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 '주먹'
건달서 ‘조폭’으로 ‘어둠의 보스들’
한량. 무뢰배, 양아치, 불량배, 건달, 깡패 ,조폭….
폭력을 주업으로 삼는 무리들을 일컫는 우리말은 참으로 다양하다. 정작 당사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협객'을 자처하며 '도(道) 통했다'는 의미의 '건달''(乾達)이라 불리기를 바란다지만, 호칭이 어찌됐건 무리를 지어 이권개입 갈취 등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기생하는 그들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먹들의 주활동무대는 도시, 그 중에서도 상업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혹자는 "주먹의 역사란 상업의 역사"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19세기 중엽 서울 진입을 기다리는 팔도 물산의 물류기지인 마포나루 주변은 온갖 종류의 주먹들이 득실거리던 각다귀판이었다. 배를 건너는 상인들은 도강세란 세금 아닌 세금을 무뢰배들에게 뜯겨야 했고, 여리꾼이나 기생오라비(기둥서방)의 농간에 물건을 날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가 놓인 일제 초엽 '철도깡패'가 창궐했던 것도 상업과 주먹의 관계를 확인시키는 또하나의 예.
그러나 이런 고전적 스타일의 주먹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공고해진 30년대 들어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일제의 수탈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이들 가운데 요즘 말로 '한 주먹'하는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 바야흐로 우리 주먹사의 첫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해방후 정치깡패화 …자유당 시절 황금기
당시 조선의 중심 경성은 크게 조선인 상점이 밀집한 종로 상권과 일본인 중심의 명동 상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몰려 있는 사람이 다른 만큼 밤의 지배자가 다른 것은 당연했다.
명동의 지존은 하야시. 선우영빈이란 이름을 가진 한국인으로, 부모를 따라 일본에 간 뒤 거물 정치인이자 최대 야쿠자조직인 현양사의 보스 도오야마 미쓰루(頭山滿)의 휘하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이런 전설적 거물을 뒷배경으로 가진 하야시는 조선내 일본 야쿠자조직의 우두머리로 파견돼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1인 지배에 정치적 힘까지 갖춘 명동에 비해 종로의 경우는 그에 필적할 만한 절대 강자가 없었다. '구마적' 고희경, 보성전문 출신의 인텔리 주먹 '신마적' 엄동욱, '쌍칼' 등이 적당히 지분을 나눈 삼각구도를 이루었던 것. 이들 외에 서대문에서 모화관패를 이끈 김기환, 왕십리의 김남산, 마포의 정춘식 등도 하야시에 비하면 자금력은 물론 조직력 동원력 등에서 동네 건달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종로거리에도 드디어 '큰형님'이 나타났으니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바로 그 주인공. 우미관 '기도'로 영입된 김기환의 모화관패에서 말단 조직원이던 그는 김기환이 일본순사를 두들겨 패 구속되고 신마적마저 만주로 떠난 뒤 종로를 평정한다. 여세를 몰아 마포 영등포 왕십리 등 장안의 주먹을 휘하에 거느리며 조선팔도를 아우르는 최초의 '전국구'(주먹세계의 용어로 '전국을 평정한 주먹'이라는 뜻)로 등극했다.
당시 김두한패의 주활동은 자칭 '조선인의 상권 보호'였다. 하지만 말이 보호지, 내용으로 보자면 사실상 지금의 갈취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 다만 식민지 백성에게는 생업을 영위하는 과정에 법보다 가까운 주먹의 '힘'이 필요했고, 주먹들은 그들대로 일본주먹과의 대항을 일종의 '항일운동'으로 생각하면서 김두한을 중심으로 한 협객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명실공히 서울을 양분한 하야시패와 김두한패 사이에는 갈등이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조직은 운영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돈 나올 구멍이라곤 우미관 국일관 정도인 종로패에 비해 명동의 하야시는 이미 중간보스들에게 가게를 차려주는 기업형 조직을 갖추었던 것. 더욱이 총독부의 정무총감과 너나들이 할 정도로 위세를 행사하던 하야시패에 비해 종로패는 늘 경찰의 단속에 시달려야 했다.
한동안 수표교를 사이에 두고 수성과 공세의 불을 뿜던 두 조직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김두한패는 태평양전쟁이 심화되면서 강제 징용을 피할 요량으로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해 보국대 활동에 나섰다. 일제로선 끌고가봐야 말썽만 일으킬 건달들을 동원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셈.
