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선사 인문학특강 시리즈 종강-조규환의 '조선불교와 금선사'
서울 삼각산 금선사金仙寺(주지 법안스님)가 2년여 간의 코로나공포시대를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시민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드리기 위해 마련한 전통산사문화재 활용사업 《새로운 일상을 제안하다-사불체험과 인문학 특강》이 9월 4일(일) 열린 <조선시기 불교의 변화와 서울 금선사/강사 조규환 역사학자>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을 마쳤다.
특강을 마련한 금선사 부주지 현장스님은 “먼 남쪽해상에서 태풍(라오스 어로 힌남노)이 올라오고 있는 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채워주신 시민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또, 포교사단 서울지역단 불교문화해설포교팀 봉사자들도 오셨다.”고 인사하고 “여러분들의 관심과 열띤 호응속에 진행해온 금선사 인문학 특강이 오늘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북한산의 상서로운 서기와 울창한 숲속의 금선사의 정기를 듬뿍 받아 평안하시기를 바란다”고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조규환 연구위원(전 서울대 규장각 연구원)은 강의를 시작하며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개국한 조선조에서 억불은 필연적 이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그 이유로 “신라-삼국통일-고려 왕조를 거치며 불교는 비대화 되고 부패했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적으로 부富를 독점한 기득권을 타파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젊은 유림들의 야심찬 개혁주장을 민심이 환호했을 것”이라고 역사적 맥락을 짚어주었다.
이어진 특강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불교에 신심이 깊어 태고太古·나옹懶翁등 고승을 사사하고, 무학대사를 왕사로 삼아 건국사업을 완성코자 했으며 즉위 초기에 연복사탑 중창, 문수회 실시, 해인사 고탑중수하며 <대장경> 인경본을 그 탑속에 복장물로 안치하여 종묘사직과 국민의 번영을 빌었다. 태조3년(1394)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고 승려 100명을 내전으로 초청 회식을 베풀기도 했다. 1397 흥천사를 창건 조계선종 본사로 삼고, 다음해에는 강화 선원사의 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기고 조선조 건국 봉축사업으로 <대장경>인경과 금은자 사경을 실시했다.
<실록>에 전하는 불교관련 행사로 인경印經 12회, 소재회消災會 14회, 불사佛事법석 참석 35회, 반승飯僧(스님들 공양대접) 9회 였다. 정도전, 조준 등 공신들과 유림들이 “승려를 도태시키고 사찰을 혁파하자”는 주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을 송헌松軒 거사로 자호하며 퇴위 후에도 염불삼매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태종(3대)대에 이르러 억불정책을 본격화 했다. 불교 자체의 심각한 부패와 유생들의 척불의지 가 결합되며 죽위(1400년)부터 배불정책 단행, 종단과 종파 병합, 사원수 감경, 승려환속, 사찰토지 국유화, 사원 노비 군정軍丁으로 충당, 도첩제度牒制(출가를 공인하는 일종의 자격증)엄격한 운영, 국사와 왕사 폐지 등 억불정책을 실행했다
3대 태종 5년(1405) 개성과 新京(지금의 서울)에 각종단 직영 사찰 각 1개, 목牧(요새의 도청기능)·부府에 선-교 양종 사찰 1곳, 군현에는 선종이나 교종 1寺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노비수 대폭 축소, 토지 국가로 귀속시켰다. 신-구 양경(한양과 개경)의 선-교 양종 각 1사찰에 200결의 토지와 100명의 노비,승려 100명으로 줄였다. 1407년 여러 종파이던 불교를 7종宗으로 통폐압하는 등 억불정책을 강화함으로써 도시에 있던 사찰을 산속으로 내 몰기 시작했다.
4대 세종 6년(1425) 억불정책 강화로 불교를 선·교禪·敎 양종(선종수사찰-봉은사로, 교종수사찰 -봉선사)로 통폐합, 선-교 양종 각18개 사찰(총36사찰) 남기고 모두 폐지, 전국의 공인 승려 4000명(비 공인 승려수는 별도)
7대 세조는 신실한 불자로 신미信眉, 수미首尾스님등 고승과 친분을 쌓으며 호불정첵 폈다. 승려들 도성출입이 쉬워지고 출가 제한 철폐, 관리들의 사찰 무단 출입 금지, 현재 탑골공원에 원각사 창건하고 불상과 종탑 건립, 해인사 상원사 월정사 복천암 등 명산대찰을 찾아 스님 대중 공양과 각종 불사 참여, 불경 역경 및 인경사업 장려로 <해인사 대장경> 인출, 월인석보 간행,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 창작, 간경도감 설치 등 호불에 앞장 섰다.
