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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진화는 그 한계를 가늠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쏘고 피하는 일차원적 재미로 시작했지만, 진화를 거듭하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새로운 서사도구로 발전했다.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은 소설 ‘반지의 제왕’을 능가했고, ‘콜오브듀티’의 전투장면은 왠만한 전쟁영화보다 리얼하다. 재미와 이야기를 마음껏 변주하며 영화나 문학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그려나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단순한 이야기 전달 차원을 넘어 시대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단계까지 왔다. 이번에 소개할 [바이오쇼크]는 게임의 진화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게임은 20세기 문명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타락과 각종 사회 부조리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렸다. 그 속에 그려진 사회적 모순과 그를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은 단순히 게임이라고 가볍게 볼 수준이 아이다. [바이오쇼크]를 통해 우리시대 게임의 진화는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보자.
“어릴 적 나는 무엇 하나 내세울게 없는 너드(Nerd)였죠. 방안에 틀어박혀 TRPG에 몰두하고, 마블 코믹스를 탐독하거나, 게임에 빠져 살곤 했었죠. 그때는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죠.”- 바이오쇼크 개발자 켄 레빈 인터뷰 중
[바이오쇼크]를 만든 켄레빈 감독. 이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로 통한다.
[바이오쇼크]를 만든 ‘이래셔널 게임즈’는 ‘블리자드’나 ‘밸브’처럼 국내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외국에선 최고의 게임사로 알려져 있다. 특유의 철학적인 메시지와 혁신적인 게임성은 게임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이오쇼크]는 이래셔널 게임즈의 창업자 켄레빈의 철학과 역사관이 집약된 역작이기도 하다.
뉴저지 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켄레빈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소심한 소년이었다. 학창시절 주변으로부터 왕따에 시달렸던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책을 탐독하거나 소설에 빠져 살았다. 그러던 중 생일선물로 받은 ‘아타리2600’를 통해 게임이란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그 시절 켄은 학창 시절의 우울했던 나날들을 게임을 통해 보상받았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시간이 반복됐다.
29살 늦깎이 개발자 켄레빈이 처음으로 만든 씨프. 도둑을 주인공으로 한 독특한 작품이이다.
청년시절 켄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학교 동아리에서 연극 각본을 맡게 됐다. 심사숙고해 쓴 각본이 예상외로 좋은 반응을 얻자 그는 글쓰기로 진로를 잡았다. 대학교도 드라마 학부를 선택했다. 대학에서도 그는 작가적 재능을 발휘했다. 켄은 학교의 소개로 헐리우드 시나리오 에이전트에 들어가 2편의 영화 각본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당장 짐을 싸들고 헐리우드가 있는 LA로 옮겼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너드’ 출신 작가에게 헐리우드는 새로운 꿈의 도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꿈과 현실은 달랐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헐리우드 제작환경에서 그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펼쳐 보일 수가 없었다. 몇 차례 고배를 마신 후 빈손으로 고향을 향해 짐을 꾸렸다. 뉴욕에 돌아온 그는 직업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루킹글라스 스튜디오’라는 게임사에서 게임 디자이너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취업을 결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켄은 게임개발 경험이 전혀 없는 29세 청년이었다. 영화 다음의 차선책으로 택한 게임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만든 게임들이 대부분 어두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린 것도 우울과 좌절 속에 고뇌했던 청년시절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게임의 소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깊이 있는 게임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 구조나 게임플레이 그런 모든 것들에 깊이를 더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시스템쇼크 프로듀서 워렌스펙터
바이오쇼크의 모태가 된 시스템쇼크. FPS와 RPG를 혼합한 게임성은 당시 시장에 쇼킹 그 자체였다.
