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도 2월 28일,
오늘의 아침 날씨는 여행객들에게는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청명하지 못하고, 조금은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흐린 날씨다. 우리 일행 4명은 덕천로타리 국민은행 앞에서 조우하여, 장비와 물품(소주, 라면, 김치, 고추장)을 점검하고 필수품중 빠뜨린 드럼프 카드를 25시 마트에서 거금 6,000원에 구입하고는 부산 국제여객 터미널로 향했다.
우리가 탄 택시는 백양터널과 수정터널을 연이어 통과한 후 약 40여분만인 아침 8시 40분 경에, 나와 우리일행을 낯 설은 터미널 건물 앞에 내려놓았다. 1층에 위치한 부산은행 출장소에서 엔화를 소액으로 환전하고 2층으로 올라가니, 많은 여행객들이 줄지어 출국장으로 빠져나가는가 하며, 한쪽에서는 여행사 가이드의 여행에 따른 설명에 귀 기울이는 여행객들의 무리와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강태공들의 무리가 몇몇씩 짝을 이뤄 낚시장비인 낚시대와 바구니 등을 잔뜩 짊어지고 술렁이고 있었고, 간혹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가 있는지를 찾아 헤메는 동안, 다른 여행사인 '온 그린 여행사'를 착각하여 여권과 패스-보딩을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헤프닝이 있은 후에도 한참을 기다린 10시경에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가 도착해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가까이 '쯔시마 투어'라는 깃발을 내걸었으며, 거기에서 우리는 '온- 누리 여행사'에서 온 정수걸 대리와 자칭 대마도 제일의 가이드라는 조 재근 가이드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출국심사를 받기 위하여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탄 배 '시- 프라우워(Sea flowers)'는 총 426톤으로 정원 240명 시속 35노트로 운항하는 배로 부산항에서 도착지인 이즈하라항 까지 약 2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하였다. 이 배는 당초 예정시간대로 정확하게 오전 10시 30분에 서서히 부두 접안 위치에서 기수를 돌린 후 빠른 속도로 대해를 향해 나아갔다. 약 10분이 흘렀을까 나아가는 왼쪽 편 선실 창 밖으로 보이는 방파제를 벗어나는가 하는 순간 멀리에 있는 오륙도가 눈앞에 보였다가 점점 작아져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항해하는 주변 바다에 자주 보이던 1∼2척의 배도 보기가 드물어지고, 배의 요동도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바깥 바다를 쳐다보니 출발 때 보다 훨씬 파도도 높고, 헤쳐나가는 배도 엄청 힘드는가 보다. 배의 요동만큼이나 힘든 호흡으로 증기를 내 뿜어 선실 창에 휘 뿌연 입김을 남긴다. 조금 높은 파도에 의한 흔들림과 좁은 공간이 가져다 주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좌석에서 일어나 조금 움직여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발걸음이 정상으로 띄어지지 않는다. 무중력 상태가 이럴까? 바닥에 닿은 듯 하면 아직 멀었고,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면 벌써 부딪쳐 팅겨지는 발. 좌우의 균형도 잡기 힘든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어이 없어하며 씩 웃고 "어 정말 되게 흔들리네" 하는 넋두리와 함께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출항한지 약 1시간 남짓 흘렀을까? 어 저기 대마도가 보인다는 소리에 '설마 한 시간 조금 넘었는데 무슨 대마도가 벌써 보일까?'하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한 나머지 배 좌우의 창을 바라보니 오른쪽에 거뭇거뭇한 섬의 윤곽이 길게 바다 위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 왔다. 그렇다! 벌써 대마도에 온 것이다. 이름하여 상대마(上對馬)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배는 오른쪽에 대마도를 안고 왼쪽으로 파도가
넘씰거리는 일본해협을 가로막고 계속 남쪽으로 나아갔다.
목적지인 이즈하라항까지 가는 도중에 만나는 대마도의 풍광은 어찌 그리 우리 대한민국 땅과 비슷한지, 산세가 동그마니 부드러워 그리하며 해안에 있는 숲과 바위의 모양까지도 우리의 산하에서 쉬이 볼 수 있는 그러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폼세가 너무 놀라웠고, 어촌의 풍경이 우리 옛날 70∼80년대의 빛바랜 추억의 사진에서 봄직한 어촌의 조용함과 정다움이 배어 있는 듯 하였다.
