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야 어찌 되었던지 우군통도사 이성계가 저질렀던 위하도 회군은 1392년 조선시대의 서막이 오릅니다.
권력의 세계에서 욕망은 지켜주는게 가족이라는 명제를 쉽사리 무시하며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1405년 창덕궁을 창건합니다.
623년이란 세월이 짧지는 않다하더라도 조선시대하면 마치 '호랑이 담배피던' 고대로 되돌아간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무관심에서 오는 부작용은 아닐까 싶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해요. 7월 한 달동안 조선시대 다섯개의 궁을 무료로 개방하는 행사는
부작용을 치료 할 수있는 기회 되었답니다.
지하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 창덕궁으로 가다보면 건축가 김수근씨가 지었다고하는 공간사옥이
이채롭게 눈에 들어와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합니다.
공간사옥 바로 옆에 창덕궁 정문 돈화문이 보이고 있어요.
목조로 만든 2층 누각의 돈화문은 1412년 (태종 재위 12) 건립하여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때 만 출입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600년이 지난 현대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아저씨께서 관람객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계십니다.
주권이 국민인 시대에 사는 보람이 새삼스러워요.
돈화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 있는
금천교가 나옵니다.
장마비로 그나마 개울 흉내를 내고있는 금천교를 지나면 인정문으로 들어가는 진선문을 만나게됩니다.
인정문 너머로 왕의 즉위식과 신하의 하례 그리고 외국 사신을 접전했다는 인정전이 보입니다.
2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통증이라고 해요.
왕과 사대부가의 밀당이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조선왕조 굳게 닫힌 여닫이문은 세월의 장막에 가려 깊은
침묵에 빠져듭니다.
선정전으로 가는 선정문입니다.
인정전이 의례때 주로 사용하였던 정전이라면 선정전은 임금님의 집무실인 편전이예요.
1461년 세조는 조계청을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 있는 선정전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고해요.
끝없는 왕위의 권력투쟁 속에서도 1470년 성종에 이르면 체제는 안정적 기반을 만들어 갑니다.
한명회 딸이라면 귀에 익숙해질 성종 왕비 공혜왕후 한씨는 성정원에서 해마다
9월이 되면 8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경노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가 건국이념였던 유교사상에서도 안정을 구축했던 단면같기도해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으로 소실 되었던 선정원을 1647년 인조가 다시 재건하였지만,
규모가 작아서 순조 이후에는 혼전(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되었답니다.
임금이 가장 많이 기거하면서 편전겸 침전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희정당이 드디어 나타났어요.
1496년 연산군은 숭문당을 희정당으로 개명을 합니다.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처럼 책 읽기를 좋아하고 총명하였다고 해요.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청하던 효명세자는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쳤지만
22세의 나이에 희정당에서 승하합니다.
역사에서 만일에라는 가정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봅니다. 총명하고 개혁의지가 강혔던 효명세자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조선왕조가 망하는데 일조를 했던 세도정치도 일망타진하여 일본에게 쉽사리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왕비의 침전였던 대조전으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건물들이 복도를 통해 이어져있어 왕비의 생활공간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는 대조전이예요.
1910년 흥복헌에서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면서 519년 조선왕조의 종말을 고했던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시대의 종말을 고했던 흥복헌의 문은 굳게 닫혔지만 무심하게 쏟아지는 오뉴월 햇살은 눈이 부십니다.
임금께서 편전과 침전으로 사용하던 희정당과 세자의 교육장였던 성정각이 다정하게 머리를 맡대고 있어요.
희정당과 성정각 사이로 왕비께서 생활하는 대조전이 슬며시 모습을 보이기도 하구요.
세자의 교육장였던 성정각이예요.
금수저를 물로 태어났기때문에 존재가치가 특별했던 왕자는 네 살 정도 자란 후에 세자가 됩니다.
열살 쯤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혼인을 하였어요.
시강원에서는 세자 교육을 담당합니다.
하루 세 차례 공부와 독서를 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등으로 수련을 쌓으며
문무를 겸비한 준비된 왕으로 재탄생하였다고 해요.
성정각 뒷편에는 왕의 독서실 집희가 있어요
독서실답게 조용하고 아늑했어요
세자들의 교육장였던 성정각이 나즈막한 언덕위에 있거든요.
성정각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낙선재를 만날 수 있어요.
여덟 살 때 할머니 순현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던 헌종은 할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나봐요.
할머니 순현왕후와 자신이 특별하게 좋아했던 경빈을 위해 낙선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1847년 헌종이 지었던 낙선재입니다.
책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서예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 헌종였기에
추사 김정희가 서예가로 대성할 수 있었을거예요.
낙선재 현판도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라고해요.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던 옹수곤이 평원루라는 현판도 썻다는군요.
