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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세종대왕 탐구 기행
(24회 서울시민과 문인들이 함께하는)
■ 일 시: 2016년 5월26일(목)
■ 장 소: 국립한글박물관. 영릉(英陵세종대왕릉). 영릉(寧陵효종대왕)
신륵사
■ 참가자: 서울시민과 문인 80명
■ 강 사: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1960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문학과 역사, 지리를 집중 탐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부터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을 시작했으며,
학교 및 단체에서 수백 회의 인문학기행을 진행했다.
저서로 <사색의향기문학기행>,<서울문학지도>외 다수가 있으며,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지학사)에
문학기행 <이병기시인을 찾아서>가 게재 되었다.
2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에서 문학특강,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였다.
몇 년간 서울문화재단 주최의 <서울문학기행>을 진행하였으며,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주최하고,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서울시민과 문인들이 함께하는 詩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진 행: 1호차: 김율희(시인, PEN문학 편집장)
이애정(시인)
2호차: 이다경(시인)
김자은(시인)
■ 문 의: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처
전화02)782-1337~8
■ 주 최: 서울특별시
■ 주 관: 사)국제PEN한국본부
■ 후 원: 서울특별시
■ 세부일정표
2016년 5월26일(목)
9:30 출발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 오성빌딩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1번 출구> 서강대교 방향 10분 거리
명찰, 간식, 자료집 배부
9:30~10:00 국립한글박물관으로 이동
10:00~11:10 국립한글박물관 관람
11:20~12:00 점심식사 -국립중앙박물관 나무레스토랑 02)796-0713
12:10~14:00 영릉(英陵세종대왕릉)과 영릉(寧陵효종대왕릉)으로 이동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번지
14:00~15:30 영릉(英陵세종대왕릉), 영릉(寧陵효종대왕)
참배 및 답사
16:00~17:00 신륵사 탐방
-나옹화상(1320~1376)과 목은 이색(1328~1396)의 삶과 문학의 현장
17:10 출발
19:00~20:00 광화문(지하철5호선)과 서울시청역(지하철1. 2호선) 도착 해산 예정
■ 상황에 따라 일정이 변경이 될 수 있습니다.
한글과 세종대왕 뿌리 찾기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세종대왕과 영릉(英陵)
여주는 문화유산이 많은 역사의 고장이다. 특히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영릉(英陵)이 있기에 여주의 위상은 매우 높다. 세종대왕의 능은 처음에 광주에 있다가 여주로 옮기면서 조선왕조가 백 년이 더 연장되었다는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설이 있을 정도로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터다.
세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성군’ 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반대할 사람이 없는 세종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우리 국민에게 가장 존경 받는 분이다. 세종대왕(1418~1450)의 재임기간의 성과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형편없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당대에 이미 세종은 ‘해동요순’이라 불려졌다. 집권기에 유교의 도덕정치와 민족문화는 찬란하게 꽃이 피었고, 왕도의 길은 후왕들의 모범이 되어 주었다.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사뭇 길다.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1394∼1462)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은 날은 1418년 6월3일이다. 양녕대군을 폐한 것은 세자의 행동이 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갈 수 없다고 신화들이 상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녕대군은 선량하고 총명하며 민첩하여 자못 학문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정치의 실체를 인식하기 때문”에 태종에 의해 세자로 간택되었다.
1408년(태종8) 충녕군(忠寧君)에, 1412년에는 충녕대군으로 임명되었다.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 된 후, 2개월 후인 8월에 조선의 제4대 왕으로 등극한다. 태종이 많은 피를 보면서 강화시킨 왕권을 기반으로 세종은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시킬 다양한 정책을 시행한다.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승정원의 기능을 크게 강화했다. 집권 2년 후인 1420년에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다. 집현전은 젊고 실력있는 학자들을 육성했다.
집현전이 있던 장소는 현재 경복궁 수정전이 있는 곳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27대왕 중에서 세종대왕과 가장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궁궐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도 가장 먼저 건립한 정궁(正宮)이다.
1388년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한다. 1392년 개성에서 왕으로 즉위한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王씨에서 李씨로의 역성(易姓)혁명이었다. 1394년 12월4일 경복궁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5년에 중요 전각을 완성하여 경북궁의 골격을 완성한다. 경복궁의 이름은 시경(詩經)의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대대손손 조선 왕조에 경사스럽고 큰 복을 기원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묘하게도 경복궁은 한양의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건축되었지만 왕들이 머문 기간은 짧다.
