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누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건넛마을 불들도 반짝이고, 느티나무도 거멓고, 앞내도 환하고,
벌레들도 울고, 사람들도 울고,
기어코 오늘밤 또 이민열차가 떠나나보다.
그리운 이야! 기약한 여름도 지나갔다.
밤바람이 서리보다도 얼굴에 차,
벌써 한 해가 넘어 외방 볕 아래 옷깃은 찌들었다.
굶는가, 앓는가, 무사한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도 알 수 없는
청년의 길은 참말 가혹하다.
그대 소식 나는 알 길이 없구나!
어느 누군 사랑엔 입맛도 잃는다더라만,
이 바다 위 그대를 생각함조차 부끄럽다.
물결이 출렁 밀려오고, 밀려가고,
그대는 고향에 자는가?
나는 다시 이 바다 뱃길에 올랐다.
玄海 바다 저쪽 큰 별 하나이 우리의 머리 위를 비출 뿐,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않는다만,
아아, 우리는 스스로 명령에 순종하는 청년이다.
* 네거리의 순이(順伊) - 임화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 너 하나 때문에 - 임화
오직 있는 것은
광영 하나뿐이고,
정녕 굴욕이란 없는가?
있어도 없는 것인가?
만일 싸움만 없다면……
그러나 싸움이 없다면,
둘이 다 없는 것,
싸움이야말로
광영과 굴욕의 어머니,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
패배의 피가
승리의 포도주를 빚는 것도,
굴욕이
광영의 향료를 끌어내는 것도,
모두 다 싸움의 넓은 바다.
바다는
넓이도 깊이도 없어,
승리가 실컷
제 즐거움의 진주를 떠내고,
패배(敗北)가 죽도록
제 아픔의 고귀한 값을 알아내는 곳.
회복될 수 없는
굴욕의
- 제군은 이 말의 의미를 아는가?
아프고 아픈 상처가,
붉은 피가
장미 떨기처럼 피어나는 곳.
아아! 너 하나, 너 하나 때문에,
나는 굴욕마저를 사랑한다.
* 9월 12일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 - 임화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문이 화로가 깨여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이하고 저하고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었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세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 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속을 메워 버리시던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잘 알었세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 올라가는 외줄기 담배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세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치른 구두소리와 함께 --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희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장에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뚜러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 지도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가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에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안었에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섧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 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새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에요.
-- 누이 동생 --
* 현해탄 - 임화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대마도를 지나면
한가닥 수평선 밖엔 티끌 한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南進)해 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
몽블랑보다 더 높은 파도,
비와 바람과 안개와 구름과 번개와,
아세아(亞細亞)의 하늘엔 별빛마저 흐리고,
가끔 반도엔 붉은 신호등이 내어 걸린다.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첫 번 항로에 담배를 피우고
둘쨋번 항로엔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느티나무 아래 전설과,
그윽한 시골 냇가 자장가 속에,
장다리 오르듯 자라났다.
그러나 인제
낯선 물과 바람과 빗발에
흰 얼굴은 찌들고,
무거운 임무는
곧은 잔등을 농군처럼 굽혔다.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가여운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 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
-그 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오로지
바다보다도 모진
대륙의 삭풍 가운데
한결같이 사내다웁던
모든 청년들의 명예와 더불어
이 바다를 노래하고 싶다.
비록 청춘이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 다 땅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상장(喪帳)으르 내린 일은 없었다.
오늘도 또한 나 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삼등 선실 밑 깊은 속
찌든 침상에도 어머니들 눈물이 배었고,
흐린 불빛에도 아버지들 한숨이 어리었다.
어버이를 잃은 어린아이들의
아프고 쓰린 울음에
대체 어떤 죄가 있었는가?
나는 울음소리를 무찌른
외방 말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오오! 현해탄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청년들아!
그대들의 조약돌보다 가볍게
현해(玄海)의 물결을 걷어찼다.
