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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74강-4 (2016. 4. 4.)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三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一
四. 十廻向
2. 第一 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2권-135)
(1) 廻向善根 (2) 利樂救護
(3) 受苦惱救護
가. 法 나.大海喩 다.日輪喩
라. 合
2. 第一 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1) 廻向善根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救護一切衆生호대
離衆生相廻向고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行檀波羅密하며 淨尸波羅密하며 修羼提波羅密하며
起精進波羅密하며 入禪波羅密하며
住般若波羅密하야 大慈大悲大喜大捨로
修如是等無量善根하나니
修善根時에 作是念言호대 願此善根으로
普能饒益一切衆生하야 皆使淸淨하야 至於究竟하야
永離地獄餓鬼畜生閻羅王等의 無量苦惱라하니라
第一 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제일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
일체중생을 구호하지만, 구호해야 됩니다. 열심히 돕고ㆍ
제도하고ㆍ교화하고ㆍ성숙시키고ㆍ성취시키고ㆍ보호하
고 ←이렇게 해야 되지만, 그가 그냥‘중생이다. 단순한
중생이다.’ 라고만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중생의 상을 다 떠난 상태에서 구호하고ㆍ돕고ㆍ
보살피고ㆍ배려하고 해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남을 위하는 일들이 일상생활에서 많지요.
상당히 많습니다. 많은데 자칫, 어떤 내가 배려하는 사람, 내가 도와주는 사람, 내가 우리 집에서 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착각할 수가 있어요. 잘못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 조심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그런 데에 대한 생각을 좀 할 수 있어야 되는 내용입니다.
일체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이라는 생각을 떠난 그런
회향이다.
廻向善根(회향선근).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운하위보살마하살)의
救護一切衆生(구호일체중생)호대,
무엇이 보살마하살이 일체중생을 구호하되,
離衆生相廻向(이중생상회향)고?
중생상을 떠난 회향인가?
열 가지 수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열 가지 수행은 뭐냐? 六度四心입니다. 육도사심.
六度 = 6바라밀. 四心 = 四無量心.→ 慈ㆍ悲ㆍ喜ㆍ捨.
이것이 보살행의 기본입니다. 가장 아주 쉽고, 또 많이
거론되고, 다른 것도 十善도 있고, 온갖 것 많지요.
많지만 다 거두절미 해버리고 六度四心. 외우기도 좋잖아요. 여섯 가지 바라밀하고,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
자ㆍ비ㆍ희ㆍ사. 그 속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어떤 선근도 그 열 가지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제가 하나로 하면 뭐라고요?
“보시다.”그랬습니다. 배려하는 마음이다. 배려하는
보시의 마음이... 그것도 열 가지 다 복잡하니까 거론할 것 없이 “보시”그것만 잘 연구해서 보시가 얼마나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가? 그렇게 알고 실천하면 그 하나 속에 또한, 아까는 廻向一法이 總攝諸行 그랬는데요.
지금은 布施一法이 總攝諸行이다.
베푸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그것 하나가 일체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이래도 됩니다. 선불교에선 손가락하나 딱 세우는 것. 그것가지고 다 하잖아요. 할. 주장자 한번
내려치는 것. 그것이 다 이런 화엄경에서 나간 것이지요.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이 보살마하살이
行檀波羅密(행단바라밀)하며, 보시바라밀을 행하며,
淨尸波羅密(정시바라밀)하며,
시라바라밀 = 지계바라밀을 행하며,
修羼提波羅密(수찬제바라밀)하며,
인욕바라밀을 닦으며,
起精進波羅密(기정진바라밀)하며,
정진바라밀을 일으키며,
入禪波羅密(입선바라밀)하며,
선정바라밀에 들어가며,
住般若波羅密(주반야바라밀)하야,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大慈ㆍ大悲ㆍ大喜ㆍ大捨(대자대비대희대사)로
修如是等無量善根(수여시등무량선근)하나니,
이와 같은 등 한량없는 선근을 닦나니, 그랬습니다.
이것이 六度四心, 慈ㆍ悲ㆍ喜ㆍ捨.
大慈ㆍ大悲ㆍ大喜ㆍ大捨. 이것이 네 가지 마음이고,
앞의 6바라밀은 六度고, 六度四心 그렇습니다.
자다가도 누가 “불교는 뭐하는 일이냐?” 하면
“六度四心”그것도 복잡하면 “6바라밀 닦는 일이다. 6바라밀 닦는 일이 불교가 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온갖 일거수일투족에 그것이 장착이 되어있어야 되고, 저~ 기 무수한 세포에도 다 그것이 스며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六度四心.
여기 大慈는 큰 사랑. 그 다음에
大悲는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대자가 어머니의 사랑이면, 대비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大喜는 기쁘게 하는 겁니다. 중생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그런데 사실은 大捨가 조금 애매합니다.
설명도 또 여러 가지입니다. 이것이 평정심. 편안함을 주는 것. 평온하고 집착이 없는 상태를 “버릴 捨”그래요.