세종. 문종. 단종. 고종이 이곳에서 주로 기거했을 뿐이다. 왕자의 난으로 경복궁에서 피를 본 태종이 경복궁을 기피하면서 1405년(태종5년) 지어진 궁이 창덕궁(昌德宮)이다.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 역시 경복궁을 기피했다. 그 역시 창덕궁에 살면서 집무를 보았다. 불행하게도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전소된다. 그것도 한양의 백성들에 의해서 불에 타는 수모를 겪었다. 그나마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1865년 폐허로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복원하였다. 1868년 경복궁 복원공사가 완료되었으니 경복궁은 실로 270년 동안 폐허 상태였다.
경회루 남쪽에 있는 수정전은 세종대왕 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이다.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집현전 자리에 지었던 건축물이다. 정면 10칸 측면 4칸이니 그 규모를 알만하다. 수정전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보면, 560년 전에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방문하던 상상을 하게 된다.
어느 해 늦은 밤, 세종은 하루 종일 연구에 열정을 다하다가 잠시 잠든 신숙주에게 곤룡포를 덮어주고 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세종은 그런 분이었다.
경복궁은 세종대왕의 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종은 단명했으며, 단종은 왕위에 오르자 영월로 유배를 가서 죽음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고종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막판에 덕수궁에서 처량한 만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집권 32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조선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결국 경복궁은 세종대왕의 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집현전에서는 학술연구 서적편찬과 왕과 세자의 학문적인 자문 교육도 겸했다.
이곳에서 근무했던 학자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정인지등이다. 이들은 세종대왕의 민본정치를 추진하고,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던 세종의 사람들이었다.
<효행록〉,〈삼강행실도〉,〈주자가례>를 발행하여 보급하는 한편, 유교적인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헌신한다. 1419년 사사노비(寺社奴婢)의 정리를 시작한다.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백성을 사랑했던 분은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사면령을 자주 내렸으며, 부역에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노비들의 처우를 개선한 것은 물론이며 주인이 가혹한 형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혹시 실수로 노비를 죽인 경우에도 그 주인을 강력하게 처벌 했다.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는데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했다. 출산을 당한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는데 무려 그 기간이 1개월이나 되었다. 왕의 이런 애민정책이 너무하다며, 상소를 올리는 선비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백성 사랑의 정점의 끝에는 한글창제가 있다.
세종의 대외정책은 훌륭했다. 명에 대해서는 사대와, 왜와 여진 에게는 교린의 대외정책을 강구했다. 이것은 태조 이래 써온 대외정책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명나라에 처녀를 바치는 것이나 금과 은의 조공을 폐지한다.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 최윤덕에게 명령을 내려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냈다. 이곳에 6진(六鎭)과 4군(四郡)을 설치하고 백성을 이주시켰다.
1419년 이종무(李從茂1360년~1425년)에게 명령하여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그들의 회유를 위해서 1423년 삼포(三浦)를 개항한다. 이곳에 왜인들의 출입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발생하자. 1443년 계해조약을 맺는다. 내용은 세견선과 세사미(歲賜米)의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하였다.
세종이 우리 민족을 위해 남겨진 최대 문화유산은 훈민정음이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문연구와 각종 예술 활동 및 편찬사업이 주도 되었다.
세종대왕 집권 10년 후인 1428년 이후 본격적으로 간행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발행된 간행도서는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등의 역사서, 〈사서언해〉,〈효행록〉,〈삼강행실도〉,〈오례의주〉등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 〈명황계감〉〈치평요람〉등의 중국정치서, 〈운회언역〉,〈용비어천가〉,〈동국정운〉등 훈민정음이나 음운. 언해 관계 서적, 〈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등의 의서, 〈농사직설〉등의 농서를 비롯하여 중국법률, 중국문학, 천문, 병서 등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의 가계도를 보면, 부인 6명에서 자녀가 무려 18남 4녀 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족을 거느리면서도 그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세종대왕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교의례에는 다양한 음악이 필요했다.
이 무렵 다양한 악기를 조율할 수 있는 율관(律管)이 제작되었으며,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정간악보(井間樂譜)가 제작되었다. 결국 음악학이 발달한다. 조회아악(朝會雅樂)과 제례아악(祭禮雅樂)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세종의 이런 음악적인 성향과 열정을 뒷받침해 준 사람이 있었다. 충북 영동 출신 박연이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백성사랑에서 창제되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느끼는 연민의 정은 남달랐다.