해방 이후 주먹들은 '정치 깡패'라는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는다. 좌우 이념 대립이 첨예하게 부딪친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먹패도 좌우로 갈려 정치 테러의 선봉에 나선 것.
좌익계 행동대의 중심은 '조선 청년전위대'.김두한과 어린시절 수표교 아래서 구걸생활을 같이 하던 정진용이 이끌었다. 이에 대항하는 우익의 선봉은 1946년 결성된 '민주청년동맹'(민청)과 '빨갱이'가 싫어 남하한 이북 출신들의 '서북청년단'.
좌익의 적색테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익의 백색테러였다. 경찰력이 형편없던 당시 상황에서 파업현장을 찾아다니며 좌익을 처단하는 이들의 '활약' 뒤에는 우익 정치인들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민청과 전위대 세력이 부딪쳐 정진용이 피살된 소위 '시공관 사건'으로 김두한이 구속되면서 주먹세계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다.
동대문패, 정치 업고 주먹 천하통일
정부 수립 이후 6·25가 터지고 그해 9·28서울수복이 이뤄지면서 현대 주먹사는 2기에 접어든다. 여전히 무대는 서울. 일본 주먹들이 떠난 뒤 무주공산이던 명동은 이화룡을 정점으로 정팔, '시라소니' 이성순, 장천용 등 서북청년단 출신들의 차지였다. 이들과 함께 동대문에는 김두한의 소개로 경찰에 입문했다 훗날 동대문시장 상인조합 이사장이 된 이정재, 종로는 김두한의 정계진출 이후 지역을 물려받은 '아이마스' 심종현, 광화문 장영빈, 서대문 최창수 등이 50년대의 건달군을 형성했다.
이들 가운데 선두는 단연 이정재였다. 그는 시장 상인조합을 통해 거머쥔 조직과 자금을 무기로 자유당의 이기붕에 접근, 정치권과 연을 맺으며 힘을 불려나갔다. 이미 부산 피란시절인 52년 개헌 과정에서 극우 테러단체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을 통해 주먹의 효용성을 알고 있던 자유당 입장에서 주먹계의 접근은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자유당 정권은 이른바 '충정로 도끼 사건'을 빌미로 폭력배 소탕령을 내려 이정재가 가장 껄끄럽게 여기던 명동 세력을 제거해주기도 했다. 이로써 이정재는 김두한에 이어 두번째로 '전국구'에 오를 수 있었다.
'정치깡패' 이정재의 '대표작'은 57년 5월의 장충단 야당집회 방해사건. '깡패'란 단어가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한 이 사건은 자유당 2인자 이기붕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가 사돈지간인 유지광을 내세워 경찰의 비호 속에서 벌인, 정치 테러의 하이라이트였다.
이듬해 4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선거법 개정을 추진중인 야당연합은 정국돌파를 위해 장충단에서 대규모 장외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수십만의 서울시민이 운집한 이날 대회장에서는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에게 배신당한 뒤 야당 의원으로 변신한 김두한이 경호를 맡았다. 이때 맥고모자를 쓴 괴청년들이 각목을 들고 연단 위로 뛰어올라 난동을 부린 것은 조병옥의원이 연설이 시작된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회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임무를 달성한 괴청년들이 빠져나간 한참 뒤 출동한 경찰은 대회를 해산시켰다. 이때 동대문패는 행동 대가로 밀가루 15만포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도오야마'를 자처하던 이정재는 자유당 이천 지구당위원장까지 맡아 고향과 관련된 민원을 거침없이 해결해주며 지역을 돌보았다. 통행금지가 엄존했던 당시에도 오직 이천쌀만큼은 통행금지와 상관없이 서울로 수송이 가능했을 정도. 그러나 58년 이곳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던 그는 이기붕이 낙선의 위험이 높은 서대문 대신 이천을 선택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이 일로 인해 이정재와 이기붕의 사이는 뒤틀어졌고, 자유당은 대타로 종로4가 미라도 극장의 소매치기 출신 주먹 임화수를 키웠다. 일자무식인 그는 경무대의 경무관 곽영주를 배경으로 힘을 불리며 특히 영화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를 주물렀다.
