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가 있었던 주막집
최윤환
1972년 당시의 막걸리 술통 방법을 기억한다. 중서부 서해안(충남 보령군 웅천면) 작은 장터에도 양조장(釀造場) 술도가(술都家)는 있었다. 면소재지 대창리 새장터 술도가는 마을마다 담당 배달꾼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구룡리 고뿌래(花望 화망)*의 배달꾼은 화망마을 4반 국고개*에 사는 김 씨였다. 신작로* 곁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막걸리 위탁판매와 솜틀집도 함께 운영했다. 솜틀기계 발판 위에 사람이 올라서서 발로 구르면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목화* 실을 뽑아냈다. 솜털가루가 온 방안과 마당에 둥둥 떠다녔고, 솜털 찌꺼기가 머리카락과 눈썹에도 하얗게 달라붙었다. 우리 집에서도 목화를 재배했다.
나일론 옷감과 얇은 캐시미론 이불이 등장하면서 목화씨를 빼내고 묵은 솜을 다시 타는 일감이 줄어들자 김 씨는 술 배달만을 전문으로 나섰다.
김 씨가 끌고 다니는 자전거는 짐을 싣기 위해 전용으로 만든 튼튼한 자전거였다. 짐받이 양쪽에 U형의 쇠고리가 달렸는데 여기에 여러 개의 술통을 매달았고, 경사진 언덕배기 고갯길을 오르려면 자전거에서 내려서 힘겹게 끌어당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짐이 많은 자전거의 뒤를 밀어 올렸다.
경운기가 보급되자 자전거 배달은 사라졌다. 경운기 짐칸에 여러 개의 술통을 실어 날랐다. 볏짚을 뭉쳐서 만든 수세미를 술통 구멍에 꽉 쑤셔 넣고, 또 빙빙 돌려서 틀어막았다. 술통의 좁은 아가리(둥근 구멍)은 출렁거리는 요동(술 무게)때문에 술이 삐줄삐줄 흘러내렸다. 달짝지근한 쉰 냄새가 풍겼고, 짚수세미를 빼내면 술이 분수처럼 왈칵 위로 치솟아 올라왔다.
경운기 짐칸을 알루미늄 탱크(貯水槽)로 개조한 술배달 전용 경운기가 등장했다. 둥글고 큰 물탱크가 부착된 경운기였다. 탱크 밑에는 수도꼭지가 매달렸기에 잠금장치를 손에 쥐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비틀면 한 줄기의 술이 좌르르 쏟아져 나오거나 멈췄다.
논농사 일을 여럿이서 함께 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이 한두 말(斗)들이 사각형 플라스틱-통을 들고서 마을어구의 독다리(돌다리의 방언)*나 황씨네 솔밭이 있는 외나무다리에 나가서 배달꾼이 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면내에서 오는 배달꾼이 나타나는 예전산 모퉁이(남포 백씨네 종산이 있는 야산 모퉁이)를 향해서 눈길을 쏘았다.
말술을 주문할 때에는 자전거 배달꾼에게 이틀이나 사흘 전에 미리 기별했지만 경운기가 등장한 뒤로부터는 미리 기별하지 않아도 맞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술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아침 일찍부터 행길(일제강점기에 만든 지방도로606 신작로)의 마을 입구에 서서 술 배달차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막걸리 하면 구룡리 화망마을 1반과 죽청리의 경계선에 있는 서낭댕이(서낭당 城隍堂) 주막집과 화망마을 4반 국고개 도로변에 있는 술집이 떠오른다.
특히나 화망1반 서낭댕이 언덕바지 느티나무 주변에는 작은 초가집 네 채가 있었고, 술집 두 군데 가운데 한 채는 황 씨네가 살림집 겸 주막집으로 운영했다. 주막이라야 여늬 가정집이었기에 곁방 하나가 주막인 셈이었다.
안주인은 황 씨네 늙은 소실이었다. 이 집에서 막걸리를 사면 쉰내(군내)가 풀풀 났으며, '술이 게심심하다'라고 일꾼들은 투털댔다. 즉 술 배달꾼한테 술 받은 지가 오래되었거나 술에 맹물을 슬쩍 섞어서 팔았기에 술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두병(큰 유리술병)이나 술 주전자를 들고 십리길의 새장터까지 걸어서 나갔다가 되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이 자네. 다음부터는 국고개에서 술 받아 오지. 거기가 술맛이 조금더 나아."
동네 일꾼 형님들이 말하면, 농사채를 형님들한테 의존하는 나는 "예.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화망4반 국고개의 술집도 마찬가지로 여늬 가정집, 초가집이었다. 막걸리를 주문하면 가난에 찌든 오종종한 여주인 아낙이 부엌 바가지로 술바탱이(술독)에 담긴, 쌀뜨물같이 뿌연하게 탁한 술을 후이후이 내졌고는 술을 떠서 주전자에 채웠다. 때로는 바가지로 바탱이 안을 득득 긁는 소리가 났다. 즉 술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이따금씩 안주인 대신에 되바라지고 겉 까진 것 같은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처녀가 막걸리를 퍼 주었다. 왠지 조금은 안쓰러워 보이는 주인집 딸이었다.