훈민정음은 1433년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언해의 서문은 언제 읽어도 세종의 깊고 넓은 백성 사랑을 느끼게 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세종이 1418년에 집권하고 25년이 되던 1433년에 완성하고, 1446년 10월에 반포한 훈민정음은 우리민족에게 내린 축복이다.
세계적으로 문자를 만든 이유와 정확한 연도를 명시한 것은 훈민정음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세종의 당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탄압을 받아왔다. 한문을 익힌 자들의 기득권 때문이었다. 언문(諺文),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등으로 불러지며 수모를 견뎌야 했다. 한글은 제대로 교육 받으면 10일이면 글자를 모두 해독하고 독서가 가능하다.
조선시대 지배자들이 이를 모를리가 없었다. 한문을 평생 배워 입신출세를 하려는 자들에게 한글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로 보였다.
그들에게 평민들 모두가 글자를 깨우치고 지식인이 된다고 하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글을 박해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때로 의미있는 상상을 동반한다.
만약 세종대왕께서 한글 반포 후 10년 이상 생존하였다고 하면, 한글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종대왕은 한글반포 4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어렵게 창제한 한글도 세종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천대를 받아야 했다. 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해방이 되면서 남과 북이 '한글'로 부르며, 세종대왕의 위업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글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국제화라는 미명하에 조기 교육을 한답시고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먼저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살아오신다면 가장 실망하시면서 격노할 일이다.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다. 한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체계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음절 단위로 기록하는 음절 문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1446년 당시 훈민정음 창제 때의 문자 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다. 그러나 초성의 3자와 중성의 '1자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싸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젼차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옳배 이셔도 마침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할노미 하니라 내 이를 爲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히여수비 니겨 날로 쓰메 便安킈 하고져 할 따라미니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류통)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를 가지고 서로 통하지가 않는구나.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고우민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끝내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자가 많도다.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여위치민연 신제이십팔자)
내가 이를 위해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배워 매일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학자들인 박팽년, 최항,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의 노력의 결실이다. 당시 중국에는 운학(韻學)이 존재했다. 이것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서였다.
세종은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운학에서 의문나는 점을 질문했다. 성삼문에게 명하여 요동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에게 13번을 방문하게 하였다. 방문 목적은 음운에 관해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치밀한 분이셨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에도 바로 반포하지 않았다. 3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어 다양한 실험을 했다.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짓기도 하고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해례서(解例書)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용비어천가는 장편 서사시이다. 조선 건국 초기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에서 생겨난 노래이다. 〈용비어천가〉라는 노래 이름은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이다. 〈주역 周易〉의 건괘(乾卦)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표현하였다.
海東(해동) 六龍飛(육룡비)莫非天所扶(막비천소부)古聖(고성)同符(동부)
이를 해석하면 "해동(조선)의 여섯 용(왕)이 날으시어서, 그일(조선건국)마다 모두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 옛날의 성인(중국 개국 성군)의 하신 일들과 동일하도다."이다. 해동은 조선을 의미하며, 6용(六龍)은 조선 창업 주역인 6조를 비유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터 조부까지와 태조. 태종을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등이다.
결국 용비어천가는 하늘에 뜻에 따라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배경이라고 하지만 설화를 소재 삼아 세종의 조상이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의 영웅담을 소개한 내용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정인지, 권제, 안지를 시켜 짓게 하였다. 1445년에 완성하고 세종이 직접 '용비어천가'라 제목을 달았다.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에게 용비어천가의 주해를 달게 하였다. 이는 다른 주해가 오해를 낳을 수 있음을 염려해서였다.
〈용비어천가〉를 노래로 부를 때는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했다. 이 곡명을 사용한 것은 백성들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 감동이 백성에게까지 전달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훈민정음
1443년(세종25년) 음력 12월에 28자가 만들어졌다. 3년 후인 1446년(세종28년)음력 9월에(양력 10월9일)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훈민정음>의 서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글을 창제하였다는 것은 세종대왕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정신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글의 원리는 우리말의 닿소리를 그 나는 자리에 따라 어금닛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잇소리, 목소리의 5가지로 분류했다. 당시 세종대왕은 5가지 소리에서 대표적인 소리를 하나씩 뽑아냈다.
