찾다가 보이지 않자 이웃집 아이를 수상하게 여깁니다.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터인데 머뭇거리고 아이의 행동만 살핍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심증이 들자 날이 밝으면 따지겠다고 벼르며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잃어버린 도끼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아이를 다시 보니 수상쩍은 데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의심암귀’(疑心暗鬼) 곧 의심이 깊어지면 귀신이 보인다는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보고 유령 곧 귀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사실 부활 이전에도 제자들은 스승을 유령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심한 풍랑으로 배가 파도에 뒤덮이려 할 때였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의심을 없애시고자 최후의 만찬 때처럼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의심 많던 제자들의 변화는 오늘 독서에서 나오듯 그들의 굳은 믿음으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사랑의 성찬례인 미사에 더욱 열정적으로 참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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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루카 24,36-4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는데, 그들은 평화를 얻기는커녕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면서 무서워하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셔도 우리 쪽에서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그 평화를 받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셨기 때문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돌아가신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알아보았지만,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해서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즉 실제로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반가워했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으면서도 제자들은 왜 무서워했을까? 아무리 사랑하는 분이라도 유령으로 나타나면 무서운 것일까? 제자들이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들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을 무서워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어서 자신들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과 발의 상처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같은 분이라는 증거는 되지만, 유령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져 보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몸이 있다면 유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져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도 만져 보고 믿은 것은 아닌 것 같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신 것도(루카 24,41-42),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겁에 질렸다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5-27) 제자들이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겁에 질린 것은 예수님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다.”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들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또 그들이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전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은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일은, 착각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단체로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명’도 살아계시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살아 있는 명령’이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 일’이라는 말씀은, 그 일들은 모두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떻든 분명한 점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18,14),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꼭 그런 방식으로만 진행되었어야 했는가?” 라고 물으면,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얼마든지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범죄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걸림돌들을 극복하시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셨습니다(로마 8,2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을 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 되어라.”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모든 말씀을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증인으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임무는 그들만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임무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은, “살아계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명령”이라고 말했는데, ‘살아 있는 명령’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살아 있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살아 있을 명령입니다. 즉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종말이 올 때까지 신앙인들이 계속 해야 할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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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복음 선포>
오늘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땅에 내려 오셔서 사랑과 진리와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신 예수님을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로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예수님 정신의 부활이다, 민중의 부활이다 등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는가, 아니면 단지 신앙 고백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따져도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다만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셨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지 않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이 자신의 삶에서 목격되고 현실이 되기 전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뛰어나가 전한 것도 바로 이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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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말하여라, 마리아. 무엇을 보았는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그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확신이 클수록 부활에 대한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을 통해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또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셨고, 스승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살아 계심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 사건의 의미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부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을 접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믿기 시작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렇고 베드로가 그렇고 요한이 그렇고 엠마오의 두 제자가 그렇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감격해서 모여듭니다. 그리고 정말 부활하신 것 같다고 자신들의 체험을 나누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증언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렇게 의심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제자 공동체에 모여서 그때의 생생했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더더군다나 죽었던 사람이 여기저기 나타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설왕설래할 뿐 확신에 차지 못하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놀란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시지요.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손과 발의 상처는 분명한 죽음의 표지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표지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겁에 질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음식을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24,41)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며 그들의 불신을 확신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당신의 부활이 어떤 상상에 의한 부활이 아니라 실제 부활임을 드러내주시지요.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십니다.
구약성경 모세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당신의 생애와 활동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고 믿음의 삶을 살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눈과 마음이 열려 영원한 세상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려주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확신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방으로 나가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한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증언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온 몸으로 전하는 제자들의 활동과 그 활동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드러낸 기록서입니다.
열심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기록이고,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믿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전했던 역사가 바로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이지요.
