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전통가옥구조 ‘마구간’에 얽힌 사연
(작성중 : 가옥구조 시리즈 4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전통가옥에는 ‘마구(馬廐)’ 또는 ‘마구간(馬廐間)’이라는 칸이 있다. '마구깐' 또는 ‘소마구깐’이라고도 하는데, 표준어로 ‘외양간’이라는 곳이다.
부잣집의 경우 문간채 ‘머슴방’ 옆에 주로 위치하고, 초가삼간의 경우 아래채 ‘사랑방’ 옆에 위치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농가(農家)의 창고나 헛간 등지에 설치하여 말과 소를 사육(飼育)하기도 한다.
이는 농촌에서 말과 소가 중요한 가산(家産)이므로 가까운 곳에 두어 건강상태(健康狀態) 등을 돌볼 수 있도록 관리하기 위해서다. “마구로 치우고 ‘마꺼불’로 새로 쫌 깔아 조라”라는 용례가 있다. “외양간을 치우고 북데기를 새로 좀 깔아주어라”라는 말이다.
마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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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은 흔히 ‘구’자 밑에 ‘ㅅ’ 받침을 써서 ‘마굿간’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이 맞는 표기법이다. 그리고 ‘마구간(馬廐間)’ 이라는 말은 ‘마구(馬廐)’라는 한자어에 ‘사이 간(間)’자가 붙어서 된 순수한 한자어이다.
현행 맞춤법 규정에서 순수 한자어(漢字語)가운데 ‘사이시옷’을 쓰는 단어는 ‘곳간(庫間), 셋방(貰房), 숫자(數字), 찻간(車間), 툇간(退間), 횟수(回數)’ 6개밖에 없다.
‘마구간’은 이 6개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이 맞춤법에 맞는 표기형태(表記形態)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하에서는 표준어(標準語)인 ‘외양간’으로 통일한다.
그 시절 마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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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典型的)인 농촌에서는 집 밖에 ‘외양간’을 만들어 소나 말을 사육(飼育)하는 일도 있었으나, 대부분 아래채에 붙은 창고(倉庫)나 ‘헛간’ 같은 곳에 ‘외양간’을 설치하였다.
‘외양간’은 짚을 깔아주어 말과 소가 밟게 함으로써 농업용(農業用)의 퇴비를 만드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파리가 많이 생기고 불결(不潔)하였으나, 말과 소는 농촌에서 중요한 가산(家産)이며 농경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가까운 곳에 두고 성질(性質)이나 건강상태를 돌보기 위해 ‘외양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외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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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농가(農家)에서는 소를 가족처럼 대접하기도 했었다. 1년 중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면 오곡잡곡밥과 찬으로 말과 소에게도 ‘상차림’을 해 주는 관습(慣習)이 있었고, 키우던 말과 소가 병사(病死)하는 일이 생기면, 귀신(鬼神)이 들었다고 하여 굿을 지내기도 했었다.
서남부(西南部) 지방에서는 ‘오양간’이라 하고, 제주도(濟州道)에서는 ‘쇠막’ 또는 ‘쇠왕’이라고 하며, 강원도와 경상도(慶尙道) 지방에서는 주로 ‘마구간’ 또는 ‘소마구깐’이라고 한다.
마구간
소를 두는 공간(空間)임에도 불구하고 ‘마구(馬廐)’ 또는 ‘마구간(馬廐間)’이라 부르는 것은 옛적에 말을 키울 때 부르던 명칭(名稱)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리고 ‘외양간’은 한자어(漢字語)에 해당한다. ‘외’자는 웬만한 사전에는 없는 입구(口) 부수에 두려워할 외(畏)자가 붙은 글자로 ‘두려워하다, 치다, 기르다’라는 뜻이 있다.
‘양’은 물론 ‘養(기를 양)’이고 ‘간’은 ‘間’이다. 결론적으로 ‘외양간’은 ‘치고 기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한자로 쓸 때는 ‘口畏養間(외양간)’이라고 쓴다.
‘외양’의 용례에는 把這匹官馬, 牽回口畏養.<桃花扇, 歸山>. 驛遞專有口畏養馬夫.<福惠全書, 郵政部, 口畏養> 등이 있다. 단 ‘외’자는 ‘口畏’로 썼는데, 글자를 얼핏 보면, 두 글자처럼 보이지만 한 글자이다. 따라서 이를 ‘구외(口畏)’로 읽으면 안되고, 그냥 ‘외’라고 발음(發音)해야 한다.
지금의 마구간(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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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와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규모가 작은 집일 경우, ‘외양간’은 외채집을 제외하고는 사랑채 혹은 행랑채에 두는데, 대개 부엌 또는 불 때는 아궁이와 가까운 쪽에 둔다.
규모가 큰 집인 경우는 부속사(附屬舍)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속사란 일종의 바깥채로서 여기에 잿간·돼지우리·헛간 등을 함께 설치하여 만든 간단한 구조물(構造物)이다.
강원도(江原道) 지방에서의 외양간은 태백산맥(太白山脈) 줄기를 따라서 분포하는 외채집일 경우는 대개 안채의 부엌에 설치하며, 쌍채집에서는 행랑채에 배치(配置)한다.
외양간
‘안채’에 배치(配置)하는 경우에는 부엌의 앞쪽에 ‘ㄱ’자 모양으로 꺾어지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며, 부엌의 아래쪽에 ‘一’자 모양으로 설치(設置)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 경우는 ‘쇠죽’을 쑤어 먹이고, 소를 돌보는 일을 주부(主婦)가 주로 담당한다.
‘여물(쇠죽)’을 먹이는 ‘구유’는 부엌 쪽에 두어서 부엌에서 ‘쇠죽’ 등 먹이를 바로 줄 수 있도록 하고, ‘여물’도 직접 부엌에서 끓이게 하여 겨울철 소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주부가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게 한다. ‘외양간’의 바닥은 부엌 바닥보다 낮게 경사(傾斜)지게 만들어 소의 오물(汚物)이 부엌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 없도록 한다.
