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비비안
Fan. Spell B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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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싸움 06.
이번 회사에 들일 신입 사원들의 이력서를 노트북을 통해 검토하다가도, 목의 뻐근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면,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너에겐 감춰둔 사실이 하나 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저녁을 먹고 나서도 온통 일에 집중한 이유는, 이 일을 마치면 내일 회사는 쉬어도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온갖 집중력을 총동원 했던 것이다. 일은 모두 성공적으로 끝낸 상태고, 빌어먹을 회사에 나가기 위해 일찍 일어날 이유가 내일만큼은 없어진다는 말이다. 모처럼만에 집에서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편안해진 마음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는데, 활짝 열어져 있는 네 방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엔,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과자봉지들. 그만하면 다행이겠지만, 떨어진 음료수 캔에, 하다못해 지저분하게 흘려놓았다.
“구 이지…!”
지금의 시각을 망각하고 네 방에 들어가 네 이름을 부르는데, 아까의 모습 그대로, 곱게 펴져 있는 이불 위에 올라가 누운 채, 곤히 잠든 너. 여자의 자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매우 신기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여자아이를 집에 들여놓다니. 지금 생각해도 내 자신에 대해 믿기지 않는 부분이다. 은재가 놀랄 만도 했지…. 자그마한 손을 꿈틀대며 곤히 잠든 너를 차마 들 수 없었기에, 이불을 접어 네 위에 덮어주었고, 체구가 작은 너는 고작 반 밖에 되지 않는 이불 속에 쏙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너를 한숨과 함께 내려다보다가, 이내 방문을 닫고 네 방에서 나온다. …자연스레 나오는 단어. ‘네 방’ 네 방은, 차디차고, 딱딱했던 그 방은 고작 며칠 이후, 네 에너지로 인해 푸근한 방이 되어있었다.
* * *
“아저씨….”
어김없이 들려오는 네 목소리에, 네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 따위는 이미 지쳤다. 고장난 알람시계 따위 고치지 않아도 일어나는데에 있어, 전혀 불편한 점이 없었다. 방에 걸어져 있는 시계를 쳐다보면, 6시 35분. 기막히게 이맘 때 쯤이면 나를 깨우는 너는, 완전 인간 시계. 부스스한 눈으로 너를 쳐다보면, 갓 세수 한건지,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말끔한 얼굴로 샐쭉이 웃어 보인다. 난 너를 향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은 회사 안가.”
내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는 너. 진짜요? 내가 그런걸로 농담하게 생겼냐? 우와! 그럼 세 끼 모두 아저씨 요리 먹을 수 있겠네요? …네게서 나란 사람은 고작 재워주고, 먹여주는 사람이였다. 그런 네가 얄미워 게슴츠레 쳐다보면, 정말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그래. 지금 이 순간 까지도 네 머릿속엔 온통 내 음식들로 가득하겠지.
“아저씨! 그럼 우리 오늘 어디 놀러 가요!”
“어딜 가? 오늘만큼은 집에서 쉴거야.”
“모처럼만의 휴일을 집안에 처박혀서 지내겠다구요? 말도 안돼!”
“너는 늘 휴일이잖아.”
“제가 이쪽 길을 뭐 알겠어요? 어딜 돌아다니고 싶어도 못 돌아다니는 판국인데….”
내 어깨를 마구 흔들어대는 너. …이제 내 사나운 눈빛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독고 찬. 너도 이제 한 물 갔구나. 그렇게 한숨과 함께 내 자신에 대해 신세한탄을 늘어놓고 있는데.
“아저씨이. 네? 네?!”
“그럼 어디 가는지는 내가 정한다?”
내 말에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너. …내 대답이 아마 넌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거다.
“어디로 갈껀데요?”
“…너희 집.”
“…아, 아저씨!”
“왜? 내가 정하기로 했잖아.”
“아씨, 그래도 그건 아니죠! 완전 지옥에 가자는거랑 똑같은데!”
“그럼? 계속 내 집에서 지내겠다고? …너 정말 뻔뻔하구나.”
내 말에 으허허 하고 웃으며 앙탈을 부리는 너. …완전 새끼 여우다. 여우.
“저리 안 떨어져?”
“다른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라는데, 내가 어떻게 집에 들어가겠냐구요!!”
“말했잖아, 네 가출은 의미 없을거라고.”
“…왜 희망을 버리려고 그래요!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이래뵈도 우리 엄마 마음 약한데….”
“마음 약하신 분이 외동딸을 외딴 남자에게 시집 보내려 하시겠냐? 머리를 폼으로 들고 다니냐?”
“…….”
