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의 이름을 따라서 태백이라 했으니 태백의 큰 이름을 곧바로 이어받은 성스럽고 천혜의 복 받은 땅인 것이다.
태백이란 말은 "크게 밝다"는 뜻으로 태백산은 "크게 밝은 산"이며 한글로 표기하면 "한배달" 혹은 "한밝달"이
되는 것이다.
옛부터 우리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그 제사를 지내는 산을
"밝은산"(白山)이라 하였고 "밝은산" 중에서도 가장큰 "밝은산"이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큰 밝은산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 하였으니 그 역사가 4,000년도 넘는다.
지금도 정상에는 둘레 30여m 높이 2~3m의 돌로 쌓은 둥근 제단이 있으며 10월3일 개천절에는 산정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천제를 올리고 있어 성산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태백산 등산코스
제1코스(유일사)
유일사 입구-유일사-
장군봉-천제단 4km 2시간소요
제2코스(백단사)
백단사 입구-반재-
망경사-천제단 4.7km 2시간소요
제3코스(당골)
당골광장-반재-
망경사-천제단 4.4km 2:30분소요
제4코스(문수봉)
당골광장-제당골-
문수봉-천제단 7km 3시간소요
제5코스(금천계곡)
금천계곡-문수봉-
부쇠봉-천제단 7km 3시간소요
석탄 박물관
건 립 배 경
석탄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부존 에너지 자원으로써 국민생활 연탄공급과 국가 기간산업의
중추적인 역할로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으나 물질문명의 발달과 세계적
청정에너지 사용이 증대되면서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그간의 석탄산업 변천사와
국가 기간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던 석탄의 역사적 사실들을 한 곳에 모아 귀중한 사료가
되도록하고 후세들에게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도 산업역군으로서 석탄생산에 종사한
광산근로자들의 업적을 알리고 석탄산업 전반에 대하여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학습장으로
활용하여 석탄에 대한 기억을 되세기고자 함.
전 시 시 설
● 위 치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166번지(태백산 도립공원내)
● 건 축 규 모 : 6,683.53㎡(2,021.77평)
● 전 시 주 제 : 석탄과 자연 그리고 인간
● 전 시 면 적 : 11,576㎡
옥내-2,132㎡(645평) 옥외-7,907㎡(2,392평) 지하-1,537㎡(465평)
● 전 시 공 간 : 7실 7개소
지상옥내전시실:7실 지하전시실:1개소 옥상공원 및 전망대:2개소
옥외전시장:2개소 야외전시장:2개소
● 동 선 길 이 : 1,337m (실내 774m, 실외 563m)
● 관람소요시간 : 1시간30분~2시간
관 람 안 내
● 개 관 일 : 연중무휴로 개관됩니다.
● 관람 시간 : 하절기(3월1일~10월31일) 09:30~17:30
동절기(11월1일~2월말)09:30~16:30
매표시간-09:30~관람종료 1시간전까지
● 관람안내전화 : 550-2619,20
● 관람 요금 : 도립공원 입장료에서 포함징수 별도의 요금은 없습니다.
황지연못은...
황지연못은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로
태백시내 중심부에 위치하여 이 못에서
솟아나는 물은 드넓은 영남평야를 도도히
흘러가게 된다. 연못의 둘레가 100m인
상지, 중지,하지로 구분되며 1일 5,000 톤의
물이 용출하고 있다.
-황지연못의 전설-
옛날 황지연못 터에 황동지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한 노랭이였다.
어느날 외양간에서 쇠똥을 져내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한 노승이 찾아와
염불을 하며 시주를 청했다. 시주할 양식이 없다는 황부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염불만 하고 서 있는 노승을 보자 황부자는 심술이 나서
치우고 있던 쇠똥을 한 가래 퍼서 바릿대에 담아주었다.
노승이 말없이 돌아 서는데 마침 방앗간에서 아기를 업고 방아를 찧던
며느리 지씨가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와 노승을 붙잡고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쇠똥을 털어내고 시아버지 몰래 찧고 있던 쌀을 한 바가지 시주 하였다.
물끄럼 지씨를 바라보던 노승은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터이니 살려거든 날 따라 오시오" 하였다. 지씨는 아이를 업은채 노승의 뒤를
따라나서는데 노승이 말하기를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 고 하였다.
송이재를 넘어 지금의 도계읍 구사리 산등에 이르렀을때 며느리는 자기 집
쪽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에 노승의
당부를 잊고 그만 뒤를 돌아 보았다. 이 때 황부자 집은 땅 밑으로 꺼져 내려
큰 연못이 되어 버렸고 황부자는 이무기가 되어 연못속에 살게 되었다.