이즈하라항 도착 30분쯤 전에 여행사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먹기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배가 롤링과 피칭을 거듭하는 판국에 음식을 입에 갖다 넣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인가! 세계에서 알아주는 우리 배달민족의 젓가락 실력이 말해주듯 손재주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단군의 자손들이 아닌가. 손목에 힘을 적당히 넣고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하얀 밥, 김치, 김, 계란말이, 돼지조림, 어묵튀김 등 남김없이 배안에 저장하고, 함께 나온 씨레기 된장국도 배의 흔들림에 리듬을 맟추어 입에 꼭 대고는 단숨에 흘려 넣고, 옆 좌석을 흘낏보니 배달의 자손답지 않게 곽노인의 된장국은 그대로다.
파도가 심해 당초예정보다 약 30분이 지연된 오후 1시 30분경에 상륙한 이즈하라는 일본의 나가사끼현에 속하는 자치단체로써 대마도 전체인구 4만 5천명 중에서 약 1만 6천명 정도가 살고 있는 대마도의 제일 번성한 곳이란다. 이즈하라항의 입국심사는 정말 간편하였다. 일본세관원들에 대한 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상당히 밝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간단한 구두검색만으로 입국절차를 마치고, 입국장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이즈하라 시내는 우리의 면 단위의 시골보다 더 조용함을 지니고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에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까이 있는 앞산을 배경으로 1층 또는 이층으로 나지막하게 지어진 목조 가옥들이 조그만 모델하우스처럼 아담하고 깨끗하게 층층이 혹은 떨어져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의 산복도로를 오가는 차는 아주 소형의 차로 우리 한국의 티코나 마티스 정도의 크기다.
여행사에서 마련한 버스는 15인승 정도 되는 관광버스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6명이 타고 있었고 우리 일행의 합류로 10명이 되었으며, 조금 후에 나타난 낚시애호가 3명과 함께 13명이 숙소에 짐을 풀고 관광을 하기 위하여 숙소인 오션 호텔 (Ocean hotel)로 출발할 때 쯤 하늘은 흐려지고 차창에는 아주 가늘은 빗방울이 하나 둘씩 묻어 나곤 하였다. 오션호텔은 이즈하라항에서 차로 약 5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산복도로를 끼고 일본해협이 내려보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어 시야는 확 트였고, 조망되는 경치도 멋있었다. 건물은 목조로 산뜻하기는 했으나 우리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조립식 콘도라고 표현하면 되겠다.
오후 2시경에 집을 부려놓고 차에 타니 가이드의 말이 오늘 일기가 좋지 않아 이즈하라의 시내 관광은 내일로 돌리고, 먼저 남쪽부터 보잔다. 가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마도의 크기는 제주도의 5분의 2정도이고 거제도의 1.7배"라고 하였으며, "전 면적의 94%가 산지이고 주변이 바다임으로 주산물로는 스기나무와 표고버섯, 그리고 양식진주와 생선과 전복등 해산물이 주종을 이룬다"고 했으며 "스기나무만으로도 대마도 전 주민이 4년 간 먹고 살수 있는 자원이 된다" 했다. 또 "일본에서는 해산물을 분류할 때 우리 한국처럼 자연산과 양식이라고 분류하지 않고, 자연산과 천연산으로 분류하는데 천연산이 바로 우리의 자연산에 해당되고 그들이 자연산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에 해당하는 것인데, 우리와 달리 치어 때부터 양식을 하지 않고 성어를 잡아 가두리에 넣어 키운 것이라 하여 자연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제 우산을 받쳐야 될 만큼 비도 제법 굵어졌다. 꼭 우리 양산 화재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 길과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태종대 순환도로를 합친 듯 한 산복 도로를 한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이었다. 뭐 우리 한글로 번역하면 은어가 돌아오는 자연공원이란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은 약 26㏊의 자연공원으로 조금 흔들리는 구름다리를 통하여 입구와 연결되었으며, 10m 정도 높이의 다리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아주 푸르고 깨끗하여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이고 그 바닥은 전체가 하나의 천연의 화강암으로 연결된 유원지였다. 시설로는 캠프장과 산책로, 잔디스키장 등 놀이시설 등이 있었다.