순식간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너는 한참을 허공에 시선을 움직이더니, 이내 내 방에서 나간다. 말 한마디 없이,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용함을 남기고. 슬쩍 일으켰던 고개에 힘을 빼고 베개에 다시 머리를 묻으면, 허연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피곤하다. 눈이 감긴다. 하지만 방 밖으로 말없이 나간 네가 거슬린다. …역시 넌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신경 쓰이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결국 몸을 일으키고 방에서 나오면, 거실 소파에 앉아 무릎에 턱을 괴고 멍하니 티비를 응시하는 네 모습이 비춰진다. 이제 내겐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야-”
“…….”
“삐진거냐?”
“…안 삐졌어요. 내가 아저씬줄 알아요?”
“내가 언제 삐졌다고 그래?”
“…….”
“…나 운동 갈껀데. 너도 갈래?”
내 말에 잠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힘없이 고개를 저은다. …어리긴 어리다. 금새 풀이 죽고, 금새 팔팔해지는 네 특성을 보자면, 분명 넌 어린 아이다. 결국 나 혼자 운동 갈 채비를 하고 내 방에서 나오는데.
“…너 안 간다고 하지 않았냐?”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채, 신발까지 신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 그러자 뻘쭘한 웃음을 허허 날리며 말한다.
“아, 세 번은 물어봐줘야죠! 어떻게 두 번도 아닌 한번만 물어보냐….”
“그게 무슨 소리야? 뭣 하러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을 해?”
“아, 원래 여자들은 튕겨줘야되요! 세 번씩!”
“…됐어. 가지마.”
“아, 왜요! 준비 다 했는데!”
“누가 하라고 했어?”
“아씨….”
너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먼저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무튼 웃기다니까. 나 역시 운동화를 신고 집에서 나오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는 멍하니 층수 알림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는 네가 보인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너와 나는 올라탔다.
“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뛰는데. 따라잡을 수 있겠어?”
내 물음에 비웃는 너. 아, 당연하죠! 이래뵈도 제가 숨겨진 다리가 더 있거든요. 으하하하! …과연 그 웃음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너와 함께 오피스텔에서 나오면, 오늘따라 찝찝한 날씨. 이른 아침인데도 후덥지근하다. 왠지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았다.
“뛰자. 곧 비 올 것 같은데.”
“으아- 같이 가요!!”
숨겨둔 다리는 언제 보여 줄 건지. 약 20분 간, 천천히 뛰다가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서 전력질주를 하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네 모습. 웃겨 죽겠다. 얼굴엔 오기가 잔뜩 담아져 있었다. 멈춰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고르면서 너를 기다리면, 내 앞으로 뛰어온 너는 엄청난 숨을 헐떡인다. 얼마나 뛰었다고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린 채, 곧 죽을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는지 원….
“너 운동부족이다.”
“아씨…. 진짜 너무해요. 일부러 나 따돌리려고 빨리 뛴거죠!”
“나 진짜 천천히 뛰었는데?”
“거짓말! 아, 힘들어.”
허리에 손을 얹고는 하늘을 향해 허리를 휘어 푸아! 하고 숨을 내뱉는 너. 완전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매일 아침 나랑 같이 뛰자.”
“아, 싫어요! 젠장. 내가 왜 나왔는지…. 저 집에 갈래요!”
“여기서 집까지 찾아갈 수 있어?”
“…….”
“난 더 뛰다가 갈껀데. 돌아올 때 까지 여기에서 기다리던가, 아님 먼저 가던가. 그것도 싫으면 조용히 날 따라오던가.”
“…에이씨….”
땀으로 인해 촉촉해진 얼굴을 잔뜩 구기며, 결국 터덜터덜 나를 지나쳐 앞장서 걷는 너. 난 너를 놀리듯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숨겨둔 다리는 어딨는데? 왜 난 보이지 않지?”
“놀리지 마요. 아저씨가 그렇게 빠를 줄 알았나! 에이씨. 나 더우니까 아이스크림 사줘요.”
매우 자연스러운. 정확히 말하자면 당연하다는 듯, 내가 반드시 아이스크림을 사줘야 하는 것 처럼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너. 그까짓 아이스크림, 사주면 그만이지만, 더운게 내 잘못이야? 내 탓이야? 역시 말 한번 참 곱게 하는 너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면,
“나 지금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요. 진짜 덥단말이에요!”
“운동할 때 아이스크림은 먹는거 아니야.”
“와…. 거짓말!”
“진짜야. 먹으려면 차라리 물을 먹지.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은 전혀 운동에 도움이 안돼.”
“아,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아이스크림!! 네? 네?!”