외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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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채’ 또는 ‘행랑채’에 설치하는 경우에는 ‘문간채’ 또는 ‘행랑채’ 중앙의 대문간 옆에 붙여서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외양간’의 평면구조(平面構造)는 대개 두 면은 막히고, 한 면은 출입을 위한 출입구(出入口)를 제외하고는 간단한 짚 등으로 가렸으며, 다른 한 면은 개방(開放)하여 이곳에 통나무로 만든 구유를 놓아 먹이를 줄 수 있게 하였다.
바닥은 흙바닥이며, 이 위에 짚이나 보리 짚 등을 깔아놓는다. 이 짚에 소가 배설(排泄)한 오물로 더러워지면, 마당의 두엄터에 쌓아 숙성(熟成)시킨 후 논밭의 거름(퇴비)으로 이용한다.
외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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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여물’을 좀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알아본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외양간’의 구조를 조금 더 알아봐야한다. 지방(地方)에 따라서 ‘쇠죽’을 끓여주는 구조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외양간’은 대개가 사랑방 곁에 붙어있다.
‘쇠죽’만 끓이는 가마솥이 걸린 부엌을 가운데 두고, 이쪽은 사랑방, 저쪽은 ‘외양간’이다. ‘외양간’과 부엌은 ‘구유’를 경계선(境界線)으로 해서 막힘이 없이 툭 터져 있다고 보면 된다.
쇠죽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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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구유’는 ‘여물’이나 ‘쇠죽’을 담아주는 소의 먹이통을 말한다. 그리고 ‘외양간’ 부엌에는 가마솥을 경계선(境界線)으로 해서 안쪽에는 장작을 쌓아놓는 ‘나무청(땔나무를 쌓아놓는 곳)’이 있고, 바깥쪽에는 ‘여물’을 쌓아놓는 ‘여물청’이 있다.
‘여물청’에는 ‘작두’가 놓여 있는데, 한약방에서 한약재(韓藥材)를 써는 작두 보다 대여섯 배나 더 큰 작두인데, 한 사람은 천장에서 내려뜨려진 줄을 잡고 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작두를 밟고, 다른 한 사람은 ‘여물’이 되는 재료(材料)를 작두날에 먹인다.
작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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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볏짚도 싹뚝싹뚝, 조짚도 싹뚝싹뚝, 마른 고구마 덩굴도, 콩깍지도 싹뚝싹뚝, 이렇게 해서 손가락 길이 만하게 썰어진 것이 ‘여물’이고, 이것을 가마솥에 넣어 ‘쌀겨’나 ‘당가리(고운 보리등겨)’를 넣어 물을 붓고 끓여내면 ‘쇠죽’이 된다.
그리고 ‘외양간’ 부엌앞 쪽에는 ‘구정물통’이라고 하는 큼직한 그릇이나 항아리가 놓여 있다. ‘안채’의 부엌에서 사용한 온갖 허드렛물과 각종 음식(飮食) 찌꺼기가 거기에 담겨지게 된다.
‘쇠죽’을 끓일 때에는 맹물로 끓이는 게 아니고 바로 이 ‘구정물’을 넣어서 끓이게 된다. 물론 지금과 같이 ‘퐁퐁’이나 ‘순샘’ 등 세척제(洗滌劑)로 설거지를 한 ‘구정물’은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외양간
어쨌든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람에게는 비록 먹을 수 없는 ‘구정물’이지만, 당시의 경우 소에게는 밥찌꺼기 등이 섞인 ‘구정물’로 ‘쇠죽’을 쑤면, 영양가(營養價) 만점의 영양식이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권장할 조리방식(調理方式)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웰빙식’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구정물’은 쌀 씻어낸 쌀뜨물에 밥찌꺼기, 삶은 고구마나 감자 껍질 등이 섞인 것으로 당시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영양가(營養價)가 대단했고, 또 간을 따로 맞출 필요도 없었다.
쇠죽 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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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정물’ 한 동이를 커다란 ‘쇠죽’ 가마솥에 콸콸콸 붓고 ‘여물’을 꾹꾹 눌러 담고 나서 끓여내면 ‘쇠죽’이 되는데, 거기에 양념으로 쌀겨나 ‘당가리(고운 보리등겨)’라도 두어 바가지 섞어 넣어주면, 한 끼 식사로는 영양만점(營養滿點)인 ‘쇠죽’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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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간’의 방언형(方言形)으로는 ‘외양(간)’계, ‘마구(간)’계, ‘쉐막’계가 있다. 전체적(全體的)으로 보면 대체로 태백산맥-소백산맥-노령산맥을 경계로 하여 ‘외양(간)’계와 ‘마구(간)’계가 지리적(地理的)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대비(對比)하면 아래 표와 같다.
계 열 |
주 방언 |
준 방언 |
주 사용지역 |
외양(간)계 |
외양깐, 웨양깐, 외앙깐, (쇠)왱깐 |
오양(소오양), 오양깐(소오양깐) |
경기 전역, 충남북 전역, 전북 전역, 전남 북부의 영광, 장성, 담양, 곡성, 함평, 신안, 진도 및 강원도의 춘성, 원주 등지 |
마구(간)계 |
마구(소마구, 쇠마구, 세마구), 마구깐(소마구깐), 마구창(소마구창) |
마방깐 |
위 지역의 동부지역(경남북, 부산, 대구, 울산 등지) |
쉐막 계 |
쉐막, 쉐집, 쉐왕, 허청 |
|
제주도 및 전남 완도에서 쓰이는 방언 |
외양간
‘외양간’이라는 말의 ‘외양’은 중세어(中世語)에서는 ‘오양(馬廐)’이었고, 그 뒤 근대국어(近代國語)에서는 ‘오희양․오향․외향’과 ‘오양․외양’ 등이었다. 대체로 ‘오양>오향․외향>오양․외양’의 변화를 거쳤고, 때로 축약형(縮約形) ‘왱(깐)’으로까지 변화하기도 하였다.