믿을 수 없고 또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예수의 부활을 확신한 제자들이 지금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 천주교 신자는 11억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믿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사건의 시작이 이천 년 역사를 이끌어 왔음을 알 수 있지요. 그 세계사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천 년 인류의 역사는 부활을 믿는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줍니다. 바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끌어내는 미사, 즉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체험한 우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고 파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명을 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첫 번째 사명이 바로 복음 선포임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의 역사가 이천 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나흘이 지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강론 때마다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웃에게 전하고 계시는지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봉한 채 닫힌 무덤처럼 지내고 있지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또 다른 여러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인 양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면 과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퍼져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는 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아주 명확하게 이를 전하고 있지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여실히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은총을 입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은총은 서서히 사그러들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놀라고 감동한 나머지 인생 자체가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유다교 신자였던 그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를 변절자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자로 그를 냉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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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4년 4월 16일은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아침 뉴스를 보았습니다.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진도 팽목항 인근에서 침몰하였습니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 선생님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로 떠나야 했습니다. 2014년 8월 14일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식을 주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대전에서 있었던 아시아 청년대회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저는 당시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영성, 신심 분과의 일을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유족들에게 편지를 쓰셨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직접 찾아뵙고 위로의 마음을 전하지 못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한국 방문 기간 내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실종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직도 희생자를 품에 안지 못해 크나큰 고통 속에 계신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종자 가족 여러분 힘내세요! 실종자 가족 여러분 사랑합니다. 2014년 8월 17일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인 이호진 형제의 청을 받아들여 특별히 세례를 주셨습니다. 이호진 형제는 ‘프란치스코’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이호진 프란치스코 형제는 교황님께 세례를 받으며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호진 프란치스코 형제는 자신이 들고 다니던 세월호 십자가를 교황님께 드렸고, 교황님은 그 십자가를 바티칸으로 가져가셨습니다. 교황님은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시복식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세월호 희생자를 위로하였고, 가슴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리본을 다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함께 연대하고, 위로하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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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대화>
루카 24,35-4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대화>
여보게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평화가 자네들과 함께 하기를
어찌 평화라니요, 이리 떨리는데
놀라지 말게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못 믿겠는가
정녕 당신은 누구십니까
날세 나야
그렇기는 하지만, 글쎄요
아직도 날 몰라보겠는가
아니요 그런데 아직은 긴가민가
내 손과 내 발을 보게나, 이 자국 말이야
아니요 됐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저희가
자 그만 하고, 뭐 좀 먹을게 없나
지금 이 판국에 먹을 것이라뇨
아하 이 사람들아
왜 그러십니까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 하지
저희는 먹고 싶은 마음이 별로
그러지들 말고 함께 들게나
드시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배고프던 참이라 그런가, 아주 맛나구려
더 드십시오, 시장하실 텐데
그런데 말일세
말씀하십시오, 궁금합니다
예전에도 우리 이렇게 먹고 즐기지 않았나
하기야 먹는 게 중요한 일이었죠, 우리에게는
우리가 먹기만 했던가
아니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내가 했던 말들 기억하는가
기억하고 말구요,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됐네
뭐가 됐는데요
나의 죽음, 나의 부활, 그리고 나의 사명
아 그만 하시지요, 다 아니까요
그래 기억하게, 절대 잊지 말게
잠시 잊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 이제 괜찮아
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 할 수 있지, 내가 항상 함께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힘이 납니다
두려워하지 말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네, 꼭 그러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내 몫이 자네들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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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잘못한 사람을 대하는 4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분노,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분노와 화를 표현하면 상대방에 대한 반발이나 적개심도 늘어납니다. 따라서 관계가 서먹서먹해질 수밖에 없지요. 문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 유형은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슬퍼하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즉,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포기의 마음이지요. 이 역시 문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비웃는 사람입니다. ‘이럴 줄 알았어.’라는 마음입니다. 어리석음을 미리 예상했다는, 자신이 더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보이려는 사람이 내는 웃음입니다. 이 비웃음을 받게 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두고두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더욱 더 안 좋아집니다.
마지막 네 번째 유형은 온유한 입장으로 대하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삶의 태도로, 상대를 나와 똑같은 위치에서 받아들일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 역시 실수와 잘못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비로소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으며,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몇 번째 유형으로 대하고 계십니까?
가장 많은 유형이 첫 번째 유형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유형들을 보면서 주님이 떠올려집니다. 주님을 향해 잘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분위기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던 군중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유형인 온유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잘못했던 것에 대한 질책도 아니었고, 슬퍼하셨던 것도 아니고, 또한 비웃음으로 다가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온유한 마음이 가득 담긴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화를 내시고 혼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사명을 주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잘못한 사람들을 향한 나의 모습에 대해 떠올려 보십시오. 가족 안에서,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십니까? 이제는 주님의 모습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 땅에 주님의 사랑이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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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해야할까요?>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구부릴 수 있는 소년이 있습니다. 이 소년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숟가락을 구부릴까요?