완전 똥고집이다. 설명을 해 줬건만,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네 막무가내에 못 이겨, 어느새 나는 네 손에 굳게 잡혀, 슈퍼로 질질 끌려가는 중 이다. 그리고 원하는 쭈쭈바 하나를 입에 물고서야 또 다시 헤죽거리는 너. 그저 황당할 뿐이다. 쪽쪽대며 쭈쭈바를 입에 앙 물은 채, 만족 해 하고 있는 너를 뒤로하고 또 뛰기 시작했다. 아저씨!! 라는 네 외침과 함께 너는 다시 나를 따라…. 정확히 나를 쫒았다. 내겐 가벼운 뜀이, 너에겐 전력질주라는걸 난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때 아니면 너를 자연스럽게 골탕 먹일 방법은 없을 것이다.
<두뇌싸움>
“아이고, 팔다리어깨무릎허리야….”
소파에 엎드려 나른하게 뻗어있는 너를 힐끗 보며 맞은 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너 정말 심각해. 그러니까 키가 안 크는거야.”
내 말에 뚱하니 나를 올려다보는 너. 갓 샤워를 하고 나와서 그런지, 네 피부는 더욱 촉촉이 빛났다. 거의 말라가는 네 머리칼을 발견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역시나….
“야. 보여? 네 머리카락이잖아.”
“…아, 당연히 머리를 감았으니까 머리카락이 떨어지는거죠. 아저씬 머리카락 없어요?”
말도 안 되는 네 말에 그저 기가 찬 웃음을 내뱉으면, 또 다시 나른하게 두 눈을 곱게 감아버리고는 힘들다는 듯 한숨을 푹 내뱉는 너. 소파 옆에 계속 자리잡고 있는 만화책 쇼핑백을 불만스레 응시하다가,
“저거 언제 갖다줄거야? 연체료 낼 돈은 있는 모양이지?”
“아직 연체료 안 붙거든요? 나 너무 졸리고 배고파요. 빨리 밥 해줘요.”
오늘 마침 휴일이겠다, 대청소 하기 딱 좋은 날이다. 일어나. 라고 말하자, 넌 감았던 눈을 뜨고 왜요? 하고 묻는다.
“대청소 하자. 집 안이 너무 지저분해. 너가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부터는 더더욱.”
“대청소?! 아, 무슨 대청소에요! 맨날 밤마다 청소기까지 돌리시는 분이!”
“청소기 하나로 청소가 완벽히 끝난다면, 걸레는 왜 있고, 먼지털이는 왜 있어? 빨리 일어나. 너 이러면 아침 안 줄거야.”
“……! 설마, 대청소 하고 밥을 먹자고요? 지금 9시가 넘었는데?”
“응. 왜?”
“와아! 진짜! 이건 너무한다! 완전 고문이잖아요!”
“하여튼 쪼끄만게 먹는건 지지리도 밝혀서는. 빨리 일어나. 확 창 밖에 던져버리기 전에.”
너와의 툭탁거림은 이미 적응됐다. 예전 같았음 꿈도 못 꿀 일인데. 내게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여자라면 아마 처참히 밟혀, 앞으로의 미래에 있어서도 지장이 컸을 것이다. 네 엄청난 에너지와, 지나친 활기참은 나를 점차 변화해 주었다. 늘 찝찝한 기분에, 불편하고 답답하고. 늘 무언가에 쫒기 듯, 초조한 일상을 지내왔건만, 너로 인해 많이 웃은 것 같아, 그건 매우 고마웠다. 너로 인해 변해가는 내 자신이 놀라웠기 때문에, 너로 인한 내 변화의 한계는 어디일까. 라는 궁금함 때문에, 네가 내 집에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것 일 수도 있다. 방에 들어가, 세탁소에 맡기려고 모아둔 와이셔츠 밑 바지를 들고 거실에 나오면.
“아저씨. 비와요.”
“거봐, 비 온 댔잖아.”
“비 오는데 창문 열고 청소하려고요?”
“비 오는거랑 청소하는거랑 무슨 상관이야? 창문이 열면 비가 안으로 오나?”
“그래도 습기 차잖아요!”
“비가 그치면 다시 환기시켜도 되. 그런 문제라면 걱정 말고 청소기 좀 돌려.”
청소를 싫어하는 것 역시, 어린아이들이라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습관이였다. 투덜거리는 네가 마냥 어린아이같다. 애를 하나 키운다니까….
“아저씨. 걸레 어딨어요?”
“청소기 돌리라니까, 걸레는 왜?”
“나 청소기 못 돌려요. 귀 시끄러워서.”
“참나. 걸레가 더 힘들어.”
“걸레, 걸레.”
“화장실 변기 옆에 보면 있어.”
“…걸레 없는데요?”
“네가 들고 있는게 걸레잖아.”
“이게 걸레에요? 무슨 걸레가 이렇게 깨끗해요? 완전 수건인데….”