그런데 이것을 慈ㆍ悲, 喜까지도 좋은데, 捨에 오니까 그만 조금 헤매게 됩니다.
이것도 우리가 명확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捨는 편안함을 주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평정심 = 평온함 = 편안함. ←이런 것을 베푸는 것.
이와 같은 등 한량없는 선근, 그것이 한량없는 선근입니다. 그것으로써 선근을 닦나니,
修善根時(수선근시)에, 이러한 선근을 닦을 때에,
作是念言(작시념언)호대, 이렇게 생각한다.
속으로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지요. 속으로 혼자생각 하잖
아요. 또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요. 그것이 念言입니다.
생각으로 말하는 것. 일상에서 그렇게 많이 하잖아요.
願此善根(원차선근)으로,
원컨대 이선근으로, (六度四心으로)
普能饒益一切衆生(보능요익일체중생)하야,
일체중생을 널리 요익하게해서,
皆使淸淨(개사청정)하야, 다 모두들 청정하게해서,
훌륭하게 만들어서, 아주 좋도록 해서, 이 淸淨이라는
말의 의미가 상당히 광범위합니다. 비었다는 뜻도 되고,
깨끗하다는 뜻도 되고, 훌륭하다는 뜻도 되고, 좋다는 뜻
도 되고, 아주 좋은 뜻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 淸淨입니다. 그래서
至於究竟(지어구경)하야, 구경에 이른다.
궁극에까지 이른다. 완성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永離(영리), 영원히,
地獄餓鬼畜生閻羅王等(지옥아귀축생염라왕등)의,
지옥과 같은 삶, 아귀와 같은 삶, 축생과 같은 삶, 염라왕과 같은 그런 삶 등의 無量苦惱(무량고뇌)라하니라.
한량없는 고뇌를 영원히 떠나게 하나니라.
그렇습니다. 결국은 중생을 離苦得樂하게 하는데 무슨 도구로써, 六度四心 = 6바라밀과 四無量心으로써 한다.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수행은 이와 같이 간단명료합니다. 그리고 더 간단하게 하려면 그저 주려고 하고요. 주는 것이 회향이니까요. 또 주는 것이 보시고요.
(2) 利樂救護
菩薩摩訶薩이 種善根時에 以己善根으로
如是廻向호대
我當爲一切衆生作舍니 令免一切諸苦事故며
爲一切衆生作護니 悉令解脫諸煩惱故며
爲一切衆生作歸니 皆令得離諸怖畏故며
爲一切衆生作趣니 令得至於一切智故며
爲一切衆生作安이니 令得究竟安隱處故며
爲一切衆生作明이니 令得智光滅癡暗故며
爲一切衆生作炬니 破彼一切無明暗故며
爲一切衆生作燈이니 令住究竟淸淨處故며
爲一切衆生作導師니 引其令入眞實法故며
爲一切衆生作大導師니 與其無碍大智慧故라하나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하야
平等饒益一切衆生하야 究竟皆令得一切智니라
利樂救護(이락구호).
이롭고 즐거움으로써 구호한다.
무슨 뜻인지 제가 이 단락에 별을 세 개나 쳐놨습니다.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이
種善根時(종선근시)에, 선근을 심을 때에,
以己善根(이기선근)으로, 자기의 선근으로
如是廻向(여시회향)호대, 이와 같이 회향하되,
어떻게요?
我當爲一切衆生作舍(아당위일체중생작사)니,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해서 집이 되리니,
令免一切諸苦事故(영면일체제고사고)며,
일체 모든 고통스러운 일은 면하게 하는 연고며,
爲一切衆生作護(위일체중생작호)니,
일체중생의 구호가 되리니, 보호하는 사람이 되리니,
悉令解脫諸煩惱故(실령해탈제번뇌고)며,
모든 번뇌를 다 해탈케 하고자 하는 연고며,
爲一切衆生作歸(위일체중생작귀)니,
일체중생의 귀의처가 되리니,
皆令得離諸怖畏故(개령득리제포외고)며,
다 모든 두려움을 떠나게 하려는 연고며,
爲一切衆生作趣(위일체중생작취)니,
일체중생이 나아갈 바가 되리니, 일체중생이 거기에 나아
간다. 일체중생이 거기에 귀의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된다. 이겁니다.
令得至於一切智故(영득지어일체지고)며,
一切智.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아는 지혜에 이름을 얻게 하는 연고며,
爲一切衆生作安(위일체중생작안)이니,
일체중생의 편안함이 되리니,
令得究竟安隱處故(영득구경안은처고)며,
궁극적인 안온한 곳. 구경에 가서 안온한 곳을 얻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안온함. 이럴 때 究竟은 가장 편안함.
究竟도 살펴보니까 뜻이 여러 가지입니다. 최고의 안온한 곳을 얻게 하는 연고며,
爲一切衆生作明(위일체중생작명)이니,
일체중생을 위해서 밝음이 되리니, 作明 = 밝음이 되리니,
令得智光滅癡暗故(영득지광멸치암고)며,
지혜의 광명으로, 지혜의 광명으로써 어리석음의 어둠을
소멸함을 얻게 하는 연고다.