뒤돌아 보던 며느리는 돌이 되어 구사리 산등에 서 있는데 미륵바우라
부르고 있으며 흡사 아이를 업은 듯이 보인다.
그 옆에는 개바우라 하여 집에서 며느리 뒤를 따르던 개가 함께 돌이 되어 있다.
그 때 집터는 세 개의 연못으로 변했는데 제일 위쪽의 큰 연못이 집터로 마당늪, 중간이 방앗간 터로 방간늪,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이 변소 자리로 통시늪 이라 한다. 이 지방에 전해오는 노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며느리가
돌이 된 것은 노승의 "뒤 돌아보지 말라"는 당부를 잊고 뒤돌아 봐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늙은 시아버지를 버리고
저만 살자고 달아났기 때문에 벌을 받아서 돌이 된 것이라 한다.
찾아오는 길
태백시내 중앙에 위치하며 태백역과 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5분정도에 위치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로 창죽동 금대봉골에 있다.
금대봉 기슭의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구녕의
석간수와 예터굼의 굴물에서 솟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검룡소에서 다시 솟아나와
514km의 한강 발원지가 되는 곳이다.
오대산 우통수를 발원하는 오대천보다 검룡소를
발원하는 창죽천이 32km나 더 길어 국립지리원
에서는 한강의 발원은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이라는 공인을 받았다.
둘레 20여m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료소는 석회
암반을 뚫고 올라오는 지하수가 하루 5천여톤 가량
용출하고 있으며 솟아 나온 물이 30여m 경사가
완만한 폭포를 이루며 ?아지는 것이 장관이다.
오랜세월동안 흐른물이 깊이 1~1.5m 폭 1-2m의
암반이 푹 파여서 그리로 물이 흐르는데 마치 용이
용트림하는 것같다.
(이 때문에 검룡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듯 함.)
석간수 - 검룡소에서 검대봉골로 600여m 들어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골짜기를 들어가면 바위절벽으로 된 석벽
사이에서 물이 솟아나와 수백m의 와폭을 이루며 흘러 내린다.
한강의 5대 발원샘의 하나로 장관을 이루는데 바위틈의 작은 석굴에서 물이 나온다고 석간수라 한다.
제당굼샘 - 금대봉 정상에서 북쪽 사면 8부 계곡에 있는 샘이다.
산에 약초를 캐러 가거나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제사하는 곳이다.
한강의 5대 발원 샘 = 검룡수, 제당굼샘, 고목나무샘, 석간수, 예터굼의 굴물
-검룡소의 전설-
옛날 서해 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고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가장 먼쪽의 상류 연못을 찾아 헤메었다.
이무기는 이곳에 이르러 가장 먼 상류의 연못임을 확인하고 이 연못속에 들어가 용이 되려고 수업을 하였다.
그때 이무기가 연못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친 자국이 지금의 검룡소에서 쏟아지는 폭포라 한다.
이무기는 심심하면 인근에서 풀을 뜯다가 물을 마시러 오는 소를 잡아먹기도 해 동네 사람들이 연못을 메워
버스 ---태백 버스 터니널발 하장방면 시외버스를 이용(완행) 06:15 07:20 09:20 10:50 14:00 16:50 18:30 19:50
검룡소 입구에서 하차(약 10~15분소요) 검룡소방면으로 도보로 이동할 경우 약 40분정도 소요
자가운전---태백에서 35번국도 하장 임계방면으로 약 10분정도에서 검룡소쪽으로 좌회전
비포장도로로 약 10정도 가면 주차장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도보로 약 15~20분소요됩니다.
요금,음식,숙박
요금은 무료입니다(주차요금까지)
검룡소 인근에는 마땅한 음식점이나 숙박시설이 없어 태백 시내에서 해결하셔야 합니다.
]
용연동굴은...
전국에서 가장높은 해발 930m에 위치한 용연동굴은 총연장 830m의 수평동굴로 동굴 속에는
각종 석순과 종유석이 즐비하고 특히 동굴 중간에 폭과 높이가 약 30m 총연장 830m의 수평
동굴로 길이 약 150m정도의 광장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동굴 깊은 곳에는 임진왜란 때 동굴속에서 피난을 하던 사람이 암벽에 붓 글씨로 피난하게
된 내력을 적어놓은 것이 있다.
태백시 화전2동에 위치한 용연동굴은 약 1억 5천만년에서 3억년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석회동굴로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39호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곳이다.
지난 1966년 4월7일 한일합동 동굴조사 때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초동굴성갑충 긴다리장님
좀딱정벌레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옛새우와 장님톡톡이 등 6종의 신종 생물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한 동굴이다.(얼마나 놀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음)
동굴 내부광장에는 동굴리듬 분수대가 설치되어 멋있는 장면을 수시 연출하여 관람객의
즐거움을 더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동굴입구까지는 약 2.1km로 시에서는 트랩카를 운행 관람자의 편의를 고려했다.
