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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은교’를 만나다
한실 이소희 (헌경)
노오란 햇살이 아침 이슬에 내려앉은 따스한 봄날, 창가에 쌓아 둔 빛바랜 소설책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박범신 작가가 눈에 띄었다. 문득 그의 블로그가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 검색을 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최근 그의 소설 중 사랑의 아픔을 담은 “은교”가 게재되어 있었다. 겨우내내 무거웠던 내 가슴을 사랑이야기로 채우고 싶어서 “은교”를 단숨에 읽어내렸다. 나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은교”를 보지 않았다.. 고스란히 작가의 의도를 만끽하고 싶었고, 영화 감독의 의도가 섞여지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어쩌다 이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떤 각도에서 강조되고 있는지 궁금해서라기보다 내가 상상했던 장면들을 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것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주인공들을 형상화된 영상으로 만나 더 가까이에서 생생한 리얼리즘을 맛보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평생 원고지만 고집했던 박범신은 올해 초부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장편소설 ‘은교’를 블로그에 단숨에 폭풍처럼 써 올렸다고 밝혔다. 막상 작품을 쓰기 시작하니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도 했다. 또한 ‘은교를 통해 나는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 고 밝히고 있다. 박범신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그린 ‘촐라체’,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을 그린 ‘고산자’, 그리고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한 ”은교“를 갈망의 3부작이라고 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열정과 연민, 달리 말하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딱 달라붙은 애증이라는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내 마음속 욕망의 양극단을 끔찍한 정도로 확인하면서.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미쳤다. 불과 한 달 반 만에 썼다. 폭풍 같은 질주였다’ 고. 아마도 작가는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는 말일 게다. 소설가 조지 기싱은 ‘작가의 진실한 자서전은 오로지 그가 쓴 소설에서 나온다’ 고 했다. 산다는 것은 오욕칠정을 다스리는 ‘오랜 병’이라고 한 노년기의 박범신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 스스로 사랑했던 [은교]를 냅다 차버리고, 새로운 인물과 뜨거운 열애를 나눌 걸 상상하면 가슴이 뻐근하단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싸가지’ 없는 사람‘ 이라고 했다.
이 소설의 처음 제목은 ‘살인 당나귀’이다. 왜 하필 자신의 차를 당나귀라고 했을가? 원래 당나귀는 한 마리가 뛰면 덩달아 뛰는 속성이 있다. 또한 힘은 세지만 성질은 소심하다. 당나귀는 말보다 덜 빠르고 덜 위험한 동물로 인식되어 교통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하니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렇게 평생을 이적요에게 충성한 자신의 당나귀를 통해 아끼는 제자 서지우를 살인한 것도 사실은 이적요가 서지우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반증이다. 당나귀에 얽힌 전라남도 진도군의 설화에 스님이 당나귀와 성행위를 하는 것을 목격한 상좌가 당나귀의 궁둥이를 빗자루로 찔러 자신을 채이게 하고, 스님이 당나귀를 팔아오라고 하자 판 돈은 제가 가지고 스님에게는 장판에서 당나귀가 중새끼를 낳아 맞아죽을 뻔 하다 도망쳤다고 핑계를 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슷한 이야기로 원님을 골탕먹이는 이방의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에서도 당나귀는 원님의 성적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당나귀는 성의 상징적 존재로 설화에 나타나고 있다. 혹 이적요도 자신의 당나귀를 성의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이 소설은 노년기의 사회 심리적 과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성공한 시인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를 길러낸 훌륭한 스승이었던 이적요는 자신의 삶을 전면 부정하며 절망감으로 죽음을 맞는다. 사람의 일생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무자비한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도 없고 나아가지 않을 수도 없다. 외롭기만 한, 편도 차편이다.
