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이데올로기]
아래에 올라온 언수선배의 조언 덕분에 '밥,꽃,양'을 알게 됐고, 그를 둘러싼 시시비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울산운동을 규정하는 것은 노동이고, 그 정점에 서 있는 현자노조의 '외압'이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되었으리라는 점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새로이 안타까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동네에 있다보면 이런 일은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소위 '선수들'(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정규직 대노조 활동가들의 상당수)에게 '진보'와 '개량'은 대중교통수단 환승권처럼 손쉬운 '운동'의 이기(利器)일 때가 많습니다. 여하튼 좋은 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걸로 글을 맺기에는 할 말이 좀 있군요.^^
"…현민이의 '이레이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은 나의 이런 우려를 한층 증폭시키고 만다. 물론 '이레이저'는 영화로서 평가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저 '킬링타임'용으로 볼만한 영화지만, 그 속에서 '노동'의 성격을 이야기하며 영화 자체를 침소봉대하는 우는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의 골자다…."
선배는 아래의 글에서 '밥, 꽃, 양'의 사례를 빌어 노동조합과 같은 주변부 권력일지라도 때로는 주류권력에 못지 않은 폐해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노동조합은 물론 이익단체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라는 잣대를 가지고 영화에 '주동적으로' 반응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글에서도 비슷한 '혐의'를 발견하였다니 이 대목부터는 좀 궁금해집니다.
저는 '사회단체들과 영화와의 연관성'이라고 하는 주제를 다루려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영화의 이데올로기성'을 얘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의 일면을 고찰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내용' 그 자체에 대한 아주 가벼운 탐색이 애초의 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부르주아영화 속에서 부적절하게 작위되는 것이 어디 노동뿐 이겠습니까만, 1990년대 미국 거대도시의 한 부두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한 떼의 노조간부들이 이권을 위해 총질을 한다는 이 황당한 설정마저 가능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조건에 대한 분노, 그것이 제 글의 요지였습니다.
더군다나 제 얘기는 어디까지나 선배가 우려하는 집단헤게모니의 관철을 위한 조직적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 분노였을 뿐이며, 선배의 조언대로 (회원들에 대한 일방적인) '선동'이었으며, (아주 작은 영역에서 이루어진) '언론플레이'였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끙끙거리며' 글을 쓰다보니 기왕에 몇 가지를 더 말해보고 싶어집니다.
"물론 이레이저 속에서 표현되는 조합간부들의 행태가 '사실'일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오히려 감독은 미국사회에서의 노동조합의 파워와 비리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헐리우드적 작법에 충실한 감독으로서는 '오락'과 함께 비벼 넣어야 할 사회적 소스로 노조간부를 택하지 않았을까. 마피아 못지 않은 사회적 영향력을 행세하는 사람들, 건강한 척 하지만 위선으로 가득 찬 소위 '활동가들' 그들을 헐리우드는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엔터테인먼트의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영화인들의 작은 고뇌, 그것이 메카시 열풍속에서도 미국영화의 종다양성을 길러왔고 세계영화의 제패를 가져왔다"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헐리우드 영화에도 나름의 사회성이 담겨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헐리우드가 이 정도로 정의롭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설마요! (노파심에서 용어정리를 하겠습니다. 제가 얘기하는 헐리우드 영화는 미국영화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헐리우드는 '흥행결정론'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공룡입니다. 물론 그 곳에도 명장들이 있고, 진지한 고민도 있고, 걸작들도 있습니다만, 소수의 '자수성가형(?) 브랜드'들을 제외하고 나면 과연 누가 그 공룡의 걸음에 딴지라도 걸 수 있을까요?
선배가 기특해(?)하는 헐리우드의 '엘리트 비틀어보기'라는 것도 결국은 오락의 극대화와 주인공(영웅)을 위한 미장센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애써 크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악에 대한 비판적 컨셉, 그 자체를 탐구했던 소수의 헐리우드 영화는 흥행조건(브랜드, 배급망, 트랜드 등)의 나와바리 안에서 제한적으로 가능했다는 것이 저의 추정입니다.
구구절절 설명을 아니하더라도, 거대영화자본의 '비영리적' 목적이 '관객의 인식 심화'가 아닌 '위대한 미국, 위대한 자유시장주의의 전파'에 있다는 저의 확신이 틀리지 않는 한, 헐리우드의 정의로움을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헐리우드는 지명이 아닙니다. 상징입니다."
더욱이 마지막 영화인들의 고뇌로 인해 미국영화가 다양성을 잃지 않았고, (그것이)세계영화의 재패를 가져왔다는 대목에는 정말이지 "이-의를 제-기합니다"만, 말꼬리 잡는 격이 될 것 같아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영화는 오로지 영화로서 이야기한다. 이문열처럼 소설을 자신의 변호를 위한 마스트베이션으로 활용하는 감독이 아니라면 그 영화에 대한 판단의 몫 또한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노동조합이든 사회적 이익단체든 영화와 예술을 보는 시각을 넓혀야 되지 않을까. 이쁘게만 보지도 말며 모나게만 보지도 말자"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 한국노총에 다닐 때 였습니다. 한국노총 직원이라는 사실만으로 저는 소수의 후배들로부터 질타를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당시 한국노총의 외피만을 보고 그 안의 다양한 스텍트럼에 주목하지 않는 그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편견이 하나의 원인이었던 같습니다. 편견은 진지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합니다. 편견은 그것이 의도적이지 않은 이상, 정보와 경험의 부족에서 옵니다. 베이컨은 그래서 '동굴'로 편견을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왜곡된 정보는 편견의 일반화 내지 사회화에 기여할 따름입니다. 영화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조폭 신드롬'을 잘 아실겁니다.
노동운동을 포함하여 의미 있는 사회단체라면 왜곡된 메시지와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판단은 소위 '대중'의 몫이라 하더라도 메시지의 확산과정에서 싸우고 물어뜯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들의 역할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밥, 꽃, 양'의 상영 자체를 막아버린(내지는 그런 혐의가 다분한) 현자노조의 행위는 졸렬하다고 생각합니다. '밥, 꽃, 양'은 상영되었어야 하고 그 이후의 불같은 논쟁에서 현자는 방어적이든 공격적이든 그 논쟁의 중심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굳이 사족을 붙이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이 '현자노조로 대표되는 주류노동운동의 반여성성'이라는 '편견'으로 확대인식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제 긴 글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맑스의 얘기처럼 "한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자본입니다. 뉴미디어 어쩌구 떠들어도 아직까지는 노동조합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의 신세라는 게 자본선전의 촘촘한 그물망을 뚫지 못해 파닥이는 생선꼴이나 한가지입니다. 노동운동이 처한 메시지 지정학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반노동적 메시지들이 수십수백개의 채널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노동운동에게 아량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공평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오로지 영화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선배의 주장이 다소 한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입니다.
- 이상 여의도에서 민이가 드렸습니다.
- 추신 : 선배 덕분에(?)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저녁약속을 놓쳤습니다. 이 다음에 선배한테 뜯어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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