그 의미도 소에만 한정(限定)되지 않고 말이나 양 등도 거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말(馬)의 경우에 한자어로는 ‘馬房(마방)’이라 했는데, 경기 이천 지역의 ‘마방깐’이 이를 이은 방언형(方言形)이다.
그 시절 마구간(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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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외양간’을 의미하는 ‘마구(馬廐)’는 근대국어(近代國語)에서 보이는데, 변화를 입음이 없이 쓰이고 있는 셈이다. ‘마구’가 원래 한자어(漢字語)였었는지는 증명하기 어렵다.
제주도(濟州道)에서 ‘외양간’의 의미로 쓰이는 ‘쉐막’, ‘쉐집’은 각각 ‘소+의 막’과 ‘소+의 집’으로부터 형성(形成)된 것임은 물론이다. ‘소집’은 경남 남해(南海地域)지역에서 때로 ‘소마구형’과 함께 쓰이는 방언형이다. 전남 완도에서 쓰이는 ‘허청’은 ‘헛간’의 대체어(代替語)로 보인다.
외양간
옛적 양반사회에서는 ‘외양간’을 훈육(訓育)의 장소로 상징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 어느 선비가 지은 시조(時調)에서는 ‘외양간’이 인간의 품성(品性)이나 도덕(道德) 따위를 가르쳐 기르기 위한 교훈의 장으로 보고 있다. 시조를 소개한다.
외양간 쓸고 닦고 거름통 치웠거늘
‘외양간’ 쓸고 닦고 거름통 치웠거늘
코뚜레 빠진 것도 내 탓에 매타작이요.
중뿔난 송아지다요 낸들 어이 알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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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時調)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은 위에서 말한 대로 품성(品性)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쳐 기르기 위한 교훈에 초점(焦點)을 두고 있으며, “자식 그릇 됨은 보지 못하고 애꿎은 머슴만 탓 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본문의 ‘코뚜레’는 송아지가 ‘중 소’가 되면 코청을 꿰뚫어 끼는 나무고리를 말하고, ‘중뿔난’이라는 말은 ‘하는 일이나 모양이 유별(有別)나거나 엉뚱하다’는 뜻이다.
코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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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시인(詩人)들은 또 ‘외양간’을 사람의 마음으로 표현하기도 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외양간’보다는 그 ‘외양간’에 메어져 있는 ‘일 잘 하는 소’를 지칭(指稱)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조를 소개한다.
가슴 한 켠 외양간에
가슴 한 켠 ‘외양간’에 일 잘 하는 소 한 마리
논 밭 갈일 없는 터에 되새김 질 허허(虛虛)하네
나목(裸木)은 나이테 따라 물소리 은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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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몇 해 전 92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고모님을 선산에 안장(安葬)해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고모님 집이 된 옛 할아버지 댁에 들렀다. 필자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다.
65년 여 전 얼키설키 얽혀 있었던 돌담은 높은 시멘트 벽돌담으로 바뀌어 있었고, 솔가지나 싸리나무로 엮은 사립문 대신 무거운 철문(鐵門)이 달려 있었다.
시골집 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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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님이 연로하셔서 수족(手足)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부터 마당에는 잡초(雜草)가 웃자라 있었다.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머슴이 산에서 뽑아 와서 심었다는 ‘엉게나무’는 죽어 가는지 잎 대신 가시만 무성했고, 그렇게 많이 열리던 우물가 앵두나무도 잎만 무성(茂盛)하고 열매가 없었다.
채소(菜蔬)도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더니 나무도 인기척이 있어야 생기를 얻고 열매를 맺는 것인가. 모두들 울산공단(蔚山工團)으로 몰려 간 탓으로 무엇 하나 정상(正常)인 것이 없었다.
엉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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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은 저절로 ‘외양간’으로 향했다. 썩어서 맞지 않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린 시절 정들었던 ‘외양간’은 완전히 폐가(廢家)가 되어 있었다.
고모님께서 작고(作故)하시기 이태 전에 들렸을 때는 야윈 암소 한 마리가 있었으나, 이때는 그 암소마저 종적(縱笛)을 감추고 없었다. 쇠약하신 고모님께서 전혀 손을 쓸 수 없어 처분했다는 것이다.
‘외양간’은 가는 거미줄이 겹겹이 쳐져 있었고, 녹슨 가마솥은 비스듬히 얹혀 있었다. 오래 전에 식어버린 아궁이는 굶주린 채 입을 쫙 벌리고 있었고, 소가 누워 있던 그 자리에는 비료(肥料)가 담긴 비닐포대가 쌓여 있었다. ‘소여물’을 주는 ‘구유’는 썩어 내려앉아 있었다.
마구간 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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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린 시절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철에 이 ‘외양간’은 우리들에게 있어 얼마나 아늑한 곳이었던가! 이웃집 누이들의 어린 시절 추억(追憶)의 중심이 정지간(부엌)이라면, ‘외양간’이야말로 우리들의 유년시절(幼年時節)에 형성된 추억(追憶)의 중심이자 허브(hub)였다.
‘외양간’에 소를 집어넣으면 소는 배가 고프다고 ‘음메 음메’ 하고 울거나, 머리로 벽을 쿵쿵 뜸배질(뿔로 박는 짓)을 했다. 그러면 우리들은 부랴부랴 ‘여물’을 쏟아 붓고, 등겨와 콩깍지, ‘구정물’을 소물솥(소죽을 끓이는 솥)에 가득 넣고 부어 소죽(쇠죽)을 끓인다.
처음에는 소나무 ‘갈비(솔잎 마른 것)’로 헛불을 지핀 뒤에 가는 솔가지를 던져 넣어 점점 화력(火力)을 키운다. 불기운이 세어지면 마지막으로 까디(그루터기 나무)와 팬 장작을 넣어 활활 타오르는 화마대왕(火魔大王)으로 만든다.
