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 공 한 번 차 보지 않은 남자가 없다. 술자리에서 펼치는 ‘축구 무용담’은 가장 식상한 주제다. 하지만 ‘축구 무용담’이 모두 거짓은 아니다. 하다못해 나도 K3리그 고양시민구단 선수다. 여기 오늘 소개할 유명인들도 해당 분야에 종사하기 전까지 전문 축구 선수로 멋진 활약을 펼쳤다. 축구 선수 출신 유명인은 누가 있는지 살펴보자. 강동원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 ‘멍 때리지’ 말고 축구계로 돌아오라. ⓒ연합뉴스 강동원 배우 겸 모델 강동원의 축구 사랑은 대단하다. 남양초등학교 재학 시절 또래 아이들과 밤늦도록 공을 찼던 강동원은 당시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의 눈에 들어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집안의 반대가 워낙 심했던 탓에 축구를 그만뒀지만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그의 재능은 빛났다. 경원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또 다시 축구부 감독의 제의로 축구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집안의 반대가 심해 결국 축구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됐다. 당시 지역 최고 명문 학교였던 거창고등학교에 ‘공부로’ 입학한 강동원은 곧바로 축구부 감독을 찾았다. 규율이 심한 탓에 “머리가 길어 받아줄 수 없다”고 감독이 말하자 다음 날 삭발을 하고 다시 축구부를 찾은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거창고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기에 강동원은 부모님 몰래 계속 축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거창고 최고 공격수 강동원은 또 다시 부모님에게 걸려 세 번째 도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다시 학업을 재개해 ‘가볍게’ 한양대학교에 입학했다. 강동원은 현재도 일이 없는 날이면 아침 6~7시까지 축구를 보며 밤을 새우는 축구 마니아다. 공부 잘하고 잘 생기고 축구 잘하고 심지어 키까지 큰 ‘이기적인 유전자’ 강동원에게도 분명히 찾아보면 단점이 있을 것이다. 발 냄새가 난다던지 겨드랑이 털이 없다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영민 다들 이영민이 누군가 할 거다. ‘이영민 타격상’이라면 이해가 쉬울까. 경성 운동장 1호 홈런을 날리는 등 한국 야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영민 선생도 사실은 축구 선수 출신이다. 그것도 아주 촉망받는 축구인으로 오랜 시간 축구와 함께 했다. 1924년 배재고보 시절 제5회 전조선 축구대회에서 공격수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한 이영민 선생은 1933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제1회 경평축구 정기전에도 경성축구단 감독으로 나섰다. 또한 그는 조선축구협회 창립 이사를 맡기도 했으며 놀랍게도 광복 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선임된 바도 있다. 그는 축구와 야구 뿐 아니라 육상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배재고보 시절 전조선 중등 육상경기 400m에서 우승한 이영민 선생은 2년 뒤 연희전문 시절에는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 조선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하기도 했다. 이 정도 스펙은 돼야 “야, 요새 ‘엄친아’는 ‘엄마하고 친한 아빠’라는 뜻이구나” 할 거다. 이쯤은 되어야 진짜 멀티 플레이어 아닐까. 한국 육상의 1인자이면서 국가대표 축구 선수와 야구 선수를 겸업하고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을 위인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세 종목에 걸쳐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영민 선생, 그가 축구에서 이룬 업적도 재조명 해볼 필요가 있다. 공 잘 차고 빠르고 위치 선정 탁월하고 축구 센스있고 개인기는 출중했지만 축구는 못했던(?) 개그맨 노우진. ⓒ연합뉴스 노우진 ‘달인의 수제자’ 노우진은 배재중학교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그의 동기가 차두리(프라이부르크)였고 송종국이 그의 1년 선배, 조원희(이상 수원)가 그의 3년 후배다. 당시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노우진은 “내가 잘한 게 아니라 우리 학교가 잘했다. 나는 그냥 묻어갔다”면서 겸손해 했지만 그는 배재중-배재고를 거쳐 전주대학교에 축구특기생으로 입학할 정도로 축구에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노우진은 선수 시절에도 웃기는 데 재능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 3인방이 있었는데 항상 합숙 훈련을 할 때면 이들 중 한 명과 밤마다 토크쇼를 했다. “축구 그만두면 꼭 개그맨하자”고 이 친구와 약속하기도 했다. 당시 노우진과 토크쇼를 했던 친구는 MBC 개그맨이 된 안용진이었고 항상 방청객 역할을 맡아 웃어주던 친구는 차두리였다. 결국 노우진은 대학에 입학한 뒤 “축구로 대성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해 축구를 그만뒀다. “보통 운동을 그만둔다고 하면 감독님이 ‘왜 그러느냐’는 게 대부분인데 내가 감독님을 찾아가 ‘운동을 그만 두겠다’고 하니 감독님이 ‘그럴래?’라고 감독이 해맑게 웃었다”는 노우진은 “연예인 축구대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너는 축구했던 거 티를 안내고 뛴다’고 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달인의 수제자는 됐어도 감독님의 수제자가 되는 데에는 실패한 모양이다. 전두환 중학교 때부터 축구 선수로 뛰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팀의 골키퍼를 맡아 활약했다. 전 전 대통령은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골키퍼로 맹활약하며 팀의 준결승 진출에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다. 그는 축구를 그만둔 뒤에도 축구에 대해 문자 그대로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다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는 등 ‘현실 속 FM’을 구현하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은 목적이야 어찌됐건 프로축구 창설에도 앞장섰고 태릉선수촌에도 아예 전용집무실을 따로 두기도 했다. 1985년 대통령배 국제축구 개막식 시축 당시에는 오른발잡이이면서도 왼발로 시축을 하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요즘 축구 선수, 특히 수비수들은 행복한 거다. 