그렇습니다. 금강경에도 눈이 어두운 사람과 눈이 밝은
사람. 눈이 밝은 사람은 온갖 사물을 다 보지만, 눈이 어두운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듯이, 지혜의 광명이 있는
사람은, 우리가 인생, 사람의 몸을 받아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이 그야말로 雨寶益生滿虛空입니다.
다이아몬드가 그냥 하늘에서 비 쏟아지듯이 쏟아지는 그런 행복인데, 그런 다행함이고 그런 무량대복인데, 각자 그 그릇 때문에, 알고 있는 것 때문에 그 복을 누리는 것이 각각 다 다르잖아요.
빛이 없어서 그래요. 지혜의 빛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입
니다. 그래서 지혜는 세상의 것에다 비유하면 뭐와 같은가 하면 밝음과 같다. 길이 밝으니까 운전도 잘하고 걷기도
잘하고, 다치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그렇지요.
그런데 캄캄하다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캄캄하다면, 아무것도 보인다면 10미터도 제대로 못가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을 사는데도 지혜의 밝음이 있는 사람은 정말 즐겁게 잘살고, 현명하게 살고요.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智光滅癡暗이라고 하는 것이 참 중요한 말입니다.
지혜의 광명으로써 어리석음을 소멸함을 얻게 하는
연고다.
爲一切衆生作炬(위일체중생작거)니,
일체중생의 횃불이 되리니, 아~~ 좋은 말이지요.
일체중생의 횃불이 되리니,
破彼一切無明暗故(파피일체무명암고)며,
일체무명의 어둠을 깨뜨리려는 연고니라.
爲一切衆生作燈(위일체중생작등)이니,
일체중생의 등불이 되리니,
令住究竟淸淨處故(영주구경청정처고)며,
구경에 청정한 곳ㆍ훌륭한 곳에 머물게 하는 연고다.
한 구절ㆍ한 구절이 참 주옥같은 말입니다.
爲一切衆生作導師(위일체중생작도사)니,
일체중생의 導師. 안내자가 되리니, 여행 갔을 때에 가이
드 잘못 만나면 참 여행망치기가 일쑤입니다. 갈아치울 수도 없고, 그것 보통일이 아닙니다. 무성의하게 정말 좋은
내용이 많이 있는데도, 이 사람이 공부를 안 하고 성의가
없어놓으면 설명을 안 해주니까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거든요. 여기 導師라고 하는 것은 안내자. 가이드
라는 뜻입니다.
일체중생의 안내자가 되리니,
引其令入眞實法故(인기영입진실법고)며,
그들을 이끌어서 진실한 법에 들어가게 하는 연고다.
그렇지요. 안내자. 우리는 무엇으로 안내자를 삼아요?
화엄경으로 안내자를 삼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지금의 역사식적으로 현존하는 사람으로서는 솔직하게 그렇게
明도사. 밝은 안내자가 어디 있습니까? 있어도 잘 모르겠
고요. 거의 없다고 봐야 되고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이런 대승 경전!
법화경 같은 것. 화엄경 같은, 특히 화엄경을 만났으니
이보다 더 훌륭한 안내자는 없습니다. 아주 단언컨대,
‘이 화엄경이 최고의 안내자다. 최고의 도사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절대 사람을 염두에 떠올리면 안 됩니다.
引其令入眞實法이라.
화엄경이야말로 진실한 법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런
안내자다.
爲一切衆生作大導師(위일체중생작대도사)니,
일체중생의 大導師. 큰 안내자가 되리니,
일체중생의 大導師가 되리니, 導師가 되리니 했고,
大導師가 되리니, 부처님을 三界의 大導師. 그러잖아요.
그 부처님은 지금은 가셨고,
‘부처님을 대신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이 남기신 이 경전이다.’ 그런 이치를요? 그런 이치를 우리프로들, 스님들은 아주 너무나도 쉽게, 정확하게 잘 알고 있어야 됩니다.
머뭇머뭇해서 어디 있는 큰스님. 어디 숨어있는 어떤
도사 찾고 이래서는 그만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벌써
잘못된 겁니다. 이 대승 경전!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야말로 大導師다. 그래야 됩니다.
與其無碍大智慧故(여기무애대지혜고)라하나니,
그로 하여금 걸림 없는 큰 지혜를 주는 연고니라.
與 = 우리에게 화엄경은 大導師가 되어서, 우리에게 걸림이 없는 큰 지혜를 주는 것이다. 말입니다.
뭐가 안 풀리고 문제가 생기거든 얼른 화엄경 넘겨보세
요. 넘겨서 잠간만, 한 시간만 참고 읽어보세요.
그러면 거기에 열쇠가 그냥 한주먹이 손에 잡힐 겁니다.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한 시간만 읽으면 열쇠가 한주먹이
손에 잡힐 거라고요. 그보다 더 큰 대도사가 어디 있습니까?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善根으로, 이 모든 선근으로써,
如是廻向하야, 이와 같이 회향해서,
平等饒益一切衆生(평등요익일체중생)하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요? 平等饒益一切衆生. 우리 염불 속에 있잖아요. 평등하게 일체중생을 요익하게해서
究竟皆令得一切智(구경개령득일체지)니라.