다음 관광지인 쯔쯔자끼 등대를 향하는 도중 쯔쯔마을에 있는 길옆에 있는 작고 볼품 없는 비석을 보고 가이드가 하는 이야기가 "저 비석이 있는 곳이 쯔쯔의 미인총이며, 쯔쯔에는 옛날에 미인이 아주 많았는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있는 한 미인이 교토성의 궁녀로 뽑혔지만 어머니와 헤어져 성으로 들어가기 싫어 죽으면서 앞으로 쯔쯔에는 궁녀가 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후로는 쯔쯔에는 미인이 한명도 태어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쯔쯔가 쌀 품종인 아끼바리를 최초로 재배한 곳인데 그것을 전해준 원주민이 백제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대마도는 분명히 삼국시대에는 우리의 속국으로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쯔쯔등대가 있는 곳은 일본해협과 대한해협을 가르는 대마도 남단의 모퉁이로 해안에서 등대까지의 약 500미터정도의 바다속에서 분명 암석이 융기되어 시커멓고 투박한 모습으로 파도속에서 일렁거리고 일부는 우뚝 솟아 해수면 위로 솟구쳐 삐쳐나온 것이 꼭 용가리의 등뼈를 연상케 했다. 등뼈의 양쪽으로 갈라선 해협이 민족성을 말하지는 않을진대 대한해협은 그리도 평온하건만 일본해협은 파도로 용틀임 치며 괴로워했다.
우리일행이 해안을 보면서 "어찌 이 섬의 해안이 제주도의 암석과 풍광을 그렇게 꼭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가이드 설명이 "이 섬은 우리나라의 거제도와 동식물의 분포가 거의 같고 지질학적으로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일본 본토와는 별종으로 취급된다"고 하였다. 우산을 받쳐들고 쯔쯔등대 옆 해안 산책로를 따라 가는 길은 자연 그대로 엉켜진 동백이 간혹 피어있고, 민들레, 쑥,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우리의 눈에 익은 잡초들로 가득하였다. 저 아래 바닷가에는 비를 맞으며 힌부리 갈매기가 한 무리를 이루어 비상회의를 하는 듯 모여 소리치며 날개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쯔쯔자키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산복도로 옆 옹벽은 실제 자연 토석과 암반처럼 보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발포식으로 쏘아 만들었다는데 자연석 비슷하고 게다가 이끼까지 나 있어 더욱 자연스러웠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길가에 버려진 페차다. 일본에서는 얼마 전까지 페차증명서 없이 차량번호와 등록증을
반납을 받아 주고 페차를 위한 인건비가 비싸 이렇게 페차를 아무데나 방치한다고 했다. 어느 지역이나 골치 아픈 일은 한 두개 있는가 보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하고 저녁 6시쯤 이즈하라에 있는 부페에서 저녁식사를 가졌는데 이즈하라에 하나밖에 없는 부패식당이란다. 부패식당이라지만 어느 조그만 시골 식당처럼 좌석이 몇 개 배치되어있고 안쪽으로 몇 개의 공간이 나뉘어져 거기에도 한 테이블에 4명이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식당은 깨끗하고 아담하였다. 발빠른 우리 가이드가 미리 예약을 해 놓았는지 우리 일행은 예약석으로 안내되었고 곧 이어 줄을 서서 음식을 가져오는데 음식은 기본적으로 야채와 샐러드 종류를 포함해서 돼지고기 닭고기 등 육류조림 그리고 빵과 과일, 식사류로 백반, 김밥, 회초밥, 스파게티와 몇가지의 부침, 그리고 일본색을 대표하는 다양한 모양과 재료의 오뎅국, 그리고 후식으로 먹는 커피, 밀키스, 아이스 크림으로 대별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남들이 볼 때 조금 게걸스럽다 할 정도로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며 서로 음식을 권하며 찧고 까불고 하다보니 우리 테이블 위에 접시가 가장 많이 쌓였음을 후식을 먹으면서 알게되었지만, 그 누구를 탓하랴. 우리의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겠는가? 맛있는 음식 맛을 탓하겠는가? 하긴 1식에 14,000원 이니까, 이 정도는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자조와 함께 식당 여사장님의 못 알아듣는 인사말을 뒤로하면서 식당을 나올 때는 벌써 밖에는 어둠이 깔렸다.