“말 많다. 빨리 빨아서 네 방 닦아. 창문 다 열어 놓는건 잊지말고.”
“예예.”
대청소에 대해 내 마음을 돌리려는 생각은 결국 접은 모양인지, 말없이 걸레를 빨고 방으로 들어가는 너를 지켜보다가, 네가 귀 시끄러워 못 돌린다는 청소기를 들고 전선을 풀었다. 열린 네 방문을 통해 열심히 바닥을 닦는 너를 계속해서 관찰하며, 청소기를 켜면, 청소기의 소음에 두 귀를 막아버리는 너. 청소기의 소음에 잘 들리진 않지만, 어렴풋이 ‘으아아아아’ 라는 네 알 수 없는 비명이 들려온 것 같았다.
너로 인해 잠군 두 방은 네가 있어 들어갈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두 방 중 하나는 청소가 필요 없었지만, 수의 방은 청소가 필요했다. 이따가 너를 심부름 시키고 그 틈을 타서 청소하면 되겠거니, 생각하며, 청소기를 다 돌리고 걸레 하나를 들고 와, 창틀과 텔레비전 위. 소파와 테이블이며, 먼지가 쌓일만한 장소를 꼼꼼히 닦는데,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질린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는 너.
“왜?”
“…아니, 무슨 청소에 뭐 맺힌거 있어요? 무슨 청소를 그렇게 해요!”
“내가 뭘?”
“아저씨 결벽증이죠.”
“뭐?”
“내가 보기엔 결벽증 같아요! 아주 약한 결벽증.”
“시끄러워. 너 방 걸레로 다 닦았어?”
“아, 그럼요! 아저씨가 청소기 돌릴 때 다 닦았어요.”
“테이블과 책상은? 장롱 손잡이 같은 부분에도 먼지가 앉을 수 있잖아.”
“…거긴 미처….”
“빨리 가서 닦아.”
“아씨! 밥 줘요, 밥! 나 진짜 굶어죽이려고 그래요? 안 그래도 작은데, 더 작아지면 어떡해요!”
네 말도 안되는 투정에 피식- 웃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너. 지금 시각은 10시. 그래, 배 고플만도 하겠다. 무리한 운동에, 청소까지 했으니. 청소라 봤자, 고작 방 하나 걸레질 한 것 밖엔 없지만.
“다 해가잖아. 나 거의 다해가니까, 너도 빨리 네 방 닦아. 꼼꼼히, 구석까지. 알았어?”
“…진짜 바로 해줄꺼죠…?”
“알았다니까.”
내 말에 아자아자! 라고 외치더니, 걸레를 집어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너. 참 단순해. 멍청한건지, 귀여운건지. 청소를 마치고, 걸레를 빨면, 어느새 방을 다 닦은건지, 걸레를 내게 내미는 너.
“다 닦았어?”
“네.”
“확인해도 되?”
“네!”
“좋아.”
네 걸레까지 빨고 꽈배기처럼 쥐어 짠 채, 걸레통에 집어넣고서야 모든 청소가 끝났다. 아직 세탁기도 돌려야 하고 세탁소에 옷도 맡겨야 하지만, 네가 집에 있는 상황에, 이 정도면 성공적으로 청소가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였다. 주방에서 냉장고를 뒤적거리는데, 언제 온건지, 내 뒤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지켜보는 너. 깜짝 놀라 움찔 하면, 장난스럽게 히히히. 웃는 너.
“왜 그렇게 서 있어? 나가있어.”
“뭐 해줄거에요?”
“오징어 볶음.”
“우와! 나 그거 완전 좋아하는데!!”
“네가 안 좋아하는게 어딨어?”
“으하하. 그건 그래요. 아싸! 오징어 볶음!”
“그래서 말인데, 심부름 좀 해.”
“에?”
“오징어 두 마리만 사와. 싱싱한걸로 골라달라고 해. 그리고 슈퍼 가는 길이면 세탁소 하나가 있을거야. 거실에 모아둔 옷을 맡기고 와.”
“비 오는데, 심부름을 하라구요? 너무해요!”
“밥값은 해야할 것 아냐. 고작 심부름 따위도 못 해?”
“…에이씨. 알았어요. 대신 심부름 값!”
“그렇게 따지면, 널 보살펴주는 값, 밥값에, 먹여주고….”
“에이씨. 돈 줘요!”
만원을 너에게 건네주면, 작은 발을 투박스레 쾅쾅 굴리며, 거실에 모아둔 옷이 들어있는 쇼핑백과, 그 옆의 만화책 쇼핑백을 한꺼번에 들고 현관문에 나서는 너.