어금닛소리에서는 ㄱ, 혓소리에서는 s , 입술소리에서는 ㅁ, 잇소리에서는 t, 목소리에서는 ㅇ 어금닛소리는 혓바닥의 뒤쪽을 입천장에 올려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ㄱ' 자를 만들었다. 혓소리는 혀끝을 윗잇몸에 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그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ㄴ'자를 만들었다. 입술소리는 입술을 닫고 내므로 입술의 모양을 그려 'ㅁ'자를 만들었다. 잇소리는 혀끝을 감아서 나오는 공기의 흐름이 윗니 끝을 스쳐서 나는 소리이므로'ㅅ'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한글이 창제되었을 때의 공식적인 이름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을 줄여 '정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언문>은 한글을 낮추어 부르면서 한문에 대해서 우리 토박이 말을 적는 글자란 뜻으로 사용했다. 여성들이 사용한다는 <암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 국운이 위태로울 때에 한글을 <국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글이란 명칭은 한글학자 주시경에 위해서였다.
1907년부터 주시경(1876~1914) 선생은 '하기국어강습소'를 개설하고,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를창립한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국어'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되자 학회의 이름을 '배달말글 몯음'이라고 했다. 1913년에는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7년에 기관지인 〈한글〉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한글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을 담고 있다. <한글> 훈민정음을 대신한 가장 완벽한 이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기본글자의 수는 24자이며,
닿소리는 다음과 같다.
ㄱ 기역 k /ㄲ 쌍기역 k' /ㄴ 니은 n /ㄷ 디귿 t
ㄸ 쌍디귿 t' /ㄹ 리을 l /ㅁ 미음 m
ㅂ 비읍 p/ ㅃ 쌍비읍 p' /ㅅ 시옷 s
ㅆ 쌍시옷 s' /ㅇ 이응 ŋ /ㅈ 지읒 č
ㅉ 쌍지읒 č' /ㅊ 치읓 čh /ㅋ 키읔 kh
ㅌ 티읕 th / ㅍ 피읖 ph /ㅎ 히읗 h
홀소리는 다음과 같다.
ㅏ 아 a / ㅐ 애 ε / ㅑ 야 ja
ㅒ 얘 jε / ㅓ 어 ə / ㅔ 에 e
ㅕ 여 jə / ㅖ 예 je /ㅗ 오 o
ㅘ 와 wa / ㅙ 왜 wε /ㅚ 외 ø/we
ㅛ 요 jo / ㅜ 우 u / ㅝ 워 wə
ㅞ 웨 we / ㅟ 위 y/wi / ㅠ 유 ju
ㅡ 으 ï / ㅢ 의 ïi / ㅣ 이 i
한글은 표음문자(表音文字)로서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사용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인정받는 이유다. 한글은 창제 연대와 창제자를 알 수 있으며, 일시에 반포되고 사용된지 어언 600년이 가까이 사용되고 있는 문자이다. 이런 글자는 전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 영릉이 자리 잡고 있는 여주
여주는 세종대왕의 영릉이 자리 잡고 있는 고을이다.
남한강이 휘돌아 가는 들은 기름지고 언덕 같은 산들이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다. 강변을 따라 여주의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다.
지정학적으로 광주산맥, 태백산맥, 차령산맥의 영향을 받고 있는 여주는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원주시, 서쪽으로 이천시, 광주시, 북쪽으로 양평군, 남쪽으로 충주시, 음성군과 경계지역이다.
여주 남서쪽인 여흥동, 중앙동, 가남읍, 능서면은 들이 넓고, 북동쪽지역인 강천면, 북내면은 주로 산지지역이며, 금사면을 포함한 북서부지역은 광주산맥으로 주변에 비해 높은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주는 “들이 넓고 평평하며 산은 멀게 보이는 곳(野平山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목은 이색(1328~1396)은 옛 여주의 모습을 시로 표현하였다.
驪江一曲山如畵(여강일곡산여화) 여강의 굽이굽이 산이 그림 같아서
伴似丹靑半似詩(방이단청방이시)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와 같다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대동강의 평양, 소양강의 춘천, 여강의 여주는 우리나라의 삼대 강촌이다” 라고 기록했다.