주인공 이적요는 20대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했고, 30대에는 감옥에 있었고 40대부터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살았다. 그에게 젊은 청년은 없었다. 오직 중늙은이처럼 오로지 일만 하며 살아온 시인을 맞이한 것은 노추의 외로움이었다. ‘늙은 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늙은이의 욕망은 더러운 범죄이므로 제거해 마땅한 것, 이적요의 마지막 섹스 장면은 신체적 노화가 얼마나 큰 심리적 상처를 주는지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때 여고생 은교를 만난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이 불편한 고백의 실체는 무엇일까. 노인의 음탕한 정욕일까. 은교는 손녀 같고 어린 여자 친구 같고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았다. 시인은 은교를 통해 고향집으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살붙이 같았던 제자 서지우와 갈등이 불거지고 병만 얻은 이적요의 심리적 퇴행은 은교를 통한 섹슈얼 판타지를 낳게 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섹슈얼 판타지가 아닌 결핍과 외로움의 콤플렉스가 비극으로 치닫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적요는 제자 서지우와 돈 문제에서 비롯된, 더 깊고 복잡한 심리적 갈등이 점차 의심으로 바뀌고, 서지우가 은교를 탐하는 광경을 본 후로, 살인 충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서지우가 차 안에서 은교와 키스하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 스승과 제자는 심하게 삐걱거린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엔 사제지간의 정겨움이 사라지고, 애증은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자신의 생일잔치를 함께 벌인 날, 잠에서 깬 시인은 자신의 집 2층 서재 침대에서 서지우와 은교가 벌이는 섹스 장면을 목격하고 서지우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서지우가 죽고, 이적요는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암이 전신에 퍼졌지만, 치료 대신 술만 마시다가 혼자 죽었다. 그가 평생 그리워한 것은 ‘할아부지, 밥 먹어요.’ 이런 사소한 말이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노년기 우울증의 심연에서 스스로 죽음을 재촉했다. 이적요의 독백이다.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고상한 시인으로 지조 높은 선비로 살아온 이적요 시인이 찬란한 삶과 살아있는 삶을 은교에게서 깨달았던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그 어떤 시보다 삶이 아름답고 싱싱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다. 고상한 포장이 벗겨진 적나라한 본능이 더욱 아름다운 삶 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은교를 통해 나는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한다. ‘너희의 젊음이 노력해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다채로운 21세기의 다원화사회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들은 가지각색으로 분출되어 때로는 격정적인 인생행로가 되기도 하고, 치명적인 사건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은교 이야기가 바로 그러했다.
곧은 정신, 높은 품격, 고요한 카리스마 등 고결한 이미지의 이적요가 죽은 지 1년이 되었다. 칠십 평생 12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은 유언과 함께 노트 하나를 남겼다. 시인의 사후처리를 위임받은 변호사는 유언대로 시인 사후 1년이 되어 노트를 공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노트를 읽고 나서는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공개를 망설인다. 노트에서 시인은 열일곱 소녀 한은교를 두고 벌인 갈등 때문에 베스트셀러 ‘심장’의 작가이자 제자인 서지우를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이뿐 아니라 평생 시만 써온 것으로 알려진 시인이 제자의 이름을 빌려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통속소설을 연달아 발표해 제자를 인기작가로 키웠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시인 보다 여섯 달 앞서 자동차 사고로 죽은 서른여섯 살 서지우는 시인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한 아들 같은 존재였다. 스승의 행동에 불안을 느낀 서지우도 은교에게 따로 일기를 남겼다. 그 사실을 안 변호사는 노트와 일기를 함께 읽어가며 두 사람이 은교를 놓고 벌인 애증의 전말을 찾아낸다.
은교는 시인에게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로망으로 다가온다. 평생 자신만만했던 시인의 이성은 은교의 ‘옴씬한’ 발목 인대를 한 번 접촉하자마자 죽어지내던 자신의 페니스가 불끈 일어서는 경험을 하고는 단번에 무너지고 만다. 시인은 은교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녀를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 라고 표현한다. 서지우는 이적요가 쓴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여 큰 명성을 얻지만 정체감을 잃어버린 마음의 불구자다. 스승이 아끼는 은교를 농락하는 것이 늙은 이적요를 정복하고 열등감과 왜소감을 상쇄하는 길이었다. 위장소설로 작가 행세를 해야 하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서지우는 자신이 소개해 준 은교를 바라보는 스승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은교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서지우 차바퀴 바람을 모두 빼 차를 쓸 수 없게 만든 뒤 자신의 자동차 핸들을 조작하고 차가 쉽게 폭발하도록 연료 호스에 구멍을 낸다. 어쩔 수 없이 스승의 차로 약속장소에 가던 서지우는 스승의 눈길이 심상찮음을 느끼고 정비공장에 들러 스승의 음모를 알아내고 차를 수리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트럭과 부딪친 뒤 벼랑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만다. 서지우가 죽은 뒤 시인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술을 주식으로 삼는 자학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처형”하기로 결심한다. 그렇다고 이적요가 지나친 자책감에 카프카콤플렉스 증상을 나타낸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마지막 자신의 몸을 혹사하여 삶을 포기한 듯해 보이지만 처절하게 단호하고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선택한 결정이고 구질한 생(여기서는 병든 육체)을 조금이라도 빨리 정리하고픈 시인의 자존심일 수도 있겠다.
