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경기도 시흥 시화신도시의 글로비스 중고차 경매장. 현대차 그룹 계열사가 운영하는 이 경매장 주차장(3만3058㎡)에 중고차 500여대가 늘어서 있다. 흙덩이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1.5t 포터트럭부터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벤츠 S클래스, 앞 범퍼가 덜렁거리는 11인승 승합차까지 온갖 차량이 있다.
글로비스 시화경매장은 분당(글로비스), 기흥(대우차판매) 경매장과 함께 우리나라에 3곳뿐인 중고차 경매장이다. 개인이나 법인으로부터 중고차를 출품받아 대당 2% 내외(최대 33만원)의 수수료를 받고 중고차 구매자들과 연결시켜준다. 국내 중고차 시장의 특성상 이들 경매장이 전체 중고차 유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이지만 파급 효과는 상당히 크다고 한다. 특히 이들 경매장은 우리 중고차 수출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 경기도 시흥 글로비스 경매장에서 경매에 나온 차량들을 점검하고 있는 입찰자들.
‘수출 허브’ 글로비스 경매장 국내 중고차 수출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현대차 계열의 글로비스, SK 계열의 SK엔카 같은 대기업들이 중고차 유통과 수출시장에 뛰어들면서 거래 과정이 투명해지며 거래가 활성화되고 있다. 한국중고차수출조합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로 수출된 중고차는 모두 26만4742대. 금액으로는 13억6200만달러에 달한다.
중고차 수출 대수 26만대는 국내 완성차 수출(약 180만대)의 14%, 국내 완성차 내수판매량(약 120만대)의 22%에 달한다. 중고차수출조합 이병하 부회장은 “국내 중고차의 전세계 시장점유율은 대략 7% 정도로 추정된다”며 “이는 EU 180만대, 일본 138만대, 미국 100만대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라고 말했다.
국내 중고차 수출업체는 대략 1000여개. 전국 시군구청에 등록된 4000여개 중고차 업체(수출·내수 총망라) 가운데 4분의 1 정도가 수출업체다. 이 중 시화경매장 회원으로 가입된 업체는 760여개. 국내 중고차 수출 물량의 90% 이상을 책임지는 160개 메이저 수출업체들은 모두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시화 경매장을 통해 직접 해외로 수출되는 차량 1만3815대(2009년)를 비롯해 전체 중고차 수출 물량의 상당 부분은 이곳 시화경매장을 거친다.
경매 시작 2시간 전. 중고차 리스트와 LED 손전등을 든 중고차 업자들이 주차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차량들을 점검했다. 글로비스 측 추산에 따르면 4월 16일 하루 중고차 경매장을 찾아온 중고차 업자는 300여명으로 전국 각지에서 왔다. 김용석 글로비스 경영기획팀 대리는 “이들 업자 가운데 30%가량은 수출업자”라고 말했다.
또 이 가운데는 요르단과 리비아 등지에서 날아온 외국인 바이어도 포함돼 있다. 요르단에서 온 중고차 바이어 라미(30)씨는 중고 아반떼의 문을 열고 웨더 스트립(문 틀에 끼워진 고무 패킹)을 ‘드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뜯어냈다. 라미씨는 “웨더 스트립을 뜯어보면 차량의 사고유무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며 손으로 이곳저곳을 만져본다.
LED 손전등을 비추며 차 바닥을 확인한 라미씨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키 박스에 꽂혀 있는 키를 돌렸다. 그는 “엔진 소리로 엔진 성능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라며 ‘부르릉’ 시동을 걸었다. 라미씨는 “아반떼, 엑셀(국내에서는 엑센트란 이름으로 판매됐음) 등이 요르단서 가장 인기가 많은 차종”이라며 “이번 경매에서는 중고 아반떼 두 대 정도를 낙찰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라미씨가 아반떼 한 대를 살펴보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30초. 라미씨와 함께 경매장을 찾은 중고차 수출업체 리버의 안혜선 과장은 “요르단 바이어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최소 1개월에서 대개 2~3개월씩 한국에 머물면서 중고차 물량을 확보한다”며 “한번 입국하면 최소 30~40대, 최대 70~80대의 물량을 확보해 간다”고 말했다.
한번에 최대 7억~8억 사들여 중고차 대당 평균가를 1000만원으로 잡으면 대략 최대 7억~8억원의 돈을 쓰고 가는 것이다. 이렇게 안 과장이 상대하는 요르단 바이어는 연간 6~7명에 달한다. 해외 바이어들은 대개 국내 수출업체들로부터 통·번역과 선적 업무 등의 지원을 받지만 국내 업체들의 도움 없이 동료 2~3명과 함께 바로 이곳 경매장을 찾아오는 바이어도 있다고 한다.
중고차수출조합 이병하 부회장에 따르면 국내에는 대략 300~1000명 사이의 해외 바이어들이 항상 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중동계 바이어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기 때문에 700명이란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주로 중동이나 동남아 바이어들은 국내에 와서 직접 물건을 보고 가져가는 반면 남미 쪽 바이어들은 비싼 비행기표 때문에 현지에서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 주문을 낸다고 한다.