여주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여주팔경을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신륵모종(神勒暮鍾)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마암어등 (馬巖漁燈)마암 앞 강 가에서 고기잡이 배들의 등불 밝히는 풍경
학동모연 (鶴洞暮煙)강 건너 학동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
연탄귀범 (燕灘歸帆)강 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양도낙안 (洋島落雁)양섬에 기러기떼가 내리는 모습
팔수장림 (八藪長林)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이릉두견(二陵杜鵑)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파사과우 (婆娑過雨)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여주시청 홈페이지 여주팔경(驪州八景)중에서 인용
여주시는 한남정맥(漢南正脈) 한강수계의 근원이 되는 충주시를 관통하는 달천(達川, 달래강)과 강원도와 경계인 섬강이 만나는 남한강의 합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여주시의 다양한 지천들이 남한강에 합류되면서 수량을 키운다.
이런 지류를 따라 농경문화를 꽃피웠으며, 비옥한 터전을 기반으로하여 물류의 중요 거점인 나루터가 있었다. 그러므로 한양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농산물의 집산과 운송의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 영릉이 있는 여주의 역사와 문학
남한강 유역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다양한 전쟁을 벌였다. 4세기 이후에 5, 6세기의 주도권 쟁탈권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막을 내린다.
당시 한강유역은 삼국의 주도권 따라 많은 변화를 겪는다.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의 <파사성>은 당시 한강유역 요새중의 한 곳이었다. 당시 여주지역에 설치되었던 <골내근정>은 신라 군사제도였던 6정(停)의 하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조>에 의하면, 신라지역인 당시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현(骨乃斤縣)이었다. 또 다른 여주 지명에 관한 문헌인 <삼국사기> 지리(地理)편에는 여주지역은 ‘기천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영역인 술천군에 편입되어 있다.
통일신라 때에 군사조직은 중앙의 9서당과 지방에 배치된 부대는 10정이었다. 10정중에서 한산주에 설치되었던 이천 지방의 남천정(南川停)과 여주지방의 골내근정의 2개정을 중시했다. 여주에는 10정 중의 하나인 골내근정이 설치되었던 것이 군사적 요충지임이 증명되었다. 충주와 단양으로 이어진 경상도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경상도로 이어진 육로는 이천을 거쳐 충주 문경과 상주로 이어졌으며, 강으로 가는 길은 여주를 거쳐 충주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 풍기로 이어졌다.
757년에는 ‘황효현’이라는 지명이었다가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황리현으로 바뀐다. 1305년(충렬왕 31년)여흥군, 1401년에 태종의 비였던 원경왕후 민씨의 고향이란 이유로 충청도로부터 경기도로 이관한 후에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469년(예종1년)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 성산으로 옮기며 <여주>라는 지명을 얻는다.
겨레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음택이 있는 곳이기에 여주란 지명을 얻어 오늘에 이른다.
이 무렵에 여주에 편입된 ‘천령현’은 고구려 때에는 ‘술천군’이었다.
조선시대 여주는 다양한 행정 개편으로 그때마다 위상이 달랐다. 태조, 정종 때는 군(郡), 태종 때 부(府), 예종 때는 목(牧)으로 변했다. 중앙집권제였던 조선은 파견되는 공무원들의 급이 달랐다. 도호부사(종3품), 목사(정3품), 판관(종5품), 교수(종6품)가 각 1인씩 있었다. 파견된 목민관은 백성을 통치하고 관리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의 직무수행 능력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 임명에 신중하였으며 감사를 중시했다.
수령의 임기는 대략 1,800일(5년)이었다. 또한 농업을 부흥시키고,
인구를 늘리며, 세금을 받아 내는 업무와 교육, 군정, 부역의 균등, 송사문제, 향리의 부정방지 등이 중요 업무였다. 할당 된 세금 징수의 의무는 국가재정의 토대가 되어주었으며, 수령의 임무 중 가장 중요했다. 관찰사는 이것을 각 지방 수령의 고과표(考課表)를 선(善), 최(最), 요(要), 전(殿)의 4등급으로 작성하여 1년에 2회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를 전최(殿最)라 하였는데, 수령들의 승진과 퇴출에 큰 영향을 주는 문서였다. 향교에는 교생지도를 담당하는 교수를 파견하였다. 교수는 지방의 교학의 책임자였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충주부 여주군, 1896년에 경기도 여주군이 되어 최근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였다.
2013년 9월 23일에 여주군은 인구 약 11만 명의 여주시로 승격된다.