구경에 다 一切智를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라.
一切智 =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평등한 면도 꿰뚫어 알고, 차별한 면도 꿰뚫어 알고요. 감나무는 감나무대로 이해하고 밤나무는 밤나무대로 이해하고요. 나는 감나무인데, 네는 왜 밤나무냐 하고 시비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반
되는 관계를 다 꿰뚫어 아는 것, 그것이 一切智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그런 트러블이 생길 까닭이 없지요.
(3) 受苦惱救護
가. 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於非親友에 守護廻向호대
與其親友로 等無差別이니 何以故오 菩薩摩訶薩이
入一切法平等性故로 不於衆生에
而起一念非親友想하며 設有衆生이 於菩薩所에
起怨害心이라도 菩薩이 亦以慈眼視之하야
終無恚怒하고 普爲衆生하야 作善知識하야
演說正法하야 令其修習하나니라
受苦惱救護(수고뇌구호).
고뇌를 받음으로써 구호한다.
여기는 중생들을 대신해서 고뇌를 받는 그런 내용입니다.
첫째는 법이고 그 다음엔 비유가 있는데요.
비유가 대해비유 큰 바다비유, 태양비유, ←이런 것이 있습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於非親友(어비친우)에, 친우가 아닌데,
守護廻向(수호회향)호대, 수호해서 회향하되,
친구, 친한 사람, 일가친척, 형제자매, 부모처자 ←이런 사람들을 수호하고 하는, 보살피고 베풀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다 합니다. 그것은요? 새가 가만히 보면 참 잘합니다.
굳이 사람을 들먹거릴 것도 없습니다. 새만 봐도 잘합니다.
그 멀리 와서 자기 죽음을 무릅쓰고 먹을 것을 구해서 자기는 안 먹고, 자기 새끼한테 와서 먹여주고 날아가고,
또 가서 잡아서 입에 물었는데 얼마나 넘기고 싶겠습니까? 넘기고 싶은 것을 참고는 가지고와서 자기 새끼에게 먹이
는 겁니다. 이것은 조류도 다하고 일체 동물도 다합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자기가 벌어서 자기 자식에게 물
려주는 것. 이것은 이야기꺼리가 안 됩니다. 동물도 더 잘
합니다.
동물이 오히려 그런 것은 더 잘합니다.
그것을 “하~~ 나는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그것은 그렇게 이야기할 꺼리가 아닌 겁니다.
그것은 새들이 더 잘하는데요.
친우가 아닌데서 수호해야 하되,
與其親友(여기친우)로 等無差別(등무차별)이니,
그 친우, 내 새끼, 내가 낳은 새끼들을 위하듯이 친우가 아닌 사람.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 피붙이처럼 그렇게 여기고 보살핀다. 아~~ 참 어려운 주문입니다. 정말 어려운 주문이에요. 그러나 여기는 보살사상이니까 어떡해요? 이런 이야기 아무리 어려운 주문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할 법입니다.
그 친우로 더불어 평등하게 차별이 없어야 하나니,
何以故(하이고)오? 왜냐?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이
入一切法平等性故(일체법평등성고)로,
일체 평등한 성품에 들어간 고로, 일체법이 평등한 성품.
일체 법은 평등하니까요. 평등한 성품에 들어간 까닭으로
不於衆生(불어중생)에, 중생에게 있어서
而起一念非親友想(이기일념비친우상)하며,
한 생각도 친우가 아니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해요.
設有衆生(설유중생)이, 설사 어떤 중생이
於菩薩所(어보살소)에, 보살의 처소에서
起怨害心(기원해심)이라도,
怨害心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저 나쁜 보살ㆍ저 나쁜 스
님ㆍ저 나쁜 중. 어떻게 하면 저걸 한번 봐줄까?’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菩薩이 亦以慈眼視之(역이자안시지)하야,
보살은 또한 자비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아서,
終無恚怒(종무에노)하고, 마침내 끝까지 그를 향해서
성을 내거나 분노하는 바가 없고,
普爲衆生(보위중생)하야, 널리 중생을 위해서
作善知識(작선지식)하야, 선지식이 되어서
演說正法(연설정법)하야, 바른 법을 일러줘야 돼요.
하~~ 인과 이치. 인연의 이치. 그것 하나만, 다른 것 복잡한 것 설명할 것 없이 제일 익숙하고, 만만하고 정법이고
요.
또 “석가세존의 깨달은 바가 뭐냐?” 라고 했을 때,
모든 학자들이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 인과이치를 깨달았다.” 바로
그것 하나만 가지고, 내가 철저히 믿고, 철저히 실천하고, 철저히 일러주면 그것 훌륭한 법사입니다.
사실은 우리인과 무시하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잖아요.
作善知識하야 演說正法.