라미씨 같은 요르단 바이어들이 지난 2009년 한 해 동안 매입한 중고차는 모두 8만5962대. 지난해 해외로 수출된 중고차 26만4742대 가운데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는 2008년 수출물량(5만4000여대)에 비해 3만대가량 늘어난 수치다. 수출금액으로는 3억7000만달러에 달한다. 요르단 인근 리비아와 이집트로 팔려나간 국산 중고차도 각각 3만6000여대와 6000여대에 달한다.
오전 내내 중고차들을 뜯어본 입찰자들이 2층 입찰장에 자리를 잡았다. 입찰자들은 대략 30대 정도의 중고차를 ‘먹잇감’으로 점찍어 둔다고 한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실제로 가져가는 차는 대개 2~3대에 불과하다. 일단 마음에 드는 중고차를 점찍으면 다른 업자들이 차를 못 가져가도록 중고차 키박스에 꽂혀 있는 키를 몰래 다른 곳에 감춰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입찰자들은 경매 시작 전 막간을 이용해 경매장 2층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며 “얼마 들고 왔냐” “오늘은 몇 대 받아가냐”며 탐색전을 벌였다. 하지만 요르단 등 해외 바이어들은 한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주변 상가에서 피자 등을 배달시켜 먹는다고 한다. “제86회 중고차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글로비스 경매장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중고차 경매를 진행한다. 법원 부동산 경매와 달리 사회보는 사람도 없이 철저히 IT에 기반한 전자식 경매로 진행된다. 외국인 바이어들이 참가하는 데도 별 문제가 없다. 입찰장에는 개인좌석 500개를 비롯해 개인용 모니터와 입찰용 유선 리모컨이 좌석마다 마련돼 있다.
▲ LED 손전등을 들고 중고차를 점검 중인 요르단 바이어.
전자식 입찰로 물량 확보 오후 1시, 입찰이 시작됐다. 극장식 경매장의 한가운데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경매번호 1006번 2007년식 아반떼(배기량 1600㏄)차량이 떠올랐다. 사고 유무, 사용 용도, 종합 평점 등을 기록한 재원도 화면으로 제공된다. 개인 좌석 아래로 회원 카드를 삽입하자 개인용 LCD 모니터가 켜졌다. 개인용 모니터에도 대형 스크린과 같은 화면이 떠올랐다. 입찰자들은 유선 리모컨 위에 달린 빨간 버튼을 ‘딸깍딸깍’ 눌렀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3만원씩 가격이 올라간다. 5명 이상이 한꺼번에 버튼을 누르면 모니터에 노란불이, 10명 이상이면 빨간불이 들어온다. 누르는 사람이 5명이 안되면 녹색불이 들어와서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입찰자에게 차량이 돌아간다. 시작가 670만원에 시작한 1006번차는 빨간불이 켜지더니 871만원에 최종 낙찰됐다.
반면 시초가 866만원에 시작한 GM대우 마티즈는 시작한 지 10초도 안돼 유찰등이 들어왔다. 글로비스 시화경매장의 유종수 부장은 “대개 2~3번 유찰되면 가격을 낮춰서 새로운 주인을 찾아간다”며 “현대 아반떼는 중동 바이어들을 포함해 가장 인기가 많은 차종이라 경매가 치열하다”고 했다.
경매를 통해 낙찰되는 차량은 시간당 80~90대. 1분에 1.4대꼴로 새 주인을 찾는다. 유종수 부장은 “지난 2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IT기술에 기반한 정적인 경매문화가 자리잡히는 듯한 느낌”이라며 “전자경매 초기만 하더라도 자기가 찜한 물건이 자신에게 낙찰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면 ‘야 XX, 그만 눌러, 내 차야’하고 허공에 소리쳐대는 업자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 경기도 시흥 시화신도시에 있는 글로비스 중고차 전자경매장.
낙찰차량은 인천 송도유원지로 국내 수출업체에 낙찰된 중고차는 탁송 서비스를 통해 인천 송도유원지 일대로 건너간다. 인천 연수구 옥련동 송도유원지 일대에는 수출업체를 포함 중고차 업체 450여개가 모여있다. 분당, 시흥, 기흥의 중고차 경매장에서 중고차를 매입해 마당에 깔아놓고 판다. ‘마당에 깔아놓고 중고차를 판다’고 해서 업계에서는 ‘마당장사’란 이름으로 통한다. 인천서 마당장사를 하는 한 관계자는 “요르단이나 중동 현지에 직접 현지 매장을 개설하는 업체도 있지만 극히 소수”라며 “우리나라 중고차 수출에서 이곳 ‘마당장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90% 정도”라고 했다. 마당에 깔린 중고차를 찾는 사람도 역시 요르단이나 리비아 등지에서 찾아온 바이어들이다.
환율과 매집상황, 차량상태에 따라 시세가 크게 요동치는 중고차 시장의 특성상 대개 이들 바이어들은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물건을 골라간다. 최근 중산층이 폭증하고 있는 요르단 등에서는 가격이 적당한 국산 중고차가 신차보다 오히려 인기라고 한다. 대가족 제도를 유지하는 리비아에서도 국산 중고차는 ‘세컨드카’로 인기라는 후문이다.
