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신부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사야 58,9ㄷ-14
루카 5,27ㄴ-32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건강’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들 건강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운동, 음식, 취미 뭐 하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면
피해가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누구에게 질세라 좋다는 것은 다 찾아 경험해보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이보다 건강한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보다 병자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고, 하느님의 사람들이라 스스로를 부르던 사람들에게
당신이 악하다는 사람과 약하다는 사람들 곁에 계신 이유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의인은 스스로가 의인이라,
아픈 곳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라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정말 의인인지 판단할 기준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는 사람이 말씀 속에 의인이며
예수님이 죄인들 편에 서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느 한 편에 서 계셨던 분이라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사람들 사이에 오셔서 잘났다는 사람과는 구별되는 평범한 사람으로 사셨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기에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분께 편한 마음으로 기댄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을 그 편이라 내 몬 것은 사실 의인이라 스스로를 생각하던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서 있을 수 없기에 붙인 변명에서 나온 구분에 가깝다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느 한 편에 치우쳐 계시지 않고, 우리 모두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고,
저마다 필요한 사랑을 하고, 받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사랑하며, 사랑을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누구도 구분하여 단정 짓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 자신들을 의인이라 부르던 이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작용했고, 그래서 그분 역시 죄인의 범주로 내 모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사실 불쌍한 이들은 그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입견 때문에, 또 자만심 때문에 주님의 사랑도, 위로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스스로 멀어지고, 외로워지고, 사랑 못하는
참으로 병든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늘 건강하고, 아프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건강한 사람이지만, 또 늘 병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그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사랑해주시는 참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분 때문에 병에서 회복되고, 위로를 얻고,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곤 합니다.
죄로 병들어도 늘 용서로 낳게 해주시고, 사랑하려는 시도에 축복으로
그 사랑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주시기에
우리는 병자임에도 건강을 꿈꾸고 그래서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과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주님도 나누지 않는 우리를 우리가 서로 나누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지 말았으면 합니다.
모두가 건강해지려 애를 쓰는 세상에 사는 우리,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건강하지 않다는 걱정이 많아서는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약한 병자라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럼, 어디엔가 우리 곁에는 언제든 주님이 서 계신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아픈 내 주변에 나를 위해 계시는 주님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부산교구 정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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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구 신부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사야 58,9ㄷ-14
루카 5,27ㄴ-32
오늘 복음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던 때의 이야기인데,
저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의 말씀에 귀를 귀울여 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시자,
바리사이들이 왜 죄인들과 어울리냐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와 예수님의 관점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떻게 다르냐...예를 하나 들지요...
내 아이가 문방구에서 물건을 하나 슬쩍하다가 주인한테 걸렸습니다.
그리고 '엄마한테 가자'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엄마는 창피한 마음에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고 문방구 주인을 돌려보냈습니다.
만일 내가 이 아이의 엄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어떤 엄마들은 아이를 끌고 들어와 '으이구~ 이노무 자식아~'하며 회초리를 듭니다.
지은 잘못에 대해 벌을 주는 것이지요...
이 엄마는 '결과'를 봅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벌을 내린 것이지요.
어떤 엄마들은 왜 이 물건을 훔쳤는지 이유를 묻습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거기에 적절한 충고를 합니다.
이 엄마는 '결과'를 낳은 '과정'을 봅니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살피고 거기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현명한 엄마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두고 죄인이라고...죄를 지어 벌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벌을 받아 그 죄를 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잘못을 저지를 사람을 두고 아픈 사람으로 생각하신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어디가 아파서 그러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실수를 저지르게 된 원인인 아픔을 치료해서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우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한 일... 곧 죄를 보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짓게 된 원인을 살피십니다.
우리는 드러나는 사건을 보는데,
예수님은 그 내면을 보고 일어나게 된 경위를 찾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곧잘 정의의 심판자가 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칼을 휘두르고 분노하지만,
예수님은 내면의 아픈 부분을 치료하시기 위해 칼을 댑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이라는 정의를 내세울 때, 예수님은 사랑을 내세웁니다.
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방법은 '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꾸 되새겨 지는 말씀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입니다.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희생 재물은 죄를 지었을 때 거기에 합당한 재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비는 오늘 복음의 내용에 따르면 용서에 가까운 뜻입니다.
누군가를 용서 못하고 미워하고 마음으로부터 죄를 지어그 잘못을 씻기 위해
용서 못하고 있는 불편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희생 재물을 바치지 말고,
자비... 곧 사랑으로 용서해 주어라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용서 못하고 있는 죄를 씻는데 합당한 제물은 짐승의 목숨이 아니라,
나의 사랑임을 깨달으며,
예수님의 시선을 닮기 위해 내 마음을 준비합니다.
부산교구 강인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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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신부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사야 58,9ㄷ-14
루카 5,27ㄴ-32
용서하는 마음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초등학생 시절에 가출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단지 방학숙제를 제대로 마치지 못해서
선생님 얼굴 뵙기가 두려워 개학하는 날 아침에 덜컥 가출을 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며 부모님께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쪽지를 두고 나왔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겠습니까.
혹시 친척집으로 갔나 싶어 아버지는 서울 반대쪽에 있는 큰집에 들러
제 소식이 있었나 물어보시고 이곳저곳 찾아다니셨답니다.
가출을 했지만 갈 곳이 없어서 전 결국 해질 무렵 몰래 집에 들어와
새우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가출소년 찾기에 지친 부모님들이 돌아와 저를 발견하고선
기가 차서 흔들어 깨우며 하시던 말씀이 “저녁밥 먹어라”였습니다.
종일 찾다 지쳐 화도 나고 당황한 마음에 큰소리라도 나올 법한데 저에게 아무 말씀 하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해주신 부모님의 기억이
잘못한 벌로 회초리를 맞은 것보다 더 크고 깊게 남아 있습니다.
때리고 야단쳐서 잘못을 바로잡는 길도 있지만
따뜻하게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그 마음을 서로가 알아준다면
그 어떤 훈계보다 더 큰 교훈이 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마 그러하실 겁니다.
밥 먹어라 하고 부르셨던 부모님의 목소리에서 지금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이정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