문학작품이란 참 신기하기도 하다. 읽는 이의 그날그날의 심정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도 하고,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힐 여지가 많으니 말이다. 문학작품이 단 한 가지 주제로, 단 한 가지 방식으로 읽힌다면 좋은 작품이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문학이 아니라 오히려 학문의 부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열려있는 주제는 그만큼 상상할 폭이 크고 풍부한 감성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이적요’라는 노시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철저하게 절제된 삶을 살아왔다. 그는 한평생 고귀한 일에 매달려 왔으며 고결한 글쓰기에 온 영혼을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곁눈질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사회적 명망은 높고 시인으로서 성취는 깊다. 그런 시인이 어디로 튈 지 모를 17세 소녀, ‘살아있는 육체’를 탐한다는 설정부터가 도발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아니 어쩌면 탐하는 것이 아니고 본능을 가장한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오욕칠정을 충분히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내면의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오랜만에 공감가는 소설이다.
소설 은교는 노시인의 분신 혹은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자신 서지우를 등장시켜 젊음과 늙음, 태양 아래 깡그리 드러나버리는 젊은이의 미숙함과 어둠에 가려져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노인의 주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불어 일상과 시(낭만 혹은 이상)에 대해 집요하게 사색하는 소설이다. 그러니 은교는 참 여러 가지 각도에서 잘 살펴보아야할 소설이다. 소설 은교는 표면적으로 노 시인이 17세 소녀를 사랑했고 그 질투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제자 서지우를 살해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 행간에 숨은 이야기는 시와 일상의 대결, 젊음과 늙음의 대결, 천재성과 아둔함의 대결, 투쟁의 세월과 낭만의 세월의 대결, 삶과 죽음의 대결이다. 그렇게 본다면 노 시인 이적요가 서지우를 향해 드러내는 질투는 젊음을 향한 늙음의 항변에 해당하고, 재능 없는 서지우를 향해 멍청하다고 쏟아내는 욕지거리는 결국 멍청했던 자신의 젊음을 향해 쏟아내는 욕지거리에 다름 아니다. 더불어 젊은 육체 은교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싱싱한 젊은 시절을 보냈음에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명분 혹은 가치 있다고 믿은 것들을 쫓느라 소진해버린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에 해당한다.
위대하게 사느라 젊음을 소진해 버린 이적요 시인은 살아있는 소녀 은교를 보며 너희는 살아 있었고 함께 있었고, 두 동생을 양팔로 싸안고 있는 너의 모습은 햇빛보다 환했고, 일상적 삶에 깃든 너의 참모습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네가 일깨워준 쾌락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이적요 시인은 명분과 혁명의 깃발 아래 살았으며 그 탓에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고 그것을 훈장처럼 여겼다.)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라고 고백한다. 고상한 시인으로 지조 높은 선비로 살아온 이적요 시인이 찬란한 삶, 살아 있는 삶을 깨닫는 순간이다. 지은이 박범신은 이 소설을 통해 그 어떤 시보다 삶이 아름답고 싱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은교는 변호사에게 시인과 서지우가 서로 너무 깊이 사랑하는 바람에 자신이 낄 자리가 없어 소외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변호사는 은교의 그 말이야말로 시인과 서지우의 비극적 관계를 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열쇠라는 것을 느낀다.