루킹글라스 스튜디오는 [울티마 언더월드], [시스템쇼크], [씨프] 같은 독특한 게임들을 만든 게임사다. 켄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씨프]란 1인칭 액션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제목 그대로 도둑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이다. 설정자체가 파격적인데다가, 당시로는 흔치 않은 잠입액션을 도입해 관심을 끌었다. 특히 폭력성이 짙은 기존 FPS와는 달리 적을 죽이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씨프] 프로젝트에 합류한 켄은 훌륭한 선배 개발자들 아래서 게임개발을 익혔다. 회사의 리드 디자이너 ‘더그 처치’는 그의 멘토 역할을 하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켄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시스템쇼크]라는 게임을 만났다. 1994년 발매된 이 게임은 이름 그대로 게임시장에 ‘쇼킹’ 그 자체였다. 겉은 FPS인데 속은 RPG인 복잡한 시스템으로 동시대 FPS와 차별화됐다. 제한된 공간에서 한정된 자원을 사용해 적들과 싸우는 게임방식은 폐쇄적인 사이버 공간의 공포를 극대화 시켰다. 더욱이 당시에는 ‘터미네이터’, ‘에일리언’ 같은 SF공포물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라 게임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시스템쇼크]는 디테일적인 부분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우주선 밖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움직이게 했고, 심지어 게임에 등장하는 감시카메라까지 회전하도록 만들었다. 프로듀서 워렌 스펙터는 “팀원들의 이런 무모함에 질려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 덕분에 게임이 더욱 멋지게 나왔다.”고 말했다. 깊이 있는 스토리와 디테일 한 시스템을 강조한 [시스템쇼크]는 동시대 게임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켄은 [시스템쇼크]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자신의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루킹글라스 스튜디오에서 게임의 가능성을 읽은 켄 레빈은 동료인 ‘조나단 체이’, ‘로버트 퍼미어’와 함께 독립해 나와 조그마한 회사를 창업했다. 이 회사가 바로 [바이오쇼크]를 만든 ‘이레셔널 게임즈’였다. 회사를 차린 그는 루킹글라스 스튜디오에게 게임을 공동제작 하자고 제안했다. 루킹글라스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999년 [바이오쇼크]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시스템쇼크2]가 세상에 나왔다. 사실 켄 레빈은 완전 다른 작품을 만들려고 했으나 루킹글라스의 권유로 [시스템쇼크2]를 만들게 됐다.
1편이 워낙 정교했기 때문에 그대로만 따라해도 충분히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게임엔진도 [씨프] 제작에 쓰인 다크엔진을 사용했고, 아이템이나 보안장치를 해킹해 게임을 풀어나가는 고유의 방식은 그대로다. 이레셔널 게임즈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요소를 첨가했다. 우선 게임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사이버펑크 분위기가 강했던 전작과는 달리, 우주선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의 공포를 강조했다. 방대한 배경스토리와 충격적인 반전 등 스토리의 깊이를 더했다. 캐릭터 성장, 커스터마이즈 같은 RPG적 요소도 강화했다. [시스템쇼크2]는 전작과 완전 다른 게임이 되어 나왔다. 특히, 이 게임은 이후 나올 [바이오쇼크] 시리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레셔널 게임즈는 [시스템쇼크2] 후 얼마간 침체기를 가졌다. 루킹 글라스와 공동 작업한 ‘딮커버’와 신규프로젝트 ‘더 로스트’가 연이어 취소되고, 야심작 [프리덤포스] 또한 실패했다. [프리덤포스]는 미국의 히어로 코믹스를 비튼 내용으로 어릴 적 마블 코믹스에 심취했던 켄레빈의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된 게임이다. 게임성은 좋지만, 주류가 되기는 어려웠다. [프리덤포스] 이후 제작된 [트라이브스: 벤전스], [스와트4]도 그저 그런 평타수준에 그쳤다. 잇다른 실패로 회사가 어려워졌고, 자금이 떨어진 경영진은 회사매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6년 ‘이레셔널 게임즈’는 ‘테이크 투 인터렉티브’의 자회사인 ‘2K 게임즈’에 인수되면서 어느 정도 자금적 여유를 찾았다. 당시 이레셔널은 [시스템쇼크]의 후속작을 만들려 했으나 판권문제가 걸려 포기했다(시스템쇼크 판권은 EA에 있다). 