이것 중요합니다. 정법을 연설해서
令其修習(영기수습)하나니라.
그로 하여금 닦게, 그것을 실천하도록 한다.
여기다 별을 또 쳐놨네요. 저 위에는 별을 세 개 쳤고,
여기는 별을 한 개 쳐놨는데요. 뭐 대단합니다.
10회향법문에 들어오니까 처음부터 사람을 이렇게 놀라
게 하네요.
일체중생을 위하여 등불이 되리니
일체중생에게 대도사가 되리니
일체중생에게 구호가 되리니
일체중생에게 나아갈 바가 되리니
일체중생에게 집이 되리니
시적 감각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우리말로 아주 잘 다듬으면 좋은 기도문이 될 것 같습니다. 아까 그 별 세 개 쳤다고 하는 利樂救護라는 대목이요. 이롭고 즐거운 것으로 구호하는 것이고, 금방 읽은 受苦惱救護.
고뇌를 받음으로써 구호하는 것. 고통을 대신 받는 것으로써 구호하는 것. 앞의 글이 너무 좋아 미련이 많아서 쉽게 넘어가지지가 않습니다.
慈眼視之 = 자비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것 無財七施안에 들어 있지요? 재물 들지 않고 보시하는 일곱 가지 보시 가운데 慈眼施. 눈 안자, 안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慈眼視之입니다.
나. 大海喩
譬如大海를 一切衆毒이 不能變壞인달하야
菩薩도 亦爾하야 一切愚蒙이 無有智慧하야
不知恩德하며 瞋狼頑毒하야 驕慢自大하며
其心盲瞽하야 不識善法하는 如是等類의
諸惡衆生이 種種逼惱라도 無能動亂이니라
大海喩(대해유). 큰 바다의 비유.
譬如大海(비여대해)를, 비유하자면 큰 바다를
一切衆毒(일체중독)이 不能變壞(불능변괴)인달하야,
큰 바다는 독이 아무리 독한 독이라 하더라도 바다는
變壞시키지 못해요. 바다의 물은 변하게 하지 못해요.
독도 바다에 들어가면 전부 바닷물로 변해버립니다.
저~ 기 중국의 황하에서 내려온 그 황토물. 그 많고 많은 황토물이 들어와도, 지도를 보면 그 어구에서 한 몇 키로
까지는 누래요. 그런데 조금만 흘러가면 그 누런 물이
저~~ 기까지, 아마 태평양 중간까지 가도 갈만한 물인데, 전부 맑은 물로 변하잖아요. 그 많은 황토물도 전부 맑은
물로 변해버립니다. 어디 거기서만 들어옵니까?
곳곳에서 오물들이 얼마나 바다로 많이 들어갑니까?
그렇지만 전부 청정한 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또 不宿死屍(불숙사시)라 했습니다. 시체도,
시체도 거기다 남겨두지 않고, 물결쳐서 기어이 시체를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것이 바다의 역할입니다.
不能變壞인달하야 菩薩도
亦爾(역이)하야, 또한 그러해서,
一切愚蒙(일체우몽)이, 일체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이,
無有智慧(무유지혜)하야, 지혜가 없어서,
不知恩德(부지은덕)하며, 은덕을 알지 못하며,
하~~ 이것 중요한 말이지요. 恩德을 알지 못하며,
瞋狼頑毒(진랑완독)하야,
화내고, 이리처럼 그렇게 아주 완악한 독을 품으면서
驕慢自大(교만자대)하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하늘을 떠받칠 정도로 교만이 탱천해서 스스로 높다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크다고,
잘났다고 하는 겁니다. 驕慢自大. 瞋狼頑毒 不知恩德.
驕慢이 自大해서,
其心盲瞽(기심맹고)하야, 그 마음은 아주 타고난 봉사.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못 보는 봉사와 같아서,
不識善法(불식선법)하는, 선법을 알지 못하며,
如是等類(여시등류)의, 이와 같은 무리들의,
諸惡衆生(제악중생)이, 온갖 악을 짓는 중생들이,
種種逼惱(종종핍뇌)라도,
가지ㆍ가지로 逼惱할지라도, 그런 중생들이 가지ㆍ가지로 핍박하고 괴롭게 한다하더라도,
無能動亂(무능동란)이니라. 능히 動亂,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요지부동이다. 말입니다.
아무리 핍박한다 하더라도 요지부동이다.
어릴 때 제가 해인사에서 지월스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요. 학인들 선방에 계시는 유나스님으로 오래계셨어요.
그러다가 그 스님은 경을 보는 스님도 아닙니다.
경을 보는 스님도 아닌데, 어떻게 도량을 거닐다가 그 스님을 딱 만나면 보통 한 시간ㆍ두 시간도 좋아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렇게 나와서는 학인들에게, 평소에 ‘고쳤으면’싶은 내용들이 당신에게는 많이 쌓여있
어요. 그 자리에서 그 학인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평소에 많이 보아온 것을 가지고 ,
‘오냐 잘 만났다.’하고 그 만난 학인에게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이야기하는지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학인들은 그 스님 안 만나려고, 만났다 하면 보통 한 시간ㆍ두 시간씩이니까요. 너무 간절하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옛날에, 6ㆍ25직후에 강원도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아무 잘 못도 없이 경찰에게 걸렸어요.