19세기 혁명적 과학자이자 의학자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학에서 본능의 목표는 신체적 흥분을 제거하고 정신적 평온상태와 심리적 평온상태 -긴장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본능은 심리적 활동, 예컨대 지각하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등의 활동에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이 목표를 성취하려고 한다. 심리적 활동이 완결되면, 다시 말해 행동 계획이 수립되면, 근육 에너지가 흘러나와 행동이 일어난다. 사람이 무슨 일인가를 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말하거나 걷거나 또는 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결과란 언제나 긴장의 감소이다. 그것은 긴장을 야기 시키는 교란상태를 제거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어떻게 하여 마음의 행동 계획이 신체적 활동으로 변형되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무슨 일인가를 하려고 생각한 다음 그 일을 행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확신할 것이라고 했다.
해소하지 못한 흥분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유출시키고, 그 에너지를 사용하여 대상 집중을 지속한다. 또한 타협은 동시에 포기이기도 하다.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고는 있지만 도저히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을 포기하고, 그 대신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차선의 대상 또는 그 다음 대상을 받아들인다. 본능적 대상 선택을 억압하면 여러 종류의 대체물이 형성된다. 이들 대체물은 에너지를 방출하기 위해 형태를 위장한다. 위장은 하나의 대상 선택을 다른 하나의 대상 선택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위장의 목적은 자아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소유욕이 강한 사람은 만족을 모른다. 그 대신 발전할 가능성은 더 높다. 이적요는 아마도 다른 삶을 걸어 왔어도 만족하지 못 했을 만큼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그것이 시인의 자존심이고 작가의 명예였는지 모르겠다.
노년의 삶이란 어떠할까? 신체적으로 세포노화 촉진, 신체조직 기능저하, 체중감소, 연골조직 퇴화, 멜라닌세포 감소, 얼룩반점, 건 성화, 주름살, 체온유지능력 감소, 칼슘고갈, 운동능력의 감퇴가 나타난다. 굳이 육체적인 퇴화를 표현하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 충분히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감각기능이 저하되고, 일반적으로 단기기억과 최근기억의 능력이 약화되며, 암기보다는 논리적인 기억능력이 더 감퇴된다. 그리고 방어형, 은둔형, 분노형, 자학형으로 성격이 바뀔 수 있으며, 퇴직, 배우자와 친구 상실 등으로 사회적 관계망이 줄고, 가족 친구, 이웃 등 1차 집단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의 중심이 된다.
게다가 만성질환으로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되지 않으면, 이중고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요즘은 은둔형 외톨이라는 별명으로 젊은이에게도 이러한 노년기 증세가 나타난다.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살아가는 ‘늙은 젊은이’ 들도 많다. 반면 생물학적 나이를 잘 극복한 ‘젊은 늙은이’ 들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젊은 늙은이’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노년기를 잘 보내지 않으면 요즘 흔히 말하는 ‘웰 다잉 (well-dying) : 잘 죽어가는 것’을 할 수가 없다. 최근에는 웰빙과 함께 안락사 논쟁에서 촉발된 웰다잉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한 공론을 보더라도 잘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즉, 죽기 직전까지 어떻게 사는냐가 웰다잉의 관건이 아닐까싶다. 그렇다면 사회 참여와 친구 사귀기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적요도 구차한 자신의 마지막을 짧게 마무리 짓고 싶어서 치료를 거부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야 되고, 외롭지 않아야 되고, 즐거운 생활로 어느 정도 명예도 가지면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되지 않을까... 유행가 가사 중에 ‘너 없이 백년을 혼자 사느니 너와 함께 하루를 살겠소’ 라는 구절이 있다. 사랑이 삶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청소년이나 성인기에서 성이 삶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인의 성 역시 건강과 생활의 질 측면에서 중요한 부분이며, 따라서 질병위주의 간호에서 벗어나 성공적인 노화를 위한 간호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중요하게 고려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노인의 성에 편견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노인들이 살아온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따른 다양한 삶의 조건과 노년기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단순히 신체적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 포괄적 의미로서 노인의 성에 대한 심층적 탐색이 필요하다. 이에 사회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노인들의 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을 통해 노인들의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얻고자 진행된 현상학적 연구도 많이 진행되고 있다. 