그러나 관문 해협 저쪽
이른 봄 바람은
과연 반도의 북풍보다 따사로웠는가?
정다운 부산 부두 위
대륙의 물결은
정녕 현해탄보다도 얕았는가?
오오! 어느 날
먼먼 앞의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1890년대의
1920년대의
1930년대의
1940년대의
19××년대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페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 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출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좇던 실내(川)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 임화
눈발 부우연 하늘
어느 곳에서 조국은
나의 가는 길을 바라보고 섰느냐
종일토록 울어 끊지 않는
바람 속 어느 곳에서 어머니는
나의 마지막 숨결소리를
들으려는 것이냐
* 가을 바람 - 임화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데,
무어라고 네 마음은 종이풍지처럼 떨고 있니?
나는 서글프구나 해맑은 유리창아!
그렇게 단단하고 차디찬 네 몸,
어느 구석에 우리 누나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 있니?
참말로 누가 오라고나 했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달아와서,
그리 마다는 나무 잎새를 훑어놓고,
내 아끼는 유리창을 울리며 인사를 하게.
너는 그렇게 정말 매몰하냐?
그렇지만 나는,
영리한 바람아, 네가 정답다.
재작년, 그리고 더 그 전해에도, 가을이 올 적마다,
곁눈 하나 안 떠보고, 내가 청년의 길에 충성되었을 때,
내 머리칼을 날리던 너는, 우렁찬 전진의 음악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누구가 퇴각이란 것을 꿈에나 생각했던가?
눈보라가 하늘에 닿은 거칠은 들판도 승리에의 꽃밭이었다.
오늘......
오래된 집은 허물어져 옛 동간들은 찬 마루판에 얽매여 있고,
비열한들은 이상과 진리를 죽그릇과 바꾸어,
가을비가 낙엽 위에 찬데,
부지런한 너는 다시 그때와 같이 내게로 왔구나!
정답고 영리한 바람아!
너는 내 마음이 속삭이는 말귀를 들을 줄 아니, 왜 말이 없느냐?
필연코 길가에서 비열한들의 군색한 푸념을 듣고 온 게로구나!
입이 없는 유리창이라도 두드리니깐 울지 않니?
마음 없는 낙엽조차 떨어지면서, 제 슬픔을 속이지는 않는다.
짓밟히고 걷어채이면서도, 웃으며 아첨할 것을 잊지 않는 비열한들을,
보아라! 영리한 바람아, 저 참말로 미운 인간들이,
땅에 내던지는 한 그릇 죽을 주린 개처럼 쫓지 않니?
불어라, 바람아! 모질고 싸늘한 서릿바람아, 무엇을 거리끼고 생각할까?
너는 내 가슴에 괴어 있는 슬픈 생각에도 대답지 말아라.
곧장 이 平壤城의 자욱한 집들의 용마루를 넘어,
숲들이 흐득이고 강물이 추위에 우(鳴)는 겨울 벌판으로......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았으니까......
-=-=-
* 임화의 비극적인 삶과 문학 - 윤여탁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1.
우리는 앞으로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의 오랜 숙원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런 민족 통일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측면보다는 경제, 문화, 민족 정서의 측면에서 교류가 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해법도 제시되어 있다. 그 동안 적으로 생각했던 동족들을 미래를 같이 갈 한민족으로 편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 1987년 단행된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는, 그 동안 제약을 받았던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읽기'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했다는 점에서, 또 이를 통하여 민족 문학이 바르게 수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더구나 이들 문인들 중에서 한국 근대문학사에 뚜렷한 그림자를 남긴 임화를 발견할 수 있음은 뒤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임화(林仁植)는 평론가로서 문예 이론과 문학사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도 우리 문학사에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일제 강점기, 을유 해방, 남북 분단, 민족 상잔의 전쟁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이데올로기와 민족 해방 운동의 제물로 바쳐졌다. 자기 스스로 선택한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임화는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보성고보>를 졸업한 후, 1926년부터 {매일신보}, {조선일보} 등에 문학론과 모던한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모던 보이는 '미목수려한 장발의 시인'인 이상화를 동경하는가 하면, 영화 평론과 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1927년 경에는 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였으며, '단편 서사시'인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등을 발표하면서 계급 문학 운동의 대열에 참여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임화는 일제 강점 상태에서 문인이 할 수 있는 의무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1929년 일본에 건너가서 당시 일본에서 노동 사상 운동을 하던 김두용이 발행한 {무산자}라는 출판물에 관여하면서, 무산 예술 운동의 전위(前衛)가 되고자 한다. 1930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그 동안의 KAPF의 이론가이자 지도자들이었던 김기진, 박영희와의 이론투쟁을 통하여 조직의 장악하게 된다. 이후부터 1935년 KAPF가 해산될 때까지 대중화 논의나 창작 방법 논의에 깊이 관여한다.