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동대문사단의 위세는 4·19와 함께 종언을 고해야 했다. 장충단 사건으로 8개월의 실형을 산 유지광이 출소후 조직한 '화랑동지회'가 3·15부정선거에 깊숙이 개입한데 이어 화랑동지회의 후신인 '반공청년단'이 4·18 고대생을 습격한 것이 화근이었다. 신도환회장, 임화수종로구단장, 유지광종로구단동대문특별구단장의 진용을 갖춘 반공청년단은 이승만의 4선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
자유당 시절을 풍미했던 이정재와 임화수, 유지광은 자유당정권 붕괴 이후 2공화국에서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유지광을 제외한 두사람은 이듬해 일어난 5·16 직후 혁명정부의 특별재판부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민심을 얻기 위해 벌인 첫째 조치는 깡패 소탕령. 정부는 민원(民怨)의 대상이던 깡패들을 잡아들여 참회 시가행진을 시키는 한편, 국토건설단에 투입하거나 감옥에 보내 뿌리뽑으려 했다. 비록 선거철이면 '핵심 선거운동원'으로 그 효용을 과시하긴 했지만, 박정희 재임 18년 동안 주먹들은 공공연히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63년 민정이양 뒤 단속의 고삐가 다소 느슨해지면서 자유당 시절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위세가 한풀 꺾였던 명동파 세력은 '밤의 세계'에서 조금씩 회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리멸렬한 주먹계를 통일하고 새로운 권좌에 등극한 이가 이화룡파의 행동대장이던 '신상사' 신상현.
개발의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60~70년대, 상대적으로 소외된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호남지역 출신 주먹들도 어느새 만만찮은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번개' 박종석과 김태촌 등이 한 부류를 형성하고, 오종철과 그 직계인 조양은 세력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 72년 유신 이후 박정희정부의 사회악 처단 조치에 따라 호남파의 두목급 9명이 구속된 이후 전열을 정비, 새로운 계파를 형성한 범호남파는 75년 '사보이호텔' 사건을 계기로 신상사파를 제치고 주먹계에 호남 전성시대를 연다.
90년 이후 지역중심서 업소위주로
주류공급권과 정기 상납금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던 명동파와 범호남파가 맞붙은 사보이호텔 사건은 '전통 주먹'의 시대가 가고 '칼잡이' 시대가 왔음을 선포한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기껏해야 각목이나 곡괭이가 무기였고 '주먹'에 의해 우열을 가리던 이 세계에 처음으로 회칼과 일본도 등 새로운 '문물'이 소개된 것. 또 주먹계의 '족보'와는 무관하게 후배가 선배를 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명동을 점령한 호남파는 다시 분열과정을 거쳐 새로운 보스 조양은이 꾸린 '양은이파'와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강자로 부상한 김태촌의 서방파, 'OB파'의 이동재가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이와 더불어 건달세계를 부르는 외부의 지칭도 이 무렵부터 '조폭'으로 통일됐다.
광주학살을 저지른 정통성 부재의 정권이 들어선 것은 이들에게 호재였다. 80년 계엄하에서 '삼청 제5호'라는 대대적인 조직폭력배 소탕작전으로 타격을 입은 것도 잠시. 어수선한 세상에 주먹들은 강남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유흥업소를 주무대로 건설현장 주주총회 등 이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뛰어들어 자금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직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단군 이래 최대의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또한 겉으로는 조직폭력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앞세우던 정치권도 정권 유지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여전히 폭력을 동원했다. 87년의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은 대표적인 사례. 이른바 '용팔이 사건'으로 알려진 이 일의 배후는 권력의 핵심이던 장세동안기부장과 그의 자금을 받은 야당중진 이택희 이택돈의원, 그리고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이란 단체가 관련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호청련의 전면 등장은 과거와 달리 폭력배들이 조직 자체를 구태여 비밀에 붙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봉사단체 등 '낮세계'의 외투를 걸친, 80년대 후반 이후의 새로운 현상이기도 했다.
조직폭력배들은 90년 노태우정권의 '범죄와의 전쟁' 이후 보스급 주먹들이 줄줄이 사회와 격리되면서 지금은 '지역중심'에서 '업소중심'으로 서식 방법을 바꾸고 군웅할거 상태에 있다. 최근들어 조직간 싸움이 갈수록 잔혹함을 더하고 있는 것은 절대 강자가 없는 이 바닥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는 평.
툭하면 칼을 들이미는 요즘의 조폭들은 "우리 시절에 안그랬어"라며 혀를 차는, 인정과 협기를 읍조리고 항일과 반공의 선봉을 자처하던 1기 선배들의 '말씀'에 귀기울일 여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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