쇠죽 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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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불은 ‘소물솥’의 밑바닥을 새된 소리를 내며 달구다 끝 모를 깊은 동굴인 ‘방고래’로 빨려 들어간다. 신나게 활활 타오르는 불을 신데렐라의 흥겨운 무도회(舞蹈會)라고 한다면, 재속에 묻혀 있는 빠알간 불씨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公主)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삽으로 재속에 묻힌 예쁘고 고운 알불을 건져 화로(火爐)에 담아내고, 남은 불씨에는 감자와 고구마, 그리고 뒷산에서 주워온 ‘밤’을 묻어 둔다. 껍질만 시커멓게 타고 속은 덜 익은 감자와 고구마라도 왜 그리 맛이 있었던지,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쇠죽솥 알불에 구운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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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집을 내지 않은 ‘밤’을 한 주먹 불속에 집어넣었다가 폭발(爆發)하는 바람에 불티를 뒤집어쓰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일도 이제는 영원히 복원(復原)할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쇠죽’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은 ‘소’는 고드름처럼 긴 침을 흘리며 ‘움머’‘움머’라며 울어댄다. 소디베이(솥뚜껑)를 열고 자루가 달린 나무바가지로 ‘쇠죽’을 퍼 ‘구유’에 담으면, ‘소’는 코로 투루루투루루 투레질을 하며 김이 펄펄 나는 ‘쇠죽’을 고개를 돌려가며 부지런히 먹는다.
쇠죽솥 알불에 구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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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도 냄새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짚여물을 푹 삶은 소죽냄새를 구수하게 느끼는 사람은 진짜 농촌(農村) 사람, 푹 삭은 똥거름 냄새조차도 구수한 냄새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짜 농부(農夫)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미(韓美) FTA 체결 이후 소 값은 폭락(暴落)하고, 소 먹이는 농가(農家)가 줄어들고 있다. 빈 ‘외양간’에는 농민(農民)들의 시름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고, 농촌(農村)의 삶은 빈 가마솥처럼 녹슬어 있다.
쇠죽 먹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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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農夫)의 주름살이 펴지고 ‘외양간’에 소의 워낭소리가 다시 들릴 날은 언제일까. 세월에 말라 비틀어져 삐걱거리는 추억의 ‘외양간’ 나무문을 억지로 밀어 닿고 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소도 사람도 모두 떠난 ‘외양간’은 이제 더 이상 존재가치(存在價値)가 없어진 것 같았다.
여기에서 잠시 위에서 말한 ‘구유’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보탤까 한다. 애초 ‘구유’는 말이나 소의 먹이통이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자귀로 쪼아 배를 만들 듯 속을 파서 말과 소의 밥통을 만든 것이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이 ‘구유’를 ‘귀이’ 또는 ‘소귀이’라고 불렀다.
외동읍 ‘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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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시골에 집집마다 ‘구유’가 있었다. 당장 소가 없어도 언제 소가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기에 아래채 부엌 옆에 작은 ‘외양간’을 만들고 거기에 ‘구유’를 놓아두는 것이다.
필자들이 어릴 때는 여름철마다 소꼴을 베어 수시로 ‘구유’를 채워주었고, 풀이 시들어 꼴이 없는 가을과 겨울에는 가마솥에 여물을 끓여 ‘구유’ 가득 퍼주었다. 그리고 한 겨울에는 틈틈이 짚단을 풀어 간식(間食)으로 담아주기도 했었다.
간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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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구유’가 이제 시골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축사(畜舍)마다 철판(鐵板)으로 만든 ‘구유’를 쓰거나, 시멘트로 만든 ‘구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절 그 ‘구유’들은 이제 도시(都市)로 나와 제법 모양을 갖추고 사는 집 거실(居室)의 유리 탁자 받침을 하거나, 큰 음식점의 장식품(裝飾品) 노릇을 하거나, 식탁(食卓) 받침 노릇을 하고 있다.
야외에서 쇠죽먹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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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구유’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내 일거리인 것 같아 지겨운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구유’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 ‘구유’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없어지고,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것이 ‘구유’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집에 가야만, ‘구유’를 볼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가끔 부유한 사람들의 응접실(應接室)에서 진열된 ‘구유’를 볼 때는 어린 시절의 삶과 추억들이 모욕(侮辱)을 받는 것 같아 싫어지기도 한다.
하긴 인류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였지만, ‘마구간’의 ‘구유’에서 탄생(誕生)하셨으니까 그 일을 기리는 뜻에서 부유층에서 장식품(裝飾品)으로 비치할 수는 있겠으나, 막상 그 ‘구유’를 비치(備置)하고 있는 가정들은 거의가 비기독교 가정들이다.
장식품 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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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聖堂)이나 신도의 경우는 이 ‘구유’를 조각품으로 만들어 성탄절(聖誕節)을 기리거나 경배하는 신앙행위(信仰行爲)의 대상물로 활용(活用)하고도 있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誕生)한 장소인 ‘구유’는 원래 아주 보잘 것 없는 ‘말구유’였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 뜻을 기념하기 위해 각 나라의 전통과 풍습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장난감 ‘구유’를 제작해오고 있다.
이 장난감 ‘구유’는 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교회(敎會) 동굴 앞에 처음으로 ‘말구유’를 만들어 공개하면서 유래(由來)되었다.
구유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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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란치스코 성인(聖人)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과 궁핍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었고, 교황(敎皇)의 허락을 받은 다음 장남감 ‘구유’를 만들고 소와 나귀를 아기예수 옆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성당(聖堂)이나 로마 가톨릭 신자의 가정에서는 ‘말구유’를 만들고 공경(恭敬)하는 ‘구유 신심’이 시작되었다.