또 한국문학사를 '이식 문학사'라고 규정한 문학사 연구를 통하여 문학 연구의 한계와 진전을 아울러 보여주기도 한다. KAPF의 해산 후에는 소설가였던 김남천과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수용한 창작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일제 파시즘의 전면적인 등장이라는 위기의 국면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임화는 일제 강점기 전기간을 통하여, 문학 연구와 작품 행동에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KAPF 활동기에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은 임화는 -- 그로 인하여 숱한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에 대한 이같은 의혹은 일제말 암흑기에 친일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 1945년 민족 해방을 맞이하자 곧바로 민족 문학의 재건에 뛰어든다. 그래서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후 재편된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해방 정국에서 좌파의 문학 운동을 주도한다. 특히 이 조직은 박헌영이 이끈 <조선공산당>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문학의 정치 투쟁으로의 임무를 수행한다.
미군정과 우파의 조직적인 탄압과 압박을 피하여 월북한 임화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박헌영의 일파와 같이 숙청된다. 그는 미국의 간첩으로 처형된 1953년까지, 남다른 문학에의 열의, 문예 이론의 탐구를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임화를 (그의 사상적인 문제를 떠나서) 민족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임화는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일제 강점기에 민족 해방을 위하여 싸워온 문학 운동가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 강점 상태에 발표된 {문학의 논리}라는 방대한 문학론과 곳곳에 연재했던 {신문학사}는 그의 시집인 {현해탄}, {찬가}, {회상시집}과 더불어 중요한 민족 문학의 성과물이다. 그리고 이런 업적들은 문학사적으로도 그가 '이식의 문학'을 거듭해왔다고 봤던 빈약한 근대 문학의 성과를 재검토하는 데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
임화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생각과 사상이 일제 강점기의 문학 청년들에게 만연됐을 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문학론과 시 창작을 통하여, 당시의 민족 현실과 민족의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이 점은 그의 대표적인 시인 [우리 오빠와 화로]의 일절을 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노동 운동을 하다가 끌려간 오빠를 생각하면서 담배 공장, 제사 공장을 쫓겨난 남동생과 민족의 누이 동생인 순이라는 노동 일가의 삶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봉투를 붙여서 생계를 꾸리고, 감옥에 간 오빠의 솜옷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민족의 모습은 깨어진 화로(오빠)의 품을 벗어난 화젓가락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되고 있다.
또 이 시가 창작된 일제 강점기는 일제 = 친일 자본가 = 친일 지주라는 등식이 성립됐던 시기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경우, 이 시에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무산 계급의 독재를 꿈꾼 시인의 사상이기보다는 일제와 싸우는 민족 해방 투사의 애국 애족 사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이 시는 우리 민중, 민족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3.