9대 성종은 억불시책 강화하며 상사喪事시 승려 공재 풍습 금지시키고, 국왕 탄신일 에 맞추어 절에서 행하던 탄신행사 열지 못하게 했다. 후반기로 가면서 외침시 필요한 병력 확보를 명분삼아 출가 관리 강화, 퇴위한 선대왕을 모시던 궁녀, 노비, 권속들이 모여 살던 집단시설인 ‘정업원’을 철폐시켰다.
연산군(10대)-중종(11대)대에 억불시책 최고 강도로, 선-교 양종 본사인 흥천사와 흥덕사-대원각사 폐사후 관가 건물로 편입, 삼각산(지금의 북한산) 모든 사찰의 승려 축출후 빈절로 만들고, 도성안의 비구니 스님 사찰 헐고, 비구니는 궁방의 노비로 삼았다. 사찰 토지 관부에서 몰수, 양종 본사 폐지, 국가적 행사로 열리던 수륙재水陸齋(지상-해상의 모든 생명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와 왕능을 돌보던 능침사찰 폐지시켰다,
11대 중종(재위 1506-1544) 축소로 시행하던 승과僧科(일종의 출가 자격 전형) 완전 폐지, 경주의 동불銅佛 파쇄후 군병기 제작, 원각사 파괴한 목재로 연산군때 헐린 민가의 재건축 자재로 나누어 주고 정부의 배불정책과 폐불조치로 불교 교세 최악으로 위축되었다.
어린 명종을 대리해 섭정을 펼쳤던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은 허응당 보우대사가 봉은사 주지(판선종사도대선사로 부임하여(명종 5년/1551년) 며 불교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중단 되었던 승과僧科부활로 선발된 서산대사(휴정), 사명대사(유정)와 그 뒤를 잇는 백곡 처능, 영기대사 등 걸출한 스님 발굴하는 인재불사로 불교 씨앗을 심었다. 후일 임진·정유 왜란과 병자 호란시 활동한 승군장으로 호국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1565년(명종 20년) 4월 문정왕후가 죽자 왕후의 우세에 눌렸던 유생들 보우대사 처단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요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요승妖僧’이라는 악랄한 프레이밍의 덫을 씌워 제주로 유배를 보내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의해 장살(매를 때리는 형벌)로 죽였다,
(*보우대사에게 ‘요승’의 굴레를‘ 씌우는데 앞장섰던 율곡이 쓴 ‘논요승보우論妖僧普雨’라는 기록물이 서울 ‘서소문역사발물관(이름만 역사발물관 일뿐 속은 100% 카톨릭 찬양일색) 전시장 진열장속에 전시중입니다. -블로거의 생각을 덧붙인 것, 특강 내용은 아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 발발로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 가던 선조는 묘향산에 주석하던 서산대사를 불러 팔도선교도총섭으로 임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4000여명의 승군이 명나라 원군과 함께 평양성탈환,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하는 공을 세웠다. 왜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 파견된 사명당은 외교적 공로도 인정받았다.
인조 4년(1626년) 벽암 각성스님 휘하의 승병들의 노역으로 남한산성 축성하고 성안에 9개의 사찰을 조성하여 방비를 담당했다. 북한산성 축성, 나주 금성산성, 문경 조령산성 축성과 수비도 스님들의 몫이었다. 축성 과정의 단청작업을 거치며 단청, 조각 불사등 전문분야 장인으로 인정받는 스님들 늘어났으며, 후일 불교미술의 주체세력인 불모장 양성의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현종(재위 1659-1674)은 즉위 즉시 억불책 강화하며 장안의 비구니 승려 성밖으로 축출하고 문정왕후의 내원당으로 500여명을 수용했던 자수원慈壽院·인수원仁壽院 철폐, 사찰의 노비와 토지를 본사로 돌리고 비구니 승려 단속 강화했다.
이 때 백곡白谷 처능處能(1617-1680)의 7300여자의 상소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통해 불교의 부역과 공납에 공헌 하는등 유익한 활동에도 이단으로 몰아 배척하고 폐불을 일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상소문 올렸다.