로마의 성 마리아 대성전(大聖殿)에는 베들레헴 ‘외양간’에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뉘었던 ‘여물통(구유)’ 조각이라고 알려지는 나무 조각이 지난 12세기경부터 보존(保存)되어 있기도 하다. 이를 본떠서 흔히 성탄절(聖誕節) 날 일반 천주교회(天主敎會)에서는 나무 ‘구유’를 제대(祭臺) 위나, 그 옆에 설치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장식품 구유에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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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예술가(藝術家)들은 이 성탄 ‘구유’를 매우 다양한 형태로 표현했었다. 16세기 말엽과 17세기 초 알프스 산 인접 제국(諸國)에서는 ‘성탄구유’ 공경이 일반화(一般化)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17세기 바로크 시대는 나폴리 ‘구유 작품’의 전성기(全盛期)가 되기도 했었다.
또 18~19세기에 이르러 독일(獨逸) 지역에서는 서민 가정에 ‘성탄구유’를 설치하는 것이 토착화 되었으며, 19세기에는 인쇄그림이 출판사(出版社)에 의해 대량생산되면서 성탄 ‘구유’의 대중화(大衆化)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었다.
800년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성탄 ‘말구유’의 제작은 로마 가톨릭의 성당(聖堂)이나 그 신자(信者) 가정의 경우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다양(多樣)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구유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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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적의 ‘구유’가 동이 나니까 공장에서 장식품(裝飾品)으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이를 구입하여 정원(庭園)이나 거실에 두고, 마치 옛것인 것처럼 장식(裝飾)을 하여 진열(陣烈)해 놓고 있다.
옛적 시골의 것은 거의가 그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부잣집 정원(庭園)이나 거실로 숨어들었고, 새로운 수요자(需要者)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상품(商品)으로 만들어 비싼 값으로 팔고 있는 것이다.
정원 장식품으로 진열되고 있는 나무 구유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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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외양간’의 정취(情趣)를 포근하고 구수하게 그리고 있는 김진문의 ‘외양간’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외 양 간
김 진 문
눈밭에 손발 시린 한겨울
무너져 내리는 석양을 붙잡아
수수깡 콩대궁 가마솥에 불, 돋우고
청솔가지 매운 연기 마셔가며
쇠죽 끓이다 흘리신 눈물은
따가웠던 것일까
슬펐던 것일까
어머님의 눈물이
외양간 새끼 달린 어미 소
배고픈 눈망울이 초롱초롱
해넘이 할 때에
구수한 소여물 익는 냄새
겨울 녹이려 올라온다.
모락모락 저녁 굴뚝 연기
동네 어귀 감싸 안으며
하늘로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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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간’ 얘기를 다시 시작한다. 흔히들 ‘외양간’이라 하면 보통 대문간 딸린 헛간쯤에 긴 나무로 칸을 막고 소가 나오지 못하도록 빗장목(막대기)를 지르고 한쪽 공간엔 통나무를 투박하게 파서 만든 ‘구유’를 가로 걸어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소를 기르는 외양간은 말을 기르는 ‘마굿간’과 더불어 흔했던 우리들 고향의 전통 가옥구조(家屋構造)였다.
쇠죽 먹는 어미소와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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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사랑하는 주인이 솜씨 좋게 파낸 통나무 ‘구유’는 먹성 좋은 누렁이가 어찌나 핥아 대었는지 맨질맨질 윤기(潤氣)가 나고, 그 외양간 안엔 잘 얻어먹고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윤기 나는 누런 털을 자랑하는 누렁이가 순한 눈을 껌벅이며 편안히 누워 느긋하게 되새김질 하는 평화로운 광경(光景)이 언제나 그려지고 있었다.
그 옛날 넓은 초목 풀밭을 누볐을 소는 사람에 의해 가축(家畜)으로 길들여지면서 개 다음으로 인간과 마음의 소통을 하는 짐승이 되었고, 주인과 더불어 논으로 밭으로 늘 함께하는 반려자(伴侶者)가 되었다.
소 먹이기(소 맥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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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전(山田)에 밭일을 나갈 때도 함께 몰고 나가서 풀밭에 매어두면, 스스로가 알아서 배가 불룩하게 풀을 뜯어 먹곤 했었다.
학교(學校)에 다녀와서 책보를 방안에 던져 놓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찬물에 보리밥 한 덩이를 말아 채전(菜田) 밭에서 딴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점심을 때우고, 마구간에서 파리를 쫓고 있는 누렁이를 몰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풀어 놓으면, 배가 불룩하게 풀을 뜯었으니 신통방통하기도 했었다.
깊은 산골 다랑논에서 홀로 일을 할 때는 가끔씩 무서움이 들기도 하지만, 든든한 소가 있어 의지(依支)도 되었고, 이렇게 소나 사람이나 서로 믿음이 있었기에 늘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간식 먹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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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배가 불룩하게 나오도록 실컷 풀을 뜯기고, 풀 한 짐 베어 지게에 짊어지고 올 때 콧노래가 나오는 것은 소도 사람도 느긋한 행복감(幸福感)에서였으리라.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간다는 소는 사람이 할 수 없는 힘든 일도 도와주었고, 암소의 경우 해마다 송아지 한 마리씩을 주인에게 선물(膳物)하여 살림이 펴는데도 한몫 해 주었으니 이 어찌 기특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소 주인은 자신은 굶을지언정, 여름날 입맛 다실 소풀(쇠풀)과 겨울날 뜨거운 소죽(쇠죽) 끓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아지와 어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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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마음으로 통하는 소는 어쩌면 주인의 얼굴에서 주인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쇠죽 잘 끓여 먹여 팔려 가는 날, 굵은 눈물을 흘리는 소는 진정 자신이 팔려가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별이 서러워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누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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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토록 정감(情感) 있는 소들이 언제부터인가 ‘외양간’이 아닌 대규모 축사(畜舍)에서 고기를 목적으로 이른바 비육우(肥肉牛)로 길러지게 되었다.