우리 민족이 (그가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했던) 현해탄 건너편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보여준 그의 행동들도 이런 민족, 민중 운동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해방 정국의 중요한 과제였으며, 민족 모두가 바랬던 것은 더불어 같이 사는 해방 조국이었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친일 잔존 세력과 결탁한 미군정과 우파에 의하여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때에도 임화는 이들과 맞서서 결연한 투쟁을 할 것을 주장한다.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깃발을 내리자]의 부분 ({찬가}, 51~52면)
우리 문인들 대부분은 일제 강점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이런 문인들이 해방 정국의 민족 앞에 떳떳하게 나서기 위해서는, 성실한 자기 비판을 선행해야 했다. 또 앞으로의 삶에 부끄러움이 얼룩지지 않도록 남달리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임화는 남보다 열심히 조직을 정비하고 문학론과 창작을 실천했다. 그러나 그가 본 해방 정국은 매국노와 강도들에 의하여 일제의 빈자리가 메우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해방이 가져다 준 민족 통일 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제가 무시되어 조국은 민족 분단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반민족인 일들은 강대국의 이해에 부합되어 계획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한갓 문인이었던 임화 혼자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이자 아내였던 지하연과 더불어 박헌영이 간 길을 뒤따라갔고, 북의 대남 공작의 선봉장이 되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문학사 연구가, 비평가, 시인, 조직의 지도자 등의 큰 족적을 민족 문학사에 남긴 임화. 그러나 우리 문학사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야 할 임화는 그 동안 실종자가 되었었다. 해방 후 붉은 이데올로기의 선택으로 인하여 남쪽에서 제대로 검토되지 못했으며,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죄목 때문에 그의 사상의 지향지였던 북쪽에서는 부분적인 검토마저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문학사적 왜곡은 임화라는 문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납 월북 문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요, 우리 주위의 수많은 이웃에게도 부딪쳐 있는 문제다. 이제라도 우리 민족 모두의 포용력있는 결단과 이들의 문학 작품에 대한 성실한 '읽기'를 통하여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 문학 연구자들과 독자들은 이런 작업이 작은 통일 운동의 하나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 임화(林和 Lim Wha 1908.10.13 ~1953. 8. 6)
시 인, 평론가, 좌익운동가, 카프(KAPF) 서기장, 정치인, 혁명가
1. 출생 및 성장
1908.10.13(양) 서울 낙산(駱山)의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 형제관계 및 기타 가족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음. 본명은 인식(仁植). 필명은 성아(星兒), 임(林)다다, 쌍수대인(雙樹台人), 김철우(金鐵友), 청로(靑爐), 임화(林華). 문필활동을 시작한 1926년에 성아(星兒), 임(林)다다라는 필명을, 1928년부터 임화, 김철우, 쌍수대인, 청로 등의 필명을 씀. 보성중학(普成中學) 입학(1921), 고리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 섭렵함. 4학년(17세)이던 1924년12월8일, 15일, 22일에 동아일보 문예란에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감상적 연애시인 <연주대>, <해녀가>, <낙수>, <실연1, 2>, <소녀가> 등 6편의 시 투고. 졸업 직전(5학년) 집안의 파산으로 중퇴(1925). 