단청을 입히지 않아서 일까요.궁궐이란 느낌은 들지 않고 유서 깊은 대 학자집에 와 있는 느낌은 느을 수가 없었어요.
헌종이 경빈 김씨를 위해 만들었다는 석복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 경빈 김씨는 전생에 천사였나봐요.
우리들의 기억속에는 이방자 여사가 생활 하셨던 곳으로 남아 있는 낙선재를 보면 잠시 생각해 봅니다.
왕의 기질보다는 학자의 기질이 더 강하여 자신 만의 공간을 마련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들하고 생활 했던 헌종이 과연 한 나라의 왕으로써 합리적인 방법인가하는.
나즈막한 언덕을 다시 올라 오니 세자들의 교육장 성정각이 보입니다.
성정각 왼쪽으로는 창덕궁 후원이 있고 오른쪽으로 창경궁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은 인원제로 관람을 하기때문에 우선 창경궁을 가보고나서 관람시간에 맞춰
창덕궁 후원을 가면 시간이 절약되는데 일조를 합니다.
창경궁으로 가는 출입문을 나와 돌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게 통명전입니다.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했지만 왕비의 침전이라고해요.
당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왕과 주도권 싸움이 극에 달했던 숙종 때
궁녀 장옥정은 아들 균을 낳고 희빈이 되는 영광(?)을 얻게되는데요.
서인은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하는데 막강한 영양력을 행사했고, 남인은 세자 균을 옹위했다고합니다.
이런 소용돌이속에서 제 정신이 차리고 산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라할지라도
왕비까지 되었던 장옥정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를 통명전 주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통명당이예요.
어느 정도가 진실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구궁 궁궐에서 희빈 장씨의 적나라했던 모습들이
굳게 닫혀있던 통명전의 여닫이 문들이 열리면서 슬며시 엿보는 것같아 회심의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어요.
통명전 바로 아래에는 경춘전이 있습니다.
1483년 성종은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침전이 경춘전이라고합니다.
왕비의 침전이긴하지만 정조와 헌종은 경춘전에서 태어났답니다.
경춘전 옆에는 왕과 세자들이 생활했던 환경전도 있습니다.
경춘전이나 환경전은 창덕궁에 있던 편전이나 침전보다 단출하고 지극히 검소하여
조선시대 왕들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았어요.
경춘전과 환경전 뒤에는 영춘헌이 있어요.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편전과 침전들을 구경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은
정조가 독서실겸 집무실로 사용했다는 영춘헌이예요.
의학실력또한 탁월했던 정조였지만 등에 난 종기로 병을 앓기 시작한지 보름 만에 죽음을 맞이하여
정적 정순왕후의 독살설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라고해요.
정조는 자신의 집무실이자 독서실인 영춘헌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완숙미를 자랑 할 수 있는 나이 49세승하하셨습니다.
영춘헌에 사방으로 굳게 닫힌 문들이 깊은 한숨과 침묵을 강요합니다.
성종은 세 분의 대비 침전으로 창덕궁이 제
역활을 하지 못해 1483년 창경궁을 지었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모두 동궁이라고
불렀어요.
창경궁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건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정궁으로 사용하면서 창경궁은 이궁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물론, 창경궁도 임진왜란 때 서울의 다른 궁궐처럼 소실되었지만
1616년 광해군에 의해
재건되었어요. 이때 재건된 명전전은 현존하는 정전중에 가장
오래된 정전이라고해요.
일본의 통치를 받던 시절에 가장 큰 피해를 많이 당한 곳은 어쩌면 창경궁일지 모릅니다.
궁 안에 있는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1911년 창경원이란 이름의
놀이동산이 되고 말었어요.
특히나 궁궐의 여인들과 공주 왕자들이 생활하던 내전은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숲속에 있는 대온실로 가는 도중에 만난 두리미예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 하수도 구멍에 서 있었어요.
첨단 기계문명이 만개한 현대 서울 한복판 궁궐 안에 두리미가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지만 실제상황였어요.
창경궁 숲속길을 따라 창덕궁 후원을 가기 위해 다시 창덕궁으로 올라왔어요.
매 시간마다 인원제한으로 갈 수 있는 창덕궁 후원을 우리는 흔히 비원이라고 부르는 데
비원은 구한말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던 관청이 비원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후원을 가는 길목입니다.
왕의 정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예요.
나즈막한 언덕을 내려가니 연못과 함께 나타났던 부용지를 보는 순간 너무도 놀랐어요.
마치 숨겨놓은 보석을 보는 듯 화려하게 빛을 내고 있더군요.
사각형 연못을 중심으로 2층 규모에 주합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왔어요.
519년 조선왕조의 르네쌍스는 25대 정조라고 생각해요.
1776년 정조가 창건한 주합루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도서관 규장각이 있고 위층은 열람실과 누마루를 만들었답니다.