만약 우리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가 그였다면 이거 어디 무서워서 공이나 차겠나. 그가 만약 계속 축구를 했더라면 수비수 기강이 해이해질 경우 무력을 쓸 수도 있었다. 요새 어린 친구들은 그의 말처럼 그 무서움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동균 작고한 코미디언 서영춘의 아들로 잘 알려진 서동균은 중·고등학교 시절 축구 선수로 맹활약했다. 남대문중과 광운전자공고에 다니며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운 서동균은 선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예인 축구단에서도 183cm의 훤칠한 신체 조건과 왼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능력, 타고난 축구 센스를 앞세워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서동균은 중·고등학교 재학 당시 홍명보, 김주성 전 축구국가대표 선수들의 중학시절 은사인 임흥세 감독 밑에서 축구를 배웠다. 하석주 경남FC 코치가 그의 중학교 3년 선배고 지난해 U-20 청소년월드컵에서 한국팀을 8강에 올려놓았던 송경섭 수석코치도 그의 고등학교 후배다. 서동균은 지난 2007년에는 베트남에 가 축구를 하다 전문 운동선수가 아니면 잘 당하지 않는 무릎 십자 인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축구 선수인지 방송인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다. 지난 1990년 10월, 남북 통일축구 경기 식전행사에서 이주일 선생이 사회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주일 중학교 시절부터 축구 선수로 활동한 코미디언 이주일 선생은 19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 4강 신화의 주역인 박종환 감독과도 춘천고등학교 시절 함께 선수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주일 선생은 박종환 감독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박종환 감독이 2년 휴학을 했던 탓에 동급생으로 학교를 다니며 평생 친구가 됐다. 이주일 선생은 춘천고에서 라이트윙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이주일 선생을 박종환 감독의 친구 정도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이주일 선생은 당시 대학 축구의 명문인 신흥대(지금의 경희대)에 축구 특기자 자격으로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정도로 촉망받는 축구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어이없는 이유로 결국 축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학 입학 전 서울에 자취방을 얻은 그는 입학금을 모두 ‘섯다’판에서 날리고 대학 진학 꿈을 접어야 했다. 결국 박종환 감독은 어엿한 대학 축구 선수가 됐고 이주일 선생은 군대에 자원 입대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주일 선생은 선수의 꿈을 접은 뒤에도 축구를 유난히 사랑했다. 1983년 10월, 이주일 선생은 당시로는 거액인 1,000만 원을 대한축구협회에 선뜻 기탁했고 이 돈은 효창구장에 인조 잔디를 까는 비용으로 사용됐다. 암투명 중이던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 개회식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경기를 관람해 축구 사랑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조한선 조한선은 연예계 최고의 축구 실력을 자랑한다. 초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한 그는 홍익대학교 2학년 때까지 골키퍼로 활약했다. 특히 정명고 재학 시절에는 이후 국가대표에 발탁된 최성국(광주상무)과 함께 팀을 대통령배 고교축구대회 4강에 올려놓기도 했었다. 조한선은 2000년 부천SK에 지명됐을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지녔었다. 하지만 조한선은 이후 허리 부상을 당해 결국 축구 선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허리 통증이 있었지만 결국 이를 숨기다 큰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당시 정명고에서 조한선을 지도했던 박이천 현 인천유나이티드 부단장은 “제자들 중 조한선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연예인으로 성공했지만 축구를 계속했어도 그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고 회고했다. 한 맥주 회사의 광고 ‘빗속의 골키퍼’ 편을 제작하던 광고 대행사의 권유로 CF 모델로 데뷔한 조한선은 최근 개봉한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2’에서도 폭력으로 인해 영구 제명을 당하고 세상을 등진 전직 축구선수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그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내가 축구선수로 활동했을 때가 있어서 배역을 확실하게 이해 할 수 있었다. 축구를 하다 그만 둔 그런 감정까지 모두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이라면서 “원래 여자친구와 헤어져도 금방 잊는 편인데 축구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남는다”고 밝혔다. 조한선이 여전히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면 아마 부천SK 관중이 줄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부천이 연고를 제주로 옮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K-리그가 퇴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08 KFA 총조사’에 따르면 고교 때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한 엘리트 선수 중 약 60%는 축구와 무관한 직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많은 이들이 축구 선수로서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평생 축구를 즐기며 새로운 꿈에 도전하길 기원한다. 또한 앞으로도 각계각층으로 뻗은 축구인들이 한국 축구 발전과 홍보를 위해 노력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footballavenue@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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