그 때는 도민증이라는 것인데, 스님이 그런 것도 제대로 안 갖추고 다녔어요. 무지몽매한 순경들이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얼마나 구타를 했는지 하루 종일 얻어맞은 겁니다.
아무리 때려도 그대로 진실만 말하니까...
그 때는 6ㆍ25직후니까 ‘빨갱이가 혹시 승복을 입고 절에 숨어들지 않았나?’그런 의혹이 참 많았을 때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구타를 해도, 그대로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니까 나중엔 놔 줬어요.
절에 두 신가 세 신가 돼서 올라온 겁니다.
“스님 왜 이제야 왔습니까?” 하니까 상좌들에게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 늦게 왔노라고, 그리고 새벽 세 시
에 모두 일어나서 예불하고 정진하는데, 피투성이가 되도
록 얻어맞은 그 몸을 가지고 반듯하게 앉아서 대중들과 똑 같이 정진을 했다는 겁니다. 낮에도 그렇게 정진하고 밤에도 정진하고,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졸아서, 조는 사이에 끙끙 앓거든요.
상좌들이 보니까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여서, 조사해 보니까 온 몸에 완전히 그냥 피투성이가 되고 멍이 들어서 거의 송장이 다 되다시피 그런 상태가 되었는데도, 빳빳하게 앉아서 그렇게 정진시간을 다 채우고, 그랬다는 스님입니다. 나중에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상좌, 태종대 도성스님.
그 상좌거든요. 돌아가셨지만 도견스님. 도자 돌림인 그
스님들 한데 제가직접 들었습니다.
우리가 모시고 살았는데 그런 스님입니다.
별명이 자비보살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축원을 하는데 그 때 제일 감동스럽게 들은 축원이 그 스님 축원입니다. 그 스님은 선방에 계신데도 낮에 부처님께 불공 올리고 낮 축원은 꼭 그 스님이 했습니다.
수 10년을 해인사 대적광전의 축원은 꼭 그 스님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 스님이 축원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듣기 좋
았습니다. 그래 그 스님축원 들으러 간다니까요.
가서 절하고 같이 예불하고 축원 듣고 했습니다.
그런 아주 훌륭한 스님이었습니다.
가리킬 指ㆍ달 月. 지월스님. 그런 스님이 계셨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정말 그 마음이 盲瞽해서,
아주 캄캄해서 선법을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은 무리가 諸惡衆生이,
모든 악한 중생들이, 가지ㆍ가지로 逼惱할지라도,
핍박하고 괴롭게 할지라도,
無能動亂이라. 능히 그를 움직이게 하고 어지럽게
하지 못한다.
그 스님 정말 그랬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정말로 눈물겹고, 대단한 정진력이다.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 日輪喩
譬如日天子가 出現世間에 不以生盲不見故로
隱而不現하며 又復不以乾闥婆城과 阿修羅手와
閻浮提樹와 崇巖邃谷과 塵霧煙雲인
如是等物之所覆障故로 隱而不現하며
亦復不以時節變改故로 隱而不現인달하야
日輪喩(일륜유)
譬如日天子(비여일천자)가,
日天子衆 있잖아요. 이것은 태양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비유하자면 태양이
出現世間(출현세간)에, 세상에 출현함에
不以生盲不見故(불이생맹불견고)로,
生盲 =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隱而不現(은이불현)하며,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하며,
봉사가 태양을 못 본다고 해서 태양이 어디 숨었나요?
숨은 것이 아니잖아요. 저렇게 하늘에 떠서 쨍쨍 비추고 있잖아요.
又復不以乾闥婆城(우부불이건달바성)과,
또 다시 건달바성과
阿修羅手(아수라수)와 閻浮提樹(염부제수)와
崇巖邃谷(숭암수곡)과, 높은 바위, 깊은 골짜기와
塵霧煙雲(진무연운)인, 먼지, 안개, 연기, 구름.
如是等物之所覆障故(여시등물지소부장고)로,
이러한 사물들이 덮어서 방해를 한 까닭으로
隱而不現하며,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하며,
태양은 태양대로 그대로 태양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亦復不以時節變改故(역부불이시절변개고)로,
또한 시절이 變改한 故로
隱而不現인달하야.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한 것과 같다.
태양은 봉사가 못 본다고 해서 안 나타난 것도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여기 乾闥婆城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큰 산이나 阿修羅手. 閻浮提樹. 이런 것들이, 다른 어떤 방해물 들이 태양을 가린다고 해서 태양이 또한 안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또 어떤 시기가, 밤이 되어서 안 나타난다고 해서 태양이 없는 것도 아니듯이...