가이드에게 청을 넣어 인근의 파친코를 찾아 가 보니 구슬치기와 슬롯머신인지를 하는데, 방법을 몰라 배우는 5분만에 1,000엔을 잃고 우리의 선택과목이 잘 못된 것을 알아채고 안내 나온 가이드를 파친코장에 내 팽개쳐 놓고, 영업용 택시를 타고 "오우센 호테루"라고 하니 잘도 알아듣고 목적지에 5분 후에 내려놓는데 요금은 기본거리인데 530엔이었다.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약 6,000원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산 택시요금 기본이 1,500원 정도로 알고 있는 나에게는 가이드가 말한 "일본 물가가 한국의 약 2배정도 되고, 대마도는 일본 본토 물가의 약 1.3 배가된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숙소에 들어가 전기장판을 작동하고 방이 따뜻해 질 때까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볼 요량으로 세면장에 들어가 보니 이건 뭐 우리집 목욕탕의 반쯤 만한 공간에 욕조와 세면대와 변기가 옹기종기 이마를 마주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욕조는 근근히 쪼그리고 앉아야될 정도로 좁아 우리가 사용하기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축소지향의 문화를 향유하는 민족답다는 생각과 함께 요즈음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일본이 원조인 반신욕도 이러한 문화적인 환경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숙소에 식수가 없어 프론트에 가서 물어보니 "대마도는 물이 좋아 아무 물이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니 목욕탕에 있는 물을 식수로 사용하라"고 일러 준다. 찜찜한 마음으로 물을 마셔보니 말 그대로 물맛은 담담하면서 청량감이 든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다는 흐린 날씨로 어둡고 무덤덤하다. 이제 비는 그친 것 같은데 바람은 계속 거세다. 전기장판이 가열되었는지 이부자리 바닥은 뜨겁기까지 한데, 바깥으로 내 놓은 손발은 우풍으로 싸늘해 잠자리가 편치를 않다.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다가 창문을 열고 나가 애꿏은 바람소리를 원망도 해보았지만, 바람소리뿐인 인적 드문 대마도는 정말 조용한 섬임에는 틀림이 없다.
2004년 2월 29일,
아침 6시 30분 경 잠자리에서 누워 눈을 떠보니 숙소 파트너인 왕 서방이 커텐을 걷고, 일본해협 쪽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쉰다. "에이 날만 좋았으면 일출을 볼 텐데, 아직 날씨가 완전히 개지 않았어 볼 수가 없구만."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바람도 자고, 비도 그쳤으나 아직까지 해는 떠오르지 않고 조금 밝은 빛을 띤 구름이 수평선을 가리고 섰다.
아침식사 전 까지 돌아올 작정으로 가벼운 차림으로 어제 내린 이즈하라항쪽으로 산보를 나갔다. 조금 빠른 속도로 걷는 아침 산책길은 어제 내린 비로 인도가 조금은 촉촉하였고 길가에 있는 가로수 줄기와 풀들도 이슬을 머금은 듯 영롱하다. 여기에서 느낀 것은 대마도에서는 도로에 여유만 있으면 완전하게 인도와 차도를 낮은 경계 턱과 흰색 둥근 막대기형 거치대로 구분하여 보행자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건너편에서 올라오는 젊은 일본여성이 무어라고 인사를 하면서 지나가는데 말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해서 " 어∼ 어∼"하다 지나쳤다. 역시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힘이다.'
약 15분을 걸어나가 이즈하라항과 연결되는 어선 정박장에 도착하니 소형동력선이 열병을 하듯이 질서정연하게 줄서 있는 가운데, 몇몇의 배 선상에는 출어를 준비하는 손놀림이 분주하다. 우리나라나 여기나 아침을 여는 모습은 어디라도 상큼하다. 정박장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뒤에서 몇 마리의 갈매기가 선회해 바다속으로 달려든다. 아침 해장거리를 장만하는가 보다. 숙소로 돌아오는 도로에 속도표시가 40이라고 적혀있다. 속도 제한이 시속 40㎞인가보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차들도 드물고 도로가 텅 비었지만 속도를 내서 달리는 차를 한 대도 보지 못했다. 먼 하늘에서 솔개가 맴을 돈다. 산복도로를 따라 숙소로 오는 약 15분 여 동안 한명의 산보객도 만나지 못할 만큼 정말 조용한 동네다.
아침은 정식으로 먹었는데 오션호텔은 우리 부산에 있는 동아고등학교 출신이 운영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생선구이나 김치, 김 등이 입맛에 꼭 맞는다. 고향을 떠나 외국에 나와서 입맛을 잃지 않는 것만 해도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해협 방향으로 하늘을 보니 해가 윤곽은 가린 체 바다를 향해 원추형의 황금그물을 내리고 그 속에 은빛 물결과 어선들로 가득 차있었다.