“두개 다 들고가게? 그러다 자빠질라.”
“안 자빠지거든요? 흥.”
콧방귀를 뀌고 자기 집인 마냥, 신발장에서 네 키 만한 커다란 검은 우산을 꺼내 집더니, 나가버리는 너. 왜 우산을 집어도, 저런걸 골라 집는지. 좀 더 작은 우산도 있건만. 우산 때문에 분명 자빠질거라 예상하며, 이젠 창문을 닫아도 되겠다 싶어,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방에 가서 오징어 볶음에 넣어야 할 야채를 썰었다. 수의 방 청소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이다. 평소에 음식을 잘 만들어 먹지 않지만, 내 음식을 먹고 좋아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게 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인 것 같다. 늘 재료를 썩혀둘 만큼 요리에 마음 쓰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귀찮지 않다. 오징어 볶음을 먹으며 좋아 할 너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두뇌싸움 07.
“…오질라게도 오네.”
우산이 구멍나진 않을까. 말도 안되는 걱정을 마음에 담아둔 채, 걸음을 느릿하게 걸었다. 우산이 하도 크긴 커서 이 어마어마한 장대비라도 고작 내 발 근처밖에 오진 않았지만, 마치 우박이 쏟아지는 마냥, 우산을 치고 내리는 빗방울 소리는 아주 거칠고 과격했다. 빨리 집에 가서 아저씨의 오징어 볶음이 먹고싶은 생각에, 좀 더 걸음을 빨리 하는데.
“……어?”
멀리서 보이는 오피스텔을 무심코 올려다보는데, 옥상 난간에 익숙한 자세의 실루엣 하나가 보인다. …비도 어마어마하게 오는데. 설마. 그래, 설마. 하지만 설마 했던 의심이 점차 확신이 섰고, 순식간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저 미친 놈! 진짜 미친 놈 아니고서야 저럴 수 없어! 우산이 뒤로 넘어가고 오징어가 들린 검은 봉다리가 미친듯이 뒤집어졌지만, 마다하지 않고 빠르게 빛의 속도로 뛰었다. 무조건 저 녀석을 저 위험한 난간으로부터 구해내야겠다는 생각에,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마자, 옥상 버튼을 미친듯이 눌렀다. 온 몸이 젖었다. 대체 어쩌려고….
‘죽겠지.’
‘네 말대로, 내가 발을 헛딛으면 죽겠지. 그게 뭐 대수라고….’
‘미안하지만 내 죽음에 슬퍼할 가족따윈 내게 없어.’
‘그러니까 내게 죽음이란 별 대수롭지 않은 존재라고.’
정말이였다. 그 아이에게서 죽음이란 존재는 그저 쥐뿔도 없으면서 위협을 하는 우스운 존재따위였다. 고작 그 정도였다. 지독한 슬픔에 젖어있던 그 아이의 눈동자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안 돼. 그러지마. 옥상에 도착하자, 그래도 우산과 봉지를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옥상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역시. 역시 그 녀석이였다.
“야, 이 미친놈아!!”
내 외침에 반응이 없다가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 녀석. 소름이 돋을 만큼 감정이 없는 표정이였다. 저렇게까지 까말 수 있을까. 라고 생각 들 만큼 새카만 그 녀석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고작 세 번 본 얼굴이지만, 녀석의 감정 없이 흔들리지 않은 채, 확고한 표정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어 버린다.
“빠, 빨리 거기서 올라와.”
“…….”
“비가 와서 난간이 많이 미끄러울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선 이리로 올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녀석은 재밌다는 듯 나를 관찰하더니, 이내 난간을 잡던 두 손 중, 한 손을 놓아버린다. 거침없는 그 아이의 행동에 할 말을 잃은 채, 동작을 멈추고는 그 녀석을 응시하면, 피식- 하고 웃어버린다. 어제와 같이, 감정 없이 딱딱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웃음. 눈물이 차오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저 아이가 그 다음 무슨 행동을 할지에 대해 두려움이랄까. 저 위험한 자세에서 난간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용기란, 대체 어디서 나오는건지. 정말 웬만한 깡이 아니고서야 저럴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나지막히 말했다.
“나, 난간을 빨리 잡아.”
“왜 그래야 하지?”
“그러다가 정말 죽어!”
“말했잖아. 무섭지 않다고.”
“누구 인생 망칠 일 있어? 너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내 앞에서 죽어버리면? 평생 너가 내 앞에서 떨어져버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죽을 때 까지 기억에 남을텐데. 누굴 정신병자로 만들고 싶은거야?!”
내 말에 고개를 다시 허공을 향해 돌려버리더니, 딱딱한 목소리를 내뱉는 녀석.
“…내가 부른게 아니잖아.”