여주 출신의 이규보(1168~1241)는 고려시대의 문인이다. 고려 무신정권에 결탁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우리민족을 위한 문학에 헌신했다. 이규보는 태어나자 중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난다. 아홉 살에 신동이라 불릴 만큼 글재주를 보인다. 그러나 늘 과거시험에는 낙방을 하였기에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
이규보란 이름의 유례도 과거시험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이규보의 본래 이름은 인저(仁底)였다. 그의 나이 22세 때 사마시에 응시하기 전 날 꿈에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너는 이번 시험에 꼭 장원을 할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아라”. “하늘의 비밀이니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결국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름을 규보(奎報). ‘별이 알려주다’로 개명한다. 당시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인로, 이담지, 함순등과 함께 연회에 불려간 이규보는 무인정권의 실세였던 최충헌으로부터 시의 재주를 인정받아 전주목사의 서기직을 얻게 된다.
문학에 탁월했던 이규보는 중국문학을 모방하던 풍조를 버리고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다. 이 서사시는 우리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었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고려 정부를 강화도로 옮겨 대장경을 만들 때에도 민족수호의 충성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직접 작성한다. 젊은 날의 벼슬길은 순탄했지만 63세 때 유배를 당하기도 한다. 고종 24년 69세에 고향으로 가서 쉬게 해 달라는 편지를 쓰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70세의 나이에 ‘문하시랑평장사’라는 오늘날의 부총리 자리까지 오른다.
1241년 9월2일 세상을 떠났으며, 강화의 진강산 기슭에 임금의 명으로 장사를 지냈다. 동명왕편은 주몽으로 알려진 동명왕의 영웅적이고 모습들을 찬양한 장편 서사시다. 그는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몽고침략시기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을 찬양하고 역사적인 실체를 가지고 시를 썼다.
고려 초기 문인들의 허상적인 관념론을 탈피한 민족문화를 재인식하게 만든 동명왕편의 의미는 대단하다. 그는 처음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을 황당무계한 전설로 알고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인의 긍지를 품고 141행이나 되는 서사시를 쓰게 된다.
이 서사시 몇 구절을 읽는다.
먹구름이 산과들을 덮어
산맥도 보이지 않는다.
수천의 백성들의 소리
나무 자르는 소리 같다.
왕은 말했다.
하늘이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성을 쌓으라 한다.
갑자기 안개와 구름이 걷히더니
궁궐이 높이 솟아올랐다.
고려시대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곧 주몽의 이야기를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음을 이규보 선생은 서두에 쓰고 있다.
고려의 운명이 몽고의 말발굽아래 밟혀서 바람 앞에 등불이 되던 시절에 이규보 선생은 절망상태에서 붓을 든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절망한 고려의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동명왕편의 서사시는 오늘까지 전하며 나라 사랑을 전한다.
동명왕편의 서사시 본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기(元氣)가 혼돈 없애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어났다.
십삼, 십사, 머리모양
체모(體貌)도 기이터라.
그 남은 어진 제왕(帝王)
경사(經史)에도 올라 있다.
여절(女節)은 대성(大星)느껴
대호지(大昊摯) 낳았고,
여추(女樞)는 전욱(巓頊) 낳되
그도 칠성(七星) 느낌이라.
복희씨(伏羲氏)는 제사법을,
수인씨(燧人氏)는 불(火)의 발명,
동명왕의 탄생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되는 서막이 사뭇 경이롭다. 동명왕인 주몽의 죽음에 관한 사실은 아직은 미정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 제1'시조 동명왕' 19년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을(9월)에 왕은 운명하셨다. 이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가 원문: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 龍山 號 東明聖王)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성왕의 이런 내용이 오늘까지 두 눈뜨고 살아있다.
이런 분의 일대기를 대서사시로 쓰기 위해 헌신했던 분이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선생이다. 여주 신륵사 입구 여주박물관 앞에 <이규보문학비>가 세워졌다.
이규보의 시 <봄날의 절을 찾아>라는 시를 읽으면 여주의 풍경이 다가온다.
바람 부드럽고 햇볕 따뜻하여
새소리는 시끄러운데
수양버들 그늘 속에
반쯤 문이 닫혀 있네
뜰에 가득 떨어진 꽃
스님은 꽃향기에 취해 누웠나니
절에는 아직 그대로
태평스런 흔적이 남아 있구나
목은 이색은 삼은(三隱)중의 한분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지조 있던 높은 문인이었다.
목은 이색은 1396년(태조 5년) 68세 때 여주 여강(남한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조선 건국에 반대한 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권근, 김종직, 변계량 같은 제자를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저서로는 <목은집> 55권이 있다.
