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
원 보 숙
큰오빠와 나는 나이 차이가 나서 어릴 때는 어려웠다. 그 큰오빠가 코로나로 얼마 전에 세상을 떴다. 나는 오늘도 3차 예방 접종 후 부작용으로 세상을 떠난 오빠를 그리워한다.
큰오빠는 그 예날, 공주에서 제일인 사범대학교의 부설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는 학교와 가까운 부유한 외갓집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첫 손자인 오빠에게 외조부모와 이모들의 사랑이 지극정성이었다. 더구나 그 시대에 딸만 있는 외가에서 오빠의 대우는 남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집 떠난 생활이었지만 외롭지 않고 사랑과 행복 속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성장 후에도 외가에 대한 추억이 많았다.
그후 큰오빠는 집안의 많은 동생과 아버지가 힘들 것을 생각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가장 빠른 취업의 길로 나섰다. 고향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오빠 출근길은 자전거였다. 나는 신작로를 달리는 것이 불편해 몇 달 다니고는 타지 않았지만, 처음에 오빠는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도시락은 뒤에 싣고 덜컹거리는 신작로를 달려 늘 학교에 가곤 했다. T.V도 없고 동화책도 귀한 시절에 큰오빠가 어린 동생들에게 ‘어깨동무’ 월간지를 정기구독 시켜 주기도 했다. 우리는 그 책을 읽으며 상상력과 꿈을 키웠다. 그 외에도 전래동화와 세계명작동화 등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여행의 기회가 없던 시절에 미지의 세상 이야기도 들여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책 읽기는 어린 시절 우리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오빠는 우리에게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큰오빠는 집안사람과 동네 사람들에게 항상 공손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 모두가 신망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정했다. 얼마 후 곱고 착한 새언니를 이모의 중매로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식구가 많은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며 온 가족을 보살피는 효자였다. 큰조카 취학 전에 대전으로 발령이 나서 퇴직 때까지 대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퇴직 후에는 운동에 열중하고 건강하게 지냈다.
그동안 우리 형제들은 정기적으로 만남이 있었다. 종종 형제들이 모여 가까운 곳 여행도 다녔다. 친정엄마 살아 계실 때 수안보온천에 자녀들까지 다 대동하고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리조트에서 큰오빠가 맛있게 끓여 준 매운탕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매운탕 속에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여름방학 때 친정에 형제들이 모이면 큰오빠가 모두 데리고 나가서 아이들과 함께 캠핑을 즐기곤 했다. 겨울방학에는 군고구마와 군밤 구워 먹기를 해 주었다. 맏이라 제사가 많았는데 제삿날은 형제가 모두 모여 잔칫날 같았다. 코로나가 끝나고 얼마 전 남동생의 초대로 형제 모임에 오셨다. 큰오빠는 형제 모임 날을 그렇게 기다리고 좋아했다. 형제들을 만나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막내 남동생이 어린 시절 우리에게 큰 형이 해 준 것을 생각하며 가장 잘 챙겼다.
어느 날 내가 밖에 볼일을 보고 들어 왔는데 결혼해 대전에 사는 여동생에게 전혀 뜻하지 않은 전화가 왔다. ‘언니! 소식 들었어? 저기, 큰 오빠가 병원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대.’ 그 순간 나는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 1, 2차 예방 접종 후 오미크론 유행 때 코로나를 가볍게 앓고 지나간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 후 완쾌되어 건강하게 횔동한 오빠였다.
나는 멍한 마음을 진정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소식을 전한 후 먼저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올케언니와 조카들을 보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장례식장에 가서야 우리는 올케언니로부터 사망원인을 들을 수 있었다. 코로나 1,2차 예방 접종까지는 이상이 없었는데 코로나 3차 예방 접종 후 산소포화도가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회복이 되지 않아 산소 호흡기를 늘 코에 끼운 채 생활했다고 한다. 전기 코드를 꼽고 전기선을 길게 해 집안을 자유롭게 다니도록 거실이랑 방이 온통 전기선으로 깔려있었다. 외출 시에는 휴대용이 있어 그걸 가지고 몇 시간은 지냈다. 코로나 3차 예방 접종을 하기 전에는 80대 중반인데도 건강하게 지낸 큰오빠였다.
그 오빠가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일주일 되었을 때 병원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는 비보를 가족에게 전한 것이다. 가족 그 누구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에게 베풀며 사신 분이다. 자손과 형제도 많고 사람을 좋아해 친구도 모임도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는 가족도 없는 중환자실에서 홀로 쓸쓸하고 외롭게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형제들은 힘들어하는 올케언니를 부추기며 가족 친지들과 공원묘원으로 향했다. 고향에 선산이 있음에도 현 세태에 맞게 자손들이 화장 문화를 선택하였다. 유골함을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물과 흐르는 눈물이 범벅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홀로 말없이 떠난 오빠를 생각하니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토록 허무한 인생을 어찌 살면 보람이 있을까? 남은 생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며 형제들에게 안부 전화도 자주 하도록 해야겠다. 한동안 힘들어할 큰올케 언니에게도 좀 더 신경을 쓰며 지내야겠다. 오빠가 남긴 헌신과 사랑이 내 마음속에 살아 있어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자고 마음먹어본다. 오빠는 한 줌의 재를 남기고 떠났어도 우리에게 남긴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은 영원하다.
‘오빠! 감사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어린 시절 함께 지낸 아름다운 추억과 살아생전의 큰오빠 모습을 그리워하며 나는 오늘도 마음을 달래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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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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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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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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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 시생멸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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