억불의 시대가 가고 숙종-영조-정조 대에 이르면서 억불과 호불의 시책이 오락가락하며 혼란을 초래한 결과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경제기반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원당의 혁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고, 실제로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특별히 정조는 당파의 하나인 노론의 사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원혼 천도를위해 불교에 의지했다. 서울 남쪽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부친의 묘소를 이장해 현륭원을 조성하며, 능침사찰격인 용주사를 창건, 효행의 모범을 보였다.
정조 사후 정치는 왕후와 외척 세력간의 권력투쟁이 본격화 되는 세도 정치에 돌입하며 정치세력간의 특혜와 사회적 혼란으로 공직기강이 무너지고 국가적 운영체계가 와해되며, 경제적 모순 심화로 사회의 양극화 현상 가속되었다.
고종 32년(1895) 승려들의 서울 출입금지령이 공식 해제되었다. 여기에는 도성안 출입이 자유로운 일본 승려들 입장에서 성안 출입을 통제당하는 조선의 승려들의 차별의 모순을 본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佐野)가 총리대신 김홍집에게 건의하여 고종의 허략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조 유림들의 불교를 대하는 차별대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스님들 도성안 출입 허용’도 잠시, 당쟁과 정파간 권력투쟁에 몰두하며 국가운영에 손을 놓고 있던 조선왕조는 끝내 패망하며, 일본제국주의에 완전히 넘아갔다.
세월이 지나 도성출입 금지령이 해제되며 성안과 근접한 금선사 스님들과 시인묵객들의 친교 가 늘어나며 금선사를 주제로한 시화작품들이 문집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금선사는 조계종 제14교구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 소속 사찰로 서울 삼각산(북한산)의 정기와 울창한 숲속의 풍광이 빼어난 사찰이다.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 자초대사의 창건설활와 함께 대를 이을 후사가 없어 노심초사하던 영조가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인연이 맺어진 롱산聾山스님이 토굴속에서 철야정진으로 왕세자인 순조로 좌탈환생坐脫還生(간절한 기도 끝에 앉은 자리에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남) 했다는 탄생 설화가 전해오는 등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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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선사의 사격寺格이나 위상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후기로 가면서 서울 도성과 지근거리에 있다는 지리적 잇점으로 운수납자들과 시인묵객들이 소통하는 창구역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문인단체인 옥계시사詩社, 서원시사, 비연시사 구성원들이 금선사가 관련된 작품을 낸 바 있다. 중인 이하 출신들로 조선후기 <위항문학운동>을 통해 결속을 다지며 일세를 풍미했던 요새로 치면 엘리트 지식인들이라, 사회적 영향력이 컸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 김명희와 자하 신위, 초의 스님들이 만남의 장소로 금선사를 활용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확인되는 기록들로는 박윤묵朴允黙의 〈유금선암기遊金仙菴記)〉, 조수삼趙秀三의 《추재집(秋齋集》 속의 농산스님이 들어간 싯구(‘농산선사고재려“聾山善士古齋廬)를 포함한 다수의 시편, 양반세도 가문출신으로 시-서-화에 두루두루 능했다는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7)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시작품을 들 수 있다.
<夜宿金仙菴(야숙금선암-밤에 금선암에서 묵다>/ 박윤묵 詩
㳒界如天璧月明 一樓四望悄無聲
하늘같은 법계에 둥근달 밝은데,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고요하여 아무 소리도 없구나.
精神忽與寒山聚 心肺偏從止水淸
정신은 어느새 싸늘한 산과 함께 모이고(집중),
마음은 특별히 거울 같은 물 따라 맑아지네.
圓覺只宜論佛性 輪廻未必問人生
깨달음은 오직 불성만을 논해야 하며, 윤회는
꼭 인간의 삶을 따질 필요는 없네.
牎前知有氷霜積 夜冷繩床夢欲驚
창 앞엔 분명 얼음과 서리가 쌓여 있겠지
밤 냉기 승상에 스며 꿈속에서 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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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금선사 관련 자료 및 금선사와 연을 맺었던 인물들로는 농산, 선홍, 초의 같은 큰 스님들과 박윤묵, 조수삼, 신위, 조희룡, 한장석, 서응순, 박규수, 남병철, 조인영 등의 문사들을 금선사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로 특강을 마무리 짓고, 금선사에서 의욕적으로 마련한 사불체험을 곁들인 인문학 특강은 제4강까지의 전과정을 마치고, 원만 회향했다.
<안내 및 문의> 삼각산 금선사
템플스테이 (02-395-9955/010-2685-9913
첫댓글 해륜 포교사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