당해 모친사망 후 가출, 문학과 인연을 맺으며 다다이즘, 사회(공산)주의등 최신 유행 사상과 예술 사조를 접하게 됨. 매일신보와 조선일보에 시와 수필, 평론을 발표(1926. 1:성아(星兒)라는 필명사용, 1926. 4.14 매일신보에 시 <무엇찾니>발표)하고 잡지[학예사(學藝社)]의 주간을 거쳐 카프(KAPF) 가입(1926.12). 임화라는 필명을 쓰며 <혁토>, <화가의 시>, <지구와 박테리아> 등 다다이즘적인 성격의 시를 발표하는 한편, 정신분석학을 기초로 계급문학을 비판하는 글을 쓰다가, 서서히 무산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임. [예술운동] 창간호(1927)에 계급의식과 국제주의 및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의지를 표방한 시 <(曇(담:흐릴 담) -1927년>을 발표하여 카프 진영과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은 이후 박영희(朴英熙), 윤기정(尹基鼎)과 교유하며 카프(KAPF) 중앙 위원에 피선(1928)됨. 영화와 연극에 참여(1928년 카프 정통의 영화부인 청복 키노(1930년 7월)가 제작한 김유영 연출의 <유랑(流浪)>, <혼가(昏街)> 등의 영화에 주연 배우로 출연). 카프 지도자 중의 하나인 김팔봉을 공격하는 논전 <탁류에 抗(항)하여>를 씀으로 써, 박영희(朴英熙)의 강경노선을 지지하여 카프(KAPF)의 주 논객으로, 계급성을 강조하는 박영희(朴英熙)와 형식을 중요시하는 김기진 사이에 벌어진 '내용과 형식 논쟁'시 김기진을 유화주의, 도피경향의 소유자로 비판·공격하고, 이후 벌어진 김화산등 아나키스트와의 아나키즘 논쟁시 '일언하면 피등은 좌익문예가의 가면을 쓰고 대중에게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자 하는 예술파적인 소시민의 근성을 발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 일침한 후 김화산이 좌익 진영 내에 잠재하여 혼란을 획책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 조직내 아나키스트들에게 일격을 가하며 논쟁을 잠재우고 박영희(朴英熙)를 지지함으로써 카프내 이데올로기논쟁에서 주도권을 잡고 조직활동에 깊숙히 관여하게 됨. 1929년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順伊)>, <우산 밧은 요코하마(橫濱)의 부두>등의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 경향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대표적 프로 시인의 위치를 점함. 박영희(朴英熙)의 도움으로 동경유학을 떠남(1929). 일본 동경에서 무산자사(無産者社)를 경영하면서 카프 동경지부를 운영하고 일본 나프(NAPF)에 관계한 이북만(李北滿), 김두용과 교분을 나누며 이후 카프(KAPF)의 제2차 방향전환의 핵심인물들인 소장파 안막(安漠), 김남천(金南天), 권환(權煥) 등 ‘무산자파’ 그룹과 교유함. 첫 부인이 된 이북만의 누이동생 이귀례를 만나 동거 생활 시작. 이귀례와 결혼, 귀국(1931)한 뒤 이데올로기의 간접표현이 '극도로 재미없는 정세'의 타결책이 될 수 있다는 김기진의 주장을 후퇴주의이자 프로문학을 포기하는 패배주의라 비판하고 같은 동경유학생 김남천, 권환, 안막등 소장파의 지지를 얻어 카프(KAPF)의 분열을 수습하고 헤게모니를 장악, 카프(KAPF)를 볼세비키화로 재조직 하는 제2차 카프(KAPF)의 방향전환을 주도하며 서기국장에 피선 됨.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윤기정, 고경흠 등과 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 지하당 재건을 획책한 혐의로 70여명이 검거되는 공산당 재건사건과 관련된 제1차 카프검거사건에 연류되어 검거되었으나 3개월간의 옥살이 후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됨(1931. 8. ~ 10). 딸 혜란을 낳음(1931.12). 카프(KAPF)의 조직원 전체를 검거하기 시작, 80여 명이 검거되고 이기영, 나웅, 송영, 한설야, 박영희(朴英熙), 권환(權煥), 김유영, 백철, 정청산(鄭靑山), 홍구(洪九), 윤기정, 이갑기(李甲基), 이동규(李東珪), 박완식(朴完植) 윤기정(尹基鼎)등 23명이 기소된 제2차 카프검거사건(1933년의 ‘신건설(新建設)사사건’ 또는 ‘신건설(新建設)사건’)이 발생하였으나 지병인 폐병을 빌미로 구속에서 제외 됨. 윤기정의 후임으로 카프 서기장이 됨(1932). 평양 고무공장 사건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남천의 체험적인 창작물 < 물!>을 둘러싸고 김남천과 소위 '물논쟁'을 벌여 이를 계기로 소설비평가로 문단에 주도적인 이론을 전개함(1933).