찾아오는 길
정선군 고한읍에서38번
국도를 이용하면 싸리재
를 넘어오면서 죄측.
태백시내에서 31번국도
고한방면으로 5분거리
요금,음식,숙박
요금 :
어른 3,500
학생,군인 2,500
어린이 1,500
구문소는...
지금으로부터 약 1억5천만년에서 3억년전 사이에
생성되었다고 하는 구문소는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간 도강산맥 이라는 특수한 지형을 갖춘 곳으로
수능천석 이란 말이 실감나는 세계에서도 그 유형을
찾기 힘든 기이한 곳이다.
주위의 낙락장송과 어우러져 풍광이 좋은 구문소는
높이 20∼30m 넓이30m 정도되는 커다란 무지개다리
처럼 생긴 석회동굴로 경북에서 강원도로 들어서는
길목에 위치한다.
구문소 자연학습장 <--- Click
구문소 일대는 수 억년전에 이루어진 지층들로 삼엽충을
비릇한 많은 화석들이 늘려있죠.
구문소 자연학습장은 일반인들도 잃어 버린 세계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체험의 장으로 개장됩니다.
또한 구 동점동 사무소에 화석전시관을 개장 태백지역의
화석을 소개합니다. 전문가도 탐내는 지층과 화석들...
여러분들이 직접 찾아내고 만져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구문소의 전설-
옛날 동점 구문소 옆에 엄종한이라는 사람이 노부모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매일 구문소에 나가 그물로 고기를 잡아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느날 그물을 쳐놓은 곳에 가보니
그물이 없어져 버렸다. 엄씨는 이리저리 그물을 찾다가 실족하여 그만 물에 빠져 버렸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는데 그곳은 구문소 밑에 있는 용궁으로 용왕이 사는 곳이었다.
용궁 군사들에게 잡혀 용왕에게 끌려간 엄종한은 용왕에게 문초를 받게 되었다. "네 놈이 엄종한이냐?"
"예"
"너는 무엇 때문에 남의 닭을 잡아가느냐?"
"소인이 어찌 용왕님의 닭을 잡아 가겠습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저놈이 발칙하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네 놈이 아침 저녁으로 잡아가는 닭을 아니 잡아 갔다니 고얀놈!"
엄종한은 그동안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용궁의 닭이었음을 간파하고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용왕님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그것은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인에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는데 농토는 적고 식구는 많아 살림이 어려운지라 그만
용왕님의 닭인줄 모르고 그것을 잡아 부모님을 봉양하였사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요." 하였다.
그러나 용왕님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삼일 동안 잘못을 비니 그제야 용왕님이 노여움을 풀며
"그래 듣고 보니 그대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 이로다. 모르고 한 짓이니 차후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며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였다.
용궁의 산해진미를 맛보고 융숭한 대접을 받던 엄씨는 집에 두고 온 부모님과 자식 생각이 나서 먹던 떡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주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용왕이 흰 강아지 한마리를 주며
강아지 뒤를 따라 가면 인간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강아지를 따라 물 밖으로 나오니 강아지는
죽어 버렸고 구문소 가에는 무당의 굿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그때 무당이 구문서 엄씨의 넋을 건지기 위해 닭을 물에 집어 던졌으나 죽지 않기에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럴 때 물밑에서 엄씨가 살아나온 것이다. 모여섰던 사람들은 귀신이 나왔다고 혼비백산하였으나 엄씨는
"나요. 엄종한이요. 귀신이 아니요." 하였다.
늙으신 어머님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내 아들이라 하였다.
엄씨가 용궁에서 용왕에게 3일 동안 빌며 보낸 시간이 지상에서 3년이란 세월이 지나간 것이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니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엄종한은
용궁에서 가져온 떡이 생각나서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니 떡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는 그대로 굳어 딱딱한
차돌이 되어버린 뒤였다. 엄씨는 그 돌을 무심코 빈 쌀독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아침 엄씨의 아내가 쌀독을
열어보니 쌀독에는 쌀이 가득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엄씨의 아내는 쌀을 바가지로 퍼내 보았으나 쌀독의
쌀은 줄지 않고 그대로였다. 아무리 쌀을 퍼내도 줄지 않는 쌀독은 화수분이 되어 있었다.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엄씨네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 때 한양조씨에게 시집간 딸이 경북 대현리의 배지미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친정 아버님이 용궁갔다 와서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쌀독 속에 넣어둔 백병석때문에 부자가 된 것을 알게 된 딸은 친정 어머니에게 잠시만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알면 큰일나니 안된다고 하였다. 하도 며칠만 빌려 달라는 딸의 간청에
못이겨 친정 어머니는 엄씨몰래 백병석을 빌려주고 말았다. 얼마후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이상히 여긴
엄씨가 백병석을 찾았으나 딸이 가져간 뒤였다. 친정 어머니가 딸의 집에 가서 백병석을 달라고 하였으니
번번히 가짜 백병석을 내놓았다. 일설에는 조씨가 엄씨집에 처가살이를 하였다고 하며 백병석을 훔쳐
대현리에 살다가 처가집에서 자꾸 백병석을 찾으러 오니 안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현리에 살던 딸이 친정 부모 몰래 백병석이 들어있는 쌀독을 훔쳐 이고
구문소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백병석은 다시 용궁으로 돌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진다.