오늘은 이즈하라 주변 중부권 대마도 관광이란다. 카미자키 전망대로 가는 길에 제주도 5·3사태로 인하여 대마도까지 떠내려온 시신을 안장한 국군사와 백제의 학자 왕인과 아직기을 모시는 구번왕 신사를 지나쳐 평준화되기 전의 이즈하라 지역유지 자제들이 다니던 이즈하라 국민학교를 지나니 대나무와 스기목이 터널처럼 엉켜진 드라이버 코스로 딱 좋은 길을 만났다. 적당히 봄기운이 도는 숲길은 햇빛이 수림사이로 스며들고 다소곳이 머리 숙인 잎새들은 윤기를 머금고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다. "대마도는 공기가 좋고, 먼지가 없어 와이셔츠를 며칠 동안 입어도 때가 끼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카마자키 전망대는 일본 봉건영주시대의 전략요충지로 이용되었으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조금 건너 앞에는 쯔시마공항의 활주로가 황토색으로 길게 걸쳐져 있고 그 너머 멀리로 아소만이 몇 개의 호수처럼 펼쳐져 있고 구름에 가리워진 산악들이 아소만을 감싸듯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전망대를 내려와 뒤쪽 숲속으로 들어가니 중일전쟁 때 만들었다는 포진지와 약 30㎝정도 두께의 시멘트로 만들어진 군막과 연병장 그리고 교통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세월의 연륜이 말해 주듯이 이끼가 무성하고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아소만의 진주양식으로 대마도에서 제일 세수가 높다는 토요타마정(豊玉町)에 있는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 神社)는 海神을 모시는 신사로 아소만과 접하고 있으며 신사 앞에 있는 토리(문)는 하늘을 매개하는 새를 상징한다 하였다. 대부분의 일본신사는 문이 동쪽으로 나 있으나 와타즈미 신사는 한국방향인 서쪽을 향해 나 있고 몇 개의 문이 일렬로 바다에서부터 시작하여 뭍으로 올라오는 양식이 특징으로 우리의 조상들이 대마도로 들어왔다는 증표라는 것이다. 또 이 신사에 전해오는 전설로 초대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진무천황이 무령왕의 후손이거나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중 한 명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신사입구에 우물이 있어 먼저 왼손을 씻고 다음에 오른손을 씻어 신성한 곳에 출입하도록 하고 있으며, 그 우물 가까이 조그만 야외 스모경기장이 있었다. 신사에 스모경기장이 있는 것은 신사의 재정확보를 위한 흥행을 목적으로 신사와 스모는 공존하였다고 하며, 푸로스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생겨났으며, 현재 일본의 푸로스모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고졸이상으로 170㎝이상의 키와 73㎏이상의 몸무게가 되어야만 된다고 하였다.
또 스모경기의 용어중 다가서라는 말을 '다가다가다가'라 하고, 싸우라고 독려하는 말로는 '하케요이' 무릅을 꿇기 직전의 아찔한 순간을 '노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 말 '다가서라'는 구령식 말, 그리고 현재 이북에서 사용하는 '---하기요', '무릅을 놓을 것 같다'의 뜻으로 '노코다'가 쓰이고 있음은 스모가 고구려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에 방문한 일본정원은 깔끔한 일본식 전통가옥이 있는 정원으로 정원수도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으며, 특히 캠프파이어장, 취사장, 텐트장, 방갈로, 휴식공간 등을 시설하여 가족단위나 직장, 단체단위로 휴양을 하거나 연수훈련을 받는 시설이었다. 전통가옥은 건물 밑으로 통풍이 가능한 통로를 설치하였고 지붕역시 이중지붕으로 환기에 좋을 것 같았으며, 수세식 화장실 배수공에 유수에 따라 작동하는 개페식 뚜껑을 설치하여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 아유모도시자연공원과 마찬가지였다. 사소하지만 이런 점들은 우리도 도입해서 활용해 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1시경 온 길로 돌아가면서 들린 美津島町에 속하는 만제키바시(萬關橋)는 엣날 일본해군의 군함출입을 위해 인공운하를 만들어 그 위에 세운 다리로 조금 곡선을 준 철교에 빨간 색칠로 멀리서도 잘 보였다. 원래 대마도는 하나의 섬이었으나 이 운하로 인하여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 졌으며,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하여 일본국민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운하는 그리 넓지는 않으며 물은 푸르고 깨끗하였다. 마침 화물선이 한 척이 지나가면서 가르는 파도가 시원하게 퍼져나갔다.