게임이름을 쓸 수 없게 되자 제작진은 새로운 타이틀을 고민했다. [시스템쇼크2]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세계관과 스토리가 완전 다른 새로운 ‘쇼크’시리즈를 기획했다. 천부적인 이야기꾼 켄레빈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게임의 근본부터 하나하나 다시 쌓았다. 2007년 8월, [시스템쇼크]의 정신적 계승자 [바이오쇼크]가 세상에 나왔다. 사람들이 이 기괴하면서도 묘한 마력이 있는 스토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2007년은 게임시장은 그야말로 [바이오쇼크]의 해였다. 처음 PC와 엑스박스용으로 발매되고, 이후 플레이스테이션3용으로 발매됐다. 게임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대체역사’가 적용된 스토리를 채택했다. 대체역사는 SF의 하위 장르로 ‘실제 역사가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 하에 그 뒷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기법이다. 주인공 잭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대서양 한가운데 불시착한다. 바다위에 난파당한 그는 작은 등대를 발견하고 그곳을 통해 수중도시 ‘랩처’로 들어간다. 주인공은 인간의 탐욕이 부른 거대한 재앙, 랩처의 비밀을 밝히고 그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바이오쇼크]에 느낀 첫 인상은 독창적인 미술이다. 배경이나 캐릭터 디자인은 게임의 범주를 넘은 하나의 작품에 가까웠다. 무거운 스토리라인과 그로테스크한 게임디자인은 수중도시 렙처의 참혹한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 게임은 1920~30년대 건축과 풍경, 복식, 음악 등을 사실적으로 고증했다. 특유의 사운드는 공포감을 배가 시켰다. 잡음이 잔뜩 섞인 라디오에서 쉴 세 없이 들리는 목소리, 멀리서 들리는 소녀의 비명소리,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기분 나쁜 금속음 등 폐쇄공간에서 벌어지는 극도의 긴장감을 소리로 묘사했다. 사전지식 없이 시작한 게이머들은 초반에 등장하는 ‘리틀시스터’와 ‘빅대디’의 엽기적 모습에 오금을 저릴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유저들에게 다가서는 접근방식부터가 달랐다. 말초적인 재미보다 깊이 있는 주제로 다가갔다. 킬링 타임용 팝콘무비가 아닌, 심오한 메시지의 예술영화를 감상한 듯한 느낌이다.
게임방식도 독특하다. 액션과 RPG를 접목한 특유의 게임성은 더욱 견고해 졌다. 플레이어는 랩처를 탐험하면서 돈을 모으고, 이 돈을 이용해 탄약, 체력 등을 보충할 수 있다. [시스템쇼크2]처럼 중요한 물건을 해킹해 사용할 수 있으며, 해킹은 퍼즐방식으로 제공된다. 플레이어는 게임상 중요한 아이템인 ‘플라스미드(렙처에 사는 사람들을 타락시킨 물질)’을 이용해 다양한 공격을 할 수 있으며, 과다 사용하면 인간성이 훼손되어 추악한 모습으로 변한다. 멀티엔딩도 도입했다. 간혹 등장하는 ‘리틀시스터’를 살리냐 죽이느냐에 따라 엔딩이 바뀐다. 플레이어의 도덕성이 게임의 스토리를 좌우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요소들로 인해 [바이오쇼크]는 2007년 최고의 게임으로 올랐다. 언론들의 극찬도 이어졌다. 심지어 일부 언론에선 “철학과 심리와 도덕을 탐구할 전적으로 새로운 도구”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예술작품에 비견되는 찬사다. [바이오쇼크]는 올해의 게임상(GOTY)을 휩쓸며 2007년 최고의 게임에 올랐다. 물론 전 세계 300만장이 판매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단순한 흥행을 넘어 게임서사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바이오쇼크]가 가진 의미는 크다.
“리틀 시스터의 ‘악몽’은 본작의 스토리텔링 전반에 걸쳐 드라마틱한 배경이 됩니다. 이 악몽은 랩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한 은유의 구체화입니다.”- 바이오쇼크2 개발사 2K게임즈 개발진 인터뷰(게이머즈 2009년 6월호)
2010년 발매된 [바이오쇼크2]는 ‘이레셔널 게임즈’가 아닌 ‘2K마린’에서 개발했다. 2편은 전작의 10년 후 이야기를 다루었다. 주인공도 바뀌었다. 전작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빅 대디’가 이번편에선 주인공이다. ‘빅 대디’는 리틀 시스터를 보호하는 역할로 등장하며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는 전작을 능가한다. 2편은 켄 레빈 등 1편의 주요제작자가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선지 1편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인공이 달라지고 그래픽이 좀 더 보강된 점을 빼면 전작과 비슷한 수준이다.