비육우 사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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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비좁은 공간에 눕지도 못하게 세워놓고, 인공사료를 먹여
살만 찌게 한다.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병이 생기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한 마리가 병이 들면, 같은 축사 안의 모든 소는 물론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 남의 소까지 모두를 '살처분'해야 한다. 오직
인간의 미각과 식성만을 위해 키워지고, 그 고기를 즐겨먹는 인간들
마저 오만가지 성인병에 걸려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그 소들과 함께
죽어가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되풀이하려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한두 마리 ‘외양간’에서 기를 때는 병도 없더니만, 인간과 함께 가족처럼 일을 하는 소가 아닌 비육우(肥育牛)로 사육되면서부터 구제역(口蹄疫)이란 병 때문에 매몰(埋沒) 처분 된 소가 수백만 마리에 이른다.
갇혀 지내고, 스트레스 속에 지내다보니 그 병에 대한 내성(耐性)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을까. 매몰처분하기 위해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주인이 정성(精誠)으로 끓여준 ‘쇠죽’을 배가 부르도록 먹고 눈물 속에 이별한 소는 얼마나 많을까.
살처분 2시간 전 마지막 '여물'을 먹이는 농부와 모녀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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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모르는 모녀가 열심이 먹이를 먹고 있고, 차마 떠나 보낼
수 없는 소 주인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모자이크 처리)로 '어미소'의
목을 어루만지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질병으로 이 천진
하고 순한 한우모녀가 왜 죽어야만 하는지 너무나 애처롭기만 하다)
살처분(殺處分)을 위한 주사(注射)를 맞은 후 크고 맑은 눈을 내리감고 비틀거리면서도 송아지를 보살피는 어미소의 앞에서 비통해 하는 어느 노인의 오열(嗚咽)이 가슴을 후벼내듯 통증으로 다가온다.
“자식을 죽이는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답니까. 저 크고 맑은 눈이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 곡기(穀氣)를 잇는 것도, 밤잠을 이루는 것도 죄스럽소”
인간이 자신들의 미각(味覺)과 식욕(食慾)을 돋우기 위해 수십 수백 마리를 사육하는 비육우(肥肉牛) 농가가 아니라, 농우(農牛)로 부리는 암소 한 마리와 그 암소가 낳은 송아지 한 마리를 키우던 노인의 말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여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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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2일 구제역이 발생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의
농가에서 한 부인이 통곡을 하다 말고, ‘살처분’ 예정인 자기 집 소들
에게 마지막 '여물'을 먹이고 있다. 부인이 13년 동안 자식 같이 키워
온 이들 소들은 '마지막식사'를 마친 이날 오후에 중장비로 파놓은 구
덩에에 뭍혀 '살처분'되었다. 인간이 만든 병으로 소들을 죽인 것이다)
그날 그 시간 '마지막 여물'을 주고 통곡하던 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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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할 주사(注射)를 맞고도 자신의 새끼소에게 젓을 물렸다는 어미 소의 모성애(母性愛)가 신문에 나던 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지 않았던가.
필자도 예외(例外)는 아니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때부터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무정한 구제역 살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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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구제역 감염지역의 인근 지역에서 사육되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염되었거나 앞으로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미와 송아지가
함께 죽어야만 했다. 농민의 손실보다는 인간들의 무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소를 소답게 키웠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것인데, 인간들에 의해 걸렸던 몹쓸 병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가면서 다시 그 많은 사람들을 눈물짓게 한 소들이 과연 인간들에 대한 원망(怨望)은 없었을지 궁금해지기만 한다.
왜 원망(怨望)이 없었겠는가. 5만분의 1 지도 위에 콤파스(컴퍼스)로 동그라미를 그린 후 그 동그라미 안에 들어간 지역(地域)은 소든 돼지든, 병에 걸렸든 걸리지 않았든, 가축(家畜)이라는 가축은 모두 ‘살처분’을 해 버렸으니 어찌 원망이 없었겠는가.
흙더미에 묻히면서 인간을 향해 꾸짖는 ‘살처분’ 돼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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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 강제(强制)로 실어 구덩이에 쓸어 넣고, 불도저로 흙더미를 밀어 넣자 마치 불도저와 그 운전자(運轉者)를 잡아먹을 듯 고함을 지르던 돼지들의 포효(咆哮)를 보면, 시시한 원망보다는 사무친 앙갚음을 예고하는 듯도 했었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구제역(口蹄疫)으로 인해 행여나 그 병이 전염(傳染)될까. 지난 몇 해인가의 명절(名節)에는 고향집 찾는 자손들의 귀성(歸省)을 만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들었던 송아지와의 마지막 이별 (경기도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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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 직전 마지막 먹이를 주면서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터지는
울음을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여인이 웃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그토록 온 국민을 걱정하게 했던 구제역(口蹄疫)이 척결되어 자식 같은 소를 묻으며 눈물을 흘렸던 농민(農民)들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외양간’에 어미소와 송아지가 다시 매어지고, 멀리서 송아지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기를 기대(期待)하여 마지않는다.
산채로 '살처분' 당하는 돼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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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간의 반찬과 술 안주로 죽어갈 신세들이지만, 단지 감염권
안에서 사육되고 있거나, 앞으로 발병할 수 있다는 혐의만으로 무더기
살생을 당하는 돼지들이 얼마나 억울할 것인지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돼지 4,000마리를 한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그렇게 소들이 떠나버린 ‘외양간’의 황량(荒凉)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권명은의 ‘텅빈 외양간’을 음미해 본다.
텅빈 외양간
권 명 은
봄이면 구성진 노랫가락에
어그적 덜그럭 논밭 갈던
누런 소가 떠났습니다.
휑하니 비어버린 외양간엔
뚫어진 구멍사이로 찬바람만 드나들 뿐
긴 꼬리 내두르며 허연 김 내뿜던 황소의
껌뻑이던 눈빛만 어른거리고
아침저녁으로 뜨근하니
끓어오르던 가마솥엔
콩깍지 듬뿍 넣은 소죽은 간데없고
텅빈 가슴만 펄펄 끓어 넘칠 뿐
음-메하니 밥상을 재촉하던 황소의
누런 울음만 아련합니다.
