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이 변해가는 속도를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스마트폰이 상용화되어 손쉽게 인터넷을 검색하고 일 처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미래에 무인 자동차가 상용화될 수 있다는 보도는 이따금 저를 놀라게 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발전에도 많은 사람이 심적으로 병들어가고 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 미워하며 살인까지 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편리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왜 우리는 가까운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요한 일서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형제 사랑”에 대해 같이 나누길 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인생 말미에 요한복음과 3권의 서신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성령의 감동으로 썼습니다. 그 중 요한 일서는 믿는 성도들에게 거짓 복음을 전했던 영지주의(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정,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함을 주장)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처음 믿을 때 받았던 복음(요일2:24, 요이2:6)에 머물러 있으라 권면하는 서신서입니다. 이 서신서에 나타난 일관된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그의 편지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사랑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 일서 1장과 2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 사랑의 관계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의 정체성이 반복적, 심층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이를 더욱 세밀하게 표현하였는데,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3:14). 저자는 사랑을 말하면서 사망과 생명을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특별히 형제에 대한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떻게 생명과 연관되어 있을 것일까요?
구약에 나타난 “형제”라는 단어는 한 아버지에게서 나온 핏줄(창42:32) 또는 같은 조상에게서 나온 동족(신2:4)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 근원에서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자를 형제라 말할 수 있는데,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더욱 분명하게 정의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태12:48-50). 예수님께서는 그저 한 부모 또는 조상에게서 나온 자를 형제라 부르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진정한 형제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형제의 개념이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 연결된 공동체, 즉 영적 공동체로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한 말씀하시길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한6:40).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그 뜻을 행하는 자, 즉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게 된 자들이 곧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한 근원(아버지 하나님)에서 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형제 되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아니하시고.” (히2:11)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시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2:17).
그러므로 요한 일서3장14절에 나타난 “형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친히 우리의 형제 되어 주셔서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3:16). 본문에 나타난 “사랑(agape)이라는 단어”는 “다른 이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는 곧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가 된다는 것 그리고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같은 정체성(예수님을 통해)을 가진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온 형제(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를 사랑함이 마땅하며 이는 생명을 보장 받은 자들의 당연한 열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함으로 그분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세상(요일2:16-17, 다른 정체성)에 속해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나”(요일3:16-17). 실제적인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자신의 형제를 말과 혀로만(요일3:18)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의 본을 따라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는 것이 형제 된 도리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핏 값으로 사신 형제(히10:19)를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형제뿐만 아니라 모두에게까지 확장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6:44, 46).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마태9:13),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5:8). 이 사랑은 용서받을 수 없었던 그리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던 우리(롬3:9)를 친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조건 없는 사랑(갈2:20)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 사랑, 즉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죄를 대신 지신 그 분의 숭고한 희생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그 사랑을 믿고 실천하고 계십니까? 편리함은 있지만 마음이 병들어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몰라 방황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본질이신 예수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거듭나셨다면 실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