원래 여행이라는 것도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가 아닌가? 대마도에 와서 생선회 한 점 구경을 못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대마 수산물 집하장에 들러보니 굉장하다 그 쪽 말마따나 천연산과 자연산을 갓 잡아 운반선에 옮기는 것이 굉장하다. 아구, 참돔, 망상어, 참상어, , 혹돔, 그리고 잡어들이 큰 가두리에서 활개치고 있고 갑오징어는 무에 그리 불만이 많은지 연방 검은 먹물을 내 뿜어 수족관을 금방 더럽혔고, 해삼은 그저 죽은 듯이 서로 엉켜 꼬물거린다. 간 크게 참도미 한 마리 들어올리니 무게가 4.7㎏라 한다. 부가가치세 5%를 포함해서 7,403엔을 지불하니, 그 놈 목을 따고 얼음을 채워주는데 숙소에 올 때까지 약 1시간을 스치로폼 박스안에서 힘차게 펄떡인다.
점심식사는 정오를 조금 넘어 숙소인 오션 호텔에서 간단히 도시락으로 때우고, 이즈하라 시내 주점가 옆에 있는 수선사를 찾아가 1905년에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이듬해에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간 뒤, 일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하다가 세상을 떠난 애국지사이신 최 익현 선생의 묘비를 돌아보고, 이즈하라정청 가까이 있는 조선통신사 영접지에 서있는 덕혜옹주결혼 봉축기념비를 방문하였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후궁에서 태어나 대마도 번주인 宗伯爵家의 아들인 유케다께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으나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합의이혼까지 이르는 망국의 비운의 황녀란다. 이국 땅에 시집와 향수와 수모로 인한 아픈 가슴이 오직 했을까?
도보로 조금 걸어 고려문을 거쳐 조선통신사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대마도 역사자료관에 들어가 보았다. 역사관 입구에는 종백작가의 유케다께의 유화로 그린 섬 그림이 걸려있었고 안쪽 사무실을 바로 지난 진열장 맨 앞에 조선통신사 행렬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다. 토기와 한국계통의 팔찌를 비롯하여 고려청자와 고려판 대반야경의 존재는 한반도와의 끊임없는 교류를 상상케 하였으며, 토기와 농기구등 대마도 민속생활용품이 우리 것이나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좀 왜소한 크기를 가졌다는 생각이 우리일행이 공통으로 느낀 점이었다.
역시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쇼핑이 아닌가? 우리나라 천원백화점이라 할 수 있는 100엔 shop은 정말 매장이 우리나라의 대형마트 크기만큼이나 컸다. 별도로 고가의 가전제품 코너가 있었고, 큰 비디오물 판매장도 있었지만 비디오물의 내용이 저질처럼 보였다. 진열된 물건의 종류는 많았고 대다수의 100엔 짜리 물건은 중국산이었다. 별반 마음에 드는 상품이 없었으나 기념으로 목욕타올, 향초, 찻잔받침, 지압봉 등 몇 가지를 구입하였다.
다음은 차량으로 조금 이동하여 우리한국의 할인매장에 해당되는 '오싸다(discount store)'를 들어가 보았는데 지상1층과 반 지하로 되어 있었으며 1층은 생필품과 의류, 장신구, 스포츠 용구 기타 가전제품 등 생활용품이었고, 반 지하는 식품판매장이었다. 진열된 물건은 섬이라서 그런지 우리물건보다 못했고 가격도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우리 일행 중 물건을 구입한 사람은 부부동반 여행 온 조사장이라는 분이 일본 소주 2병을 산 것이 전부였다. 일본 소주는 상당히 종류도 많고 포장도 다양했으며, 가격도 천차만별이지만 대개 우리한국의 4∼5배는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오후 5시를 가르치고 있고 몸의 피로도 풀 겸, 가이드가 권하는 윳타리 온천욕을 1인 700엔으로 입장하였다. 당귀, 황기, 진피 등 한약재를 섞었다는 한방약탕인 '藥補湯'이라는 이름의 노천탕에서 반신욕을 즐길 때, 대나무 담장위로 담담한 바람이 불어오고 멀리 보이는 물색 푸른 아소만과 그늘에 가려진 산 준령에 감싸진 해가 이제 붉은 윤곽이 선명하다. 갈매기가 아소만 위로 비상하고 자주빛깔의 목욕물이 석양보다 더 붉었다. 탕내로 돌아와서 백매, 홍매의 엑기스를 풀었다는 매지탕(梅之湯)에서 한번 더 땀흘린 후, 상쾌한 기분으로 욕탕을 나오니, 서쪽하늘에는 벌써 어두움이 살포시 묻어나고 주황의 구름이 흘러간다.