평생을 함께 지내 그리도 정겨운 벗을
맥없이 당신 손으로 떠나보내고
누렁이의 서글픈 울음소리에
아버지의 두 귀는
한동안 먹먹했을 겝니다.
그 가슴마저 먹먹해져 오래도록
쓸쓸하고 허전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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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외양간
![](https://t1.daumcdn.net/cfile/cafe/23409F4C521467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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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필자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방학(放學) 다음날부터 매일 꼴을 한 짐씩 베어와 소에게 먹이는 것이 필자들의 일과(日課)였다.
비가 오는 날도 나가서 꼴을 베어야 했다. 어디 하루 놀러 간다거나, 친척집으로 외출(外出)이라도 하자면 전날에 꼴 두어 짐을 베어놓아야 했다.
얼마 전 고향에 갔더니 아직도 비육우(肥肉牛) 10여 마리 정도를 키우는 집들이 있었다. 그런데 여름인데도 푸른 풀을 베어주지 않고, 모두 마른 짚과 사료(飼料)를 섞어 먹인다.
꼴 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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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둑마다 소가 좋아하는 ‘바랭이’가 무릎 높이로 자랐어도 이제 시골에는 소에게 꼴을 베어 먹이는 사람은 없다. 우선 그럴 인력(人力)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 ‘마구간’에는 애달픈 사연(事緣)도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哀歡)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외양간’에는 있어야할 소들이 사라지고, 명절(名節) 때 모여들 가족들의 침실(寢室)로 개조되고도 있다. 10여년을 키워 온 소들은 모두 살처분 당하고, 아들 손자들이 모두 찾아오면 잠 잘 방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비육우 외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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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풍경은 언제나 어두운 백열등(白熱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살처분으로 소를 모두 잃고 상심하여 술을 퍼 마시는 장손(長孫)을 보고 동생들이 만류하자 “이까짓 놈의 세상 마시다 죽으면 말지 뭐”라는 독백(獨白)만 공허하게 메아리치곤 했었다.
이상국이 그들 형제들이 주고 받은 얘기를 바탕으로 엮어 그린 ‘마구간에서 보낸 겨울밤’을 잠시 음미해 본다.
마구간에서 보낸 겨울밤
이상국
물 버리는 소리 끝이 버적버적 얼어붙는 겨울밤
우리는 고깃근이나 끊어 들고 작은 형님댁에 모였다.
부엌에서는 메 짓는 여자들 잠 먹은 소리 잦아드는데
밤 깊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점에 백 원짜리 고스톱을 쳤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날마다 까탈을 부린다고
형수는 입술을 빼물고 넌덜머리를 냈지만
형님은 초저녁부터 취해 있었다.
- 야 동생아 쥐뿔두 없이 살아도 어머이 지사만은
보란 듯 모셔야지
하며 씨부렁거리는 그이 빠져버린 앞니 사이로 말이 샜다.
- 몸 생각은 안 하우?
- 이까짓 놈의 세상 마시다 죽으면 말지 뭐
이렇게 빗가는 대답이 내겐 비명처럼 들렸다.
이 설 쇠면 마흔일곱,
화투판에서도 그는 껍데기든 똥이든 닥치는 대로
먹었지만
집안귀신이 사람 잡는다며 걸핏하면 피박을 쓰기
일쑤였다.
이 방은 원래 마구간이었다.
소 키울 힘이면 안팎이 노가다 나서는 게 낫다고
형님은 아예 쇠꼬리를 놓아버렸다.
제상을 설고 안골 숙모님께 제사음식을 갖다드리고
와서야
우리는 제가끔 생각을 안고 눈을 붙였다.
술에 볶이는지 삶이 너무 무거운지
형님은 돌아누울 때마다 이를 갈았다.
훈김이 봉창 유리를 적시며 흘러내리다 얼어붙고
한때 대여섯 마리씩 소가 매였던 자리에
우리는 나란히 누워 겨울밤 깊이 들어갔다.
새벽이 어디쯤 왔는지 한기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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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살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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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도 위에 그린 동그라미 안에 사육되고 있다는 혐의 만으로
무차별 '살처분'을 당하고 있는 한우들, 대량으로 사육하는 기업 축산
농가도 그랬지만, 재래식 농사를 짓기 위해 키우는 전재산인 어미소와
송아지도 예외가 없었다. 살처분으로 한 해에 3조 원이나 되는 손실을
봤는데, 그 돈으로 예방백신 개발노력은 기울이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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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영어(英語)에서 말하는 “Mend the barn after the horse is stolen.”이라는 말이다.
뜯어진 ‘외양간’에 소를 기르더니만, 결국 소를 잃어버린 뒤에 그제야 뒤늦게 ‘외양간’을 고친다는 말로 즉,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못하고 결국 손해(損害)를 보고 후회(後悔)한다는 뜻이다.
외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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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에는 이와 비슷한 말로 ‘양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망양보뢰(忘羊補牢)’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 속담(俗談) 중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라고 알려져 있다.
사전(辭典)에서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를 ‘이미 실패(失敗)한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사전에선 ‘망양보뢰(忘羊補牢)’를 이 속담(俗談)과 같은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망양보뢰(忘羊補牢)’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한다. ‘망양보뢰’는 유향이라는 사람이 지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처음 나오는 말인데,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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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초나라의 장신(莊辛)이라는 사람이 양왕(襄王)의 실정을 비판하고는 조(趙)나라로 가버린 일이 있었다. 후일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양왕이 다시 장신(莊辛)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그때 장신(莊辛)이 말하길 “세상 사람들이 토끼를 발견하고 사냥개를 돌아봐도 아직 늦지 않았으며, 양을 잃고 외양간을 고쳐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들 합니다(臣聞鄙語曰, “見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라고 하였다.
여기서 ‘망양보뢰(忘羊補牢)’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왔는데, 특이(特異)한 점은 ‘망양보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正反對)의 의미로 사용됐다는 점이다.