새장터에서 이미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이 저녁 무렵이면 건드렁거리면서 삼갈래 길목인 국고개까지 걸어왔다가 다시 주막집에 들어서기가 일쑤였다. 밤중이면 동네 사내들도 술집에 끼어들었다. 희미한 남포등(석유등)이 그을음을 내고, 사내들의 그림자가 바람결 따라 덩달아 흔들거렸다. 어두침침한 부엌 안에 내놓은 긴 나무의자(통나무 한가운데를 잘라서 만든 엉성한 장의자) 위에 걸터앉아서 흰빛깔의 막사발(대접)에 담은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안주라야 시어-꼬부라진 짠지(김치) 쪼가리를 대나무 젓가락이나 두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동네 사내들은 술주정을 했다. 너무나 취한다 싶으면 소 외양간 옆 곁에 달아낸 방 안에 기어들어갔다. 그 방에서는 봉초(封草, 궐련초)* 연기와 담배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방구석에서 화투장(花鬪張)을 쥐고 섯다판을 벌리곤 했다.
나는 어설픈 청년이었기에 형님들의 뒤를 따라다녔지만 화투 노름에는 상관하지 않고는 아랫목 구석쟁이에 쑤셔 박혀서 세상모르게 잠이나 잤다. 잠결에 오줌이 마려우면 바지갯말을 밑으로 내리고는 소 외양간 아무 데나 오줌발을 뻗쳤다. 또다시 노름방 안으로 기어들었다.
내가 갯바닷가 독산해수욕장 인근의 경비초소, 무창포 해안초소를 거쳐 면내 예비군중대본부에서 군복무를 할 때인 1970년대 초. 그 당시에는 이농시기(離農時期])였기에 머슴(일꾼)이 별로 없어서 화망마을의 청장년들이 논농사를 거들었다. 우리 집에서도 머슴이 나갔기에 동네 형님들의 도움으로 논농사를 지었다. 내가 제대한 뒤 1974년 연말에 대전으로 가서 공무원 취직시험을 준비하였고, 그 뒤로부터 내 젊은 날의 시골생활은 막을 내렸다.
* 고뿌래(花望 화망) : '꽃을 바라본다'의 뜻을 지낸 '곶바래' 또는 '고뿌래'마을은 많이 변했음. 마을 동편에는 농공단지가, 서편에는 서해안고속도로 무창포톨게이트(TG)가, 마을 앞뜰과 앞산에는 보령웅천산업단지가 들어섰음. 또한 지방도로606 확장공사로 인하여 무창포로 주변의 땅은 또다시 토지수용되어서 마을 전체의 농토는 대부분 사라졌음
* 국고개 : 굴고개의 방언.
* 신작로(新作路) :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새로 만든 큰길. 지금은 지방도로606 무창포로.
* 목화(木花) : 아욱과(科)에 속한 한해살이풀. 원줄기는 높이 60cm로 곧게 자라면서 가지가 갈라짐. 잎은 어긋나고, 가을에 백색 또는 황색의 꽃이 피며, 솜털이 달린 씨가 나옴. 솜털을 모아서 솜을 만들고, 씨를 짜서 기름을 얻음.
* 독다리 : 돌다리, 징검다리의 방언
*봉초(封草) : 곰방대 담뱃대에 넣어서 피울 수 있도록 잘게 썰어 봉지로 포장한 담배(봉초담배).
봉초담배
2003. 10. 3. 금요일. 개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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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게다.
위 '세상사는 이야기방'에 올렸던 글.
40 ~ 50번도 더 다듬었는데도 여전히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띄입니다.
독자님들이 읽고는
어색한 문구, 잘못되고 틀린 낱말 등이 있으면 곧바로 지적해서 알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문학지에 내는 글은 정확해야 하니까요.
2024. 6. 4. 화요일. 최윤환 올림.
첫댓글 술 배달 가는 자전거 탄 풍경이 어릴적 잊혀졌던 기억입니다. 수필도 사진도 너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글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저는 제 어린시절이었던 1950년대 세상과 2020년대인 지금을 비교하면서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많이도 변했다'라고 말하지요.
당시 산골마을이었는데도 마을사람들이 득실벅실거렸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특히나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였기에 상이군인들이 몰려와 동냥을 구했고. 문둥병환자도 많았고, 거렁뱅이도 많았던 시절이었지요.
위 글의 시기는 1970년대 초. 이농이 심하게 일렁거려서 농촌에 머슴들이 사라지던 시절이었지요.
객지에서 살던 제가 졸지에 시골에서 머슴도 없이 농사 지으려니 동네 형님한테 부탁하고.. 함께 주막집에 갔으나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기에....
옛 기억을 더듬는 추억꺼내기 수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