<오늘의 노래>라는 번역시를 읽어보면 당시 목은 이색의 심경이 표현되어 있다.
숨어 사는 흥취가 늙을수록 더욱 맑아
새로운 시를 쉬이 얻어 눈앞에 펼쳐지네
바람이 자도 나머지 꽃이 스스로 떨어지고
구름이 옮겨가도 가랑비는 활짝 개지 않았네
담머리에 나비들은 꽃가지를 떠나가고
집모서리에 비둘기도 깊은 숲에서 우네
재물과 소요는 내 할 일이 아니지만
거울 속에 그 형색이 못내 분명하여라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했던 <동국여지승람>에는 “강변의 숲과 기름진 전답이 백리에 가득하여 곡식이 잘 되며, 나무하고 풀 베는데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 데도 적당하여 만물이 풍성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치도 좋고 인심도 좋은 곳이기에 많은 문인들이 여주를 탐방하면서 남긴 글이 전한다.
이중에서도 서거정의 여주팔영, 최숙정의 <여주팔영>, 김사의 <팔영>, 이숭인, 권근, 정도전, 이곡, 정몽주, 등의 문인들이 여주를 노래했다.
인생은 백년 안쪽
백년마저 못 채우니
더구나 진망 속에 얽혀
어찌 한가로이 살랴
저! 강물을 바라보니
물 맑아 갓 끈을 씻겠고
내 속에 맞는 취미 없어
세속의 냉온을 모르니
늙었노라
벼슬 버리고
적송 짝이 되리
-서거정의 팔영 중 <여강>
□ 영릉(英陵)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1446년(세종28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모산(大母山)에 안장된다. 이때 동원이실(同陵異室)형태로 세종의 능을 미리 마련한다. 동원이실은 능 하나에 석실이 둘인 형태의 능을 말한다. 왕의 능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을 수릉(壽陵)이라 부른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여 합장릉(合葬陵)이 완성된다.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으로 국조오례의 치장조(治葬條)에 의거하여 조성되었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겨 넣었으며, 병풍석 설치하였다. 규정에 따라 혼유석 밑의 고석(鼓石)4개를 설치했다.
세조 때에 영릉의 음택 자리가 불길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장을 주장하는 분위기였지만 서거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1469년(예종1년)에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여주 서쪽의 북성산(北城山)으로 천릉(遷陵)하였다.
19년간 서 있던 석물과 신도비는 구릉(舊陵)자리에 파묻었다. 구릉의 석물은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하고 있다.
여주 영릉 묘역 작업에는 부역군 5,000명과 숙련공 150명이 20여 일간 동원되어 공사를 벌였다. 이때 쌀 1,323석과 소금 41석이 사용되었다.
여주 영릉은 세조 때에 바뀐 능제(陵制)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고, 봉분 안에도 석실이 아닌 회격(灰隔)으로 공간을 조성하여 합장하고 상석 2좌를 마련하여 양위(兩位)임을 표시하였다. 회격으로 공간을 조성하는 방법은 관을 구덩이에 내려놓고 석회로 그 사이를 메워서 단단하게 다지는 형태를 말한다.
본래 영릉의 능역에는 이인손(1395~1463), 이계전(1404~1459), 공조참판을 역임했던 이사순 등의 묘가 있었지만 사전에 자손들과 협의하여 이장(移葬)시켰다.
묘가 완성된 후에 이 지역의 지명인 천녕현(川寧縣)을 여흥(驪興)과 합쳐서 목(牧)으로 승격하고, 고을 이름을 여주(驪州)로 개명했다. 영릉이 이장되고 3년 후인 1472년에는 신륵사(神勒寺)를 중수한 후,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조선의 멸망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영릉(英陵)은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영릉 성역화 사업’을 거치며 현재의 능역의 모습이 되었다.
영릉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전(世宗殿)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세종의 어진, 기록화, 천문기기, 악기, 인쇄기구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우측에는 재실과 세종대왕상이 서 있다.
넓은 잔디밭에는 실물을 모방해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관천대(觀天臺), 측우기(測雨器)등이 전시되어 있다. 훈민문(訓民門)을 지나면 왼편에 연못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으로 홍살문이 경건하게 서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丁字閣)이 보인다. 정자각의 왼쪽에는 제물을 준비하던 수라간이, 오른쪽에는 약 3,5m의 영릉표 보관하는 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영릉표는 1673년(현종14년)에 송시열(1607~1689)이 건의하여 설립을 승인 받았지만 세우지는 못했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후인 1745년(영조21년)에 와서야 건립된다.