원작자가 빠진 상태여서 스토리의 얼개도 촘촘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억지로 늘린 감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시리즈를 완결하는 결정적인 단서도 없이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러면서도 게임의 볼륨은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일부에선 정식 후속 작이라기보다 1편의 확장팩, 혹은 보완작품이라고 평가절하 하기도 했다. 멀티플레이모드가 추가되어 팬들에게는 그나마 위안을 주었다. [바이오쇼크2]를 통해 ‘빅대디’와 ‘리틀시스터’라는 기괴한 모습의 캐릭터는 플레이어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후 이들은 바이오쇼크 시리즈를 상징하는 대표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전적으로 1편과 비교했을 때이지, 게임 자체로 평가하면 충분히 호평을 받을 만 했다. 폐쇄 공간 렙처에서 벌어지는 악몽은 더욱 실감나게 표현됐고, 연출 또한 업그레이드 됐다. 툭하면 길을 헤매기 쉬웠던 전작의 복잡한 맵 구조를 개선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난이도를 개선했다. [바이오쇼크2]는 ‘형 만한 아우가 없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지만, 또래 동료들에 비해선 발군의 게임으로 인정받았다. 한편, [바이오쇼크2]가 시장에 나오는 동안, 이레셔널 원 제작자들은 또 다른 공간의 ‘바이오쇼크’를 기획하고 있었다. 수중세계가 아닌 공중도시를 배경으로 한 [바이오쇼크: 인피니티]였다.
“원래부터 바이오쇼크 시리즈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멋진 디자인으로 잘 표현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이 시리즈가 명작으로 대우받고 있는 이유는 스토리를 꾸미는 소재를 고르는 능력에 있다”- 게이머즈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리뷰 중
2013년, 이레셔널게임즈는 시리즈 3편 겪인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출시했다. 사설탐정인 주인공 부커드윗은 엘리자베스란 여인을 찾기 위해 공중도시 콜롬비아로 향한다. 그는 도시에 얽힌 음모를 파헤치고, 엘리자베스와 함께 그곳을 탈출해야 한다. 주인공이 우연한 사건으로 낯선 도시로 들어간다는 스토리구성은 전작과 비슷하지만, 게임의 소재는 180도 달라졌다. 1, 2편이 해저도시 랩처를 배경으로 했다면, 인피니트는 공중도시 ‘콜럼비아’가 무대다. 폐쇄적인 해저터널 대신, 탁 트인 창공을 바탕으로 시원한 공중액션이 펼쳐진다. 특히 케이블카처럼 연결된 스카이라인을 타고 번지점프를 하듯 하늘로 비상하는 장면은 이 게임의 백미다.
원작자 켄레빈이 직접 만든 만큼 언론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좋았다. 그러나 게임의 변화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리즈 특유의 깊이 있는 스토리는 여전하지만, 전작과 연결지점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전작에서 풀리지 않은 사건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후속 작을 기대한 팬들을 애타게 했다.