“뭐?”
“네가 온거잖아, 이 자리에.”
“……!”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넌 내 자살 현장에 대해 단순한 목격자가 되는거야.”
“…하, 장난치지 말고 빨리 이리 건너와.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다고 세상이 눈 깜짝 할 것 같아? 오히려 네 죽음에 비 웃을걸?”
“…….”
내 말에 고개를 다시 내게 돌려 말없이 응시하다가, 이내 가볍게 옥상 바닥으로 안착한다. 그제서야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난간에 허리를 기대는 녀석.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나를 계속해서 응시하더니,
“왜 내게 관심을 주는거지?”
“야, 너 같으면 옥상에 죽음 따윈 무섭지 않다는 미친놈이 위험하게 난간을 아예 넘어서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미친놈이라….”
“그래! 넌 나한테 정상인 취급 받긴 글렀어. 대체 무슨 생각으….”
“맞아.”
“뭐?”
“나 미친놈 맞아.”
싱긋 웃는 녀석의 미소. 대체 얜…. 얜 대체 뭐야?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과 함께 녀석을 향해 물었다. 녀석을 어김없이 싸이코라 생각한 채,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이름은 왜?”
“세 번씩이나 만났는데, 이름 정돈 알고 있어도 되지 않아?”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먹지?”
“뭐야?”
“난 누굴 사귈 만큼의 여유가 없다고 했잖아. 너라면 더더욱 친해지고 싶지 않아.”
“참나, 웃기는 놈이네. 야. 내가 친해지자고 했냐? 이름만 알려달라고 했지?”
내 말에 피식- 웃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세 글자를 내뱉는 녀석.
“…백 태민.”
“그래, 백태민.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대체 왜 그렇게 사람을 놀래키는거야? 확 그냥, 올라와서 명치를 갈겨버릴라고 했어.”
내 말에 의미없이 하하 웃더니만, 골 때리는구만…. 라고 작게 들려오는 녀석의 목소리. 기다란 검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더니,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로 내 이름을 묻는다. 넌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왜 물어보는데? 하나도 안 궁금하잖아. 아니, 궁금한데? …구 이진이야. 내 말에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더니, 뒤를 돌아,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 두 손을 모아 또 다시 자신의 발밑으로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본다. 저 자식, 몇 시간동안 비를 맞은 것 같은데, 괜찮은가? 난 벌써 추워 죽겠는데. …아차, 심부름…. 멍하니 아저씨의 심부름을 기억해내는데,
“재밌다.”
“…응? 뭐?”
“재밌다고, 너.”
“하하. 그런 소리 자주 들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응?”
“다치고 싶지 않으면, 더 이상 내가 뭘 하던 상관하지 말라고. 네 뜻처럼, 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테니까….”
“…야, 자꾸 무슨 소리를….”
“내 말.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잘 새겨들어.”
여전히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무덤덤히 말하는 녀석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경고 비슷한 무언가. 저 자식이 계속 어제부터…. 인상을 찌푸린 채 녀석의 뒷모습을 넋 놓고 응시하면, 표정이야 자신이 관리하지만, 공허한 쓸쓸함과, 무언가에 지치고, 지독히 슬픔에 쩔어버린 외로움이 잔뜩 짊어져 있는 녀석의 어깨를 보자니, 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가릴래야 가릴 수 없었다, 그 녀석의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의 괴로움이란. …그렇게 녀석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손에 들린 검은색 우산을 녀석이 서 있는 난간 옆에 내려놓았다. 뭐 하는거야? 라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너를 뒤로하고, 어제의 너처럼 혼자 옥상을 나왔다. 분명 감기 걸릴거다. 그냥 소나기도 아니고 완전 장대비인데. 가족도, 친구도 없다는데, 오늘 밤이나 내일 쯤 죽 끓여 갈까? 한 번도 끓여보진 않았지만, 가끔 엄마가 아플 때, 아빠가 끓이던 죽을 생각하며 순서를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참 웃겨. 대 놓고 호의를 거부하는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죽까지 끓여 줄 생각을 하는건지. 위험천만한 녀석임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닌 것 역시 분명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더 이상 내가 뭘 하던 상관하지 말라고.’
…그 때 만큼은 녀석의 목소리에선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녀석이니까. 왜, 무엇 때문에 사람들과의 사귐을 피해가는 이유야, 찬찬히 알아가면 되는거니까.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다짐하며,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허둥지둥 집 안으로 들어가면….
“응?”
아무도 없는 집 안. 어딜 간거야, 오징어 사왔는데. 하긴, 이 꼬라지를 아저씨에게 보인다면, 당장 쫒겨날지도 모른다. 아저씨 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도어락 소리와 함께 거칠게 열리는 현관문.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오던 아저씨는, 방으로 들어가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매우 화난 표정으로 변해버리더니,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온다.