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용 찬반논쟁을 둘러싸고 낭만주의론 제창(1934)함. 카프 2차 검거 사건 이후 카프의 지도자 박영희(朴英熙)가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라는 전향문을 쓰고 조직의 이론가인 신유인, 백철(白鐵), 신석정 등과 함께 퇴맹계를 제출한 뒤 카프(KAPF)에서 탈퇴하자 크나큰 내부 혼란에 빠져들어 소위 전향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에 서기장이던 임화가 퇴맹계 제출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퇴맹계를 무효로 선언,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일제의 지속적 탄압과 제2차 카프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고 활동이 정지된 상태에서 일제의 직접적인 해산 압력을 받게되자 카프 지도부는 제2차 검거로 구속된 동맹원들에 대한 서면질의 형태를 밟아 1935년 5월 20일 김남천, 임화, 김기진이 카프의 해산을 협의하여 임화가 동대문서 고등계에 카프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해체된다.부인 이귀례와 이혼(1935). 이후 악화된 폐결핵 요양차 내려간 마산에서 두 번째 부인이 된 거창출신의 이현욱(필명 지하련(池河連:소설가. 동경소화여고(東京昭和女高), 동경경제전문학교 졸업. 임화와 함께 월북함. 임화 사형 당시 만주에 소개돼 있다 사형소식을 접한 후 귀국하였으나, 시체도 보지 못하게 되자 미쳐 버려 평양시내와 두만강변을 헤매다 평북 희천 근처 산간 오지로 끌려가 교화소에 격리수용되다 1960년 초 병사함.)을 만나 재혼(1935)함. 이후 문학작품 창작과 세태소설론, 본격소설론, 개설 신문학사 등의 평론을 발표하고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활발한 비평활동을 벌임. 제 1시집 [현해탄(玄海灘)](1938)을 발간하고 학예사를 경영함. 평론집 [문학의 논리] 발간(1940). 총독부 소속 총력연맹 문화부장 矢鍋永三郞과 대담, 일제의 신체제문화운동에 어떻게 협력해야 합당한지를 논의하였으며 일제의 탄압끝에 전향, 일제말 친일 문인 단체인'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고 조선영화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1944년까지 근무하며 [조선영화발달사] 집필. 광복 2일 후 조선문인보국회를 기반으로 이원조, 이태준, 최용달 등과 함께 이전 카프문인들과 좌익문인들을 규합, 최초의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1945. 8.17)를 조직, 서기장에 취임. 범좌파문학단체 조직을 목적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구카프계의 비해소파 이기영, 윤기정, 한효, 한설야, 이동규, 윤규섭, 송영, 홍구, 김승구, 권환(權煥) 등이 1945. 9.17 결성)과 문학건설본부와의 연합을 논의한 '아서원 좌담회' 및 '봉황각 좌담회(1945.11∼12. 해방공간하에서 우익진영에 대항할 전국적 규모의 사회주의 계열 문인들의 구심체 조직을 목적으로 북한 쪽에서 파견된 이기영, 한설야, 한재덕, 연안에서 귀국한 김사량 등과 남한측의 임화, 이원조, 이태준, 김남천 등이 서울소재 중국집 아서원과 봉황각에서 만나 가진 두 차례의 모임을 일컫는 말로 이태준, 김사량등의 전향문인의 친일행위에 대한 공격과, 임화의 자기 반성론 등의 대토론이 벌어졌으며 이를 계기로 가칭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결정하고 이 조직의 명칭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확정하게 되는 전조선문학자대회의 개최를 합의, 문학건설본부와 문학동맹의 합동위원회를 개최(1945.12. 3)하여 문학건설본부와 문학동맹의 통합(1945.12. 6)하고 전조선문학자대회(1946. 2. 8 - 9)를 개최하게 된다.)를 주선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조선문학건설본부에 흡수하고 다수의 순수문인들과 중간노선을 걷던 문인들을 참여시켜 이를 확대 개편한 한국 문단사상 최대의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1945.12. 3)을 주도 함. 전조선문학자대회(1946. 2. 8 - 9, 초청 임석자 804명, 출석문인 약 100명, 서기장으로 권환(權煥)을 선출함.)