이 게임은 전투부분에서 호불호가 갈렸다. 전작은 창의적인 전투방식을 버리고 [콜오브듀티]처럼 총격전 위주의 전투로 회귀한 부분은 마니아들의 아쉬움을 남겼다. 스토리 부분도 논란이 많았다. 시리즈 마니아들은 전작을 능가하는 치밀한 복선과 복잡한 배경지식에 열광했다. 반대로 중반으로 갈수록 설정이 꼬여있어 도무지 내용을 알 수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게임은 양자역학과 다세계 해석, 평행우주론 등 전문적 과학이론까지 끌어 들여 이야기를 꼬아놨다(물론 몰라도 게임하는데 지장은 없다. [인피니트]는 게임방식은 편해진 대신, 그 내면을 관통하는 이야기 구조는 더욱 복잡해 졌다. 이야기의 밀도를 위해 멀티엔딩과 멀티플레이모드를 도입하지 않았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는 출시 후 약 2억달러(5,338억원)의 매출을 올려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번 DLC버전은 팬들에게 보내는 저의 러브레터와도 같습니다.”- 바이오쇼크 개발자 켄레빈(게임스팟 인터뷰 중)
제작사도 이런 반응을 고려해 다음 시리즈 부터는 게임의 방향을 새롭게 틀었다. 추가로 판매된 다운로드콘텐츠(DLC) ‘바다의 무덤’은 게임의 무대를 다시 수중도시 렙처로 되돌렸다. [바이오쇼크] 1편 이전의 시기를 다룬, 일종의 프리퀼 개념이다. 평화롭던 렙처가 어떻게 지옥이 되어 가는지,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미쳐 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제작자는 이 작품에 평행우주론을 도입해 시리즈 전체의 이야기의 얼개를 꿰어 맞췄다. 예를 들어 인피니트의 주인공 부커와 엘리자베스가 이번 시리즈에선 전혀 다른 인물로 나오는데, 이는 평행우주론을 근거로 렙처와 콜롬비아가 서로 개입되는 현상이라 설명하고 있다. 물론 DLC버전도 플레이어들에게 고민거리를 한가득 안겨주었다. 아무래도 가볍게 게임을 즐기기에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의식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이오쇼크] 시리즈는 ‘바다의 무덤 에피소드2’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비록 스토리를 맞추기 위해 여러 군데 무리수를 두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한편, 2014년 2월 이레셔널 게임즈는 바이오쇼크 시리즈를 마무리 하면서 돌연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0명 이상의 개발자 중 15명만 남기고 모두 정리 해고한 것이다. 켄레빈은 “차기작으로 완전히 다른 게임을 만들 것이다. 새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평적인 구조의 팀을 만들고 게이머들과 직접 교류할 필요가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바이오쇼크] 시리즈는 2편을 개발한 2K게임즈가 이어받았다. 켄레빈은 [바이오쇼크] 시리즈를 완결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새 게임을 구상중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흘린 땀의 대가를 주장할 수 없는가? 워싱턴 사람들은 말한다. ‘없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바티칸 사람들은 말한다.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말한다. ‘없다, 그것은 모두의 것이다’ 나는 대답을 거부했다. 나는 불가능을 선택했다. 예술가가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시, 과학자들이 사소한 윤리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도시, 위대한 이들이 사소한 것에 제약 받지 않는 도시… 자신을 위해 흘릴 땀이 있다면 랩처는 언제라도 당신을 환영한다."- 바이오쇼크 등장인물 앤드류 라이언의 대사
[바이오쇼크]는 시리즈마다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의식을 던져준다. 1편은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가져온 신자유주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1편의 배경이 되는 수중도시 렙처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도시다. 렙처를 만든 ‘앤드류 라이언’은 게임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하다. 2차 대전 후, 소련의 공산주의와 미국의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낀 그는 대서양 한가운데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도시를 건설한다.
그가 구상한 사회는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방임주의 국가다. 라이언은 라디오(언론)와 광고를 통해 통제 없는 자유주의가 새로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 역설했다. 그렇게 창조된 렙처라는 도시에 수많은 계층들이 몰려들었다. 자본가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과학자는 윤리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 예술가는 검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국가를 구현했다.
하지만 자유방임 국가의 결과는 비극이었다. 부의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결국 사회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극단적 대립으로 좁혀졌다. 이들의 갈등은 결국 렙처를 끔찍한 디스토피아로 만들었다. 게임은 모든 것을 개인의 자유의지에 맡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비판한다. 소름끼치는 부분은 게임에서 벌어진 온갖 참상들이 단지 게임 속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 시작한 신자유주의 운동은 소수 이익집단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가능한 많은 분야에서 사회를 지배하도록 만든 장치로 변질됐다. 2009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는 이런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 금융위기, 사회 양극화, FTA, 민영화 논란 등도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에 근간을 두고 있다.