라. 合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有大福德하며
其心深廣하며 正念觀察하며 無有退屈하며
爲欲究竟功德智慧하며 於上勝法에 心生志欲하며
法光普照하야 見一切義하며 於諸法門에
智慧自在하며 常爲利益一切衆生하야 而修善法하며
曾不誤起捨衆生心하며 不以衆生이 其性弊惡하야
邪見瞋濁하야 難可調伏으로 便卽棄捨하야
不修廻向하고 但以菩薩大願甲冑로 而自莊嚴하야
救護衆生하야 恒無退轉하며 不以衆生이
不知報恩으로 退菩薩行하야 捨菩提道하며
不以凡愚가 共同一處로 捨離一切如實善根하며
不以衆生이 數起過惡하야 難可忍受로 而於彼所에
生疲厭心하나니
合(합). 비유와 법을 합한다는 뜻이지요.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이와 같아서,
有大福德(유대복덕)하며, 보살은 큰 복덕이 있어서,
其心이 深廣(기심심광)하며, 그 마음이 깊고 넓으며,
正念觀察(정념관찰)하며, 아주 바른 생각으로 관찰해서,
無有退屈(무유퇴굴)하며, 退屈하지 아니하며,
爲欲究竟功德智慧(위욕구경공덕지혜)하며,
공덕지혜를 완성 하고자 해서, 究竟하고자 해서,
於上勝法(어상승법)에, 훌륭한 법에,
心生志欲(심생지욕)하며, 마음에 하고자 하는 뜻을 내며,
法光普照(법광보조)하야, 법의 광명이 널리 비추어서,
見一切義(견일체의)하며, 일체의 뜻을 보며,
於諸法門(어제법문)에, 모든 법문에,
智慧가 自在(지혜자재)하며,
常爲利益一切衆生(상위이익일체중생)하야,
항상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而修善法(이수선법)하며, 선한 법을 닦으며,
曾不誤起捨衆生心(증불오기사중생심)하며,
일찍이 그릇 중생을 버리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보살은 그 상대가 어떻든지 간에 한 번도 중생을 버리려는
마음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不以衆生(불이중생)이 其性弊惡(기성폐악)하야,
중생의 그 성품이 弊惡해서
邪見瞋濁(사견진탁)하야, 사견과 성내고 혼탁해서,
難可調伏(난가조복)으로,
가히 조복하기 어려운 것으로써
便卽棄捨(변즉기사)하야, 곧 捨棄해서,
不修廻向(불수회향)하고, 회향을 닦지 아니치 아니하고,
중생이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서 그 사람 때문에 회향
을 버리는 일은 없다 이 말입니다. 보살은 보살의 의무를
다하고, 보살의 할일을 다 하는 것이지, 상대가 착한데 착
하게 해주고, 좋게 해주는 것은 누군들 못합니까?
누구든지 다 해주지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자기 새끼 돌보는 것은 누구든지 다 하는 일입니다.
여기는 나쁜 놈에게,
나쁜 놈에게도 그렇게 나쁘다고 해서 그를 버리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但以菩薩大願甲冑(단이보살대원갑주)로,
다만 보살의 큰 원력의 갑옷으로써,
而自莊嚴(이자장엄)하야, 스스로 장엄해서,
救護衆生(구호중생)하야, 중생을 구호해서,
恒無退轉(항무퇴전)하며, 항상 퇴전함이 없으며,
不以衆生이 不知報恩(부지보은)으로,
중생들이 은혜 갚을 줄 알지 못한다고 해서
退菩薩行(퇴보살행)하야, 보살행에서 물러나서,
捨菩提道(사보리도)하며, 보살도를 버리지도 아니하며,
‘아이고 저 나쁜 놈 저~ 은혜도 모르고, 참~ 배은망덕한 놈. 에이 보살행이고 뭐고 거둬 치워야 되겠다.’ 허허허 우리가 하다보면 그런 경우 많지요?
위한다고 아주 위하고 그렇게 위해줬건만, 끝내 그 사람
은 은혜를 저 버리고, 등에다 비수를 꽂는 그런 일들이 세
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더라도
보살은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보살도를 버리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기 전부 그런 내용들이지요.
不以凡愚(불이범우)가, 어리석은 범부가,
共同一處(공동일처)로, 한 곳에 살면서,
捨離一切如實善根(사리일체여실선근)하며,
일체사실과 같은 선근을 捨離. 버려서 떠나지도 아니하며,
아주 어리석은 범부하고 같이 산다고해서 한 타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處染常淨(처염상정)하는 것이지요.
같이 살되 和而不同(화이부동)하는 것이지요.
그들과 함께 하지는 않는다.
내면까지 모든 것을 다 함께 하지는 않는다.
和光同塵(화광동진)이니 和而不同이니 하는 말이 그런
뜻이지요.
不以衆生이 數起過惡(삭기과악)하야,
중생들이 자주ㆍ자주 악을 일으켜서, 過惡을 일으켜서,
難可忍受(난가인수)로,
가히 참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써,
而於彼所(이어피소)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生疲厭心(생피염심)하나니.
疲厭心을 내지 아니하느니라.