“아저씨. 어디 갔었어요?”
“너 대체 뭐 하는 애야?”
“…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심부름을 보냈지, 누가 놀고 오라 그랬어? 왜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들어!!”
처음이였다. 아무리 귀찮게 아저씨에게 달라붙어도, 만들기 까탈스러운 요리를 부탁해도, 심부름 핑계대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했을때도 내게 미운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던 아저씨였는데…. 처음 보는 아저씨의 화난 모습에 멍하니 아저씨를 올려다보면.
“너란 애.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는거 알아?”
“…아, 늦은건….”
“우산은 어디다 버리고 오는거야. 비까지 맞아가면서, 대체 뭘 하고 온거야?”
“…죄송…해요. 많이 화났어요? 우산은…. 우산은 잃어버렸어요. 우산은 제가 어떻게든…!”
“내가 지금 우산 하나로 이러는 거 같아?”
“…….”
“…….”
“후아…. 진짜 무섭다, 아저씨 화나니까….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네?”
내 말에 등 돌려 거실로 가더니만 무언가를 내게 건넨다. 신문?
“이게 뭐에요?”
“읽어.”
신문 첫 면엔, ‘서울시 강남구 한성동 살인사건.’ 한성동이라면 이 동네였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내용을 읽어보자면 이러했다. 또 다시 침묵의 살인자가 흔적 없이 누군가를 총살했다는 기사. 요새 들어, 몇 달에 한번 꼴로 일어나는 잦은 살인사건이 이번엔 한성동에서 일어났다. 뭐야, 그럼 아저씨가 진짜 나를 걱정하기라도 했다는건가? 경찰 측에선 이 유명한 침묵의 살인자는 살인 전문 조직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며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방면에서도 이렇게 깨끗이 흔적을 안 남길 수 없다고 한다. 시신은 오늘 5시에 발견했으며, 시체의 상태를 살펴보다면, 살해당한지 약 2주가 넘어, 더운 날씨 때문에 이미 부폐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했다.
“…….”
“그 새끼, 아직도 한성동에 있을거라고. 여자애가 겁 없이 그렇게 싸돌아다니다가, 어쩌려고 그래?”
“…으하하…. 뭐, 소름돋는 기사이긴 하네요. 우와, 아저씨 저 걱정한거에요? 혹시 이 살인자가 날 잡아갈까봐?”
“시끄러워. 샤워나 하고 나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가는 아저씨. 은근히 귀엽단 말야. 보기 좋게 넓직한 아저씨의 등판을 흐뭇하게 응시하다가, 이내 방에서 편안히 입을 옷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찝찝하고 싸한 냉기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오들오들 떨며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약 20분간 몸을 담구고 있다가, 머리를 감음을 마지막으로 옷을 입으려는데.
“……!”
뭐 때문에. 대체 목욕하는게 뭐가 그리 급했다고…. 가장 중요한 속옷을 놓고 왔을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브래지어야 옷을 입고 후다닥 방에 들어가 입으면 되지만, 팬티는…. 아직 촉촉이 젖어있는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찰싹- 때렸다. 두 세 번 때리자, 따가움이 솟구쳤고, 울상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문을 살짝 열어 고개만 빼꼼히 내밀은 다음, 주방에서 칼질을 하고 있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아저씨 저러고 있는데, 그냥 빨리 뛰어가면….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두 눈을 질끔 감았다.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뻔뻔하다지만, ‘아저씨! 팬티 좀 가져다주세요!’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뭐해? 다 씻었으면 나오지.”
두 눈을 멀거니 감고 있는데, 냉장고로 향하던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더니 의아하게 묻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한 눈으로 물었지. 그저 뻘쭘히 웃음을 터뜨리자, 고개를 저으며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다시 등을 돌리는 아저씨를….
“아, 아저씨!”
“왜-.”
“…저, 있잖아요. 그게 말이죠.”
“……? 수건이 없나? 근데 너 이마가 왜 그렇게 빨개?”
“아니…. 그게 말이죠. 저…. 그러니까….”
“셋 셀 동안 말해. 하나, 둘 세….”
“패, 팬티 좀 갖다주세요!!”
……팬티가 뭐야 구이진. 속옷이란 무난한 단어도 있건만! 무튼 내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 뒤로 흐르는 정적이란. 지금 쯤 내 얼굴은 아저씨가 들고있는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겠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시선을 피하며 기껏 말했더니, 왜 아무말도 안하는거야? 슬쩍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입을 벙긋거리며, 할 말을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래. 왜 당황스럽지 않겠어. 미치겠군. 미치겠어, 구 이진!