양(羊)을 잃어버리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양(羊)을 잃어버린 뒤에 ‘외양간’을 고친다는 의미(意味)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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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혹은 소)을 잃었다고 해서 ‘외양간’을 고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혹은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에 실패했다 해서 좌절(挫折)할 것이 아니라 늦었지만 다시 일어나면 성공한다는 금언적(金言的) 성격을 지닌 말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첫 중간고사(中間考査)를 망치고 나서 ‘난 안 될 거야’라면서 그 다음 시험들도 준비하지 않아버리는 모습을 버리고, 다음 시험부터라도 제대로 준비하라는 교훈으로도 보인다.
소중한 양(羊)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도 계속 미래를 바라보면서 대비(對備)하는 자세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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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결코 어리석은 일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미래를 제대로 대비(對備)하기 위해서는 소를 잃었더라도 ‘외양간’을 더 튼튼히 고쳐야 한다는 뜻의 금언(金言)이라 할 수 있다.
지난 7월 18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노량진 상수도관 공사현장 수몰사고에 대한 반성과 재발방지(再發防止)를 위한 간부회의에서 “소 잃고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고 강조한 내용도 이를 반영(反影)한 의미의 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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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더운데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외양간’과 관련하여 중국 조선족(朝鮮族) 사회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傳說)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 파일을 덮을까 한다.
먼 옛날 한 도둑이 어느 가난한 집 ‘외양간’에 뛰어들어 한창 자라는 송아지 한 마리를 훔쳐가려 했다. 도둑이 ‘외양간’에 기어들어 송아지 ‘이까리(목에 멘 줄)’를 풀려는데, ‘외양간’ 문 뒤 ‘낟가리’ 곁에서 주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외양간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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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만일 지신(地神)이 계신다면, 우리 이 집을 살피시여 돈 한 꿰미만 생기게 해주소서. 이제 한창 자라는 송아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팔아보았자 겨우 몇 푼도 못갈 것이라 돈 한 꿰미만 하사(下賜)하신다면, 노모(老母)의 병환을 고쳐드리겠나이다.”
도둑이 문틈으로 내다보니 멀쩡한 주인이 달빛 아래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 한 그릇을 낟가리 곁에다 떠놓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고 있었다.
“흥, 빌기는 잘 빈다만 내가 단박 송아지를 끌어가겠는데 돈바리가 생겨?” 이렇게 속으로 냉소(冷笑)하던 도둑은 주인이 다 빌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곧 송아지를 끌어내다 놓고 다른 집에서 훔쳐온 동전(銅錢) 한 꿰미를 송아지 허리에 칭칭 동인 후 살그머니 그 집을 나섰다.
동전 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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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은 그 집 송아지의 ‘이까리’를 단단히 움켜잡고 끌고 가다가 아찔하게 깊은 개울골짜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개울을 뛰어넘은 후 송아지의 고삐를 잡아당겼으나, 송아지는 네발을 뻗치고 말을 듣지 않았다.
“이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도둑은 이렇게 말하면서 소고삐를 더욱 힘 있게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소고삐가 뚝 끊어지자 송아지는 자기 집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뛰어 가버렸다.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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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날이 희뿌옇게 밝아서 도둑놈은 송아지를 더 이상 뒤 쫓을 수도 없었다. 그 바람에 도둑놈은 송아지는 물론 부잣집에서 훔친 돈꿰미마저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대신 송아지 임자는 밖에서 돌아온 송아지 등에서 소원(所願)대로 난데없는 동전꿰미를 얻어 노모(老母)의 병 구환을 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이 말이 온 마을에 퍼지게 되어 이때로부터 사람들은 제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지신제(地神祭)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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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가 자꾸만 길어져 배경음악 한 곡을 게재하여 음미하면서 파일을 덮을까 한다. ‘마구간’ 노래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구제역(口蹄疫)의 누명을 쓰고 ‘살처분’된 송아지의 노래도 아닌, 그 시절 '소문 난 황소'를 음미해보기로 한다.
소문 난 황소
김봉학
소문났네 소문났어 동네방네 소문났네
소문난 황소라네
대기산 우리 황소 한우리 황소
새 방울 울리면서 으라차 황소 고집 내 고향 지켜왔네
더덕향기 약초향기 풀냄새 흙냄새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아 신토불이 횡성 한우
소문났네 소문났어 동네방네 소문났네
이랴(이랴) 하 이랴(이랴) 저 언덕을 넘어
신토불이 횡성 한우 소문난 황소라네
소문났네 소문났어 동네방네 소문났네
소문난 황소라네
대기산 우리 황소 한우리 황소
새 방울 울리면서 으라차 황소 고집 내 고향 지켜왔네
머루 다래 더덕향기 풀냄새 흙냄새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아 신토불이 횡성 한우
소문났네 소문났어 동네방네 소문났네
이랴(이랴) 하 이랴(이랴) 저 언덕을 넘어
신토불이 횡성 한우 소문난 황소라네
더덕향기 약초향기 풀냄새 흙냄새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아 신토불이 횡성 한우
소문났네 소문났어 동네방네 소문났네
이랴(이랴) 하 이랴(이랴) 저 언덕을 넘어
신토불이 횡성 한우 소문난 황소라네
소문난 황소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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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마아득한 얘기가 될번한 마구깐
새로운 추억꺼리로 불러 주시어 고맙습니다
우리집 아랫채에 마구깐 사랑방도 함께 있었는데 허물어지고
빈터에 잡초만 자리하고 있어 언젠가 가꾸어야 할 터이기도 합니다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도 보았고
생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며 억지 눈물도 닦고
때로는 목욕물을 끓여주던 가마솥이 있는 마굿간
소가 보는 앞에서 목욕을 하던 생각도 나네요
워낭소리 영화에 젖었던 향수가 되살아나는 좋은 글
감사하며 다가오는 좋은 계절에
좋은 일 많으시고 건안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