왕릉에는 비석이 없어도 능참봉과 수호군이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능표지석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석의 앞면에는 조선국(朝鮮國) 세종대왕(世宗大王)영릉(英陵)소헌왕후(昭憲王后) 부좌(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총 9행의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해서(楷書)로 기록하였다. 건립연대는 <崇禎紀元後 一百十八年乙丑 1745 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숭정기원후 118년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의종)의 집권시기를 연장하는 것이며, 영조 21년 1745년이다. 숭정제를 끝으로 명나라는 1644년에 멸망했지만 조선은 망한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 신륵사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절역사가 오래되고 남한강변에 위치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가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신륵사가 유명하게 된 것은 1376년(고려 우왕2)에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문인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며, 조사당을 비롯하여 다층전탑, 다층석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석등, 대장각기비 등의 보물들이 많은 사찰이다.
신륵사(神勒寺)라는 사찰명은 미륵(彌勒)과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제압하였다는 전설에 의한 설과 인당대사가 강건너 마을에 나타난 용마를 神의 힘으로 재갈(勒)을 물렸다는 설에 기인한다. 고려 때부터 벽사(甓寺) 라고는 사찰명도 가지고 있었는데 사찰 내에 다층전탑에서 유례했다.
무엇보다 신륵사가 대찰로 중창을 하게 된 것은 이루게 된 것은 나옹선사의 다양한 이적들이 소문을 타고 전국에 퍼졌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1376년(우왕2년) 사리를 모신 부도를 세우며 중창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에 극락대전, 조사당, 승당, 선당, 종루, 동익당, 서익당, 남행랑, 향적당, 대장각 등의 많은 건축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나옹화상의 영정을 모시는 ‘선각진당’도 건립한다.
대장각(大藏閣)에는 이색(李穡)의 부친이었던 이곡(李穀)이 대장경을 봉안하였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색이 그 뜻을 받들어 계승하고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에는 나옹화상(1320~1376)의 사리를 모신 종모양의 부도인 보제존자 돌로 제작한 석종이 있다.
보물 제2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나옹화상이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에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1.6m 규모로 세웠다.
부도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이며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제작하였다.
나옹선사의 본명은 혜근(惠勤)이다. 속명은 원혜(元惠), 호가 나옹(懶翁)이며, 법호는 보제존자(普濟尊者)이다.
지공(指空)과 무학(無學)과 함께 삼대(三大) 화상(和尙) 중 한 사람이며,
화상(和尙)은 계를 내려주고, 은사(恩師)와 법사(法師)로 제자를 키우며, 주지 이상의 직무를 수행한 고승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보물 제226호로 높이 약 9.4m이다. 고려시대 전탑으로는 국내유일이다. 토대 돌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길고 큰 돌을 7층으로 쌓아 받침돌을 쌓았으며, 탑신부(塔身部)는 6층이며 모두 벽돌이다. 신라 전탑은 벽돌 사이의 간격이 없이 벽돌을 쌓았는데, 신륵사의 전탑은 간격을 넓히고 그 사이를 석회석으로 바른 것이 특징이다.
이 탑을 수리했다는 것을 기록한 수리비가 있는데,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고 쓰여있어 1726년(영조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수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신륵사보제존재석종비>는 1379년(우왕5)에 높이 약 2m 규모로 건립된 높이 약 2m의 비석이다. 보물 제229호로 지정될 정도로 문화적인 보존 가치가 높은 비석이다.
신라시대의 거북이 형태의 석비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이 비석은 이런 시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문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짓고 글씨는 당시 초서와 예서의 명필이었던 한수(韓脩1333~1384)썼다.
그러나 나옹 화상의 <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시가 없다면 신륵사 탐방의
의미는 반감 될 것이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신륵사는 현재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조사당, 명부전, 심검당(尋劍堂), 적묵당(寂默堂), 봉향각(奉香閣), 칠성각(七星閣), 종각(鐘閣), 구룡루(九龍樓) 등이 건립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의 형태이며, 1800년에 완공된 건축물이다.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법당 중앙에는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신륵사 동쪽 강변 바위 위에 건립된 삼층석탑은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다.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러나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다.
삼층석탑 지척에 6각 정자인 나옹의 당호를 따와서 건축한 강월헌(江月軒)이 서 있다.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간 정자 자리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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