노인들의 성은 육체의 성적변화에 대한 대응, 제약적 환경에의 수용, 성적 감정의 재발견, 성정체성과 성역할의 재구성, 이상적인 관계의 이성에 대한 기대, 성의 의미 재확인 또한 노인의 성에 대한 본질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노인들은 젊음의 지표로 여기던 성기능이 저하되고, 타인을 통해 투영되는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면서 육체적 노화를 수용하게 되지만, 정신적 젊음으로 이를 보상하고자 한다. 이에 가면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 속에 각인시키고자 하나, 생각에 앞서서 발생하는 본능적 끌림과 구애적 자기과시는 자신을 성적 존재로서 재위치 시킨다. 그러나 노인들의 자성예언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동조는 강요된 자기 억압적 성적 표현양상을 나타낸다. 또한 성별에 따라 방출욕과 접촉욕의 차이가 나고, 정력과 순결의 이중적 성규범은 일그러짐을 낳는다. 한편, 성역할에 대한 재구성으로 자유로운 관계의 형성과 힘의 조화로의 이동이 시작되며, 대치 역할을 찾아 자신이 설 자리를 확보하고 의미 있는 삶으로 통합하고자 한다. 또한 허물이 많은 현실의 모습을 개방할 수 있고, 이를 포용해줄 수 있는 이상형에 대한 염원을 가진다. 그리고 서로 동질성과 취약성을 공유하면서 조화로운 동반자적 관계를 추구하며, 이러한 관계는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갖게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생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생활의 일부로서 더 이상 은밀하지 않은 성은, 성교 위주의 감각적 성에서 유희적이고 친애적 성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이로써 생활에 활력과 의욕이 소생하고, 더불어 스스로를 발전시키려는 의욕을 북돋아 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창조적 힘을 갖는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성은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차원의 기본적 욕구이자 친밀성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와 자아발전과도 연결되는 근원적이며 창조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그의 리비도이론(LIBIDO THEORY)에서 개인은 현실적으로는 이중의 존재를 누리고 있는데 자기 목적인 동시에 사슬의 한 고리이기도 하고, 이 사슬을 위해 자기 뜻과는 반대로, 혹은 적어도 자기의 뜻도 없이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개인은 나름대로 성애(性愛)를 자기 의도의 하나인 줄로 생각하고 있지만, 관점을 바꾸면 개인은 자기의 형질 유전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 형질 유전을 위하여 자기의 힘을 쾌락에 쏟아 버리며,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마치 재산상속인이 자기보다는 오래 가는 세습 재산을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꼴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대체로 생물학적인 사고방식은 물론 종류를 달리하는 것은 모두 심리학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므로, 자아본능과 성본능을 구별하고자 하는 리비도이론은 적어도 심리학적 기초위에서 있지만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기초 위에 있다고 했다. 어쩌면 성적에너지인 리비도는 보통은 마음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에너지의 한 부분적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아마, 리비도와 심적 리비도를 근원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분석적인 관심과는 거의 관계없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의 성본능의 결론을 어떤 다른 과학이 지어줄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는 없으므로, 심리학적인 현상들을 종합함으로써 어떤 빛이 그 생물학상의 근본적인 수수께끼 위에 던져질 수 있는가를 시도해 보는 편이 훨씬 목적에 적합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나치게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은 비굴하다. 상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말하자면 자기의 자기도취의 일부를 상실하고 있으며, 사랑받음으로 인해 비로소 그것이 보충된다. 이런 여러 가지 관계들에서 보아 자아감정은 애정 생활에 대한 자기도취적인 관여와 어디까지나 관련이 있는 듯하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 장해의 결과로서 임포텐스(impotence), 즉 자기는 사랑할 수가 없음을 지각함은, 자아감정을 많이 저하시키는 작용을 한다. 프로이트의 생각으로는 감정전이 신경증의 환자가 스스로 즐겨 표명하는 열등감의 원인의 하나는 이 점에서 찾을 수가 있다. 자신의 기관의 열등성을 지각할 즈음에는 능력 있는 정신생활에 자극적인 영향을 주어 과잉 보상적인 방법으로 한층 많은 일을 달성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러한 프로이트의 이론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바로 이적요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세 명은 다 외롭다. 외롭고 쓸쓸한 감정을 은교와 이적요와 서지우는 각각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 은교는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은 서지우와 이적요를 통해 외로움을 달랬고, 이적요는 자신의 잃어버린 청춘을 은교를 통해 보상 받고 싶어 했고, 서지우는 스승의 재능을 이용해서 자신의 명예를 높임으로써 외로움을 달랬다. 시인 이적요의 시선은 은교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본능에 충실한 ‘영원한 처녀’로 인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서지우는 시인의 사랑에 침입한 방해물이자 갈등의 주범이고 스승에 대한 동경과 질투에 사로잡힌 캐릭터로서 은교를 경계하면서도 그녀와 성적 관계를 나눈다. 세 명의 주인공은 서로 서로 각각 그들의 결핍과 외로움을 질투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과 사랑에 굶주린 세 명의 주인공의 삶은 슬프기까지 하다.