에서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된 뒤 좌파의 문학 운동을 주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깊은 관련을 맺고 문학의 정치 투쟁으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후 남로당의 외곽단체로 활동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함. 박헌영(朴憲永), 이강국(李康國)노선의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기획차장을 역임하며 지하로 잠입하여 활동함. 제 2, 3 시집 [찬가(讚歌)](1947), [회상시집](1947) 발간. 1947년 8월12일 새벽 좌파에 대한 대 검거령 이후 이여성, 백남운, 유영준 등이 검거되고 좌파 전체에 대한 검거와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이 자리잡은 건물이 폐쇄 돼고,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의 기관지인 문화일보가 간행 금지당하는 등 한층 더 강화된 미군정과 우파의 조직적인 탄압과 압박에 더 이상 남한에서의 활동이 불가하다 판단하고 박헌영을 따라 이원조가 있던 해주(이원조가 주필로 있던 좌파신문 이었던 현대일보와 조선인민보, 조선중앙일보가 하지 중장의 성명에 대한 반박문을 실었다는 이유로 발행금지 당하고 관여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1946년 9월 초 월북, 황해도 문화부장으로서 해주에서 활동함.)로 월북(1947.11.20). 월북 후 북한 해주 제1인쇄소에서 남로당 문화담당자이자 남조선문화단체총연합의 일원으로 남과 북 사이의 연락과 남한에서의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며 평양의 남조선문화단체총연합 대표로 있던 김남천, 오장환 등과 함께 좌파문학운동을 이끌었으나 친일 경력과 박헌영의 남로당파로 분류되어 북한의 문단조직 장악에 실패함.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과 남조선문화단체총연맹이 합동으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발족(1951년 3월)하자 평양으로 가 상무위원 겸 문학동맹 위원으로 활동(상무위원회 위원장 한설야, 부위원장 이태준, 부위원장 조기천, 서기장 박웅걸, 위원 이기영, 신고송, 임화, 김순남, 정관철, 김조규, 박영신, 김남천, 문학동맹위원장 이태준, 부위원장 박팔양, 서기장 김남천, 위원 이기영, 한설야, 임화, 최명익, 이원조, 조기천, 김조규, 안회남, 이용악, 안함광, 민병균, 현덕)하며 6·25 발발시 까지 조·쏘출판사 사장 및 조·쏘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쏘문화협회가 발간하는 [조쏘문화] 주필을 맡음. 박헌영·이승엽을 지지하는 문학노선 견지하다 이 시기 이후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의 그늘에서 벗어나 김일성에게로 전환하는 정치적 노선 변화의 모습을 보임. 6·25 발발이후 서울로 와(1951)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을 맡음. 다시 문화공작대의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에 종군한 뒤, 9월 인민군 퇴각과 함께 자강도로 후퇴한 후 다시 북으로 감. 이 때의 전선체험을 담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 들인 나의 피우에>등의 서정시를 남김. 전쟁중 김순남이 곡을 부친 ‘인민항쟁가’를 작사, 빨치산과 인민군의 군가로 사용됨. 6.25 전쟁이 휴전에 들어갈 무렵, 카프 시절부터 정치노선과 문학이념의 차이로 갈등하던 한설야, 이기영, 송영 등의 비판에 직면함. 김남천의 <꿀>, <이태준의 <고귀한 사람들>과 함께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 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의 작품이 한설야의 측근인 평론가 엄호석에 의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원칙에 의한 창작방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으로 비판, 공격됨. 엄호석은 인민항쟁가 <너 어느 곳에 있느냐>가 전쟁 현실을 비관적으로 노래하면서 인민에게 비통, 연민, 향수라는 독소를 주입한다는 이유로 장병들의 전의를 상실시키고 염전사상을 고취 시키는 작품이라고 혹평하고 한설야는 센티멘탈한 화자의 목소리가 애국주의를 파렴치하게 왜곡하고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욕했다고 비판함. 이에 소련파의 기석복이 <우리 문학평론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로 엄호석의 비판을 다시 비판하고 임화 등을 옹호함. 