1) 무슨 일이 있어도 구부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서 노려본다.
2) 구부려졌다는 상상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구부러졌습니다. 감사합니다.”
3)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틀림없이 구부릴 거야.”
몇 번일까요?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 숟가락을 구부릴 것이라고 물어봤지만, 소년은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
“글쎄요.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구부러지더라고요. 즉, ‘안 부러져도 그만이지만, 뭐 구부러진다면 기분이 좋을 거야.’” 어떤 일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지금을 해쳐나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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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파스카 주님의 증인證人-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벽같은 사람은 문같은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바로 다음 글중 전자前者와 같은 사람이 문같은 사람입니다. 며칠 전 전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쓴 글입니다. 이런 이가 진정 파스카 주님의 증인입니다.
-“있기를/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떠나길/바라는 사람도 있다
날로/가벼운 선물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로/무거워 짐이 되는 사람도 있다
날로/넓어지고 깊어지고 부드러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로/좁아지고 얕아지고 굳어지는 사람도 있다
날로/새로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로/낡아져가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4월16일 부활 팔일 축제 팔일 축제 목요일이자 세월호 6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당시 2014년 4월 16일은 성주간 수요일이었고, 이번 4월16일은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로 부활 축제가 계속되는 중이며 어제 21대 총선의 결과가 완전히 드러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이 은연중 감지됩니다.
올해는 참 특이한 사순시기이자 부활시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사태로인해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모든 공동전례활동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영적 ‘어둔 밤’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부활의 빛이 스며든 ‘빛의 밤’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경축하는 봄꽃들은 한창 만발하여 주님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수십년전 강론 제목으로 택했던 말마디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벽이 변하여 문이 되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평화와 기쁨이 주어집니다. 입당송 말씀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 승리하신 당신 손을 한마음으로 찬양하나이다. 지혜는 말못하는 이들의 입을 열어 주고, 아기들의 혀도 또렷이 말하게 하였나이다. 알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마음 ‘어둠의 벽’을 활짝 열린 ‘빛의 문’으로 변모시켜 주시어 평화와 기쁨을 선물로 주시고 알렐루야,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 한가운데에 서시어 평화를 선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새삼 공동체의 중심으로 확인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합니다. 평화와 더불어 선사된 기쁨의 선물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결정적 말씀을 주십니다. 참으로 성경 말씀의 온전한 이해에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의 은총’이 절대적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지만, 이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어 구원 사건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 선포활동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벽은 변하여 문이 됩니다. 평화의 문, 빛의 문, 기쁨의 문, 희망의 문 등 끝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파스카의 증인이 된 이들 역시 가는 곳마다 벽이 변하여 문이 되게 합니다. 이런 이들은 존재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가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하나되니 베드로는 완전히 ‘파스카의 증인’이지 ‘주님의 문’이 되었고 먼저번 오순절 설교에 이어 솔로몬 행각에서 놀라운 감동적 설교를 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 회개할 것을 선포하는 참으로 벽이 변하여 문이 되게 하는 설교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 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그 요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무지-경청-회개-용서-겸손-증인’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무지의 벽’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활짝 열린 파스카의 문, 파스카의 증인이 되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지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음을 봅니다. 우선 닫힌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침묵중에 잘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경청에 뒤이어 따라오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내적 부패를 막는 것이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을 향해 멈추지 말고 여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이어 죄의 용서요 겸손하고 용감한 주님 파스카의 증인이 됩니다.
우리 인생 여정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과 이런 만남의 여정을 통해 무지의 벽은 주님 말씀의 사랑의 경청과 회개, 용서와 겸손으로 활짝 열린 문이 되고 비로소 우리는 파스카의 증인, 즉 주님의 평화와 기쁨, 생명과 빛과 희망의 증인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파스카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1베드2,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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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이 열려야 한다>
국회의원 선거가 종료되었습니다. 누가 뽑히었든 이제는 그들이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하겠다던 그들의 백성을 위한 공약들이 헛소리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상대를 깎아 내리고 이전투구하던 모습이 더 이상 그들의 본 모습이 아니기를 희망합니다. 서로를 보듬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섬기는 정치인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부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 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 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려는 가운데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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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여러 방면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을 증명해 보이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바로 나다."(루카 24,39)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두 제자가 동료 제자들과 모여 부활 체험을 나눌 때, 바로 그 현장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껏 나눈 이야기가 무색하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루카 24,37)하지요.