이적요는 순수한 예술가의 표본으로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순수의 표상으로 은교를 택했다. 서지우는 스승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으로 기대를 하다가 스승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불운의 제자이다.
스승의 입장에서 스승의 내면을 살피지 못한 서지우의 실수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스승에 대한 사랑이 스승을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그런 열등감을 은교를 이용하여 스승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 본능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스승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은 욕망도 컸기에 그런 욕망을 채울 수 없고 사랑받지 못 할 때 미움으로 바뀌는 서지우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마음속의 오만가지 생각들을 고매한 시인이기에, 고상한 이미지의 작가이기에 속으로 속으로만 삭여야하는 시인의 고뇌, 본능에 호소하고 싶고, 천진난만의 심상에 젖어들고 싶고, 잃어버린 청춘을 되살리고 싶은 노시인의 속내를 이해하고 싶다.
17세 소녀 은교는 그런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를 또 질투했다. 서지우와 이적요의 사랑을 확인시켜 준 것은 은교이다. 은교가 둘 사이를 질투했다는 것은 두 스승과 제자는 서로 사랑했음이라, 사춘기 소녀의 애정 결핍은 서지우로부터 육체적 애정을 충족 받고자 했고, 이적요를 통해 정신적으로 교감과 애정을 나누길 바랬던 것이다. 그건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족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의 보충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은교를 사랑한 이적요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져 있다. 관능은 시간을 이기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는 것 신생의 폭설 같은.
먼 훗날 이적요의 영혼이 이생을 기억한다면, 여명의 갈대숲에서 숨어 우는 바람소리처럼 서러울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들의 삶 속에는 성이 존재하고 또한 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때로는 성은 갈등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결핍에 의한 열등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삶의 근원이며 사랑의 상징이며, 생활의 활성탄처럼 생기를 돌게 하고 상처 받은 심장에 스며드는 치료제이리라. 다만, 대로를 이탈하여 사고를 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사랑을 품은 아름다운 성은 행복을 전염시키고 축복을 유통시키는 따뜻한 가슴의 동반자이다. 이적요의 은교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눈물 머금은 들꽃 향기로 피어오른다. 오늘따라 유난히 먼 하늘 들녘에 누운 풀 한포기가 무척이나 청초한 초록빛으로 빛나 보인다. 그 들풀 위에는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여명을 그리워한 이슬 한 방울이 내려앉겠지. 창 밖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이제 여름이 시작되려나보다, 창문을 닫고 긴 시간 나를 불려 들였던 작가의 블로그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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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은교 영화로 보았습니다. 늙은 남자의 애욕이랄까. 어린 여자에 대한 단순한 로망이랄까 글쎄 소설을 읽지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포르노 시비가 왜 일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작가 박범신이 쓴 소설인데,, 그런 포르노 시비가 될 정도의 글을 썼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영화을 보지 않았어요... 작가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할 까봐 ,, 문학을 문학 자체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길러야겠습니다. 어쩌면 우리 독자들이 너무 편하게 문학작품을 대하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더운 여름 작품은 잘 되시나요? 가을호 소설도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건안 건필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영화를 안 보시길 잘 하셨습니다. 한실님의 모습 생각 나네요, 제 올케와 인상이 비슷해서... 무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