어쨋든 조씨네는 백병석을 자기고 안동 땅 모시밭으로 이주하여 잘살게 되었고 엄씨네는 몰락하고 말았다.
조씨네가 이주한 곳은 안동군 서후면 저전리 일대인데 그송에는 조씨네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용궁석은 하나가 아니고 조씨 성을 가진 모든 집안에 용궁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처음 용궁석(백병석)을 가지고 있던 엄씨의 사위 조씨에게는 자식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용국석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 싸움이 날 것 같으니 개울가에나가 동그란 돌을
하나 주워다가 분가하는 아들들에게 용궁석이니 잘 간직하라 하였다. 아들들은 자기에게 준 돌이 진짜
용궁석인줄 알고 소중히 보관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이 또 자식에게 그런 식으로 용궁석을 물려주니 지금에
와서 용궁석이 수십 수백 개가 된 것이다. 엄종한이 용궁을 다녀올 때 흰강아지를 따라 나왔는데 그 강아지가
물밖에 나오자 죽어버려 구문소 안쪽 둔산이라는 곳에 묻었다고 하는데 삼형제폭포 윗쪽 강건너라 한다.
엄종한은 메밀뜨리 건너편 등골이란 곳에 묻혔는데 엄씨의 묘를 용궁묘라 하였다.
그러나 30여년전 강원탄광에서 석탄을 케기 위해 등골 지하로 굴진을 하기 때문에 용궁묘 부근의 지반이
내려앉아 버렸다. 강원탄광 측에서 이장공고를하며 묘를 옮겨갈 것을 요구하여 후손들은 엄씨의 묘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엄씨네는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선산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처지라 엄씨의
유골을 옮겨 갈 곳이 없었다. 그 때 엄씨의 후손들은 조상의 유골 하나 모실 땅 한뙈기 없음을 비관하며
이렇게 우리가 몰락하게 된 책임은 용국석을 훔쳐간 조씨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동점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배지미 마을에는 장군대좌형의 명당이 있고
백병석(욕궁석)을 훔쳐간 엄종한의 사위인 조씨가 그곳에 묻혀있다.
그리고 조씨 무덤 아래로는 조씨의 후손들 무덤이 여럿 있어 매년 안동지방에서 조씨들이 모여와 시사를
지내는 곳이다. 엄씨의 유골을 옮길 곳이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엄씨의 후손들 가운데 과격한 사람이 있어
용궁 할아버지 (엄종한을 부르는 말)의 유골을 대현리의 배지미 마을 조씨네 문중묘(장군대좌형국)윗쪽에
묻자고 제의했다. 만약 조씨네가 떠들면 용궁석을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옳게 여겨 엄씨의 후손들은 엄종한의 유골을 조씨네 문중묘가 있는 장군대좌형국의 제일 위쪽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묘지기의 연락을 받은 조씨들이 몰려와 엄씨의 무덤을 파내려고 했다.
그러나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낼 수는 없는 일이라 조씨네는 안동 법원에 고소를 하여 무덤을 옮겨갈 것을
주장하였다.그때 조씨 문중사람 수십명이 시사를 지내기 위해 왔다가 그 모양을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어느 놈이 남의 문중묘 위에 겁도 없이 묘를 썼느냐고 소리쳤다.
묘지기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조씨 문중 젊은 사람들이 길길이 뛰며 당장 엄씨네를 찾아 요절을 내겠다고
험악하게 설쳤다. 그때 문중의 나이 많은 노인이 나서서 젊은이들을 달래며 천천히 말하기를 "그냥 놔둬라
필시 그 사람들이 여기 와 묘를 쓸때에는 비장한 각오와 또한 옛날 일을 생각하여 용궁석을 찾겠다고 그런
모양이니 망할대로 망한 집안 사람들이니 섣불리 건들지 말아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엄종한)은 우리들의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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