"나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당신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나다"(요한 18,5.8) 하셨던 장엄하고 위엄에 찬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또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셨던 하느님의 자기 소개 또한 알고 있지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나다" 하고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39)
급기야 예수님은 당신을 만지라고 하십니다. 육화하신 하느님, 인성을 지니신 성자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제자들과 실제로 몸을 부딪히며 사셨지요. 부활하신 그분이 살과 뼈를 지니신 존재임을 제자들이 직접 감지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사람뿐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존재에게 만진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만짐을 통해 아기는 엄마를 느끼고, 아픈 배도 낫고, 움츠러든 어깨도 펴집니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들 간의 터치는 존중과 사랑, 치유와 위로, 지지와 격려의 소통이고 확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43)
먹는 것 또한 생명 있는 모든 존재의 보편적 행위입니다. 섭취함으로써 생명을 이어갈 힘을 얻고, 함께 나누어 먹음으로써 관계를 형성하지요.
인간의 육적 한계를 뛰어넘어 부활하신 분이 뭐가 아쉬워 먹을 것을 찾으셨겠습니까! 그분은 당신을 먹으라고 내어주기까지 하신 분이니 먹는 행위에 그만큼 큰 의미를 담고 계실 것 같습니다. 또 어쩌면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과 가장 빈번히 하셨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렇듯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다"라는 익숙한 계시로, 뼈와 살을 지닌 존재임을 만져 확인하라는 허용으로, 직접 그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심으로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던 스승 예수다"라고 역설하고 계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제에 이어 불구자였다가 치유받은 이가 등장합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사도 3,16)
기적에 경탄하는 백성들 앞에서 베드로는 겸허히 밝힙니다. 이 놀라운 일을 이루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분 이름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말입니다. 기적은 자기들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제자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사실 성경 안에는 믿지 못하는 무수한 이유들이 등장합니다. 기쁜 나머지 믿지 못하고, 두려워서 믿지 못하고, 출신 때문에 믿지 못하고, 율법에 어긋난다고 믿지 못합니다. 믿음은 퍽 단순한 결단이라 믿는 데에는 구구하게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는데, 믿지 못하는 데는 이처럼 이유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부활하신 분의 존재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완수임을 깨달을 때 진실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한 발 한 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갑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서 하나씩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고, 만지게 하시고, 먹고 마시며 함께 살아가십니다. 그러니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 부활하신 주님을 찾읍시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고, 성화나 조각상에 고정되어 계시지도 않습니다. 우리 곁에서 웃고 우는 이들, 성내고 환호하는 이들, 우리를 자극하고 성장시키는 모든 이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만납시다. 이것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부활의 의미입니다.
오늘 특별히 6년 전 세월호 참사로 별이 된 소중한 이들을 기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으리라 굳게 믿습니다. 그들을 기리며, 지금 온 인류가 겪는 비극과 함께 우리 기도에 맡겨진 영혼들도 잊지 않겠습니다. 한계를 지닌 우리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부활은 그래서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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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만지고 먹으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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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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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꼬집어 보세요>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는데..."
부활하시어 곁에 와 계시는
예수님을 보며 반응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믿기지 않으면 서로 꼬집어 보세요.^^
부활이란 내 안에서 시작될 때 달라지고 새로워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솟구치는 상태입니다.
평화가 너에게 ~ 라고 말하며
해주는 나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고 내어주는,
나의 손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이 흘러 나옵니다.
'생명, 시간, 움직임을 새롭게 할 때
내가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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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 39)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
우리 앞에 선명히
있습니다.
마주치는
모든 것이
고마운 생명의
선물입니다.
생명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없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에서
시작하고
출발합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부활은
살아있는
이 순간의
기쁨입니다.
지나간
부활의 시간이
아닙니다.
살았있음의
가장 큰 기쁨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
이 순간입니다.
부활은
살아있는
이 순간을
되찾아주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주님은
살아계신 주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살아있음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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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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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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