‘아~ 이제는 중생 참, 정말 못 봐 주겠네.’ 하는 그런 중생이라고 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중생이라고 해서 그들이 있는 곳에서 疲厭心. 그를 싫어하거나ㆍ미워하거나ㆍ버리려고 하거나ㆍ외면하려고 하거나ㆍ떠나려고 하거나,
‘내가 네 안 보면 되지.’ 하는 그런 식으로, 보살은 그런 마음 절대 내지 않는다. ←이런 말입니다.
야~~ 이것 참, 우리가 올라가기는 어려운 큰 나무인데, 나무는 너무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보살이 나무라고 하는 이 거대한 나무는 너무 훌륭한 나무지만, 쳐다보니까 욕심은 나지만 올라가기는 참 어렵고, 그러나 끝내 우리는 정
복해야할 나무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얼마나 근사 합니까?
정말 이런 좋은 법을 설하려고 도솔천궁에 올라가는 이야기. 또 도솔천궁에서부터 게송으로 찬탄하는 이야기.
얼마나 뜸을 많이 들였습니까? 그것이 전부 뜸 들이는데도 보통 뜸이 아닙니다. 전부 마지막에 우리, 지난 시간에 우
리가 봤던 마지막게송이 참 좋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衆生無始來로 生死久流轉하야,
중생이 無始이래로 생사에 오래 동안 流轉해서.
不了眞實法일새. 진실한 법을 알지 못 했을 세.
諸佛故興世로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
중생이 잘살면 부처님이 나올 까닭이 없지요.
중생이 못사니까, 힘들고 고통 받고 못사니까 그들을 구하려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했다.
諸法不可壞며, 모든 법은 가히 무너트릴 수 없으며,
亦無能壞者라. 누구도 그 법을 무너트릴 자도 없다. 말입
니다. 법도 무너지지 않지만, 이 불법을 무너지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가 불법을 무너지게 해요?
스님들이 스님노릇 좀 잘 못한다고 해서 불법까지 무너져요? 아닙니다.
물론 僧重(승중)하면 法重(법중)하고, 승려가 존중하게 살면 법도 존중히 여긴다. ←이런 말이 있긴 있습니다.
사실 그것도 있긴 있어요. 그렇다고 불법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승려들이 잘 못한 일이 부지기수지
요. 그렇다고 불법까지 훼손 돼요? 불법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법을 그렇게 알면 잘 못 알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 신문지상에서 많이 떠들잖아요. 절대 불법은 영원히 훌륭한 법으로 그냥 남아있습니다. 부처님 제자의 탈을 쓰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사실은 불법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불법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아주 훌륭한 불법으로 그냥 남아있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
해야 됩니다. 불법이 그렇게 사람 몸에 딸려서 사람인 우리가 한 둘이 잘못한다고 해서 불법까지도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무슨 불법입니까? 그것은 사람 법이지 불법 아니지
요. 불법은 그렇게 사람한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고요.
自在大光明이, 자유자재한 큰 광명이,
普示於世間이로다. 이 세간에 널리 보이도다.
제가 오늘 10회향 품 이야기하면서 뒤에 미련이 남아서 또 보니까, 야~ 이것 참, 처음부터 뒤로 백해서 이것 설명 좀 하고 갈까? 하다가 그냥 넘어오긴 했는데요.
오늘 법문도 정말 훌륭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아까 이야기했듯이 콩나물 법문을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또 어리석은 새카만 중생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래도 우리의 제8 아뢰야식에,
저 깊은 무몰식에 잠재돼 있어서 언제나 그것이 전혀 싹이 나올 것 같지 않고, 꽃이 필 것 같지 않은 그 딱딱한 나무
등걸에서 봄날에,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는 것과 같이, 우리 아주 완악한 중생에게도,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정말 보살의 꽃을 활짝 피우고, 보살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
니다.
그것 틀림없습니다.
왜냐? 잠재돼 있습니다. 우리들이 본래 잠재돼있는데,
거기에다가 화엄경이라고 하는 물을 계속 붓기 때문에,
화엄경의 물을 계속 부으니까 본래 우리 본마음 속에 잠재돼 있던 것들이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이치는 그런 것입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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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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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도사심.
六度 = 6바라밀. 四心 = 四無量心.→ 慈ㆍ悲ㆍ喜ㆍ捨.
이것이 보살행의 기본, 捨 - 편안함을 주는 것, =평정심=평온함=편안함, 이 모든 것을 합하여 보시 즉 배려하는 마음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智光滅癡暗(지혜의 광명으로써 어리석음을 소멸함)..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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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 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좋다는 뜻도 되고, 아주 좋은 뜻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 淸淨입니다. 그래서
---> 좋다는 뜻도 되고, 하여튼 좋은 뜻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 淸淨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너무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보살이 나무라고 하는 이 거대한 나무는
---> 나무는 너무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보살의 나무"라고 하는 이 거대한 나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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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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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과웁ㄹ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
우리에게 화엄경은 大導師가 되어서, 우리에게 걸림이 없는 큰 지혜를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