“랩처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도시야. 이미 저들은 결실 없는 경쟁의 연속으로 지쳐가고 있거든. 그런 점에서 라이언은 놀랄 만큼 순진한 사람이지. 개개인이 얼마나 영리한가는 중요하지 않아. 모두 자아의 노예일 뿐이라구. 진화의 위대한 사슬을 이끌지 못하고 거기에 얽매여 있거든.”- 바이오쇼크2 등장인물 소피아 램의 대사들
[바이오쇼크2]는 1편의 10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2편의 주제는 다르다. 자유주의를 주장하던 앤드류라이언이 죽고, 이번엔 ‘소피아램’이란 과학자가 렙처의 새 지배자가 됐다. 그녀는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전체주의적 사상을 통해 국가를 지배하려 한다. 개개인은 사회를 움직이는 톱니바퀴일 뿐 어떠한 사유와 개인적 감정도 금지하는 시대가 됐다.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지성에 따라 모든 것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논리다. 그녀는 집단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사람의 뇌를 세뇌해 최소한의 감정마저 거세해 버린다. 1편이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한 신자유주의를 비판했다면, 2편은 집단주의적인 파시즘을 풍자했다. 게임에서 미쳐 날뛰는 시민들은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쓸린 대중을 은유한다. [바이오쇼크2]는 전체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조지오웰의 소설 ‘1984’를 참고했다고 한다. 실제 게임의 주인공 ‘빅대디’는 소설에서 얼굴 없는 독재자로 나오는 ‘빅브라더’와 비슷하다.
“TV속에서 월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게임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부수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대립은 게임 속 상황과 늘 비슷하죠.”- 이레셔널 게임즈 켄 레빈(바이오쇼크 인피니트 제작 전 인터뷰 중)
시리즈 3편 겪인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는 대놓고 미국의 불편한 속살을 드러냈다. 게임의 배경인 공중도시 콜롬비아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1900년대, 미국은 자국의 힘과 영향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공중도시 콜롬비아를 건설한다. 콜롬비아는 전 세계하늘을 비행하며 여러 나라의 이주민들을 받아 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콜롬비아에선 극심한 외국인혐오주의가 팽배해 졌다. 지배계층은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고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분리정책이 시작됐다. 유색인종들은 빈민가에 살면서 노역을 하게 되고, 그 위에서 백인은 호위 호식한다. 게임 초반 보여지는 공중도시의 평화스러운 일상은 빈민가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얻은 것이었다. 지배자는 거짓선동과 잘못된 정보로 권력을 유지했고, 사람들은 아무 비판적 사고 없이 믿었다.
그러던 중 빈민가 어느 공장지대에서 화재가 일어나면서 파국이 시작됐다. 지배층은 화재가 난 지역을 지상으로 떨어뜨려 버리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었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쌓였던 빈민층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콜롬비아 전역에 내전이 발발한다. 분노한 빈민층 노동자들이 백인 지배층을 공격하는 장면은 2011년 미국을 강타했던 월가 점거 시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인피니트]는 국수주의, 인종차별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더 나아가 미국보수 세력들의 맹목적인 애국주의까지… 미국의 맨얼굴을 그대로 까발렸다.
[바이오쇼크]는 여러모로 불편한 게임이다. 화면 가득 피갑 칠을 해대는 엽기적 장면과 기괴한 캐릭터들은 웬만한 인내력으로는 견디기 힘들다. 폐쇄공간 속에서 점점 미쳐가는 세상은 한편의 지옥도를 연상시킨다. 특히 아동학대를 연상시키는 ‘리틀시스터’의 설정은 미국에서도 논란이 됐다(기획단계의 리틀시스터는 더 끔찍하게 묘사됐지만 발매직전에 수정됐다고 한다). 스토리는 관련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지도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꼬여있다. 그 많은 대사를 꼼꼼히 읽어봐야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여기 저기 복선을 숨겨두고 끊임없이 플레이어를 뇌를 혹사시킨다. 액션자체도 [콜오브듀티]나 [헤일로] 같은 게임에 비하면 밋밋한 수준이다. 가볍게 게임 한판 하기 에는 불편한 게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이 불친절한 게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바이오쇼크]는 우리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단순히 권선징악적인 내용이 아니다. 세계대전의 비극을 가져온 전체주의, 세계 경제를 붕괴시킨 신자유주의, 빈부격차, 집단이기주의, 인종차별주의, 종교 갈등 등 지금 인류가 처해있는 고민에 진지하게 물음을 던진다. 게임이 불편한 이유는 끔찍한 화면과 복잡한 스토리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엔딩을 본 후에도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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