인천 연수구 옥련동 수출2단지에서 요르단 등지로 중고차를 수출하는 세인트카무역의 김정안 대표는 “요르단은 중고차 통관과 세관 업무 등이 중동 다른 국가에 비해 편리한 편”이라고 말했다. 홍해와 맞닿아 있는 요르단 유일의 항구 알 아카바항은 지난 2001년 경제특구(ASEZ)로 지정돼 중고차 수출과 통관, 세금 등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고차 거래에는 아랍 상인 특유의 기질도 발휘되는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는 “요르단 친구들은 두바이 친구들처럼 무역을 참 잘한다”며 “요르단 바이어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국내에서 중고차를 매입해 가면서 국내 업자들과도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고 했다.
중동의 중고차 수출 허브로 쓰이는 요르단 알 아카바항은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로 과거 아라비아 대상(隊商·카라반)들도 애용하던 항구다. 지금도 내륙국인 이라크나 시리아 등지로 들어가는 중고차는 대부분 알 아카바항에서 하선한 뒤 육로를 통해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요르단 상인들은 중개료를 챙긴다.
물론 중고차 시장에서 거래되는 차량 중 도난차량도 있고 인천항을 통해 밀수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인천세관이 적발한 밀수출 중고차는 174대. 한 중고차 업계 관계자는 “영세 수출업자들의 경우 세원노출 등을 우려해 정확한 수출규모를 공개하기를 꺼린다”며 “또 세금문제 등을 고려해 바이어와 상호협의하에 거래 금액을 낮춰 기재하는 ‘다운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털어놨다.
오픈마켓으로 인터넷 수출도 하지만 국내 대기업이 직접 중고차 수출전선에 나서면서 수출 시장도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다. 지난 2000년 중고차 시장에 뛰어든 SK엔카의 경우 2006년 중고차 2대를 태국에 수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고차 수출 전선에 합류했다. 특정 지역과 특정 차종만을 집중 공략하는 개인사업자들과 달리 SK엔카는 요르단, 이집트, 베트남, 러시아 등 전세계를 상대로 중고차를 판다. 해외 영업사원도 두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세계 30여개국에 3000여대의 중고차를 수출하며 큰손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2008년 무역의 날에는 수출 1000만달러탑도 수상했다.
더욱이 지난해 12월에는 전세계를 상대로 한 중고차 오픈마켓 오토위니도 개설했다. 오토위니 홈페이지는 한국어와 아랍어, 러시아어 등 7개 언어로 서비스된다. 중고 굴삭기, 크레인, 지게차, 덤프트럭은 물론 차량 부품까지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SK엔카 임민경 홍보팀장은 “최근 중고차 거래가 인터넷 오픈마켓을 통해 이뤄지면서 얼굴 한번 보지 않고 거래되는 중고차도 상당량”이라고 말했다.
수출시장 변수 일본 하이브리드 중고차 복병… 요르단 중고차 시장 ‘빨간불’
중고차 수출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올해 들어 요르단 시장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고 한다. 지난 3월 7일 이라크 총선을 전후해 중동 지역의 치안 사정이 악화되면서부터다. 한국중고차수출조합 이병하 부회장은 “요르단 바이어가 사가는 차량의 상당 부분은 대부분 이라크 등지로 재수출되는 물량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라크 정세가 악화되면 수출 중고차 경기 역시 악화될 수밖에 없다.
원화가치 상승에 따른 환율하락도 중고차 수출시장에 불안요인이다. 대우차판매 수출팀 출신으로 인천 송도에서 대원트레이딩이란 회사를 운영하며 리비아와 라오스 등지로 중고차를 수출하는 이 부회장은 “경기와 환율이 중고차 수출에 있어 양대 핵심변수인데, 경기와 환율 등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영업한다고 애를 써도 말짱 도루묵”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일본산 하이브리드 중고차는 요르단 중고차 시장에 복병으로 등장했다. KOTRA 암만(요르단 수도) 무역관에 따르면 지난해 요르단으로 수입된 도요타와 혼다의 중고 하이브리드차는 모두 4769대. 중동에서 판매되는 중고 하이브리드차의 대당 가격은 약 1만2700달러. 국산 중고차 평균가(약 8500달러)에 비해 비싸지만 유지비가 워낙 저렴해 중동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국산 중고차 시장에는 외국으로 수출할 하이브리드차가 전무하다. 신차 시장에서 하이브리드 차량이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미미해 중고차 시장으로 흘러들어오는 물량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에서 LPi 하이브리드차를 판매하고 있지만 수출 전망은 어둡다. LPi 하이브리드는 중동에서 주로 사용하는 가솔린(석유)이 아닌 천연가스를 쓰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석유가 지천에 깔린 중동에서 LPG(천연가스)로 돌아가는 현대차의 하이브리드 중고차를 사갈 리가 만무하지 않느냐”면서 “중고차 시장점유율은 신차 시장점유율을 그대로 반영하는 만큼 일본 중고차에 더 밀리기 전에 우리나라도 하이브리드 차량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