저녁의 메뉴는 도마에 올린 회초밥 1인당 10개에다 우동 한사발이다. 맛있게 먹은 것 까지는 좋은데 배가 불러 낮에 가져온 참도미가 들어갈 여유가 없다. 일단 한발 양보해서 저녁 8시에 호텔식당에서 일행 중 조 사장 부부와 이 사장 부부 그리고 우리팀까지 7명이 도미회에 일본소주를 곁들여 먹으면서 대마도의 마지막 밤을 자축하였다.
2004년 3월 1일
오늘은 삼일절이다. 오늘 일본땅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만감(萬感)이 교차된다. 그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다지 않은가. 이왕 온 것 하나라도 열심히 알고 가자고 다짐해 본다.
아침기상 후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려고, 숙소 창 쪽으로 걸어나가 보았으나 오늘 역시 일출을 보기는 글렀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침산보를 나섰다. 오늘 방향은 어제와 반대로 산복도로를 따라 호텔 위쪽으로 잡았다. 산복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츄리닝 차림의 노인네 한 분이 위쪽에서 내려온다. 어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얼핏 보기에는 한국사람 같아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니 "오이, 오이"하며 지나간다. 일본사람이었다.
조금 더 가니 대아해운에서 운영하는 대아호텔이 눈에 들어왔고, 바닷가 언덕 편 위로 산책을 나온 주민들을 위한 체육공원과 바닷가 가까이 일출 전망대를 조그맣게 만들어 놓았다. 특이한 것은 가로등을 우리의 허리높이 정도로 돌로 만든 둥근 기둥 안에 넣어, 보기에도 좋고, 견고하게 보였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에는 아직까지 조업을 마치지 못한 어선들 몇 척이 떠 있었고, 약간의 바람과 함께 하늘에는 솔개들이 떼지어 날아다닌다. 자연환경이 좋아서인지 대마도에는 유난스레 마을 가까이 솔개와 까마귀가 많다.
9시경에 하얀 쌀밥에 된장국으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상대마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상대마를 향해가는 길 주변 공지에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빽빽한 수림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종을 이루는 젓이 스기나무이다. 쭉쭉 뻗은 스기나무는 시원스레 보였고 너무 질서정연하게 조림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신경질이 날 정도다. 띄엄띄엄 조그만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고 촌락마다 큰 농지는 없고 텃밭식으로 가꾸어 자투리땅이라도 이용하는 모습이 우리네 도시서민 생활을 보는 것 같다.
정오 조금 넘어 카미아카타쵸에 있는 팔작지붕의 한국전망대에 도착해서 한국쪽으로 바라보니 보인다는 거제도는 뿌연 해무로 보이지 않고, 앞쪽에 있는 둥근 옥탑이 있는 일본 해상자위대 건물이 시야에 들어 올 뿐이다. 전망대 옆에 있는 조선역관사위령비(朝鮮譯官使慰靈碑)는 1703년 부산을 출발 대마도로 떠난 역관사 108명이 이 해변을 앞두고 조난을 당하여 전원 사망한 사건에 대한 위령비라 하였다. 그 자리를 떠나기 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선조들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위령을 표하고자 절 한번하고 내려올 때 부는 소슬바람은 우리네 처량한 심사를 대변하는 듯 하였다.
출국항인 하타카쯔에 도착해서 들어간 식당은 무슨 놈의 방이 그리 작은지 탁자와 벽 사이에 사람이 앉으니 더 이상의 여유공간이 없었으나 점심으로 먹는 일본식 짬뽕은 해물과 야채를 주로 하되 스파게티용 면과 비슷하였으며 국물이 맵지 않고 시원한 것이 일품이었다. 밖으로 나와 교량 위에서 히타까쯔항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버스에 올라가니 가이드 왈 "오늘은 폭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출항을 못한다"고 한다. 가이드 말이 "그것은 선장이 일기를 보고 승객들의 안전을 위하여 결정한 사항으로 출국항 출입국 관리소에 통보된 사항임으로 자기로써는 어쩔 수 없다"고 헀으며 "출항은 내일 우리가 처음 입국한 이즈하라항에서 있을 것"이라 했다.