휴전 직후 남침 실패의 책임 전가 대상으로 몰린 박헌영의 남로당계로 분류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체포, 구금됨(1953. 7). 숙청대상으로 전락한 처지에 절망, 구치소에서 쓰고 있던 안경을 깨 그 파편으로 오른손의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 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최후진술에서 '이와 같이 저는 1945년 12월 미군정청 홍보처에 자료를 제공할 때부터 1952년 9월까지 간첩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라 자인한 임화는 이강국(李康國)등 남로당 일파 및 이원조(李源朝), 설정식(薛貞植), 이승엽, 김남천(金南天) 등의 문인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총살형에 처해짐(1953. 8. 6. 향년 45세). 이후 북한에서는 김남천, 이태준 등 문학가동맹 문인들에 대한 반종파투쟁(1953 ~ 56)이 계속되고 종파분자로 몰린 임화의 모든 문학기록이 삭제되어 조선문학예술사전 및 북한문학사에서 제외되었으며 반동작가, 미제 간첩이라는 평가만이 남음. 남한에서도 월북작가로 접근자체가 금지되다 120여명의 월북(납북)문인 작품이 해제된 1988년 7.19 해금조치로 다시 빛을 보게 됨. 2001년 9월4일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미 정부측에 비밀해제를 요구, 공개된 미육군 정보국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던 '베어드 조사보고서'에 박헌영의 직계인 남로당(南勞黨)출신 북한 외무성 초대 부상(副相) 이강국(李康國)이 미(美)군 방첩대(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요원이었다는 기록과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남로당 선전부장, 임화가 미군방첩대(CIC)와 연계되어있다는 비밀문서의 기록이 있다는 보도가 있어 그의 행적과 진위여부에 관한 연구필요성이 제기됨. 300편이 넘는 방대한 량의 평론이 전해짐.
2. 활동 및 작품경향
한국의 랭보로 비견되는 천재시인 임화는 시, 비평등 문학장르에서 뿐 아니라 연극, 영화등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걸쳐 1930년대 한국문단을 주도하며 좌파문학인의 총수로서 선지자에 비견될 만한 걸출한 능력을 발휘하며 지대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 식민지하 일제치하에서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에 이르기까지 피 바람이 몰아쳤던 격동의 한국근대사에서 문학과 사상과 정치의 전위에 나서 온 몸으로 투쟁하며 치열한 비판의식 속에서 보낸 그의 파란만장했던 짧은 인생역정과 반역과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숙청, 처형당함으로써 끝을 맺게 되는 그의 삶은 비극의 극치요 또 하나의 천재시인 이 상의 삶을 능가한다 하겠다. 그의 삶을 지극히 정치지향적인 문인의 행로로 폄하하는 비판에 대해 식민지하 비참한 민족의 운명을 타계할 현실적 수단과 해방된 신생국가를 이상적 국가로 만들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모색하는 실행과정에서 보여지는 일면으로 본다면 일제말기의 친일전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행동하는 지성, 실천적 지식인이자 탁월한 조직운동가요 혁명가라 평가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는 단지 문학과 예술분야뿐 아니라 현실정치와 시대의 정치사상논쟁에 깊이 관여하여 상당한 역할과 비중을 점하고 있었기에 그를, 그의 저작물을 이해함에 있어 정치적 시대적 역사적 사회성과 연관성을 특히 주목해 고려해야 한다. 이는 당시의 문인은 바로 최고의 지식인이자 정치세력화 할 수 있는 계층이요 조직화된 단체에 가입, 시대상황에 대해 지속적인 논쟁과 작품활동 및 기고를 통한 여론형성과 간접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특히 그가 대표적인 정치문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3. 주요작품
시집 [현해탄(玄海灘)](1938),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 [찬가(讚歌)](1947), [회상시집](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