주합루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에 쓰여진 현판이 어수문이네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정조의 정치철학이 마음을 사로잡아요.
주합루 동쪽으로 있는 영화당이예요.
왕이 직접 입회하는 특별 과거시험을 치른 장소라고 합니다.
연꽃이란 뜻의 부용정이 보입니다.
부용정은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 해 주었던 정자라고해요.
억불정책으로 유명한 조선왕조지만 왕들은 유난히 연꽃을 좋아했나봐요.
정조도 연꽃의 부용지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숙종은 연꽃을 유난히 좋아했다고해요.
숙종이 지였다는 정자 애련정 이예요.
연꽃은 지고 연잎이 연꽃인양 화려합니다.
애련지 맞은편에 기와 담장 너머로 1827년 효명세자가 지었다는 의두합이 나즈막한 기와담장 너머로 보입니다.
숲속의 작은 집이어서 더욱더 운치가 있어요.
마치 동화속에 주인공처럼.
한 여름 숲속에 있는 정자들이야말로 피서지로는 최상급일거예요.
흐르는 물을 벗삼아 날렵한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과 맞은 편 언덕에 있던 승재정 보입니다.
1644년 인조때 지었다는 존덕정이예요.
특이하게 지붕이 두개로 되어있어요.
정조가 1798년 쓴 '만천명월주인옹'이란 나무판이 존덕정 안 북쪽 지붕에 걸려있다고해요.
'뭇 개울들은 달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하나다'라는 왕권 신수설에 가까운 주장은
사대부가의 밀당에서 선점을 차지하기위한 정조의 강한 의지인듯 싶어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어린나이에 경험하면서 누구보다도 효자였던 정조
활 쏘기에서는 50발 모두 명중 시킬수 있었지만 한 발은 빗나가게 쏘면서
"무엇이든 가득 차면 못 쓰는 것이다"라고 정조실록에서 이야기했던 여유로움이
왕권신수설에 가까운 행동조차도 용서가 되는거죠.
( NaMu가 쓰는 이야기는 창덕궁과 창경궁 안내책자를 보면서 참조하고 요약하여 쓰고 있는 데
창덕궁과 창경궁 안내책자에는 정조이야기가 60%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창덕궁 후원에 와서는)
창덕궁 후원 가장 깊숙한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옥류천이라 부릅니다.
여름비가 그치고 한여름 땡볕은 속살까지 태울 기세지만 숲속에 내려앉는 햇살은 초록빛 천국을 꾸미며
소요정이랑 숨밖꼭질을 하고 있어요.
옥류천에는 1636년 인조는 왕희지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 소요암을 깍아내고 홈을 파서 작은 폭포를 만들어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을 벌였다고하는 소요암 폭포랍니다.
초가지붕에는 초가집이 정답이지만 궁궐 후원에 있는 초가정자에는 단청을 올려 어색하기가 그지 없지만
임금이 농사를 짓는 현장학습장소였던 청의정이예요.
-창덕궁 후원 느티나무-
세월에 흔적을 자신의 몸에 타투로 표현한 느티나무.
한땀한땀 피비린내나는 고난의 역사이기에 감히 건드릴수 없는 위용에 빛이 납니다.
마치 정조처럼
첫댓글 시간이 많지 않아서...충분히 생각하며 쓰지 못한게 첫 번째로 아쉽고
생각하는 것 만큼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사진에 두 번째로 속상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같이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용기를 내어 올려봅니다.
나무님 창경궁 창덕궁 즐거운 나들이 하셨군요~
나무님 덕분에 저도 함께한듯 즐감 했네요 고맙습니다~^^*
아직은...많이 서투른 데 잘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작년에 안내원을 따라 들어갔던 곳이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천천히 글을 읽으며 보니까 새삼스럽네요.
자세한 안내에 감사 드립니다.
초보자라서 많이 서툴러요.
(생각만큼...따라주자 않아서 많이 속상 해 하고
그래요ㅠㅠ)
잘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상세한 설명과 동선에서의 준비함에 감사하고
이런 동행은 참 좋은시간이었으라 믿어집니다
다시 감사 내용에 푹빠져 잘일고 갑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런대로 공부는많이 했군요
역시나 학구파나무님이셔
덕분에 나도 이씨 조선시대를 공부했네요.
오랜만에 함께 가진 시간이 즐거웠어요.
전체적으로 좀더 심도있게 다루지 못한게 아쉬워요.(특히나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한 소현세자와 인조의 관계 명.청과 당파싸움 등등...)
시간이 없으니까 승질 무쟈게 급해 한 번에 후다닥 해 버리는 습관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ㅠㅠ
그러게요.NaMu도요
예쁘게 찍어주신 사진 감사드려요.
나무님 덕분에 후원.... 복습하고갑니다.
증말루여 감사드려요.
잘 지내시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