“…어, 그래. 어디에 있지?”
“…서랍 2번째 칸에….”
“아- 그래. 무슨 색…. 아니. 그냥 내가 가져오면 되지?”
“네, 네.”
무슨 색이라니! 아씨. 미치겠네. 서랍에 속옷이 한 두 개가 아닐텐데.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부끄럽고 창피함에 눈시울이 붉어지려는데, 아저씨가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내게 팬티를 건네준다. 난 빠르게 그것을 낚아채 화장실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마자 쭈그려 앉았다. 엄마가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순간이였다.
* * *
“…….”
“…….”
“나 이따가 회사에 잠시 나가봐야되.”
“아- 그래요?”
“응.”
어색했다. 나도. 아저씨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를 나누는데, 미치도록 어색하다. 오징어 볶음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모르겠다.
“근데 회사는 왜요? 오늘 쉰다면서요.”
“망할놈의 영감이 부르는데 마다할 수 없잖아.”
“…마, 망할놈의 영감이요?”
“네 시아버지 될 사람.”
“아아…. 에? 누가 누구의 뭐가 된다고요? 전 결혼 안 한다니깐요!”
“그래그래.”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 정말 내 가출이 의미 없을까. 아저씨처럼 그냥 체념 하는게 나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 팔팔한 청춘을 팔아버릴 수 없어. 멀거니 내가 지금 이 곳에 와 있는 이유를 차근차근히 생각해보면, 엄마 아빠가 죽도록 밉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잘 있는건지, 나 때문에 아저씨의 아버지가 청산해준 빚을 도로 달라고 해서 길바닥에 나와 앉아 있는 건 아닌지. 평소완 다르게 밥을 깨작깨작 먹는 나를 보더니, 말하는 아저씨.
“부모님 걱정되냐?”
“…네? 아니에요.”
“걱정이 되겠지. 안되면 넌 자식도 아니야.”
“…….”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부모님 걱정 그만 시켜 드리고.”
“…….”
“오죽하면 너를 결혼시키시겠냐. 그만큼 힘들었다는 증거 아니겠어.”
“…그래도…. 그래도 결혼은 아니잖아요.”
“…….”
“안 보고 싶어요. 결혼 안 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버틸거에요.”
씨익 웃는 나를 말없이 응시하는 아저씨. 보란 듯이 밥을 퍼 먹자, 그제서야 내게서 시선을 거둔다. 슬쩍 고개를 들어, 국을 떠먹는 아저씨를 힐끗 응시하면,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수저를 입가에 가져다 대는 아저씨. 피부도 곱겠다, 키도 훤칠하겠다, 집안 좋겠다. 대체 왜 쭉쭉빵빵한 애인조차 없는건지. 이렇게 나를 집에서 재워주고 먹여주는걸 보면 나쁜 아저씬 아닌데…. 괜히 불쌍해진다.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아저씰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내 시선에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내 눈빛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거지?”
“아저씨.”
“……?”
“아저씬 왜 애인이 없어요?”
내 엉뚱한 질문에 하-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다시 국을 떠먹기 시작하는 아저씨.
“아- 대답 해줘요! 왜 애인이 없어요? 네?”
“대체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은 네게 무슨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묻는거야.”
“그냥 궁금하잖아요. 스물여섯 살이라고 하셨죠? 와아…. 그럼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애인이 있어야 할 텐데….”
“미안하지만 여자와 진지하게 만나볼 생각은 꿈에도 없어.”
“에? 왜요? 대체 왜?”
반복되는 내 질문에 수저를 내려놓는 아저씨는 지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하지만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아저씰 올려다보면, 내 질문을 피해가긴 글렀다. 라는 식의 체념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식탁 위의 휴지를 뽑아 입을 닦으며 말하는 아저씨.
“나와 수의 인생을 피비린내 나는 고약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건 모두 여자였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슨 소리지. 그게 무슨 소리야. 수? 아저씨 동생을 말하는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아저씨가 앉아있던 자리를 멍하니 주시했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또 아저씨의 건드려선 안 될 상처를 건드린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자리를 일어나는 아저씨의 두 눈빛이 아주 잠시 동안 서글프게 흔들렸으니까…. 그래. 멍청하고 눈치없기로 소문난 둔해빠진 구이진이 또 사고를 친 것이다.
★
다음편은 7편으로 이진이의 시점을 끝내기엔 무언가 부족해보여서 8편이 아닌, 7-1편으로
이진이의 시점을 조금 더 추가했어요. 스토리는 7편을 뒤이어 계속해서 이어지구요, 작은 편이라
원래의 한 편 분량보다는 적습니다. 8편과 한꺼번에 올릴테니 참고로 알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