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에서는 소방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일선에서 국민의 안전과 소방의 발전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인물을 찾아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을 조명한다. 그 두 번째 인물로 현재 마포소방서 서장으로 근무중인 조선호 서장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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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다가온 소방공무원으로서의 삶”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7학기만에 조기졸업한 조선호 서장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방에 입문하기 전인 대학 재학 중에 여러 분야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바 있으며 전공을 살려 세무공무원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무원 임용을 기다리면서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어느 가을 날, 학원 창문 밖으로 보이는 소방차 10여대가 1차선을 점령하고 줄을 지어 출동하는 모습을 보게 된 그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이 참 남자다운 직업이라고 매력을 느꼈던 찰나에 8기 소방간부후보생 시험공고를 접하게 된다.
조 서장의 소방간부후보생 시험공고 응시를 시작으로 소방과의 질긴 인연은 시작된다.
내무부소방학교에서 1년간 교육을 받으면서 세무공무원 임용포기 각서를 제출하고 운명처럼 다가온 소방공무원의 길을 걷게 되면서 충남 보령소방서에서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보령소방서 광천파출소 개소준비단장이라는 보직을 맡으면서 그의 특이한 이력은 계속됐다. 사실상 파출소장으로 발령을 받지 못하고 초임자로 업무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파출소 개소 준비라는 업무를 맡은 것이다.
첫 보직이 공무원 생활에 보배 같은 경험이 됐다는 조선호 서장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책임을 다해야 하는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지게 됐다”며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서 부족하고 모자란 것에 대해 불만을 갖거나 업무추진에 겁을 먹지 않게 된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파출소장으로 1년 반을 재직하고 내무부 소방국에 전입을 하게 된 그는 예방과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파출소장 생활과는 많이 다른 업무로 인해 처음 몇 개월간은 마음고생도 많았다.
하지만 차츰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예방업무에 애정을 갖게 되었고 맡은 업무에는 최고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각오로 틈틈이 지식 습득에도 매진해 KBS방송아카데미 드라마작가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대학에 다시 편입해 교육학을 전공하고 소방조직문화에 관한 연구로 행정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스스로에게 채찍을 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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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같이 지나온 20년 그의 행적
“누구나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뿐이지 업적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은 부끄럽다”며 “굳이 업적이라는 말보다는 한 일에 대해서 소개하겠다”고 조선호 서장은 말했다.
그는 광천파출소장 재직 당시 백혈병에 걸린 어린이를 돕기 위해 KBS-TV의 ‘긴급구조119’프로그램에 방송을 하고 헌혈운동을 펼쳐 당시 광천읍민 전체가 동참하도록 했던 것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고 했다.
내무부에 근무하면서 예방과 직원들과 함께 우리나라 예방소방의 역사를 집대성한 ‘예방소방행정사’를 발간했고 각 지방별로 행해지던 ‘소방의 날’ 행사의 역사를 찾아 재정립하기도 했으며 대통령이 참석하는 중앙단위 행사로 격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조 서장은 “당시 소방의 날 행사는 불조심 강조의 달 행사의 일환으로 내무부 소방국 예방과에서 장관 치사를 각 시ㆍ도로 시달하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동요에서 최대, 최다, 최고 등의 수식어가 붙는 소방동요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내무부 소방국 예방과 재직시절 조서장이 직접 작사해서 만든 어린이소방대가와 서울 서부소방서에서 창작한 소방동요가 거의 동시에 세상에 나오면서 현재의 소방동요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조 서장은 소방동요 창작에 매달려 직접 50여곡을 작사하고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명성을 지닌 동요작곡가를 섭외하는 등의 노력으로 5년여 만에 100여곡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소방동요를 만들어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119소방동요경연대회’를 개최하고 ‘한국119소년소녀합창단’을 창단했다.
또한 오랜 역사에 비해 발전을 못하고 있던 ‘어린이소방대’를 ‘한국119소년단’으로 개명하면서 명실상부한 청소년단체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소방홍보 뿐만이 아닌 소방시설에 관한 기술담당으로 당시 ‘소방기술기준에관한규칙’을 현재의 ‘국가화재안전기준’으로 전면 개편하고 ‘대한민국안전대상’을 신설해 안전분야 최고의 시상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조 서장은 “이 모든 것들이 혼자서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며 “만일 혼자서 다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과 같다는 말로 많은 동료와 지도자분들의 결정적인 도움과 지원,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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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힘들 때면 늘 가슴속에 둔 진인사대천명
조선호 서장이 이룩한 성과들 뒤에는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
부족한 예산에 소방동요 CD를 만들기 위해 레코드사를 발이 불나게 찾아다니던 일과 대통령 영부인을 모시는 행사를 기획하면서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의 난관에 부딪혔던 일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역경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가지의 성공을 이루었다면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좌절과 고통은 열배 이상 많을 것이며 나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어려움이 예상되면서도 또 도전을 하는 것은 그 성취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늘 ‘진인사대천명’을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했던 그는 최악을 대비하는 자세로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 또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돕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었으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조선호 서장은 “얄팍한 술수는 언젠가는 화로 닥칠 수 밖에 없지만 원칙을 중시하는 진실은 시간이 문제이지 언젠가는 모두가 알아줄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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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소방공무원 인생을 두배로
조 서장은 학창시절 장래희망에 소방관이 되고자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운명은 자기도 모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소방차 출동사이렌이 매력적으로 들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소방공무원으로서의 인생도 3분의 2 고지를 넘어섰다”며 “그동안 과연 내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반성과 함께 소방공무원 신분으로 지낼 수 있는 기간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고 전했다.
조 서장은 “민ㆍ관, 산ㆍ학과 같은 연결고리가 구호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이제는 서로가 문을 활짝 열고 협력해서 공동 발전해야 할 때다”라며 “저 또한 앞으로 인력융합, 학문융합, 업무융합과 같은 창의적인 활동에 매진해서 소방서비스의 품질과 품격을 높이는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소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조 서장은 “소방예산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90%가 넘는 것은 바로 소방의 힘이 사람에서 나온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다”라며 “토목공사에는 중장비가 더 큰 역할을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데는 전문성 높은 소방대원이 더 결정적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런 만큼 그는 HRD(인적자원개발)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소방력의 3요소를 고급인력, 적정장비, 전문기술로 바꾸어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방공무원의 신분으로 남은 기간은 10년여지만 성과는 그동안의 20년보다 더 큰 자취를 남길 것 같은 의지를 그의 눈에서 볼 수 있었다.
최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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