하릴없이 원래 숙소인 오션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재미없고 짜증나는 길이었다. 일행 모두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는데 갑자기 일정이 연기되니 마음이 혼란스럽고 피로도 겹쳐진 것 같다. 함께 탄 일행 모두가 한동안 짜증 섞인 푸념과 내일의 일정변경에 따른 걱정을 쏟아냈지만 그것도 잠시. 풀린 긴장으로 엄습하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차에 흔들리고 졸음에 흔들리었다.
오후 5시경에 숙소에 도착하니 "1박에 아침식사를 포함해 4,000엔이고 저녁은 별도 주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컵라면도 8개 있고 해서 저녁은 자체해결하기로 하고 1박 1식으로 4,000엔을 주기로 하였다. 갑자기 늘어난 하루를 좀 더 재미있게 보내기 위하여 저녁 8시경 걸어서 이즈하라시내 구경을 나가니 오늘 못나간 우리 동포들이 여기 저기서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아무리 돌아봐도 이 놈의 동네는 조용하기는 한데 정이 쉬 붙지를 않는다. 특별한 소일거리도 없고 첫째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신이 없다.
돌고돌다 좀 전에 봐 놓았던 빨간 간판에 불이 들어오는 '부산정'이라는 식당이 그래도 조금은 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거기로 직행했다. 창을 통해서 가계 안을 들여다보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다. "야, 저사람들 한국에서온 여행객 같은데"하면서 들어가 한 테이블 남은 공간을 차지하고 둘러보니 한국말 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점원이 와서 물과 메뉴표를 놓고 가는데 가격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생맥주 500㏄에 500엔, 소주 한병 1,000엔, 백세주 한병 1,500엔이다. 거기다가 안주도 거의 1,000엔 수준인데 우리나라 주점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빈약하다.
그러나 배움에는 투자가 꼭 필요한 것임을 어찌 우리가 모르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며 머릿속을 빠른 속도로 굴리는데 벽에 조그맣게 쓰여진 '축 승격 대마시 생맥주 500㏄, 300엔' 문구 발견. 우리는 확실하게 300엔 짜리 생맥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합이 생맥주 20여 잔을 돼지고기 부침과 한 봉지에 5∼6개 들어있는 서비스 콩과자를 안주로 하여 얼굴이 뺄개지도록 마시면서, 이 가계주인 니까야마 요시후이(中山善文)의 안주인이 한국인으로 부산에 살다 대마도에 시집을 와서 '부산정'이라는 상호를 부쳤다는 것을 알았다.
숙소로 돌아와 국제전화로 오늘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우리 마누라에게 통보한 연후에 숙박비가 아깝고, 조금이라도 본전을 뽑을까 하는 마음으로 좁은 목욕탕에서 쪼그리고 앉아 반신욕을 하면서도 정말 오늘이 대마도의 마지막 밤이 되기를 몇 번이나 기원하였다. 잠자리에서도 혹시 내일 또 하는 걱정으로 얼마나 뒤척이었는지. 그러나 우리는 2004년 3월 2일 오전 9시 10분경 포근한 날씨속에서 이쯔하라항을 뒤로하고, 간 여로인 뱃길 약 70㎞를 요동치는 파도를 넘어 오륙도를 지나 부산내항에 정확하게 정오를 넘긴 50분에 부산항에 돌아왔다. 큰 모험은 못했지만 아름다운 섬 대마도에서 보낸 3박 4일의 여행도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첫댓글 에쑤케이님...무쟈게 즐거우셨겠어요 담에 만날때 애기해주세용
오데로 사라지셨나 했더니...히야~~~상세히 적어주셔서 상상을 맘껏 했더랬습돠..대마도에서 지가 있은것 같아요.ㅋㅋ...역쉬나 에쑤케이님이세요.멋찌~~~`
안녕, 또 바꿨네, 껍데기만 자꾸 변신하몬 뭐하노 ! 소속? 내용?이 바뀌야제. 올해는 될랑가 모르겠다. 암튼 언제 한번 보제이. 다음을 기약한데이.
sk님 어디에 계시다가 이제....그리고 사진 좀 올려 주세요...^^
좋은 여행이셨네요 ^^&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엥???에쑤케이님..소속이라..소속이 어케 바뀌야 된다고요??(알면서 모르는척)헤헤^^얼렁 뵙고 싶어요. 담 정모땐 꼬옥 나오셔요...참...남해 보리암 가는거 부산역서 버스 있다던디...시간 혹시 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